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영천의 문화유산

이원석 2020. 9. 19. 11:07

* 영천 화랑설화마을 – 화랑우주체험관, 화랑배움터(키즈존), 4D 돔 영상관, 체험시설인 국궁체험장, 설화재현마을, 그린스테이션 등
* 중악석굴 - 김유신 장군 수련처, 중암암, 삼인암, 장군수, 만년송 볼거리 많아

 

 

영천시 화랑설화마을은 신라시대 화랑을 주제로 전시시설인 화랑우주체험관, 화랑배움터(키즈존), 4D 돔 영상관, 체험시설인 국궁체험장, 설화재현마을, 편의시설인 그린스테이션 등을 갖추었다. 당초 2020년 상반기 중 개관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유동적이다.

 

경상북도 3대문화권사업 중의 하나로 기공식은 2014년 3월 25일 개최됐으며 영천시 금호읍 황정리 9번지 일원(111,938㎡)에 601억원(국‧도비 79%, 시비 21%)이 투입된 대규모 국책사업이다.

 

경주, 청도, 경산이 함께 참여하는 ‘신화랑풍류체험벨트’ 사업 중 하나인 화랑설화마을은 교육‧정신수련 및 문화 복원이 컨셉인 타 시군과 차별화해 휴양레저 공간 조성했으며 특히 화랑정신을 영천의 말과 별로 형상화 해 설화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함은 물론, 관광활성화를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화랑설화마을의 화랑우주체험관은 신화랑풍류체험벨트와 조화를 이루면서 화랑설화로 차별화를 두고, 화랑과 관련된 영천 설화와 신라시대 천문관측 콘텐츠를 발굴해 조성했다.

 

주요 내용은 영천의 수호신 골화(骨火)와 삼국유사의 김유신 설화, 그리고 옛 영천의 골벌국(骨伐國)을 중심으로 해 팔공산의 중악석굴에서 수련하는 화랑 김유신 이야기와 화랑과 천문이 연관된 향가인 ‘세 명의 화랑과 혜성가’를 중심으로 한 고대 천문 이야기를 담았다.

 

중악석굴(극락굴, 화엄굴)

영천 화랑설화마을 테마의 출발점이자 김유신 장군의 수련처인 중악석굴로 알려진 팔공산 은해사 산내암자인 중암암 뒤 극락굴(화엄굴)을 찾았다.

 

중악석굴(극락굴, 화엄굴)

은해사 입구에서 중암암까지는 4.8km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반면 경산시 와촌면 갓바위 선본사에서는 2.6km 정도로 산행하기 좋은 길이다.

 

선본사

팔공산은 신라 5악의 하나인 중악이다. 신라의 5악은 가야의 명산이던 지리산이 남악, 백제의 명산 계룡산이 서악, 고구려의 명산 태백산이 북악, 신라의 명산 토함산이 동악이며 이들의 중앙부에 위치한 팔공산을 중악으로 삼은 것이다.

 

능성재 정상

통일신라시대에 이 5악에 중사(中祀)라는 나라의 큰제사를 올렸으며, 중악의 석굴을 팔공산에 있는 중암암 석굴로 비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아울러 중암암 석굴이 있는 팔공산 전체가 산세나 위치로 보거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대소 40여 개의 사찰로 보아 화랑도의 중요한 수련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33년 신미, 공의 나이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해,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며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적국이 무도해 짐승같이 우리의 영역을 소란케 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일개 미약한 신하로서 능력을 생각지 않고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하늘은 굽어 살펴 저를 도와주소서!”

 

4일이 지나자 갑자기 한 노인이 갈옷을 입고 와서 말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여기에서 혼자 거처하니 무슨 일인가?” 공이 대답했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나는 일정한 주거가 없고 인연 닿는 대로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이다.”라고 말했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재배하고 말하기를 “저는 신라인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에 와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했다. 노인은 묵묵히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거듭 열심히 간청했다.

 

노인은 그때서야 말했다. “그대가 어린 나이로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부디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 작별을 했다. 노인이 2리쯤 갔을 때 뒤쫓아가 그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흔적이 없고 오직 산 위에 오색찬란한 빛이 서려 있었다.

 

건복 34년(617)에 인접한 적국의 침략이 점점 긴박해지자, 공은 더욱 더 장한 뜻을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열박산[울주군 백운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고하며 중악에서와 같이 축원하고 맹세하면서 기도했다. 그 때 천관신이 빛을 비추며 보검에 영기를 쬐어 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밤에 허수와 각수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오자, 칼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삼국사기』 권 제41 「김유신열전」에 나오는 중악석굴에 관한 내용으로 소년 김유신이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과정을 잘 기술하고 있다.

 

중암암 대웅전

중악석굴은 1969년 5월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단석산으로 비정한 이래 거의 정설로 굳어졌으나 문경현 교수 등에 의해 중암암 일대라는 설이 제기됐다.

