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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rcola 2020. 12. 30. 17:34

1].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신 공자님.

 

수천년동안 이어지는 유교의 공자님이나 가톨릭의 예수님 숭배를 볼때 두 분은 최고신 하느님과 다른 또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셨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가톨릭은 가톨릭측이 더 잘 알것입니다. 유교는 조상신의 위치에서 승천하시어 계절을 주관하시는 오제(五帝)께서 최고신이신 하느님 하위신의 형태로 존재하시는 다신교적 특성이 있어왔습니다. 오제 하느님과 같은 유교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전통을 볼 때, 수천년간 제사의 대상이신 공자님은, 공자님을 지상에 내려보내신 균천(鈞天, 중앙의 天이시며 하느님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하느님)의 곁으로 혼이 승천하여 머무시는게 어색하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유교의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이후 균천(鈞天)께서 유일하게 지상에 내려보내신 성자이신 공자님.

균천(鈞天)이란 하늘의 중앙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가장 높은 하느님(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이시며, 우주만물을 주재하시며, 인간을 낳으시고(天生蒸民), 상제(上帝)나 오제(五帝)같은 하느님 하위신 개념도 모두 포용하시고 주재하시며, 자연천(天).인격천(天)의 개념도 모두 포용하시는 최고의 하느님(天)을 균천(鈞天)이라고 하느님(天)의 피조물이자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들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공자님의 시호와 공자 성적도(圖).

 

1.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 중국의 경우 적용되었던 것 같음). 한국에서는 이 내용이 일반화 되지 않아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 필자도 성균관의 서술대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추후 개정이 이루어지기를 빌어보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문선왕이라해도 중국 황제들 이전에 태어나신 성인임금이신 요순우탕과 같은 성인임금의 칭호라, 한국에서 추존되는 작업이 없어도 황제.제후들이 위대한 스승(先師).성인임금(文宣王)으로 모셔왔기 때문에 그 성스러움에 대한 숭배는 차감되지 않습니다. 필자는 앞으로 문선제의 칭호도 문선왕과 함께 사용할 예정입니다.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启圣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启圣王夫人)이십니다.수천년전에는 공자님이나 예수님같은 하늘이 내린 성인(聖仁).하느님의 독생자 및, 한국의 고구려 (고)주몽임금, 신라 (박)혁거세같은 건국시조들은 하느님기준으로 보아야합니다. 초월적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만든 성인.건국시조들입니다. 한국의 조상중 시조로 받들어지는 분들도 이런 개념으로 시조가 되신분들 많습니다. 후세 피조물인 현대인 기준으로 보니까 정식 혼인을 거치지 않아, 야합.혼외자라고 역사개념없이 판단하면 않됩니다. 중국은 왕족.사대부의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서자차별도 한국과는 다릅니다. 황제나 왕의 자손은 서자라고 않습니다. 한국도 고려시대는 별로 없다가 조선시대 초기이후 사대부들의 서자에 대해 양인첩과 천인첩을 구분하여 벼슬을 제한하다가, 갑오개혁때 서얼차별이 철폐되고, 해방이후에는 더더욱 법으로 없습니다. 성인이나 건국시조들은 하느님기준으로 보아야지 인간의 기준으로 후세에 재단하기 어렵습니다.유교문화로 한자쓰는 한국인들은 건국시조 아니라도 그 시조들이 출생이 묘한 초월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후대 시조들은 그대신 하느님의 개입이란 신성성이 없습니다. 공자님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초월적 聖人이십니다.

그 고대시대는 그렇게 하느님의 선택받은 소수의 성인.건국시조가 성인이 되고 왕으로 인정되던 시대입니다. 그 이후는 하느님 개입이 이루어진 성인.건국시조들이 거의 없습니다.    

 

2. 중국인문학에 나타난 시호: 니부(尼父),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포존후(褒尊侯), 문성니부(文圣尼父), 추국공(邹国公), 선사니부(先师尼父), 선사(先师), 선성(先圣), 선부(宣父), 태사(太师), 륭도공(隆道公), 문선왕(文宣王), 현성문선왕(玄圣文宣王), 지성문선왕(至圣文宣王), 문선제(文宣帝),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 지성선사(至圣先师),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圣文宣先师), 지성선사(至圣先师), 대성지성선사(大成至圣先师)

 

. 출처: 인문전략연구 디지털인문학:중국인문학/한국연구재단

 

3. 초병정의 공자성적도.

 

초병정(焦秉贞)의 공자성적도(孔子圣迹图) 4폭

 

제목: 초병정(焦秉贞)의 공자성적도(孔子圣迹图) 4폭 〈어머니가 공자가 낳을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노랫소리를 듣다(钧天降圣)〉
관련명칭: 균천강성(钧天降圣)
창작년도: 청대(清代)
저자(화가): 초병정(焦秉贞)
소장: 미국 세인트루이스미술관
유형: 중국화
개요:
〈어머니가 공자가 낳을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노랫소리를 듣다(钧天降圣)〉는 청대(清代) 초병정(焦秉贞)의 《공자성적도(孔子圣迹图)》의 네 번째 그림이다.
내용:
기원전 551년, 노(鲁) 양공 21년(襄公二十一年) 음력 9월 28일, 공자를 낳을 때 어머니 안징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악과 말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하늘이 감동하여 성자를 낳게 하시고 즐거운 음악을 내리시네(天感生圣子,故降以和乐之音。)’하는 말소리와 함께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 출처: 인문전략연구 디지털인문학:중국인문학/한국연구재단

 

4.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공자성적도.

공자성적도균천강성

 

국적 > 시대재질크기용도 · 기능소장처유물번호

한국 > 조선()
지()
가로 50.8 세로 30
문화예술 > 서화 > 회화 > 일반회화()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성균관대(성균관대) 000661-000

공자성적도란 공자일생의 행적을 도해한 그림을 말한다. 공자성적도는 처음에는 사마천()의 <사기()>등을 근거로 하여 단편적으로 어떤 한 사건만을 묘사하다가, 원대에 이르러 공자의 행적 전반을 일종의 시리즈로 제작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명·청대에 이르면 질과 양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여 다량의 성적도가 필사본·인쇄본 등으로 제작되었으며, 우리나라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여러 유형의 성적도가 제작·보급되었다.

본 박물관의 성적도 6점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성적도 55점과 원래는 한 화첩으로 제작된 본이다.

그런데 화첩본의 말미에 붙어있는 발문()을 보면, 1741년 병조참판이던 이익정()이 연행시() 가져온 성적도를 본으로 삼아 모사하였으며, 어린 세자가 독서 틈틈이 펴보아가며 성인을 마주 대하듯 본받고 체득한다면 그 의의가 더할 나위 없이 크다는 논지가 적혀있다.

이중 <균천강성()>이란 공자가 탄생할 때 모친인 안징재()의 방에서 균천의 풍류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하늘이 성자가 탄생함에 감동하여 화락한 음악으로서 위로하였다는 이야기를 도해한 것이다.

. 출처:공자성적도균천강성(e뮤지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타난 공자성적도. 그림은 분량이 많아 제외하겠습니다. 

