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豐川 2018. 1. 1. 17:23

 

 

출처 : 일촌 불
글쓴이 : 묵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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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川任氏 자료

豐川 2017. 4. 7. 22:36

임호신(任虎臣) 신도비


 
[원 문]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曺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簡公任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江寧君洪暹



典涓司提檢禦侮將軍李書



川任氏世有名人當麗季有判撫山縣事諱中善壻于柳巷先生韓脩生縣監諱孝敦縣監生郡

守諱漢是生工曺判書諱由謙判書生觀察使諱樞早負公輔之望

見權倖位不稱德娶河陽名族郡守許邃之女生公正德丙寅十一月初三日也公諱虎臣字武

伯生而資稟甚高讀書倍文尋究理趣不但爲章句之陋弱冠入大

學學務踐履人稱有儒者氣像中戊子司馬試捷辛卯丙科權知承文院副正字以史才見薦入藝

文館爲檢閱序陞待敎選爲侍講院說書秋觀察公如 京師賀冬

至公以質正官隨之名流贈詩多以鳳將雛比之還未出上國界遭觀察公喪扶萬里號毁戚

華人見者無不歎服丙申喪畢復拜奉敎時權姦當國斥逐異已無

虛月出公爲黃澗縣令公怡然就道無幾微見於辭色戊戌因親病遽拜典籍歷兵刑兩曺佐郞司

諫院獻納持論平恕無纖芥意於前時軋已者坦懷接物意絶恩

怨公之素性然也轉弘文校理吏曺正郞兼侍講院文學弼善俄遷議政府檢祥陞舍人値壬寅歲

飢朝廷知公有活人手段擧爲忠淸道救荒敬差官親齎粥餌出入

病戶一方賴以全活夏移輔德秋授執義糾擧務存大體有古御史風復爲司諫各衙門根隨奴代

立者徵價布於本身甚濫朝廷許令該曺收直分給公執之曰此非

所以養廉其待士大夫也不已簿乎言雖不用時論之拜弘文館典翰直提學乙巳擢拜承政院

同副承旨病遞秋復爲右副循序至都承旨丁未 上親行禮于

廟加恩執事公受嘉善階未幾病遞還拜左尹兼同知春秋館修 二聖實錄出爲慶尙道觀察

使嶺南地廣務繁人多不堪公至治尙簡易不多敎條文簿塡委而

事無停滯人稱其能官滿還朝同知樞府戊申丁外艱庚戌釋服判決掌隸院者至再促理旣明訟

直其寃辛亥如 京師賀 聖節乙卯 特加資憲拜戶曺判書兼

都摠管時饑饉連仍島夷擾邊公長度支內心計量入爲出時裁狹以適機宜而事無不集人

以爲難也治劇盡之餘激成腸證自丙辰二月引疾固辭遞拜知

敦寧禁其家毋得受祿俸盖不欲無事而食也病遂綿終于八月初八日享年五十一有司以聞

上悼甚輟朝曰良宰相亡矣朝野相弔執友臨護犀金滿坐如哭

私親十月二十日葬于楊州天寶山南麓觀察公墓側太常易名曰貞簡公爲人學欲着實近裏

心欲平正坦夷自少靜掃一室以爲捷息之所篇曰知足菴手書先

賢格言于窓壁殆無虛紙盖欲寓目輒警不弛也不肯矯情任眞推分如見親舊寒窘推食解

衣略無難色身旣貴淡素無異布衣門閭蕭然不類有位者之家深

味李文靖缺陷世累之語嘗語所親曰是吾心也達於死生之理常書古人百年便作萬年計七字

于座右以爲貪生惡死者之戒外若坦率而內有定方臨事毅然不

撓遇急常自靜暇壬子朝廷選士大夫廉謹者奬勸砥礪公與其弟議輔臣俱與其選人以爲榮

公鉛然安得無此二字丙辰 東宮向學 上欲揀宰相中學

行俱邁者號爲輔養官使之薰陶涵養公與安左相玹李領相浚慶趙贊士秀與焉極一時之撰

也耿介寡慾遠跡權要立朝以來累經士林之禍而公獨超然無與

於其間趙文貞於人少許可獨以公歿爲痛曰寧復見正直平澹如武伯者公娶部將崔浩文之女

卽 贈右議政鄭汝昌外孫女姿性端莊善理內職有外家風生二

男二女長曰元牙山縣監次曰凱定山縣監俱有學守能業其家女長適正字鄭淑南次適士人朴

好謙牙山娶郡守李漢之女生一男曰慶基定山娶郡守尹佐之女

生一男四女女長適幼學李惇慶基娶都事申承緖之女生一女夫人自喪判書公守閨閤常恨

未亡雖連墻骨肉之家亦未嘗往來焉壬申九月初六日病歿于牙

山任所以是年十二月十八日葬同公瑩喪旣襄諸孤謀不朽於暹曰子知吾父盖銘諸神道嗚呼

暹與公同遊大學又同戊子辛卯榜又辱執友不敢以文拙辭拭

淚而爲之銘曰

學本窮經公早講明燭理惟精 玉汝于成諫坡西淸芝秀鳳鳴 謙虛遠名物與無爭內保堅貞

多欲營營笑彼伸自程 才周眷傾佇邦衝天其齡

來簪纓若寄浮生歿亦吾寧 瓮巖嶸鬱彼佳城配淑靈 考德有銘言無過情足後人聽



萬曆二年甲戌十月 日立
 

