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중생과 회심

Horace 2021. 5. 8. 08:27

[최소 호연지기(最小 浩然之氣)의 크리스챤들]

 

1. 동서양의 양심론(良心論)을 탐구해 가다가, 맹자를 통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마지막부분에 구성되어 있는, 고자장구(告子章句)와 진심장구(盡心章句)를 목표로 하여, 처음의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부터 읽어가다가, 두 번째편의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를 탐독하면서, 다른 부분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길게 논구하고 있는 호연지기장(浩然之氣章)에서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부동심(不動心)의 주제로부터 시작해서 호연지기와 지언(知言)의 방식으로 이뤄내는 부동심의 상태를 그려보면서, 우주와 합일하고 세상 사람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목표로 수양하였던 동양의 성현들의 호기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2. 그러면서, 그런 부동심을 서양에서도 추구한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헬라와 로마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었고, 그것은 다시금 르네상스시대의 스토아주의자들의 영웅적 금욕주의와 유사하다는 발견을 하게 됩니다(실존주의도 결국 이 부류가 아닐까요?). 어쩌면, 맹자선생의 의견대로 하자면, 서양의 스토아주의는 고자(告子)의 방식이었을 것 같다는 추측도 해보지만, 결국은 부동심을 지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유사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3. 그러다가,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마주해서 보이는 아레오바고언덕 위에서 스도이고(스토아)철학자들을 상대하여 부활의 복음을 설파하였던 바울사도의 말을 또한 상고하게 됩니다. 어쩌다가 오늘 묵상본문이 고린도후서3장의 의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의 비교에 대한 것입니다. 공맹의 철학과 스토아철학이나 모세의 철학이 동일한 것은 아니어도, 이런 대조를 할 수 있게끔 유사한 점이 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두가 인간의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수양의 철학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삶의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추구하였습니다. 스토아철학이나 모세의 철학도 모두 호연지기나 지언의 수양방식 비슷한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서 그 수양방식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를 뿐입니다. 동서양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부동심을 열망하였던 것입니다.

 

4.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며,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니, 고린도후서3장이 새로운 빛이 환하게 비춰지게 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15). 어쩌면 동양의 공맹철학과 서양의 스토아철학(현대의 실존철학으로 이어짐)이 추구했던 바는, 그 이상이 수건에 가려져서 그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을 만난 영감의 철학들이었지만, 마치 그 영광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 했던 것처럼, 공맹의 철학에도 스토아의 철학에도 수건이 가려졌어야 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5.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위대한 그러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의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6. 여기에 부동심의 길이 있고 호연지기와 지언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맹자의 책을 계속 읽어가노라면 계속 부끄러움이 다가오겠지만, 그 호연지기와 지언으로 부동심을 이루는 길이 바로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한 줄을 깨닫게 되니, 더욱 동양성현의 말씀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칼빈도 세네카를 읽으면서 이 마음을 가졌을 법 합니다. 아침 햇살이 참 밝습니다. 밤의 장미가 아름답듯이, 햇살에 비친 장미도 참 신묘(神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