 

공자성적도

[  ]

이칭별칭유형시대

성적도(), 공부자성적도(), 성적지도()
개념용어
조선

 

정의

중국 유학의 시조인 공자의 행적을 여러 장면으로 도해한 그림. 성적도·공부자성적도·성적지도

개설

공자는 중국 고대의 사상가로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확립된 유학사상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정치와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일생과 행적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뽑아 도해한 일종의 고사인물도()이며, 성적도()·공부자성적도()·성적지도()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성적도의 원천 자료가 되는 최초의 공자전()은 전한()의 사마천()이 쓴 『사기()』의 「공자세가()」이며, 같은 책에 실린 「중니제자열전()」도 보조자료로 활용되었다. 초기에는 공자와 노자()의 만남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단편적으로 그려지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생애의 주요 사건과 일화를 수십 폭에 도해한 공자성적도가 만들어졌다.

중국의 공자성적도

공자성적도에 앞서 공자영정()이 제작되었음이 문헌기록과 현존 유물로 확인된다. 동진()의 고개지()와 당()의 염립본()이 공자상()을 그렸다고 하며, 당대 오도자()의 석각화상탁본()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일생을 여러 장면에 나누어 도해한 공자성적도는 원대() 왕진붕(, 1280~1329)에 의해 처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명대()부터 본격적으로 도상화()된 성적도가 제작되었고, 화가가 직접 그린 육필본 외에도 목각본, 석각본이 등장했다. 1444년 장해()는 29장면을 선정해 시각화하고, 각 장면에 『사기』의 내용에서 추출한 설명문과 찬시()를 곁들였다. 1497년에도 하순()에 의해 하정서본() 혹은 홍치본으로 불리는 성적도가 제작되었는데, 장해본에 9장면을 추가한 38장면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홍치본 계통의 사본()으로 1506년에 쓴 발문()이 있는 등문질()의 성적도가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홍치본을 계승한 ‘선성소상()’이라는 제목의 성적도가 1598년에 제작되었다.

한편 동시기 최고의 인물화가로 꼽히는 구영(, 약 1509~1551)이 그림을 그리고, 문인 서화가 문징명(, 1470~1559)이 제사()를 쓴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두 권의 화첩에 총 39장면이 실려 있는데, 대다수 명대 성적도와 달리 일부 장면이 새로운 장면으로 대체된 상태이다. 화첩의 말미에는 각각 1538년과 1540년에 쓴 문징명과 허초()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곡부현사()』권30 ‘통편()’에 의하면, 1592년 하출광()이 성적도를 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 산동성() 곡부()의 공자묘()에 마멸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제1석에 새긴 “성적지도()”라는 표제에 이어 제3석~제8석에 관련 기문()이 새겨져 있고 나머지 제20석까지 총 112장면의 성적도가 새겨져 있다. 이외에 만력연간()에는 석각본에서 유래한 목각본도 생겨났다.

청대()의 공자성적도로는 1826년 고원()이 간행한 『성묘사전도고()』에 실은 작품이 있다. 고원은 당시 전승되는 본들을 널리 수집해 비교한 다음 오류를 바로잡았고, 기존에 산발적으로 쓰인 각 장면의 제목과 설명문, 찬시 등을 그림과 조합하였다. 1874년에도 만력본의 중간본()으로 보이는 성적도가 간행되었는데, 후에 대만()의 영역() 성적도의 저본으로 활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공자성적도는 원대 이후 내용이 증감되면서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의 공자성적도

우리나라에 공자와 제자들의 초상화가 유입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수십 폭으로 유형화된 사례는 조선시대에야 알려진 듯하다. 더욱이 현존하는 유물은 모두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육필본과 목각본, 인쇄본으로 나뉜다. 그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은 원대 왕진붕의 성적도를 모본으로 삼아 1700년(숙종 26) 화원 김진여()가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10폭의 『공자성적도』(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이다. 또 다른 육필본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 『성적도』55폭과 성균관대학교박물관의 『성적도』6폭이 있다. 이들 작품은 1741년(영조 17) 이익정()이 사행 길에 구해온 공자성적도를 화원이 베껴 그린 모사본()의 일부로 생각된다. 그리고 1742년 1월에 완성된 『공자성적도』는 총 104폭이었고, 원본은 청대 여성부()의 그림을 목판에 새겨 찍은 채색목각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 목각본으로 화성 궐리사()의 104폭짜리 성적도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의 『공부자성적지도()』 등이 있고, 20세기 이후에 제작된 인쇄본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등의 소장품으로 전하고 있다.

공자성적도의 내용

공자성적도의 내용은 공자의 탄생에 얽힌 일화를 비롯해 공자의 인품과 외모와 관련되는 일화, 공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장면, 공자가 성인으로서 혜안을 드러낸 일화, 유학자이자 교육자로서 공자의 풍모를 보여주는 장면 등으로 구분된다. 전체 장면의 수나 구성, 각 장면의 제목 등은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실상 원대 왕진붕본에 이어 38장면으로 제작한 명대 하정서본이 도상()의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하출광본에 이르면 112장면으로 증가하기에 이른다.

하정서본에 실린 38장면의 공자성적도는 선성소상()·니산치도()·기린옥서()·이룡오로()·균천강성()·조두예용()·직사위리()·명명영황()·직사승전()·학금사양()·문례노담()·재제문소()·안영저봉()·퇴학시례(退)·심행동거()·협곡회제()·귀전사과()·예휴삼도()·의주정묘()·인번거로()·광인해위()·추차동거()·송인벌목()·미복과송()·적위격경()·서하반가(西)·진정준집()·영공문진()·자로문진()·재진절량()·자서저봉(西)·작가구릉()·행단예악()·궤수적홍()·서수획린(西)·몽전양영()·치임별귀()·한고사로() 등이다.

 

.출처: 공자성적도 [孔子聖蹟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공자님이 하느님(天)과 연계되심을 나타내는 내용들. 유교 경전 시경, 논어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1.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느님의 인간창조.

  

하늘이 만백성을 낳으시니(天生蒸民).

. 출처: 詩經 大雅 蒸民.

 

. 필자 주 1). 공자님은 직접 지으시지 않은 이전부터의 시에 대해 편찬작업을 거치시며, 공자님에게 부여되신 천명(天命)에 의해 시경(詩經)에 천생증민(天生蒸民, 하늘이 만백성을 낳으심)이라는 시를 넣으시고, 하느님(天)의 우주주재 사실을 후세 사람들에게 계승시키신 하느님이 보내신 성자이십니다. 많은 시가 빠져있지만, 예의를 가르칠 수 있는것을 취하시면서 공자님이 편찬한 시경(詩經)입니다. 

 

2.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으니, 환퇴인들 감히 나를 어찌하랴?"(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 출처: 논어 述而.

 

. 필자 주 2). 은주시대의 상제(上帝).하느님(天)숭배시대를 이어받으셔서, 춘추전국시대에도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던(특혜받은 은나라 왕족의 후예) 계급출신답게 남들은 말하기 어려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德을 내비치시는 모습입니다.