임호신(任虎臣, 15061556)신도비

 

 

 

 

 

 

 

 

 

 

 

 

 

 

 

 

 

 

 

[번역문]


유명 조선국 자헌대부 호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정간공 임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강녕군 홍섬(洪暹)이 글을 짓고,

전연사 제검 어모장군 이잡()이 글을 쓰다.

풍천 임씨는 대대로 명망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려 말에 판무산현사 중선(中善)이란 분이 있어 유항 선생 한수(韓脩)의 사위가 되었다. 이 분은 현감 효돈(孝敦)을 낳았으며 효돈은 군수 한()을 낳았다. 이 분은 공조 판서 유겸(由謙)을 낳았고 이 분은 관찰사 추()를 낳았다. 이 분은 일찍부터 공보(公輔 : 재상의 지위)의 덕망이 있었으나 권신의 미움을 사서 지위가 높은 데 이르지 못하였다. 하양(河陽)의 망족인 군수 허수(許邃)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병인년(1506, 중종 원년) 11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호신(虎臣)이요 자는 무백(武伯)이다. 공은 태어나서 자질과 품성이 매우 고고하였다. 글을 읽을 때는 암송하고 이치와 취지를 깊이 탐구하였으며, 고루한 장구(章句)에 전념하지 않았다. 약관에 대학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고 이행하니 사람들이 유학자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무자년(1528, 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묘년(1531, 중종 26)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기용되었다. 역사에 재능을 보여 예문관에 천거되어 검열이 되었고, 차례로 대교로 승진하였으며, 뽑히어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가을에 관찰공이 동지사가 되어 중국에 갈 때 공은 질정관이 되어 따라가 명나라의 묵객들에게 시를 지어 준 것이 많았는데 이를 본 명나라 시인들은 공의 시를 봉()이 어린 새끼를 거느림에 비유하였다. 돌아오는데 중국을 나오기 전에 관찰공의 상을 당하니 관을 부축하고 만 리를 소리치며 울면서 슬퍼하였다. 이를 보는 중국인은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병신년(1536, 중종 31)에 상을 마치고 다시 예문관 봉교에 배수되었는데 이때 권간이 국정을 담당하여 척축(斥逐 : 몰아냄)이 유달리 심하였으므로 피해가 많았다. 이에 공은 황간 현령으로 나갔다. 공은 태연하게 취임하여 조금도 사색에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술년(1538, 중종 33)에 친병으로 인하여 성균관 전적에 체배되었고, ·형 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지론이 공평하고 관대하여 전에 자신을 괴롭힌 자에게도 조금도 노엽게 생각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사물을 대함에는 은(()의 구별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공의 성격이 그러함이다. 홍문관 교리에 전직되고 이조 정랑으로서 시강원 문학과 필선을 겸하였으며, 잠시 의정부 검상으로 옮겼다가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임인년(1542, 중종 37)에 흉년이 드니 조정에서는 공이 인명을 구제하는 데 수단이 있음을 알고 천거하여 충청도 구황경차관이 되었다. 공은 친히 음식을 가지고 병든 사람이 있는 집을 출입하니 한편으로 힘을 입어 모두 재활하였다.

