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 사랑 예수/설교 및 설교자료

Horace 2021. 5. 16. 08:50

천국제자들교회 주일설교(스승의 주일): 2021516

사도가 약속을 어겼을 때

고린도후서6:11-13

 

제가 중학교시절에 읽도록 권장되었던 도서 중, 임어당(林語堂)선생의 생활의 지혜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국인들은 지정의 세 가지만 아니라, 유머라는 요소를 항상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읽거나 들은 유머들을 수첩에 적어서는 외우려고 하였고 친구들과의 대화에 사용해 보려고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것이 너무 싱겁기도 하고 피상적이라 여겨져서 포기해버렸습니다만, 임어당이라는 이름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 회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 이 분에 대해서 더 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중국의 문학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유교와 노장사상, 불교와 현대과학과 유물론의 공산주의사상까지를 섭렵하고는 실망하여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어린 시절 목사의 자녀로 살고 주일학교교사도 하고, 신학교에까지 진학하였지만, 기독교인들의 너무나도 답답하고 위선적인 생활모습을 보고는 실망을 하고는 기독교를 버렸다가, 다시금 기독교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에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느낀 저의 실망과도 비슷한 점들이 있어서 너무나도 흥미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유교나 노장사상 등의 동양사상을 극복하였는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어떤 기독교에 대해서 그가 기대하면서 되돌아왔는지도 관심을 가지고 살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간혹 동양철학을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면서, 특별히, 어떤 기독교의 복음으로 어떤 교회를 이뤄가야 하는지를 상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약속을 깨뜨려버린 일로 신뢰가 상실되어진 것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된 고린도후서를 살펴보면 바로 그런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비젼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된 교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승의 주일에 저의 소원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며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상고하는 말씀의 배경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1. 왜 약속을 했나?

 

오늘 본문은,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넓어졌으니라는 말은, 변명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울일행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적게 생각하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란 함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심정이 바울일행에 대해서 마음이 좁게 닫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애당초 바울사도는 고린도지역에 들러서 1년 반 이상을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그 당시 음란하기가 세계적으로 소문난 고린도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문제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의 5장을 보면, 심지어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음란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회중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쉬쉬하거나 알아도 모르는 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 당시 바다건너 에베소에 있던 바울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편지(고린도전서)를 보내면서, 그런 사람은, 사탄에게 내어주고(5:6) 회중에서 내어 쫓으라(5:13) 하였습니다. 아주 호된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로 지나서 고린도에 가겠다고 약속을 합니다(16:5). 지시한 대로 잘 지키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2. 왜 약속을 어겼나?

 

이렇게 약속을 했는데, 바울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서는, 앞선 편지에서 바울사도가 보낸 편지에서의 조처가 너무 엄정하다고 생각하고는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을 사도라고 인정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식의 불평을 하고 배척운동까지도 하였습니다. 신뢰관계가 깨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후서가 그것입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도, 예할 때는 예하고, 아니오 할 때는 분명히 아니오 하면서 약속을 분명하게 지키셨던 분인 것처럼 자신도 그러하지만, 편지를 보내면서 의도했던 일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기다려도 들을 수 없게 되고, 막상 그런 상태로 고린도교회에 가게 되면, 더 큰 책망을 할 수 밖에 없게 될 터이니(간음한 사람을 쫓아내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보고), 가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가지 않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로아까지 가서 복음사역이 너무나도 잘 진행이 되어가는 중에도,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전해줄 디도를 그렇게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디도를 만나려고 마게도냐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변화된 모습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싶어서, 그곳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인내함으로서 지켜보다가, 디도를 만나서, 결국은 회중에서 쫓겨난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결국, 바울이 엄격하였던 것이 주효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는 열매를 맺게 된 뒤에 쓰는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3. 오직 십자가의 복음

 

이 편지는 한 마디로 해명이라고 할까요,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변명의 편지입니다. 약속을 한 것도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고, 약속을 어긴 것도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1장부터 6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의 효과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1). 생명의 냄새로서의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해서 강조한 것도(2), 자유를 주는 주의 성령으로 변화된 심령을 가진 자가 자신의 추천서라고 한 것도(3),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이 우리 심령에 비췄다고 하는 것도(4),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생관을 강조하면서, 벌거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지으신 장막, 그 생명으로 덧입혀지는 것을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는 것도(4),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도(5), 그리고 오늘 본문인 6장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고 하는 것도, 모두 십자가의 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채로 있다면, 신뢰가 깨어지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하는 자에 대한 태도가 오해나 불신의 것이라면,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본인이 손해입니다. 해골에서 고인 물이라도 생명수처럼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최근, 저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면서,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참 저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남을 아껴주는데도 가까워지지 않으면 자기의 인자함이 철저하지 않은가 반성하라...남을 예로써 대하는데 반응이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가 성실하지 않은가 반성해라. 행해서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돌이켜 자기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라”(이루장구 상, 반구제이장). 스승의 주일인데, 저의 부족함을 한없이 느껴보면서 반성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강요를 만화로 그려놓은 것을 여러권 구입해 교회의 서가에 꽂아두었습니다. 이 책이 기독교강요 원본을 쉽게 오해하게 하는 요소도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지만, 최소한 이렇게라도 기독교강요에 접근하고 번역판을 읽을 동기를 가지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저로서는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연구하여 나눌 수 있는 자료들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교회입니다.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임어당선생이 어릴 때 환멸을 느꼈던 그런 교회, 제가 어릴 때 그렇게 혐오하였던 교회를 이루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이 약속을 하는 것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십자가의 복음을 위하여 그러하였던 것처럼, 부족하나마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스승의 주일, 담임목사의 피끓는 소원을 이렇게 나누고 싶습니다.

집 꽃밭의 장미꽃을 올려둔 것은, 그것을 심고 자라게 하여 꽃을 보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에 대한 소망을 오늘 설교 속에도 담아 두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