 

3.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나는 누구를 속일까? 하늘을 속일까? 吾誰欺 欺天乎.

. 출처: 논어 子罕.

 

공자께서 병이 깊으셨다. 자로가 제자들을 가신(家臣)의 예법으로 시종케 하였다. 병환이 차도가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래였구나, 由(자로)의 속임이여! 가신이 없음에도 가신을 만들었다면 나는 누구를 속일까? 하늘을 속이랴?.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 필자 주 3). 균천(鈞天)의 선택으로 태어나신 성자답게 최고신이신 하느님(天)의 주재하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하느님을 속일 수 없는 성스러운 특수한 운명을 표출하고 계십니다.

 

4.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 아아! 하늘(하느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顔淵死 子曰 天喪予 天喪予.

. 출처: 논어 先進.

 

. 필자 주 4). 얼마나 아끼시고 충격받으셨으면, 통곡하시겠습니까? 인간의 죽음은 결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공자님이 막을 수 없는 안연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하시며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공자님 처지를 비유하신것으로 판단됩니다. 안연이란 제자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비통해 하신 점은 평소의 공자님의 언행에서 드러납니다. 논어 공야장에 공자님과 자공이 안회같지 못하다고 안회를 아끼시는 스승의 관점이 나옵니다.  

 

공자가 자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와 안회는 누가 더 나으냐?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같지 않다. 나와 너는 그만 같지 못하다."

子 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 弗如也. .

. 출처: 논어 公冶長. 


5.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사람도 탓하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배워 위에 통달한다. 나를 알아주는분은 하늘뿐이리라.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 출처: 논어 問.

 

. 필자 주 5). 나를 알아주는분은 하늘뿐이리라(知我者其天乎). 하느님이 내려보내신 성자인 공자님의  처지가 그 당시에는 만사형통이 아니고 갖은 고난을 겪는 과정도 있었기 때문에, 속세에서 인정받지 못하시는 상황이 많아도, 하느님(鈞天)만은 공자님의 성스러운 활동을 유일하게 지켜보시는 의식을 가지고 계신것이라 판단합니다. 

 

6. 왕손가가 물었다.안방 신주에 아첨함보다 차라리 부엌신을 모셔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소. 하늘에 죄를 지으면 기도할곳이 없는 법이오.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 출처: 논어 팔일(八佾).

 

. 필자 주 6).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

왕손가는 위나라 영공의 중신으로 군사권을 장악한 실력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공자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할 의사가 있음을 눈치채고 공자님에게 넌지시 암시를 주었다 합니다. 안방신주에 아첨하느니보다, 부엌신에 아첨하라고 한말은 무엇입니까? 즉 안방신주에 해당하는 영공에 아첨하느니 실력자인 자기에게 아첨하라고 암시한 것입니다. 

 

이에 공자님은 하늘에 죄를 지으면 안방신주고, 부엌신이고 기도를 올릴 자리가 없어진다고 답하셨습니다. 즉 우주만물의 최고 지배자이신 하느님(天)이 여러 神중에서, 가장 높듯이, 지상의 현실 세상에서는 임금이 가장 높으므로, 天理를 따르듯이, 지상에서는 임금의 권위가 가장 높음을 은연중에 내비치신 것입니다.

 

7. 공자님의 知天命.

 

공자는 만년에 〈위정편()〉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

. 출처: 지천명  [知天命] (두산백과).

 

유교에서는 최고 하느님이신 균천(鈞天)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께서 나이 50에 천명[命,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주재하시는 하느님(天)의 명령이나 원리를 깨우치신, 선택받으신 공자님께서 이 세상에 전파하신 천명, 인의예지신, 삼강오륜(공맹의 가르침에서 후세 유가들이 더욱 구체화시킴)등은 이후 동아시아 유교사회에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보내신 유일한 성자이신 공자님의 天命은 이후 맹자() 이루(婁) 편에서 교만해진 피조물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하늘을 따르는 사람은 존재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사람은 망한다(亡).

 

8. 하느님(天)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에 대해서도 하느님(天)은 굳이 구체적으로 일상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나이 50에 천명을 아셨다고 밝히게 하시고(知天命), 공자님에게 덕(德)을 부여하신 점만 밝히게 하시고, 모든것을 공자님의 재량에 맡기셨습니다. 공자님께서는 하늘은 말이 없다고 경험하셨습니다. 이 말은 공자님의 일상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고 공자님의 깨우침에 모든걸 맡기신 것입니다. 유일하게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께서 가르치시는 만큼의 사회가 하느님의 天命이셨던 것입니다. 더 그럴듯하다고, 후세에 여러 主義者들이 나와서 공자님의 가르침을 변형시켜 유교에서 독립해 세(勢)를 얻어 집단을 형성해도 그 주장은 하느님(天)과 공자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유교경전과 유교교육기관(성균관대)의 정통성을 기본으로 하여야 인정됩니다.  

 

인간에게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하느님(天)의 우주만물 지배방식에 대해, 하느님(天)이 유일하게 성자로 내려보내신 공자님은 이렇게 하느님(天)의 섭리를 전하셨습니다. 50에 천명(天命)을 아셨다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또한 하느님이 공자님에게 부여하신 덕(德)을 분명히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방식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천(天, 하느님)은 인간에게 말은 없으시지만, 하느님(天)이 공자님에게 부여하신 덕(德)은 공자님 스스로 명확하게 주장하시며, 만물을 낳고 기르는 주재자인 천(天, 하느님)이 갖고 있는 작용력을 지천명(知天命)과 덕(德)에서 확실히 밝히신 것입니다. 유교경전 시경은 분명하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하늘의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공자님이전에 정해진 천생증민(天生蒸民)의 시경말씀, 공자님의 지천명(知天命), 하늘이 나에게 덕을 부여하셨다는 공자님의 주장(天生德於予)들은 말없이 우주만물을 주재하시지만, 체험하면서 천명(天命)을 느끼게 하여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느님(天)의 방식입니다. 

 

다음은 말없이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하느님(天)에 대한 공자님의 가르침입니다.

 

- 다 음 - 

 

 공자께서 "나는 말을 아니하고자 하노라". 자공이 "선생님께서 말씀을 아니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으로 말하고 전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바뀌고, 백물(百物,만물)이 자라지만, 하늘이 무슨말을 하더냐?'.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출처: 논어 陽貨.

 

. 필자 주 8). 하느님(天)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시어 내려보내신 성자이신 공자님께서는 말을 통하여 배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없는 섭리를, 체험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공자님 자신의 숭고한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신것입니다. 그 자신은 하느님에게 선택받으신 분이시지만, 말없는 하느님의 섭리를 굳이 말로 가르치려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체험하고 느끼면서, 시경(詩經)의 천생증민(天生蒸民), 공자님의 지천명(知天命), 공자님에게 부여되신 덕(德)을 우리 동아시아 인들은 유교교육으로 배워왔습니다. 

 

9. 습관이나 체험의 중요성에 대해 공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천성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으로 멀어진다.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 출처: 논어 陽貨.