 

중암암 천왕문

문경현 경북대 명예교수는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중악(中嶽)이란, 3권으로 된 김유신열전의 원전(原典)인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이 김유신의 현손이었던 김장청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통일 이후의 개념으로 설사 통일이전에 중악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주분지의 중심을 벗어나 있는 단석산은 중악이 될 수 없다는 점과 단석산이 호국신의 주처(主處)인 삼산(三山)의 중앙에 위치하므로 중악이라 불렀다 하나 삼산 가운데 혈례(穴禮‧靑道)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으므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암암 용왕각

또 역사상 단석산을 중악이라 호칭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단석산이 곧 중악이라는 설은 단석산의 암석 형상을 김유신 전설과 결부시킨 후대의 전승을 수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악이란 다름 아닌 대구의 팔공산이며, 은해사의 암자인 중암암 뒤의 석굴이 곧 중악석굴이라고 주장했다.<문경현, 1983, 「所謂 中嶽石崛에 대하여」, (신라사연구, 경북대출판부)>

 

중암암 삼층석탑

은해사의 산내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中巖庵)에 이르는 길은 마치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자연바위를 거쳐야 한다. 이 바위 덕분에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중암암은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에 동화사를 창건한 진표와 영심을 이은 신라 법상종의 제3조인 심지왕사가 창건했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 중암암이 들어선 것 같다.

 

중암암 관음전

중암암은 가파른 산세와 험한 지형이지만 팔공산의 절경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속인의 눈에야 그저 경관의 빼어남만 보이겠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수행처일 것이다.

 

중암암 삼성각

그래서인지 창건 이래 별다른 변천 사실은 전하지 않으나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아있다. 또 주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1823년(순조 23) 태여(太如) 대사가 1834년(순조 34)에는 우일(宇一)과 유엽(有曄) 대사가 힘을 합쳐 중수했으며 지금의 가람은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중암암은 돌구멍을 통해 절을 드나들게 돼있고 현재는 사용을 안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삼인암, 극락굴, 삼층석탑 등 볼거리도 참 많다.

 

▶삼인암

삼인암

 

중암암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삼인암(三印巖)이다. 삼인암은 옛날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나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효험이 있는 약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으나 대를 잇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사정을 듣고 정성을 드리라고 하면서 현재 있는 삼인암의 장소를 알려주었다. 부인은 여기에서 정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어느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 사람이 뜻하는 바가 있어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리고 힘써 정진해 모든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장군수

장군수

천년을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화랑인 17세에 이곳 돌구멍절[중암암]에서 심신을 단련할 때 즐겨 마신 물이라는 연유에서 약수터 또는 장군수라고 불리고 있다. 길이 조금 험해서 곳곳에 밧줄을 매어놓은 길을 따라 50여m쯤 내려가면 큰 바위 아래에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기를 받기 위해서 무속인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촛불을 피우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있었다.

 

▶건들바위

옛적 어느 날 밤부터 바위에서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크게 놀란 당시 주지스님이 밖으로 나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위가 곧 암자를 덮칠 듯이 움직이고 있기에 부처님께 기원했더니 그 바위가 제자리에서 훨씬 위쪽으로 옮겨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가을철 단풍이 일품이다.

 

▶만년송

만년송

중암암에서 서쪽으로 약 200m쯤 가면 백리는 하늘을 향해 바위틈에 붙어있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소나무가 있는데 이 산천의 경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모습이 가히 일품이다.

 

▶극락굴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화엄경론을 집필할 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이 굴에서 화엄경 약찬게를 외우다 화엄삼매에 들어 불빛을 발산했는데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지고 그 소리에 의문이 풀리어 화엄론을 완성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그 후 조선 말기 영파스님이 화엄강백으로 유명했는데 이 굴에서 어느 여름날 정진하다가 삼매에 들어가는 바람에 학인들 강의시간도 놓치고 밤이 늦도록 스님이 오지 않아 큰절 대중들이 모두 찾으려고 나와 보니 스님이 이 굴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도인 큰스님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스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근세에 와서 이 도량에서 공부를 하거나 어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청정히 게를 지키고 기도하면 잘 이루어진다고 해 전국 각지에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이 극락굴은 몸이 아무리 굵어도 통과를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세 번을 돌아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크고 아름다운 널따란 바위와 보검으로 내려친 듯이 쫙 갈라져 있는 두 동강 난 여러 개의 바위가 먼 옛날 삼국을 호령하던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일거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직까지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삼국유사』 「기이(紀異) 김유신」조에 나오는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가 남아있는 신라의 삼산이었던 골화성(금강산성)의 존재로 봐서도 이곳이 중악석굴일 가능성이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백흥암

한편 김유신 장군의 고향인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 뒷산인 사자산 중턱에도 중악석굴과 장수굴이라 알려진 곳이 있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인종태실 가는 길(800m)

영천시청에서 5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에서 803번으로 환승, 선본사를 출발해 능성재 정상에 들렀다가 중암암에 도착해 중악석굴 일대를 답사하고 은해사 입구로 나온 후 다시 하양을 거쳐 영천으로 돌아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점은 있지만 종주를 할 수 있어서 코스를 잡기에 수월하다.

 

조만간 김유신과 백석, 호국삼신, 황보능장 장군의 설화가 전하는 골화성(금강산성)을 찬찬히 걸으면서 천 년 전의 운치를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