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천국실험

Horace 2021. 4. 20. 15:23

[잠, 깨어있음, 꿈]

성경심리학의 체계, 4부(자연상태)14절(잠,깨어있음,꿈). 

 

혼은 칠중적(七重的/septi-formis)입니다. 우리가 성경적 토대들 위에서 결론을 내렸던 것 같이, 그것이 영의 자기-드러냄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것의 감각적 주변 환경들 가운데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의 수단에 의하여, 몸의 측면에서조차도 칠중적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일곱 영과 같은 형태들(seven spirit-like forms of life) 덕분에, 혼은 영의 영광(doxa)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몸의 생명의 일곱 혼과 같은 형태들(seven soul-like forms of life)을 그것의 생명으로 채우는 것처럼, 혼은 이 몸을 그 자체의 영광(doxa)이 되게해야 하며, 또한 간접적으로는 영의 영광도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이 이중적인 생명의 일곱 형태들이, 그것들의 상호작용하고, 상승하며, 또한 하강하는 기능들의 충분한 활동에 있어서, 개입될 때, 그래서, 심지어 신체적 생명이 외부를 향해서는 닫혀져 있을 때라도, 이것이 가능한 한, 혼의 의식적이면서 자발적인 감정들이 도움이 되도록 수반된다면, 이것이 깨어있음의 상태이며, 오르[עור/, 헬라어에서는 εγρηγορεναι( )로부터 형성된,γρηγορειν( )]의 상태, 혹은 그것이 목적을 가진 채로 유지되어지는 한, 솨카드[שקד, αγρηγορειν( )]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잠은 일곱 번째, 여섯 번째, 다섯 번째 형태의 생명의 정기적인 가라앉음이 네 번째, 심지어는 첫 번째 생명의 형태로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잠의 본질에 가장 현저한 방식으로 일치되는 것이 헬라어의 카타페레스싸이(καταφερεσθαι, 졸다)에서 온 카타포라(καταφορα, 졸음)입니다(20:9). 구약의 잠에 대한 명칭은 세 가지 등급들 중의 한 절정을 형성합니다.

 

1. (נומ/졸다)에서 온, 터누마( /졸음,누마/졸음). 누스타제인(νυσταζειν/졸다, 25:5,)에서 온, 70인경의 누스탕모스(νυσταγμος/졸음). 한역주: 히브리어표기가 쉽지 않음.

2. 야쉐인(שנ/잠자다)에서 온, 세이나(שן/). 70인경의 휘프노스(휘프누운). 앞 단어의 강세형(5:27; 121:4. 한역주: 1졸다는 뜻의 강세형이 자다는 뜻을 갖게 된다는 것.