 

. 필자 주 9). 하느님께서는 만백성을 창조하시고(天生蒸民),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만의 여러가지 천성을 부여하셨는데, 이후 공자님을 성자로 내려보내시고, 공자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통하여, 학습하고 체험하여 하느님이 부여하신 천성을 계발하도록 공자님을 통하여 말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공자님은 합리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학습과 체험으로 깨닫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天)의 섭리전달은 이미 공자님을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공자님을 통하여 하느님(天)의 섭리를 배우고 순응해야지, 하늘을 거역하거나 공자님의 가르침에 거역하여, 창조신을 부정하는 부처  Monkey나, 하느님보다 높다는 불교계열 일본 천황 침팬치류의 주장에 익숙해진다면,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침팬치류의 경험을 쌓게 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이 내려보내신 공자님을 부정하는 Monkey로 살아가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하느님(天)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기품을 멀리하고, 부처 Monkey처럼 살게 됩니다.

 

유교의 최고 하느님이신 천(天, 하느님, 태극과 연계)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 인간에게 베푸시려 한 하느님의 기품은 유일하게 선택하신 공자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공자님의 제자들, 맹자, 후세의 중국 황제, 제후, 사대부, 유학자들을 통하여 이미 동아시아의 세계종교로 인간들에게 보편화되었습니다. 하느님(天)께서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모두 부여하셨는데, 악에 너무 치우치면 악귀.악령이 되어 유교사회에서 배척됩니다. 하느님(天)께서 선택하신 성자이신 공자님을 통하여 인간세계에 베푸시려 한 하느님의 마음(기품)은, 공자님의 가르침만을 통하여 모든 만민이 인정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쳤습니다. 하느님의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거나, 성자이신 공자님을 매개자로 하여 보편화시킨 유교교육에서 벗어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에 대항하는 Chimpanzee계열 부처 Monkey(인도 창조신 브라만에 항거, 브라만을 내리깔고 덤빔)類.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다 원자탄 맞고 항복한 성씨없는 賤民.부처Monkey계열 일본 점쇠(일본천황)와 점쇠가 강점기에 한국에 만든 마당쇠 賤民.부처Monkey경성제대(해방이후 서울대로 이어짐)와 그 추종자들의 대중언론 도전은 심각하지만, 이미 패전국이 되어 법적 자격은 없으며 패전국 奴隸.賤民이자 침팬치계열 부처 Monkey類밖에 되지 않습니다. 亡.

 

4].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王: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과 같은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孔子聖蹟圖에 보면 균천강성(鈞天降聖)의 그림이 있습니다. 공자가 탄생할 때 모친인 안징재(安徵在)의 방에서 균천의 풍류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하늘이 성자가 탄생함에 감동하여 화락한 음악으로서 위로하였다는 이야기를 도해한 것입니다. 균천(鈞天)이란 하늘의 중앙인데, 최고신이신 하느님(天)이 직접 내려보내신 성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天)의 하위신이신 오제(五帝:조상신 위치에서 승천하시어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하위신이 되신 또다른 하느님의 모습)께서 내려보내신 후손개념이라기 보다는 왕조가 바뀌어도 영원토록 인류에게 숭배되어야 할 성자의 탄생에 감동하신 균천(鈞天)께서 음악으로 위로하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세에서 공자님의 형편이 가난했다느니, 가난해서 천한일도 하셨다느니, 나이많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논란의 대상이 된다느니 하는 속물적인 시비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이 모든것을 초월하실 수 있는 최고 하느님(鈞天:五帝를 비롯한 여러 하느님중에서도 중앙에 계시고 존경받으시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셨기 때문에, 후대의 황제.제후.사대부.만백성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성인이시자 스승으로 추존되신 것입니다.

공자님은 원래부터 왕이 아니시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성자로 탄생하시고, 하느님(天)의 기품을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가르치시며 인의예지신, 삼강오륜의 덕목을 있게 하신 성인으로 사시다가 사후에 성인임금.성인스승(大成至聖文宣王.至聖先師)의 공식 칭호를 추존받으신 분이십니다. 공자님은 하느님(鈞天)에게 덕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은나라왕족의 후손이시나 가난하여, 겨우 벼슬할 수 있는 士계급에서 시작하여, 만인의 스승이 되는 과정을 겪으신 위대한 성인이시자 스승 공자님. 제왕과 만백성의 스승 공자님! 공자님의 아버지가 그 당시 너무 나이가 많아 음양오행론에 비추어 볼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지난것으로도 생각되어 생물학적인 야합으로도 서술된 기록도 있으나 성인임금이시자 위대한 스승이라는 존경을 더 중요시하며 객관적으로 기록. 인류는 남자가 경제력이나 능력이 있으면, 어린여자를 얻어 종족을 보존하려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마음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될게 전혀 없습니다. 공자님 어머니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 같은 士계급끼리의 결혼. 딸만 낳은 아버지가 정상적인 남자로 대를 잇기 위해 늦은 나이에 배필로 얻은 공자님 어머니. 그 당시 중국은 왕이나 士大夫계층이 일부 다처제로 대를 잇는게 아주 자연스러운 사회였습니다.하느님, 성인이나 역사적 인물의 경우, 타국의 침략을 받아 지배자가 바뀔경우 격하되는 경우가 많은데, 세계사와 국사, 유교경전, 가톨릭경전, 국내법.국제법, 그리고 정사(正史)로 판단해야 합니다. 혹시 루머로 대중언론에서 힘을 얻은 세력들이 하느님.성인.황제(요순우탕문무주공 포함)들에 대해 오도할까봐 걱정되어서 덧붙입니다. 공자님이 사시던 춘추전국시대에 무당이라면 은나라시대 최고제사장인 왕(최고 무당)의 제사가 일반에게도 널리 퍼져, 왕족.사대부계층의 집에서 제사를 치르게 되어, 전부 이전왕조 최고 무당같이 제사신분이 높아져서 그걸보고 억측하여 야담을 만들수 있겠습니다. 요순우탕문무주공 및 공자님, 기자조선시대의 왕, 삼한의 왕, 부여 금와왕, 고구려 (고)주몽왕, 신라 (박)혁거세, 신라 남해왕같은 고대의 최고 제사장(최고 무당이자 왕)과 관련되어, 나중의 개념으로 왜곡도 가능하겠다고 우려해봅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서자차별이 없었습니다. 한국과는 개념이 달라왔습니다. 왕의 경우 그 자손은 누구나 왕족이었는데, 양반의 경우 고려시대와 달리 서자가 적자보다 상당히 차별을 받는게 조선시대 초기이후의 풍속이었습니다. 한국도 갑오개혁이후로는 서자차별이 없어졌고, 해방이후에는 더더욱 법률적으로 서자차별이 없습니다. 양반이 낳은 서얼에 대한 한국의 전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 음 -

고려시대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서얼의 등용에 제한을 두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서얼은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양반관료의 등용시험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다. 때로 제한된 범위에서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관직 높낮이나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한계가 있었다. 이를 한품서용()이라고 하는데, 문, 무 2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3품, 천인 첩 자손은 정5품까지, 6품 이상 관리의 양인 첩 자손은 정4품, 천인 첩 자손은 정6품까지,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의 양인 첩 자손은 정5품, 천인 첩 자손은 정7품까지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서얼들이 신분 상승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자 조선 명종 초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얼 허통()이 되어 양인 첩의 경우에는 손자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유학()이라 부를 수 없도록 하였고 합격문서에 서얼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다. 16세기 말에는 이이  최명길() 등이 서얼 허통을 주장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777년 정조가 서얼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넓힌 ‘정유절목’을 발표하고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의 학식 있는 서얼 출신들을 임명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차별완화 조치가 시행되었으나 폐습의 뿌리를 없애지 못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 출처: 서얼 [庶孼] (두산백과)

 

다음은 중국에 서자차별이 없었다는 자료입니다. 

