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설교 및 설교자료

Horace 2021. 5. 5. 16:07

천국제자들교회 수요성경공부: 202155

이스라엘12지파연구(7): (심판)-심판받은 시기심

창세기291~6

 

1. 지금까지 레아의 네 자녀들의 출산과 그 역사에 대해서 상고하였습니다. 이제 라헬의 자녀를 살펴보게 될 것인데, 라헬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입니다. 이 출생은 아주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척 싫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내를 두 명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나 한 아내의 시녀를 통해서 자녀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멉니다. 결국 이 자녀 곧 심판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요한계시록의 144천이라는 구원받은 자들의 총수에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버렸습니다. 새예루살렘의 12대문에 새겨진 12지파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참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첫째로 배워야 할 것, 구원이란 혈통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요한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고 한 것같이, 구원은, 혈통으로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이 점을 고려하면서, 그 출생의 과정을 살펴봅시다. 그 출생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자면, 시기심입니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였습니다. 이 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단의 출생의 동기가 시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면서 그 이름을 심판이란 뜻의 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불신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언니를 시기하여 시녀 빌하를 빌려서 아들을 가지게 되는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도 악한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라헬이라는 한 여인의 구속사적 의미를 평가할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3. 라헬은 야곱에게 사랑받았으나, 야곱과 함께 매장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큰 교훈을 우리들에게 제공해 줍니다. 특별히 그가 베노니”(슬픔의 아들)를 낳으면서, 벧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에브랏길에서 죽습니다. 아이를 더하여 갖기 원해서 요셉이라고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렇게나 원하였던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는 죽고 맙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것을 성경이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이런 역설적인 모습을 성경은, “라헬의 울음이란 이미지로 전승시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시대에 베냐민지파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라마라는 곳은, 바벨론으로 잡혀갈 포로들을 집결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까지 예레미야도 잡혀왔다가 풀려납니다(4:1). 그런데 그곳에 있게 될 큰 슬픔의 이별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31:15)고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가까운 바벨론포로에 대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먼 미래, 곧 메시야의 날이 도래하였음에도 그 메시야를 통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시대를 향한 예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베들레헴의 모친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2:17~18). 예레미야선지자의 말(31:15)를 인용하면서,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그저 자녀들이 학살당하는 것이 너무 비참해서 위로를 받기를 거절한다는 뜻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요구, 이기적인 욕심의 성취만을 기대하기 때문에, 참된 영적 위로는 거절하고 있는 불신앙의 모습이, 라헬에게서와 같이, 예레미야시대의 라마의 여인에서와 같이, 베들레헴의 여인들에게서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4. 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가 라헬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라헬의 불신앙을 알아야, 그리고 그 불신앙의 핵심인 시기심을 알아야, 그의 육신의 첫아들과 그 지파의 역사의 본질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5. 사실, 단지파의 역사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창세기49장의 야곱의 예언을 보면, 단에 대해서는,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6-18)고 아주 이상야릇한 예언합니다. 모세는 신명기3322절에서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고 합니다. 나중 단이 제비뽑기를 통해서 얻게 되는 기업의 몫은 요단강 동쪽의 바산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요단강 서쪽 지중해 해변가의 해양민족인 블레셋과 유다지파 사이에 있다가(이곳에서 삼손이 활동함), 그곳이 좁아서 북쪽지역(갈릴리윗지방)으로 올라가서 레센이란 곳을 차지하고는 단이라고 이름 붙이는데(19:47), 나중, 북이스라엘의 최북단을 나타내는 지명이 됩니다. 곧 우상을 섬기는 지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18:30). 라헬이 밧단 아람에서 남편을 따라 가나안지역으로 올 때, 오빠 라반이 쫓아와서 자기 가족신상을 왜 훔쳐가느냐고 하였을 때, 라헬이 낙타에 올라앉아 엉덩이에 깔고 있으면서, 지금 월경중이라고 변명하면서, 결국 그 우상을 가지고 왔었는데, 그런 모습을 단지파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결정적인 두 번째 교훈은 시기심에 대한 경계인 것입니다.

5. 라헬은 레아를 시기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심은 사탄의 하나님에 대한 시기심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참 많았습니다. 야곱에게 사랑받았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사탄도 천사장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었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기하였습니다. 단도 재주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성막을 짓는데, 유다지파 브사렐과 더불어서 단지파의 오홀리압을 세워서 성막을 세울 때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셔서 성막의 온갖 기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31:6). 이런 재주를 물려받은 단지파의 한 여인은 두로사람과 결혼하였다가 나중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건축에 불려온 히람을 낳습니다(대하211-14), 흥미로운 것은, 왕상713-14절에서는 납달리지파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 낳게 되는 둘째 아들로서 경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았는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재주로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여서, 저주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6. 이런 모습은 삼손의 모습에서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도 많은 축복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과신했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하였고, 자중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만 스스로의 자중에 과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비밀을 누설해 버리고 맙니다. 한 백성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그만 몰락해 버리고 마는 비참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두 눈알이 빠지고 우상신전에 묶여서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백성을 심판하던 위치에서, 길의 뱀노릇, 첩경의 독사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는 역할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정신의 적그리스도가 바로 단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합니다.

7. 잊지 말아야 할 것, 그 절망 속에서, 마지막은, 살았을 때보다 더 많은 원수들을 죽이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원수들을 음부에 몰아넣으신 우리 주님의 장엄한 죽음을 예표합니다. 그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시기심의 죄악들이 용서를 받고, 이제는 참으로 겸손하게 주를 섬기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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