달콤한 내 사랑 예수/중생과 회심

Horace 2021. 4. 9. 21:05

천국제자들교회 주일설교: 2021411

요한일서강해(11):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대적하자

요한일서2:18~19

 

이상하게도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이 남북간의 통일에 대해서입니다. 70년 이상이나 오랫토록 이 땅을 분리시켜 놓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기도도 되어집니다. 특별히 북녙의 정치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포로민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부터입니다. 5만명에서부터 20만명 정도의 크리스챤들이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남북한의 기독교를 비교해 볼 때, 어디의 기독교가 더욱 정통적이고 더욱 복음적일까 하고 말입니다. 교회당도 없고 예배도 어떤 예전도 없겠지만, 북한의 기독교가 더욱 순수하고 더욱 복음적이고 성경적일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들이 이 한반도의 영적 장자들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통일이 되면, 아마도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재빠른 움직임들을 보일 것입니다. 이런 욕심들을 분명히 가지고 있을 남한의 사람들 가운데는 아마도 크리스챤들도 있을 것입니다. 남북의 분열의 문제를 세속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영적인 관점에서는 보지 않습니다. 이 분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정화시키고 보다 올바른 복음을 보존하시기 위하신 계획도 이 분리된 역사를 통해서도 있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남한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보존하신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요즘은 그 확신이 자꾸만 무너집니다. 오히려 북한교회를 통해서, 순수한 복음을 보존해 가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서, 말씀을 준비하여 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입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의 특징이 바로 이 적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법, 그리고 이기는 법을 요한이 가르쳐주는데, 그중에 오늘은 첫 번째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1. 지금은 마지막 때라

 

아시는 대로, 요한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우리들에게 제시하며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지금까지는 우리들 내면에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문제점이 나 바깥에도 있다고 합니다. 곧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성경의 용례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신 초림 이후 재림 때까지의 모든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이 허무의 악순환,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끊어버리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영적 종말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을 믿고, 그 악순환에서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크리스챤들입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챤들과 더불어서 함께 이 세상에 살아가는 자들은 여전히 악순환의 돌고 돌아가는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번뇌의 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그 연기의 고리들을 끊어버려진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것입니다. 큰 차이는 우리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는데, 아직 완성의 때는 재림의 때로 미뤄두신 그 사이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사이에 활동하는 세력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이, 중세때에는 로마교황이, 현대교회에서도 다양한 거짓된 복음의 가르침들이 적그리스도의 활동 속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무엇보다도, 적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미혹이 되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이름으로 복음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흉내내고 복음을 모방합니다. 비슷한 모조품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이나, 산헤드린 총회의 장로들의 모양을 취하였습니다. 요즘에는, 총회장이니, 노회장, 혹은 호텔같은 교회당이나 수많은 제자들을 대동합니다.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을 심문할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제자들과 그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18:19). 제자들의 세력이 어떠한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이런 외형적인 것에 대해서 먼저 관심을 갖게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비서와 놀아납니다. 그 목사의 설교와 신학이 너무나도 인기가 있습니다. 그 신학은 너무나도 유행하고 있는데, 그 비서와의 신학놀음을 변명하고 정당화하고 있는 신학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혹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대적하자

 

중요한 것은, 우리들 안에서도 이런 경향과 관심을 가지고 적그리스도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베드로조차도 사탄이라고 책망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경고하셨던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에게 여기에 초막 셋을 짓자고 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을 위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방해하는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경우들이 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가운데 흔히들 역사하는 적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공의회가 예수님을 죽음의 판결에 던져넣은 것도 민족을 구하겠다는 동기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위해서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논리가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전체가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세상의 논리가 그렇습니다. 유다가 배신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왕국을 위해서는 예수의 왕국은 오히려 방해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논리를 이용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뤄가시도록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도다고 탄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와 그 뜻에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요즘 우리 주님의 복음서에 제 영혼을 묻고는 신음합니다. 제가 마땅히 알아야할 만큼 알지 못하였나이다. 제가 사탄이었고 적그리스도였나이다 하여, 부끄럽고 죄송하고 송구하여서, 이제라도 주신 기회를 아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고, 성령님의 감동을 사모하고자 힘쓰고 애씁니다. 한순간도, 분초라도 헛되이 허망한 것을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고통 가운데서라도, 쉽지만은 않은 현실 가운데서라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꿈속에서라도 위로를 느끼는 꿈들을 꾸게 됩니다(요즘 창세기의 요셉이야기가 너무나도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천국제자들교회 성도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여러분의 아픔들을 헤아려고보고자 합니다. 중요한 결정들을 앞두고 있습니다. 참된 복음의 토대를 세우고 교회다운 교회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