 

- 다 음 -

 

중국의 황제는 왕후가 낳은 적자든 후궁이 낳은 서자든 상관없이 작호를 주었다. 그들은 열 살 전후에 황제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만일 황실에 마땅한 적자가 없다면 황위는 서자에게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중국인은 많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내각태학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이들의 과반수가 서자였다...

 

. 출처:  사우의 네이버 포스트. 2018.12.27.  시리즈[책미리보기] 상속의 역사

<상속의 역사> 중국에 서자 차별이 없었던 이유

 상속의 역사/저자:백승종/출판:사우/2018.12.10

 

 

중국은 상고시대부터 지배계층(왕족.士大夫 계층)이 일부다처제로 대를 잇는게 보편화되었고, 한국도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처럼, 조선시대를 보면 왕족.양반계층이 일부다처제를 널리 수용하였는데, 일부 다처제는 구대륙인 아시아의 지배계급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구 대륙인 유럽의 경우 일부다처제보다는 일부일처제가 특징으로 이때문에 이혼이 발생하였던 것 같습니다. 유교문화권은 이혼이라기보다는 여자쪽에 흠결이 있을경우, 여자가 소박을 맞았습니다. 모두 현대이전 인류 전통으로 여권이 약해서 그러했는데, 이는 인류특성상 그대로 역사로 이어지고, 현대기준으로 비판해도 정사(正史)를 바꿀수는 없습니다. 유교문화권은 지배층의 경우, 士大夫가 두번째, 세번째 부인을 얻을때, 혼례를 치르지 않고 사실혼의 상태로 살던게 한국의 일반적풍습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서자차별이 없던 중국의 경우에, 지배층(사대부)이 혼례를 치르지 않아서 문제될건 없었습니다. 

 

문화인류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전문학자의 표본조사에서 인류의 70%가 일부다처제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다처제

복혼제의 한 형태로서의 일부다처제(polygyny)는 머독의 조사에 의하면 그의 표본 중 약 70% 이상의 사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 출처: 일부다처제 (문화인류학, 2011. 9. 15., 한상복, 이문웅, 김광억)

 

 구 대륙인 아시아.아프리카의 경우 유교와 이슬람.고대 기독교의 성경에서 지배계급의 일부다처제가 흔하게 보입니다. 기독일보(Jul 11. 2020) 기사에 보면 기독교의 전통에서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혼용되어 나타납니다. 다만, 유럽의 경우 로마법에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여 유럽중심 기독교사회는 일부일처제가  보편화된것으로 보여집니다.

 

로마의 혼인제도는...일부일처제를 채택하였으며... .출처: 조은래(부산 외국어대학교)/한국법학회/법학연구/법학연구 제 35집/2009.08

 

다시 필자의 글로 돌아갑니다. 유교나 가톨릭은 여권이 강한 전통이 아니어왔습니다. 유교문화는 왕족.士大夫계급에서 일부 다처제(평민이하는 巨富가 아니면 일부다처제가 어려웠음)가 있었고, 여자에 흠결이 있을 경우, 여자가 소박을 맞아야 했습니다. 가톨릭은 창세기 속 하느님께서 아담 갈비뼈 이브를 만든 것과 관련, 여권이 약해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에는 이런 개념들이 완화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공자님의 출생에 대한 자료입니다. 

 

- 다 음 -

 

공자의 아버지는 이름이 공흘이고, 자가 숙량이었는데, 보통 숙량흘이라 불렀다. 숙량흘은 무사 출신으로, 키가 10척(2미터정도 추정)이나 되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다고 한다. 첫번째 부인에게서는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두번째 부인에게서는 장애인인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숙량흘은 똑똑한 아들을 하나 갖고 싶어, 동료무사인 안양에게 부탁하여 그 막내딸인 안징재를 얻었다. 그때 숙량흘의 나이는 60을 넘었고(66세였다는 설이 있음), 안징재의 나이는 16세였다. 두 사람은 정식 혼인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공자이다. 

. 출처: 공자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논어 인문학. 전용주 지음/문예출판사/2018.3.30/

 

다시 필자의 글로 돌아갑니다.

유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하늘의 기품과 땅의 형상을 가장 고귀하게 부여받은 중간적 존재.

하느님(天)을 최고신으로 하여, 상고시대숭배 五帝(하늘로승천,계절주관)를 하위신으로 모시며, 오제이전 초월적 자연天(태극과연계)이 함께 어우러져 형이상학적 天숭배하던 공자 이전의 始原유교. 요순우탕등 성인임금도숭배. 불교는 나약한 부처Monkey가 창조신보다높다며 인도창조신 브라만 내리깔고 항거.

고조선의 기자조선은 은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지배층이 공자님이전의 始原유교문화에서 사용하던 한문성씨를 사용. 이후 기자조선 지배층은 삼한등의 지배층으로 이어짐. 삼한은 은나라 왕족 기자조선의 후손 기준왕[위만에 멸망당하여 피신중 서씨를 사용.이후 삼한의 한씨사용도 있게 한 시조. 그 당시는 중국 상고시대의 영향으로 지명등을 따서 성씨를 만들어내는 시대였습니다]의 후손들이 건국한 나라입니다. 한나라때 공자님의 유가사상이 국교로 채택되어 이후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의 세계종교로 성립하기 이전에는 고대 한국의 삼한이, 은.주시대의 始原유교를 이어받은 기자조선 기준왕의 후손답게 始原유교의 제천의식인 상달제.시월제, 단오절을 거행하였습니다. 삼한의 영토에서 가야나 백제.신라등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 나라들도 역시 고대 유교국가들입니다.

한국 세계사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로 볼 때, 한국은 한나라 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서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국가로 이어짐.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계승하여 유교교육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고려.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공자님이후 한나라때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는 하느님(天),五帝(조상신에서 승천,하느님의 하위신이 되심),지신,산천신,오사(五祀, 조상신계열).공자숭배.부엌신(火관련)도 제사하는 다신교.불교는 Chimpanzee,부처(인도창조신 브라만에항거 후발Monkey부처가 창조신내리깔고덤빔)계열로,성씨없는賤民점쇠(점쇠가 한국에 마당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를 천황옹립,하느님보다높다하다 원자탄패전.일본 항복후, 미군정때 조선성명복구령,전국민이 조선 유교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해야 하는 행정법.관습법 유교한국. 5,000만이 유교도임.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불교,기독교는 한국영토에 주권없음.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5]. 공자님(하느님이 내려보내신 선택받은 성인)이나 예수님(하느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심)이나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세속의 기준으로 여러가지 루머로 판단하면 않됩니다.