여름에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옮겼고, 가을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는데 탄핵을 받았으나 무사하였으니 대체로 옛날 어사의 기풍이 있었다.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각 관부에 충당되는 노비로서 대립(代立 : 역을 대신함)하는 자는 본인에게 그 대가로서의 포를 징수케 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고 해당 관서로 하여금 거두어 바로 분급케 하였다. 공은 이를 막고서 말하기를 이는 싼 것을 길러서 사대부를 대접하는 바가 아니며, 오히려 각박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당시의 논의는 공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홍문관 전한, 직제학에 배수되었다.

을사년(1545, 인종 원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탁배되었고,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가을에 다시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차례로 승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다. 정미년(1547, 명종 2)에 왕께서 친히 묘에 부례()1)할 때 은혜를 베푸시니 집사를 제수받고 또 가선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안있어 병으로 체직되었고, 다시 한성부 좌윤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이성실록2)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영남은 지역이 넓고 일이 번잡하여 사람들이 오래 견디지 못하였으나 공은 정성을 다하여 다스려 오히려 모든 일을 간편하게 하였고 지침이나 방침도 많지 않게 실정에 맞도록 하였다. 문서와 장부가 가득 쌓였으나 일이 정체되지 않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관리로서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에 들어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무신년(1548, 명종 3) 어머니상을 당하였고, 경술년(1550, 명종 5)에 상복을 벗고 장례원 판결사를 두 번 역임하였는데 이치를 밝혀 송사(訟事)를 명철하게 하여 그 억울함을 바로잡았고, 신해년(1551, 명종 6)에는 성절사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을묘년(1555, 명종 10)에 특별히 자헌의 품계를 더하고 호조 판서에 배수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이 때 기근이 들고 왜구가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공은 탁지(度支 : 호조)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안으로 마음을 다하여 계량하여 세입하고 지출할 때는 넓고 좁음을 재량하여 적절하게 처리하니 일이 쌓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일을 공은 극진히 처리한 것이다. 격무에 초췌하여 창증이 나므로 병진년(1556, 명종 11) 2월에 병든 몸을 이끌고 사직하였고 체직되어 지돈녕부사에 배수되었다. 공은 집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녹봉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일하지 않고는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병환이 깊어져 88일에 졸하니 향년 51세였다. 유사가 왕께 알리니 심히 애도하여 조회를 받지 않으시고 이르기를 선량한 재상이 죽었구나라고 하였다. 조야가 서로 조문하였고 벗들이 호상하였는데 고관대작이 가득 앉아서 자기 부모가 죽은 것과 같이 곡하였다. 1020일에 양주 천보산 남쪽 기슭 관찰공의 묘 곁에 부장하였다. 태상시에서 지어 내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공의 사람됨은 학문에 있어서는 착실하여 속에 품은 이치를 궁구하고자 하였으며 마음에 있어서는 평정하고 온화하였다. 젊어서부터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이곳을 휴식할 장소로 삼았는데 편액을 지족암(知足菴)이라 하였다. 손수 선현의 격언을 창문 벽에 써 붙이고 백지 한 장도 그냥 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는 대개 눈여겨 보아 문득 경계하고 그른 것을 바로 잡아 해이하지 않으려 함이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수에 맞게 행동하였다. 친구가 춥고 굶주린 것을 보면 음식을 권하고 입은 옷을 풀어 주었으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을 드러냄이 없었다. 몸이 귀하게 되어도 소박하여 입는 옷은 다름이 없었고 문 밖은 소연하여 지위있는 집안의 냄새를 풍기지 아니하였다. () 문정공(文靖公)은 세상의 복잡한 일의 결함을 말할 때 항시 친우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죽고 사는 이치에 통달하여 항상 옛 선인의 백년편작만년계(百年便作萬年戒 : 백 년의 글을 익히어 만 년의 경계로 삼음)’의 일곱 자를 좌우명으로 써 붙이고 생을 탐하고 사를 증오하는 자의 계율로 삼았다. 밖으로는 공평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안으로는 정한 방도가 있어 일에 임하며 의연히 동요하지 않고 급한 일을 만나도 항상 스스로 조용하게 행동하였다.