3. 니러담( /깊이 잠들다)으로부터 온, 타러데이마( /깊이 잠듬). 70인경의 에코스타시스. 이 에코스타시스를 위해서 다른 번역들은 카타포라()나 카로스() 혹은 코마()라고 번역하는데, , 더 깊은(deeper) (20:9)이나 더 무거운(heavier) (9:32)이라고 한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잠들게 하시는 깊은 잠의 최상의 정도는, 타러데이마트(תרדמת,삼상26:12; 비교.2:21,15:12)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에 떨어질 때, 첫 번째, 깨어있음을 특징짓고 있는 모든 것을 연합하고, 생명의 일곱 번째 형태의 본질인 그 활동은 물러납니다. 게다가, 생명의 여섯 번째 형태의 활동도 그치고, 그 안에서, 그것이 외부적으로 발언되지는 한, 그것을 산출하는데 협동하는 그 유기체적 기능들과 더불어서, 그 개념들과 단어들을 준비하는 지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말과, 그 외부의 세계에 연관되어서, 근육들에 의해서 성취되어지는 모든 일반적인 행동은, 모두 연기됩니다. 셋째로, 외부의 감각들은 닫혀 집니다. 감각화(sensations)에 의해서 야기된 인지들과 개념들의 기원(origination), 또한 마음(mind)에 새겨지는 그것들의 주관적인 인상은, 그칩니다. 감각적인 지각의 수용은, 그 안에서 생명의 다섯 번째 형태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데, 점검됩니다. 그것은 생명의 이러한 나타남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묶여지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퇴축(退縮,involution)입니다. 더 이상의 퇴행(regression)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네 번째 형태의 활동은, 심장의 박동 가운데 존재하며, 세 번째의 것은, 혈액의 흐름에 있고, 두 번째의 것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어 쉬는 일에 있으며, 처음 것은, 그 기원의 토대로부터 그 유기체의 끊임없는 쇄신 속에 있습니다. 병든 자의 잠은 그가 회복될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11:12; 집회서 34:2, 31:2). 그 쇄신은 깨어있을 때보다 잠자고 있을 때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아의 유연한 능력을 닮았습니다. 마치 깊이 잠이 들었을 때, 다른 방식들로 또한 태아의 상태를 회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매일 우리는 우리가 나왔던 그곳에 그 상태로 갈아 앉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의 영적인 생명은, 육체의 생명과 같이, 새로운 생명의 기운으로 다음날 아침에 다시금 되살아나기 위해서, 그 처음의 뿌리들에 대해서 스스로를 대립시킵니다. 생각의 달콤한 분산 속에서, 우리의 영은 처음엔 뇌의 반구로부터 물러나서 넓은 두뇌피질의 중추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마비가 되기도 합니다: corpus striatum, thalamus opticus, 그리고 corpora quadrigemina는 더 이상 일별을 생기있게 하거나 팔다리를 지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눈꺼풀이 떨어지고, 눈 근육들의 마비된 신경에 의해서 버려지고, 그 균형이 상실됩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의 언제나 깨어있는 원천인 medulla oblongata만이 이런 물러남으로 아무런 영향을 입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Primum movensultimo moriens, 심장과 같이, 그것은 여전히 신체의 활력이 있는 근육들의 움직임과 그 활력있는 과정들 자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한계들이 지나고 나면, 무력함과 죽음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네 가지 육체적 형태들에, 잠자는 중에 생명이 되돌아가게 되는 그 형태들에 일치하는 것이 또한 영과 같은 심리적 현상이다: 왜냐하면 꿈은 특징적인 심리적 현상인데, 그 안에서 영이, 그것과 적절한 활동들과 더불어서, 말하자면, 휴식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면서, 관찰자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이, 그것의 의지가, 비활성화나 아직 미비하나마 하나의 반작용으로부터 등장하면서, 억제나 자극의 방식에 의해서 간섭하기를 시작하자마자, 소멸시켜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잠이 깊다면, 잠자는 사람은 꿈을 전혀 꾸지 않습니다: 혼은 생명의 첫 번째 형태의 무의식 속으로 절대적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그 첫형태는 직접적이지만 아직 희미한 자기-인식을 구성합니다; 그것은 살아있고 더욱이나 능동적이지만, 그의 본성의 가장 최하의 숨겨진 토대 속에서 그 자체에 드러나지 않는 채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생명의 형태들의 물러남이 네 번째에서 쉬고 있다면, 혹은 그것이 더 깊은 심층으로부터 스스로를 일으켜서 다시금 이것에 되돌아가게 된다면, (חלום, ενυπνιον, 지혜서에서는 ονειρος로만, 마태복음에서는 οναρ로만 나타남)이 시작됩니다. 무의식은 그것 자체로부터 하나의 충동으로서 시작될 것인데, 그 충동은 그 사람의 기질에 따라서 그 자체를 이런 식으로나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만, 언제나 깨어있을 때보다 다소간 느슨하거나 더욱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충동은 형태들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추구하는데, 그 형태는 깨어있는 중에 저장되어졌었던 것입니다. 곧 그 자체의 결정에 일치한 하나의 대상인데, 그것의 공상적인 새 형태화, 개념과 의지가 관련되어있는 그 표상 가운데서 그러하며, 또한 생명의 네 번째 형태 속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 표상 속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 마음이 그 자체에 헛되게 형태들을 고안해 내고 있도다[ως ωδινουσης φαταζεται καρδια, 집회서31(34):5]. 왜냐하면 꿈의 적절한 공작소는, 성경에 따르면, 마음(heart)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곳을 상상의 좌소라고 하는데(VII), 이곳에서, 첫 번째 형태들 속에서 배태하며, 확장되고, 또한 나아오려고 다투는 그것이 준비되어진 채로 백주 한 가운데로 나오게 됩니다. 또한 직감의 능력을 가진 좌소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이미지들을 만들어내지는 않고, 오히려 그 자체 속으로 이미지들을 받아들입니다. , 미래에 대한 즉각적인 인상들을 받아들이고, 일반적으로 신비로 가득 찬 인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머리(head)도 꿈을 꾸는 일에 있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다니엘서에서는 꿈들이 심지어는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들”(4:10)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두뇌의 형태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낮 중에 있었던 두뇌의 활동에 의존하여서, 이 관계는 오히려 이차적이며 수동적입니다. 반면, 마음(heart)의 영역의 활동은 증가되어집니다. 그리고 더욱이나 생각의 뿌리들이 놓여 있는 그곳에서, (자유롭고 완전히 의식적인 생각의 영적이면서, 대낮의 의식의 명쾌함에 이르지는 않으면서) 감각에 의하여 형성되고 색깔이 입혀진 꿈들을 솟구쳐 냅니다. 말하자면, 식물적인 생명의 구름같이 어둠침침한 것 위에 그림을 그려놓는 것입니다. 술람미여인은 하나의 꿈을 관련시키기 시작하면서, “나는 잤다고 하면서(5:2), “그런데 내 마음(heart)은 깨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그것들 자체들을 신적인 계시로서 잘못되게 참견하며 나서는 꿈-형태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deceit of the heart/תרמית לב/타러미트 레이브, 23:26)이라고 불립니다.