 

유교는 수천년에 걸쳐 제천의식(天에 대한 제사), 지신제사, 산천신 제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흘러 여자분들이 수천년동안 부엌신(火)에게 간단한 제사를 지내온것을 보면 부엌신도 신의 위치에서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반열은 아니지만 문중별.가족별로 조상제사도 행하고 있습니다. 오제(五帝)처럼 조상신계열에서 하늘로 승천하시어 계절을 다스리시는 하늘天의 일부가 되신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조상신이 되기는 어렵고 몇천년이 지나도 제사하는 시조정도로 머물것입니다. 또한 대부분 가문의 조상제사에서도 고조부모.증조부모.조부모.부모만 제사지내기 때문에 단지 조상제사로 그치며, 조상신이나 시조신은 될 수 없습니다. 유교는 하느님(天)을 최고신으로 하여 오제,지신.산천신,부엌신(火관련)등 하위신을 모시는 다신교전통입니다. 그러면 몇천년이 지나도 제사받으시는 공자님은 신(神)이실까요? 유교는 혼이 하늘로 승천하는데, 하느님이 내려보내신 성자이시기 때문에 그 혼은, 하느님(제천의식의 대상)곁에 머물러야 되고 천인(天仁)합일로 따지면 영원불멸의 신적 존재로 제사받는 성스러운 하느님(하느님의 하위신)의 반열이십니다. 

필자가 볼 때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이 태어나실때는 대중화단계의 제사가 널리 퍼져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시대로 보여집니다. 아버지는 士계급(겨우 벼슬하는 계급),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은 무사계급 친구의 딸. 그런데 나이차이가 너무 많아 야합으로도 불리는 결혼에서 태어나신분이 공자님이라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인류의 神觀으로는 거룩하게 선택받으신 성인이 맞습니다. 다신교가 아닌 일신교에 해당된다 할 수 있는 로마가톨릭 같은 경우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불멸의 또다른 하느님이시라 판단합니다. 유교의 天子사상과는 다르지만, 유교나 로마 가톨릭은 하느님을 모시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그  모든 세속적 재단에도 불구하고 공자님.예수님 이 두 성인을 대체할만한 하느님의 선택은 인류역사상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하늘의 계시로 태어나신 점도 중요합니다. 필자는 가톨릭을 잘 모릅니다.

 

그 당시의 관점에서는 두 성인 모두 하늘과 통하는 분들로 선택되신게 맞습니다. 공자님은 동아시아에서 황제.제후,사대부,만백성이 우러르게 된 성인임금, 예수님은 서아시아에서 페르시아(그 당시 이스라엘보다 선진국 페르시아)등의 동방박사 세 사람이 선택한 하늘의 점지를 받은 분들이십니다.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마리아의 남편)이란 의붓아버지(하느님 기준)와 동정녀 마리아(기독교 기준)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독생자라고 합니다. 신학적 해석은 기독교인들이 더 잘알고 계시니까, 간략하게만 서술하겠습니다. 한나라때 동아시아에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가 성립되어 초월적 존재이신 하느님(天)을 최고신으로 하였습니다. 고대 동아시아의 유교가 한국[한사군의 유교가 부여,고구려,백제로, 은나라 왕족의 후손인 기자조선 기준왕의 후손은 삼한(기준왕에서 비롯된 서씨나 한씨성 사용, 유교의 제천의식인 단오절.상달제.시월제 지냄)]으로 이어져 백제.가야.신라로 다시 승계되었습니다. 이미 유교국가로 자리잡은 고대 한국. 한나라때의 세계종교 국가 중 하나인 고대 한국은 한사군의 낙랑.부여.고구려.백제에서 유교국으로 자리잡았고, 기준왕 후손인 삼한의 지배자들은 공자님을 새로 추가하여 숭배하는 세계종교 이전의 始原유교(은.주시대의 하느님 숭배)전통으로 삼한에 자리잡았다고 판단합니다. 백제(마한의 하느님숭배 유교 습속과 고구려 주몽임금의 유교습속을 이어받은 그 아들 온조왕이 건국한 백제의 유교 습속이 선진적으로 반영된 국가), 가야(변한의 始原유교 습속), 신라(진한의 始原유교 습속). 동아시아 유교국인 고대 한국은 성스러운 임금이 태어날때 부여 금와왕, 고구려 (고)주몽왕, 신라 (박)혁거세왕등 세속의 아버지가 아닌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어 선택받으신(출생이 초월적 개념으로 태어나신)분들이 오히려 더 하느님 아들(天子)개념에 가까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공자님도 그 출생이 야합이라 서술되기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이러한 聖人(공자),임금(금와왕, 주몽임금, 혁거세 임금)들의 태생 특권이기 때문에, 그 이후 세대에서는 이런 하느님의 선택이 적용되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 동방박사 세사람: 두산백과에 의하면 《마태오의 복음서》에 동방의 페르시아·메디아·아시리아에서 박사 세 사람이 별에 인도되어 베들레헴에 찾아와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황금·유향·몰약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

 

6]. 은나라 시원유교를 이어받은 기자조선의 기준왕과 삼한의 시원유교는 신라(삼한의 진한에서 이어짐)에서도 그 고대적 유교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혁거세왕의 난생신화와 그 아들인 남해왕의 경우입니다. 물론 백제도 유교문화였습니다. 고구려도 그렇습니다.  

 

1. 정사인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해왕은 혁거세왕의 아들로, 시중용어로는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중국도 고대 은(상)나라의 습속으로 보면 무당(巫覡)이 있는데, 왕이 최고의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은(상).주 시대나 춘추전국시대, 고대 한국의 신라 무당은 남녀 구분없이 왕족이나 귀한 신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삼국사기 남해 차차웅편을 보면, 고대 한국에서 무당의 지위는 왕족이나 그 후손들의 영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혁거세 왕의 아들 남해왕은 무당으로도 불립니다.무당은 이후 하느님의 영역을 다루는 권능이 무서워 후대로 갈수록 그 지위가 격하되어, 타성(他姓) 왕조인 후대왕조들에 의해 왕족이 아닌(신분이 높지않은) 계층의 영역으로 저지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다음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남해 차차웅에 대한 내용입니다. 

 

- 다 음 -

 

남해 차차웅

 ]

원전서지시대명재위기간연도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
신라
4년 ~ 24년
4년 ~ 24년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올랐다.[차차웅을 혹은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무당이 귀신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까닭으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르신을 자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혁거세의 큰아들로서, 몸집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이다.[아루부인()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           [ 

. 출처: 남해 차차웅 [南解次次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2. 중국도 고대 은(상)나라의 습속으로 보면 무당(巫覡)이 있는데, 왕이 최고의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은(상).주 시대나 춘추전국시대, 고대 한국의 신라 무당은 남녀 구분없이 왕족이나 귀한 신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중국 상(은)나라시대 무당의 지위에 대한 책을 소개해 봅니다. 중국 무당이 고대에는 신분이 높았던 내용입니다.

