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양면

댓글 4

인간과철학

2016. 3. 7.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초반에 발견되었기에 치료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엔 아주 시설이 좋은 병원과 연줄이 든든한 사람도 있었기에, 가장 빠르게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암을 치료했다. 그런데 그 일 이후에 이 사람은 뭔가 변했다. 출세 지향적이고, 권력을 추구하던 사람이 뭔가 다 내려 놓은 듯 변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의 보살핌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겸손해졌고, 신을 찬양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후, 그는 그렇게 변했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특징을 가진 사람은 보통 에고가 매우 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존감도 높고, 그러기에 존재감도 매우 강해서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뭔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성공한 삶이 단지 자신만의 능력이 아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고 느낀 것이다.

 

삶과 죽음을 경험한 자로써 나름대로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변한 것일까?

 

물론 그것을 변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변형된 것이다. 즉, 외부로 보여지는 형태만 바뀐 것이지, 내부적으로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엔, 절대적으로 소중한 자신에 대한 믿음, 즉 에고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을 추구하고, 출세하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던 에고가 단지 조금 방향을 바꿔서 자신의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에고로 변형되었다.

 

단순히 표현하면,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냐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거대한 권력을 가져도, 이 세상 누구보다 더 많은 부를 가져도, 죽고 나면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한 것이고, 더해서 죽음 후의 뭔가를 기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이렇게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은 좋은 일이나, 본질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고 믿고 있다. 사실 그렇다. 매일 성공하고 싶어서 안달하던 삶에서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삶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이 개인적인 입장에서 결코 단순한 변화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에고의 교묘함이다. 에고는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에고는 예전보다 에고를 줄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조차도 에고를 느끼게 만든다. 에고는 정말로 상대하기 힘든 대상이다.

 

이 사람은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좋지만, 자신의 삶의 가치를 버리지 못했다. 삶의 가치는 에고의 최종적 목적이다. 에고는 존재 자체를 희망한다. 그래서 평소엔 존재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알려진, 권력을 추구하고 돈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다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면 금세 목적을 바꾼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남은 생 동안, 자신을 경험을 끝없이 얘기하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과거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던 모습에서 신을 찬양하고 추구하는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결국 권력이, 명예가, 돈이 신으로 바뀐 것뿐이다. 사실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말았다. 이런 믿음은 단단해서 잘 깨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고는 존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모습을 변형시킬 수 있다.

 

에고는 사랑 속에서도, 용기 속에서도, 믿음, 신뢰, 종교와 신에서도 나타난다. 끝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정말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에고의 쳐놓은 광대한 크기의 그물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과연 어떤 변화를 겪은 것일까? 분명히 변하긴 했는데, 그것이 내부적인 것이 아닌, 외부적인 변화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에도 변한 것은 맞다. 무엇이 변했을까?

 

에고를 상대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단면이 있다.

 

하나는 에고의 완성이다. 즉, 흔들림 없는 에고이다. 누구의 말도 누구의 조언도 누구의 주장도 모두 무시할 수 있는 절대적 수준의 완성이다. 우리가 확실한 신념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의심 없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바로 에고의 완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에고의 완성을 꿈꾸며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완성은 본질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완숙해진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본질 근처에도 못 가고 그냥 나이가 준 똥고집을 신념이나 믿음이라고 착각한 채 삶을 마감한다.

 

암에 걸리기 전에 이 사람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저 성공한 고집쟁이로 삶을 마감할 뻔 했다. 그런데 우연히 암에 걸려서 삶의 본질을 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았으나, 결국 그것 역시도 최종 완성의 길은 아니다.

 

왜냐하면 에고의 반대편 단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고의 반대편은 바로 에고의 무의미성이다. 즉, 에고를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에고는 이 둘 중 하나만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다. 이 둘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을 때 상대 가능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일단 매우 뛰어난 존재여야 한다. 즉, 에고의 완성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잘나야 한다. 잘나지 못한 사람은 아예 기회조차도 없다.

 

그리고 에고의 문제점, 즉 에고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자각해야 한다. 사실 어렵기는 이것이 훨씬 더 어렵다. 에고는 잘난 척만 할 줄 알기 때문에, 스스로 무의미함을 인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잘난 존재일수록 더욱 더 힘들다.

 

그런 상황이니, 에고의 완성과 에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내가 자유로운 사람' 은 존재하지만 '나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존재는 거의 없다. 그것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오랜 시간을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는 있다. 그렇게 뛰어난 존재가 아니더라도 본질적 이해만 가능하다면, 살아가는 동안 시도를 해볼 수는 있다. 그리고 더해서 조금씩 나갈 때마다 조금씩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사실 그것 때문이라도 해야 할 가치는 있다.