 

꿈꾸는 자 안에서 실행되어지지 않는 세 개의 최상의 생명 형태들에 속하고 있는 생명의 드러남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외부의 현실에서가 아니라, 공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몸에 의하여 도구적으로 실행되어지는 진정한 활동, 외부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그 능력들의 활동은 멈춰집니다. 그것들은, 잠재성들로 축소되는 대로, 네 번째 생명의 형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곳에서 간혹 너무나도 활력이 넘치는 방식이 되어서, 꿈꾸는 자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내적으로 받아들인 인상들을 말하고 있는 반영’(the speaking echo)이 되고, 마음(heart)의 그림세계 속에서 그것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란, 깨어있는 삶의 한 환상(a phantom)일 뿐이며, 깨어나면 날아가 버리는 하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20:8). 그러므로, 깨어나면 꿈이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은 성경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파멸되어버리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애용되는 이미지입니다(73:20; 29:7). 또한 꿈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5:7)라고 전도자가 말하였습니다. 시락의 아들은 311절에서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명철함이 없는 사람의 희망들은 헛되고 거짓되며, 꿈들은 바보들을 우쭐대게 한다. 그림자를 잡고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이, 꿈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도 그렇다. 꿈의 망상은 심지어 얼굴을 마주대고 있는 것(προσωπου ομοιωμα)과도 같이 너무도 닮은 모양(τουτο κατα τουτο)이다.”

 