 

 

상고시대에 중국에서는 백성과 신의 관계가 세 단계를 거쳐 변화했다. 먼저 백성과 신이 서로 섞이지 않는 엘리트화 단계다. 신의 대리인격인 원시시대 영매들은 그래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그 다음은 백성과 신이 섞인 대중화단계로, 집마다 제사를 지내 마치 모든 사람이 무당이 된 듯했다. 마지막으로 하늘과 땅 사이의 통로가 단절된 권위화단계다. `이 때는 왕권이 신을 독점했으며, 왕이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을 제한적으로 내주었다.

...고대 중국의 상나라(*필자 주: 은나라) 시대에 이르면, 왕은 인간 세상에서 정치적 권위자인 동시에 최고의 무당(巫覡)이었다.

 

. 출처: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공)저: 웨이안 레이, 양젠쥐. 유아이북스/2015.1.10

 

3. 한국 민속신앙사전에 나타나는 고대 무당의 신분이 높았던 내용입니다. 

 

무당의 시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중국 황제의 딸이나 왕녀였다는 왕녀전설·귀족 여성이라는 귀녀설·왕명을 받들어 무사()를 시작했다는 왕무전설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무조전설의 원형인지 알 수 없지만, 무당이 원래 고귀한 신분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 출처: 무당 [巫堂]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

 

 

 

4. 일본의 경우 한국 유교와 도교 불교를 전수받았는데, 막부시대에 불교국가가 되어 한국과는 완전 다르게, 지배층인 무사는 학문보다 무예에 치중하고 또다른 중간적 계층인 승려는 한국에서 전해준 유불선의 토대에서 무사(지배계급)와 다른 차원에서 존경이라는 정신적 특혜를 누리고 살았다 합니다. 막부시대에 불교를 국교로 삼은이후, 새로 생긴 천황도 불교적 특성에서 사유하던 결혼하는 승려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승려는 한국 조계종 승려(결혼하지 않고 산속에 머물러야 하는 신분으로 조선 시대의 천민계급으로 격하)와 달리, 결혼도 하고, 절도 사고 팔고, 시중에 진출하며, 개인 절에서 사주(원래 점이나 사주는 유교영역임)도 보고 하는 유.불 통합 일본적 특성의 대우받는 계층으로 변한것으로 이해됩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한국에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왜놈 고등학교 출신들이 이런 일본특성을 보이도록 강요되며, 현대 한국의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유학한 지식인층들이 의외로 불교쪽에 투신하는 경우가 현대 한국에 있었습니다. 이에 전염되거나 볼모로 잡힌 일부 양반.지식인층도 골치거리가 되었습니다.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추종 카르텔(일제 강점기 초급대에서 해방후 정규대학으로 변신한 대학들, 전국 각지의 공립 중고등학교등)이 대중언론에서 자격없이 우세해진 가슴아픈 특성에서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불교마크 달지 않는 무당은 역사적으로는 점이나 예언에서 비롯된 고대 유교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한국은 타성(他姓)을 가진 새로운 왕조들이 하늘과 통하는 그 제사장 성격의 이전 왕조 무당(巫)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며 신분이 높지 않은 계층으로 인식되는 격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불교마크를 달지 않고 유교 경전을 읽으며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 운영하는 운명감정소.철학관.작명소등은 고대 유교적 관점에서 생활에 필요한 계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족보나 조상들의 벼슬증거, 고향에서의 양반 문중제사등이 입증되는 양반들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현대 한국에 있습니다. 고려나 조선 초기 왕족이 승려가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는 그게 인정되었고, 일본 강점기 잔재에 볼모로 잡힌 양반 계층은 볼모 왕족.양반으로 구제되기는 되어야 합니다. 이는 드문 경우라 할 것입니다. 전주이씨 왕족가문이나 파평윤씨 양반가 후손이 아니면 볼모로 잡히면 잘 이해되지 않을것입니다. 역사에서 침략받은 나라의 왕족,양반이 볼모로 잡히는 경우는 일본에 볼모로 잡힌 대한제국 고종 후손 영친왕 같은 경우 말고도, 조선 소현세자.봉림대군등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신라 상수리제도, 고려 기인제도,조선 경저리 제도등 많습니다. 여하튼 조선시대는 전주 이씨 왕족가문과 과거 급제자, 파평윤씨.안동권씨 같은 명문 문벌의 시대인점도 변하지 않습니다.   

 

5. 일제 강점기에는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국가(중국,한국,베트남,몽고)의 한 나라였던 수천년 유교나라 한국에서 유교가 종교로 인정되지 않고, 사회규범정도로 오도되었습니다. 해방후 미군정령이 발효되어 전국민에게 조선 국교인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게 하여 한국은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으로 복구되었습니다. 현대에는, 다른 나라의 경우도, 국교가 있는 나라는 이슬람국가 빼고는 별로 없을것인데, 해방 한국도 헌법상 국교는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주민등록과 구(舊) 호적에 조선 유교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토록 하여 5,000만이 주민등록상(행정법.관습법상) 유교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일본 항복후, 그 종교주권이 없는채로 유교나라 한국에 남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학교교육도 유교교육이 주류고,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의 주요 명절 및,유교문화 24절기, 문중별.가족별 조상제사로 이어지는 유교 한국입니다. 최근 다시 대중언론에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인 성균관(석전제사 인구는 별로 없음)이 일제강점기 잔재종교들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일제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 대종교(중 일연이 고려 후반에 유교중심사관 正史인 삼국사기를 모방하여 불교설화성격의 야사인 삼국유사를 지어 새로 만든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피어난 일제 강점기 나철의 신흥종교), 천도교(구한말 동학란을 일으킨 동학에서 이어진 신흥종교 천도교임)의 종교협의회에 참여하여, 일제강점기 시각으로 오도되는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그러나 해방한국에서 현재 유교 최고제사장은 대한제국 고종후손인 황사손(이 원)이 맞으며 제천의식(환구대제), 종묘대제, 석전대제등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000만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며 문중별.가족별 제사와 여러 명절을 쇠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가지 산천제사, 풍년제, 풍어제등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으니까, 최근 다시 재발하는 대중언론의 유교왜곡을 벗어나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현행헌법에 을사조약.한일병합 무효(대일선전포고 포함)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통성이 반영되어 한국은 더더욱 유교국 조선.대한제국의 전통을 이어가야 할 법적 당위성이 있습니다.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성균관대가 국사 성균관 자격 정통승계)을 중심으로, 세계사와 병행하여 교황윤허 서강대(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와 2인 삼각체제로 공조하면서 대학의 전통자격을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학교교육이 유교가 주류인 현대 한국. 유교분야에서는 최고 제사장인 황사손(이 원)을 중심으로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 및 24절기,문중별.가족별 제사등으로 하느님(天).공자님을 배우는 성균관대와 병행(성균관은 석전제사 인구가 적지만 성균관.향교는 중요한 제사전통을 가지고 있음)하여 유교전통을 승계하여야 하겠습니다. 300년 정도는 걸쳐야 일제 강점기 잔재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성과를 볼지 모르겠지만, 헌법 임시정부 조항이 있고, 국제법상 UN이 을사조약을 무효라 하였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으로도, 일본의 주권은 없어왔습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으로도 일본의 주권은 한국에 없기 때문에, 일제 잔재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와 각종 왜구학교(일제 강점기 초급대에서 해방후 4년제 대학으로 변신한 대학들 및 그 추종세력, 전국 각지의 일본 잔재 중.고등학교들)가 대중언론에서 발호하는 현상을 제지해 나가야 할것입니다. 