임자년(1552, 명종 7)에 조정에서 청렴하고 신중한 사대부를 뽑아 힘써 정진할 것을 장려하였는데, 공과 그 아우 참의 보신(輔臣)이 함께 뽑히자 사람들은 영화로운 일이라 하니, 공은 수심에 잠겨 말하기를 어찌 지(), ()2자를 욕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진년(1556, 명종 11)에 동궁이 글을 배우게 되자 왕께서 재상 가운데 학행이 뛰어난 자를 간택하여 보양관으로 이름하고, 훈도(薰陶 : 덕과 의로써 사람을 교화함)하고 함양(涵養 : 은혜와 덕행을 베풀어 기름)케 하고자 하였다. 공은 좌상 안현(安玹), 영상 이준경(李浚慶), 참찬 조사수(趙士秀)와 더불어 마침내 일시에 뽑히었다. 공은 경개(耿介 : 지조가 굳어 변하지 않음)하고 욕심이 없어 권세와 요직을 멀리하였다. 조정에 들어온 이래로 여러 번 사화를 겪었으나 공은 홀로 초연하여 그 사이에 간여하지 않았다. 조사수는 평소부터 공의 인품을 흠모하여 존경해 왔는데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애통하여 말하기를 어찌 다시 공과 같이 정직하고 평이하고 담백하기가 무백(武伯)과 같은 이를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부장 최호문(崔浩文)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우의정에 증직된 정여창(鄭汝昌)의 외손녀이다. 자질과 성품이 단장하고 집안을 잘 다스려 외가의 가풍이 있었다. 2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원()으로 아산 현감이며, 차남은 개()로서 정산 현감이다. 모두 학식이 있어 능히 그 가업을 이었다. 장녀는 정자 정숙남(鄭淑男)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사인 박호겸(朴好謙)에게 출가하였다. 원은 군수 이한(李漢)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경기(慶基)이다. 개는 군수 윤좌(尹佐)의 딸에게 장가들어 1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유학 이돈(李惇)에게 출가하였다. 경기는 도사 신승서(申承緖)의 딸에게 출가하여 1녀를 낳았다.

부인은 판서공의 상을 당했을 때부터 절개로서 슬퍼하였고, 내실에 기거하면서 미망됨을 한하였으며 비록 담을 사이에 둔 친척집이 있어도 왕래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 5) 9월 초6일 병으로 아산의 임소에서 졸하니 이 해 1218일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상을 마치자 여러 손자들이 영원히 공의 행적을 기리고자 모의하여 섬()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우리 부친을 알므로 신도비명을 부탁한다고 하였다.

오호라! 섬은 분에 넘치게 대학에서 공과 같이 공부하였고, 또 무자년(1528, 중종 23)·신묘년(1531, 중종 26)에 같이 급제하였다. 또 송구스럽게도 친우로서 글이 졸렬하다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면서 짓는다. 명에 이르기를,



학문의 근본은 경서에 두어 일찍이 그 강명한 뜻을 밝히니 참으로 그 학문 정밀하였구나.

옥과 같은 학문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간관(諫官)으로 이름 떨쳐 조정을 맑게 하였고 현숙한 아내와 아들이 있어 공을 보필하였도다.

겸허한 이름은 사방에 떨쳤고 사물을 대하는 데 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안으로는 항상 굳은 정결로서 보신하였도다.

많은 외직을 경력하였으나 그 진퇴에는 항상 웃는 얼굴로 화기가 있었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깨끗한 길을 스스로 걸었도다.

재주는 경국(傾國)의 능력이 있어 나라의 동량으로 기대되었는데 하늘은 그 수를 줄여 뜻을 모두 펴지 못하였구나

그러나 공은 편안할 것이로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니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으랴.

옹암(瓮岩)이 높고 험하나 울연(鬱然)3)한 저 언덕엔 아름다운 묘가 있고 또 그곳엔 현숙한 배필의 영이 합장되었도다.

부친의 덕도 비석에 새긴 바 있으니, 내 말이 정에 지나침이 없음은 족히 후인들은 알 것이로다

 
 
 

우리들의 이야기

豐川 2015. 11. 22. 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