하지만, 더욱이나 꿈들에 대한 이 지배적인 망상적 특징은 그 반대편이 있습니다. 굼은 경험의 한 영역인데,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그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훨씬 뛰어넘는, 지성적이고, 윤리적이며, 영적인 중요성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영과 혼이 본질과 드러남으로서 연결되어 있고, 또한 이렇게 인간의 독특성이 그의 영의 생활과 육체의 생활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 혼에 의해서 상호적으로 조정되는데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혼과 그것의 육체적 자기-드러남이 그것들이 시작되어졌던 그 원천으로 물러나게 될 때, 동시에 영의 물러남이 뒤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바는, 사람이 잠을 잘 때, 그것이 깨어있을 때와 같이 스스로를 외부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한, 그의 영도 또한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되, 그분께서, 외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간섭하지 않으실 때, 그분의 의와 진리로부터 기대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간섭하지 않으실 때, 말하자면, 주무신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44:24, 78:65). 하지만, 반면,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121:4), 또한 영에 대해서도 참됩니다. 그분은 결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혼의 활동과 몸의 활동이 단지 그 성격만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그리고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영의 활동도 멈추지 않습니다. Hamann이 그의 라틴어로 기록된 Exercitium에서 말하기를, “그분께서는 외부의 일군들을 사용하시는 당신의 과제를 멈추시고 쉬십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그분은 게속해서 일하시며 결코 잠 속에서 주무시지도 않고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으십니다. 비록 꿈속에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차이는 단지, 하나님 안에서는 낮과 밤의 의식의 구분이 없는 반면, 자기-의식적인 피조물 안에서는 그 자체의 본성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그러하신 것처럼 결코 그렇게 투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들,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의 배경으로서, 하나의 희미한 영역,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사고가 대낮의 빛 가운데로 나오려고 힘쓰고 있고, 그 안에서 많은 것들이, 특별히 잠의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그 이후에 뒤를 되돌아봄으로써 하나의 지식에 이르게 될 수만 있게 되는, 그런 영역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험은 다음과 같은 성경(127:2)의 주장을 우리들에게 확증시켜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많은 시적이면서 음악적인 창안들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적 해결들과 영적인 지각들이 잠 속에서 각성되어진 천재들의 삶으로부터 수태되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Lavater가 그의 Pontius Pilatus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꿈들을 취합해서 엄밀하게 살펴본다면, 만약 고대와 현대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역사들 중에서, 플루타크,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플리니, 수에토니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Velleius Paterculus),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지혜롭고 존경할 만한 고대의 인물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예외 없이, 의도적인 거짓됨들이나 유아적인 미신으로서 모든 것을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고, 또한 모든 것들을 설명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은, 우리의 합리성과 지혜, 우리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지각에 대해서 어떤 칭찬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에게 보일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시대의 정신(spirit)에 의해서 묶여 있고, 그 전체를 거짓과 어리석음이라고 선언하면서, 모든 성경적 꿈들을 살펴보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고만 있다면, 우리가 성경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변명하듯이(pardonably) 믿고 있는 우리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 인간의 본성 안에는, 비가시적이며, 현재 이곳에 없고, 멀리 있으며, 미래의, 우연적인 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실제적인 이미지들과 이런 일들의 감각적인 상징들을 감지할 수 있는 하나의 감각기관(sensorium)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감각기관은, 고등한 자연들과 어떤 접촉을 하게 되는 경우, 자연적인 방식들로는 우리들에게 감춰져 있는 어떤 영향 아래에서, 움직이게 되고, 어떤 다른 감각기관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런 일들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분명히, 인간의 내적인 본성의 깊음은, 그 속으로 잠이 들 때 잠겨들게 되는데, 그에게 나타나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감추고 있습니다. 혼을 단지 그 의식이 확장되는데에까지만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의 근본적인 오류의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인정되듯이, 그것은 그것의 의식 속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능력들과 관계들을 품고 있습니다. 게다가, 풍성함에다가, 예감의 기능구조가 수반되는데, 그것은 의식적인 동기 없이 어떤 사람을 인도하고 또한 경계하며 미래를 예상하게 하는 것으로서, 잠의 상태에서 외부를 지각하는 감각들이 묶여져 있으면서도 자주 풀어져서 미래의 먼 상태 가운데서 그것을 흐릿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함은, 여러 고대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Aeschylus가 아름답고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잠 속에서 영은 시력이 분명해지기 때문;

낮에는 미래에 대한 영의 비젼이 제한되어 있도다.

 

이 점술이라는 자연적 은사에 관련해서, 탈무드는 꿈을 예언의 60번째 부분이라고 이름붙입니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그것과 관련해서, 자신이 심리학적 설명부분인 꿈으로부터’(de somno)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누가, 무언가를 지각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의 환상을 아무 것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같이, 인간 경험에 이렇게 외래인인 사람이 누구인가요“(Quis tam extraneus humanitatis, ut non aliquam aliquando visionem fidelem senserit?) 자신의 아버지 집에 있을 때 꾸었던 요셉의 꿈(37:5-11), 그에게 그 뒤에 분명하게 되어졌던 것처럼(42:9), 비유적으로 야곱의 집안 위에 그가 앞으로 뛰어나게 될 것에 대해서 그에게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술관헌과 빵 굽는 관헌의 꿈들(40), 그것들을 요셉이 해석해 주었는데, 그들의 운명에 다가오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군대의 진영에서 한 군인의 꿈(7:13), 이것들은 예감에 대한 이런 꿈들(φαντασιαι ονειρου προμηνυουσαι, 지혜서18:17-19)의 예들입니다.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꿈들은 신적으로 산출된 것으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 속에 내재되어 있는 통찰의 자연적 은사 이상의 다른 출처의 기원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은사는 다양하게 개인들과 사람들에게 할당되어 있으며,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들은 졸고, 그가 졸 때에 사람들은 깨어있기도 합니다. 미래에 대한 그 꿈의 표상은 때때로 수수께끼같은 상징들 아래에 감춰져 있고 이것과 연관해서 성경은 꿈의 해석기술을 인정하되(פתרון 혹은, שבר), 위로부터 부여된 능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1:17; 비교.40:8, 41:16).