 

그것을 위해 일단 에고의 목적에 대해서 좀 더 이해를 해보자. 앞에서 에고의 목적은 존재의 유지라고 설명을 했다. 즉, 에고는 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고차원적인 활동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맺는 것도, 이득을 추구하는 것도,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도 모두 에고의 목적에 부합되는 행위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에고의 진정한 목적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에고는 단지 두려움이 없길 바란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정체는 바로 죽음의 존재이다. 즉, 에고는 평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한다. 우리는 결국 죽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에고가 원하는 것은 바로 '확신'이다.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완벽한 확신을 가진 에고가 바로 에고가 바라는 최종 목적이다. 그 확신의 대상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이리도 많은 종교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세상에 그리도 많은 가치가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우리 각자가 가진 에고는 모두 자신만의 경험 속에서 확신을 꿈꾼다. 확신할 수만 있다면 과연 무엇이 두렵겠는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불확실성에서 나온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양 단면 중 하나인 에고의 완성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 에고를 완성시킬 수 있다.

 

그래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좀 더 빠르게 이것을 달성할 수 있으나, 평범한 사람들도 가능성이 있다. 아니, 사실 평범한 사람에게 좀 더 기회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똑똑할수록 뭔가를 믿기가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단지 잘남으로 에고를 완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남으로 에고를 완성시키려면 슈퍼맨 정도 되어야 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지극히 뛰어나야 가능한데, 그 슈퍼맨조차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보면, 그 정도로 잘나도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있다. 아니, 사실 기회가 있다기 보다는 잘나지 못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좀 더 어려운 숙제, 즉 에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해보자.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생각하자.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해보자.

 

"에고는 무의미한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해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드물겠지만, 그냥 "예" 라고 대답했다고 치자.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삶에 대해서 그 정도는 이해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사실 그 정도도 아니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는 없다.

 

대답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알기는 알지만, 인정하지는 못하는 단계일 것이 분명하다. 인정한 사람이라면 이런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이미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렇다면 인정이란 말을 생각해보자. 다른 말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것은 과연 어떤 과정일까?


우리는 인정이란 말을 쓸 때 진심이란 단어를 꼭 사용하려고 한다. 즉, 진심으로 인정해야만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진심이란 단어는 과연 어디를 뜻하는 것일까? 진심이라고 하면 진짜 마음을 뜻하는 것인데,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감정적인 부분일까? 이성적인 부분일까?

 

별 것 아닌 것 같은 질문이지만, 사실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안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정적 존재이다. 우리는 감정에 의해서 행복하기 때문에 그래서 평생 감정을 위해서 살아간다. 물론 이성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실 이성은 감정의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즉, 이성은 감정적으로 더 큰 행복을 얻게 해주기 위해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감정은 우리의 주인이고 이성은 노예이거나 잘해야 집사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받아들임은 마음 속 깊숙히 일어난 변화인데, 당연히 우리에게 있어서 주인인, 감정의 역할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받아들임은 온전히 이성의 역할이다. 이성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면, 결코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원래 감정은 쉼 없이 변한다. 감정은 절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오늘 기분이 좋아서 받아들인 것은 내일 기분이 나쁘면 내치게 된다. 이것이 감정의 본질이다. 그래서 감정은 믿을 수가 없다. 즉, 감정은 결코 진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진심이라고 하면 절대로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감정에게는 불가능한 요구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면 이성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성은 감정의 노예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어떤 집안에서 노예가 손님을 받아들이면, 주인은 언제든 그 손님을 쫓아낼 수 있다. 주인이 받아들인 손님만이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주인의 변덕이 심하니 손님은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큰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해결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결국 결론은 노예가 반란을 일으켜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즉, 이성이 감정을 압도해야 한다. 이성이 감정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때, 받아들임이 일어난다. 완벽하게 이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에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방금 표현한, 완벽히 이성적인 사람이란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성적인 존재를 의미한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득을 위해서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들일 뿐이거나, 감정 자체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지금 말하는 완벽히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단지 그 감정은 온전히 이성적 영역 안에서만 표현된다. 그래서 제대로 된다면, 좋은 감정만 표현될 것이다. 나쁜 감정들은 원래 매우 비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들은 설령 화를 낸다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게 낼 수 있게 된다.


물론 감정을 온전히 감싼 이성은 불가능한 꿈이다. 현재까지는 보통 인간이 그것을 해낼 리가 없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가능해질 때 에고는 완성과 동시에 무의미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에고의 최종 목적인,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희망은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도, 버릴수록 점점 더 감정의 역할은 줄어들고 이성의 역할을 커진다. 즉, 노예가 단번에 주인을 몰아내지는 못해도, 노예는 점점 자신의 힘을 크게 키워서 주인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인은 노예가 받아들인 손님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쫓아내는 행동까지는 자제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노예의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성은 책, 생각, 논리, 상상, 토론, 성찰 등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강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가 된 이성은 감정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제가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성은 자신을 키운 모든 것을 한번에 버려야 할 것이다. 에고는 완성이 됨과 동시에 버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완성되지 않은 에고는 결코 버려질 수 없다. 그러니 에고의 완성만을 위해서 사는 것도, 에고를 버리기 위해서만 사는 것도 모두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완벽히 이성적인 인간, 그리고 그 안에 감정을 품은 인간, 그 존재가 바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진 존재일 것이다. 이때 비로소 원은 완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