 

꿈꾸는 것의 또 다른 의미심장한 양상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꿈속에서 제시되는 것은, 그 작동들이 반영되며 멀리서 희미하게 자라는 것과 더불어(그래서 전도자가 말하기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고 합니다, 53), 그 외부의 세계(에 관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내부적이면서도 획득된 주관성이 그곳에서 자연적인 진실함으로 충만한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어서, 깨어있는 삶의 외부의 관계들과 자극의 압력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사람이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듯이 자기 자신 앞에 서 있습니다(κατεναντ προσωπου ομοιωμα προσωπου, 집회서313). 몸의 상태를 포함해서, 혼의 구성물이나 내용물만 아니고, 영의 구성물과 내용물도 또한 간접적으로 상형문자에서처럼 꿈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육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자일까요? 그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잠을 자고 있을 때, 어느 정도 로마서67절에서 죽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ο αποθανων δεδικαιωται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죄에서 죽었다가 벗어난 자)을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본질에 있어서는 그 토대에서 단지 죄가 쌓아가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 그치는 한 말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꿈을 꾸는 것이 잠과 결합되어지자마자, 영은 고통을 당하되, 육체와 자아에 의해서 내몰리고 있으면서, 그 빛으로 물러난 혼의 어둡고 불타는 삶의 측면, 곧 혼을 향하여서 퇴보하는 것을 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혼의 이기심, 그 이기적인 충동, 이기심에 의해서 자극된 그 불안으로부터 마음 속에 모든 종류의 죄악된 형상들이 형성되고, 그것으로 그 사람은 깨어나면 부끄러워집니다. 그것 때문에 때로는 꿈꾼 그 사람에게 회오감이 흔들어놓고 특별히 성적인 충동과 그 유혹들로부터 나오는 꿈의 형태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유혹들은 깨어있는 중에 절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꿈속에서는 더욱 지배적이고 음란한 꿈들을 꾸게 될 것이며, 그의 자연적인 기질의 측면에서 엄격한 훈련 중에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될 것입니다. 혼에 대한 현대의 이론은 물론 이러한 꿈들을 면죄시켜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서, 심지어는 비자발적인 설정(泄精)을 하루 동안 불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정도 혐오스럽게 오염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5:16). 그래서 군인이라면 몽설(夢泄)하였을 때 진 밖에서 하루 동안 지내게 하였던 것입니다(23:10). 왜냐하면 영이 그 충성스러움을 상실한 것은 그것의 수치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업보(the wheel of nature, 한역주: 3:6 참고)에 의해 강제적으로 내어쫓기는데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양심은 그 판단을 토라의 규례들이 나아오는 것으로부터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세계 전체가, 인도로부터 애굽에 이르도록, 꿈꾸는 자의 이 육체 안에 거하는 것’(μιαινειν την σαρκα/미아이네인 테인 사르카)에 대해서 만장일치입니다(5, 한역주: 왜 여기에 유다서5절이 언급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유다서가 아니고 다른 소스일까?). 이 음란한 꿈들은 영이 고삐가 풀려버렸다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들을 뒤따르는 영의 감춰짐 속에서 그것을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한 번 더 자기 자신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순간, 잠자는 자의 영은 그 육신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고, 그것이 기원하였던 하나님 안으로 잠겨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잠을 자는 중에도 여전히 깨어있는 것과도 같이, 하나님 안에서 있다는 그것의 감각들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26:9; 139:18, 비교. 3:5,4:8).

 

꿈의 세 번째 의미심장한 양상은 영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