 

 

7]. 두산백과에 서술된 볼모에 대한 내용입니다.

볼모

요약 서로 대립하는 세력 사이에서 항복 ·우호 관계를 보증받기 위하여 사람을 담보로 잡아두던 일.

유질() ·인질() ·질자()라고도 한다. 볼모에는 ① 외국의 침략을 받아 항복의 조건으로 왕족 ·대신 등을 보내는 경우 ② 서로 화친하는 사이에서도 상대국의 사신을 억류하는 경우 ③ 서로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자진해서 왕족이나 왕자를 상대국에 보내는 경우 ④ 두 국가 사이의 우호관계를 보증하는 뜻에서 볼모를 서로 교환하는 경우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도 볼모는 상대국을 불신하는 데서 출발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볼모의 예를 들면 ①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확증받기 위하여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척화론자() 홍익한() 등을 볼모로 데리고 갔으며, ② 신라의 내물왕()은 일본과 교류하기 위하여 왕자 미해()와 사신 박사람()을 보낸 일이 있고, ③ 백제의 아신왕()도 일본과 우호관계를 다짐하기 위하여 태자 전지()를 일본에 보냈다. 그 밖에 후삼국시대에 왕건()과 견훤()이 서로 볼모를 교환한 일이 있었으며,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고려의 정치를 간섭할 때 몽골어로 볼모를 의미하는 툴루게[禿]의 파견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왕족 및 고관의 자제를 원나라에 보낸 일이 있다. 또 볼모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서도 그 같은 실례가 있었다. 지방 호족()의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호족의 우두머리나 그들의 자제를 서울로 강제 이주하게 한 경우가 있는데, 신라의 상수리(), 고려시대의 기인제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출처: 볼모 (두산백과)

 

 

8]. 성균관 자료 

 

공자의 생애

 

대성지성 문선왕

 

B.C 551-479,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 사상가이며 교육자로 유교의 개조(開祖)시며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공(孔)은 성이고 자(子)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선생' 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남쪽 추현)출신.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551년(주왕실 영왕21년, 노양공22년)이라는 설(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과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이 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은 60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안징재는 공자를 낳기 위해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를 들였다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인 것도 니구산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혹은 나면서부터 머리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언덕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구라고 했다고도 한다(『사기』) 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 , 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으나, 그 아들 공보가 (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렸고(B.C 710)다시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현손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며, 숙량흘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공자가어』) 『춘추좌씨전』에는 숙량흘이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사가 두 군데(양공10, 17년) 기록되어있다. 공자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기』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정(鄭)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으나, 허리 아래편은 우임금보다 3촌이 모자라며 초상난 집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공자가어』 [곤서(困書)]에서는 '키는 9척 6촌이며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긴 눈에 툭 불거진 이마를 지녔다.' 는 형용을 보탰으며, 한 대 공부(孔)의 『공총자』가언에서는 장홍(弘)이 공자의 인상을 표현하여,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꼬리가 긴 눈과 불거진 이마는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긴 팔에 거북 같은 등을 하고 9척 6촌의 키를 지니고 있는 것은 탕(湯)임금의 용모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공자는 용모가 비범하였고 체력도 강했다 한다.

청소년기

공자의 가계는 훌륭했으나 공자가 태어났을 당시 공자의 집안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었다. 더욱이 공자가 세 살 되던 해(B. C 549)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그 뒤로는 더욱 어렵게 살았다. 『논어』 [자한]에는 공자 스스로 "나는 어려서 빈천했기 때문에 천한 일도 많이 할 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 기사가 있다. 또한 공자가 24세 때(B. C 528)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서야 사람들에게 물어 아버지 무덤을 찾아 합장했다고 하였으니(『사기』)공자는 극히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는 아이 때 언제나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소꿉놀이로 장난을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이지만 비교적 바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스스로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며,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배운 사람이다."(『논어』 [술이])라고 말하였으나 실제로 공자가 어떻게 공부를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논어』 [자장]에서 자공이 공자의 학문방법에 대하여, 어디에서도 배웠으며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팔일]에는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셔서는 매사를 물으셨다." 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보면, 공자는 옛 글뿐만이 아니라 눈에 띄는 모든 일에 대하여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해서 견식을 넓혀갔던 듯하다. 『논어』[태백]에서는 증자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도 적게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고 말하였듯이, 공자는 실제로 자기만 못한 사람도 찾아가 묻고 공부하였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7년 (B. C 525, 공자 27세)의 기록에는 담자(郯子)가 노나라를 방문했을 때 공자는 그가 중국 고대의 관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관제에 대하여 묻고 배웠다. 담자는 노나라보다도 문화정도가 훨씬 낮은 조그만 담나라의 제후였는데도 불구하고 옛 관제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다. 이 밖에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사양자(師襄子)에게 가서 금(琴)을 배웠으며, 또 [노장신한열전]에는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에 대하여 물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공총자』에는 주나라로 가서 장홍에게서 음악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공자 자신이 만년에 자기 일생의 학문 과정을 회고하면서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라고 하고 또 "서른 살에는 자립하였다."(『논어』 [위정])라고 하였으니, 그는 열다섯 살에는 이미 유학을 이룩하기 위한 학문의 길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학문이 서른 살에는 어느 정도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은 개인적으로는 인의예지에 바탕하여 개인윤리를 확충해서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에 이르는 길을 깨우쳐 주었고, 정치적으로는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도를 이어받아 도덕을 기초로 해서 꽃피운 문물제도를 되살려 잘 조화되고 질서 있는 세상을 재현시키는 것이었다. 그 조화와 질서는 예악(禮樂)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라 가르쳤다.

공자는 19세 때(B. C 533)노나라의 위리(委吏)벼슬을 하였고 그 해에 기관씨 집안 딸에게 장가들어 다음 해에 아들 이(鯉)를 낳았다.(『공자가어』) 위리는 나라 창고의 물건을 관장하는 낮은 관직으로서, 생활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는 해설이 있다. 다시 21세에는 승전리(乘田吏:『궐리지연보』에 의거, 『사기』에는 사직리라 하였다)가 되었는데, 역시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낮은 관직이었다. 24세에 어머니 안징재가 돌아가셨다.(『궐리지연보』)

장년기

공자는 스스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30대로 접어들면서 학문과 경륜이 더욱 원숙해졌다. 따라서 그때부터는 개인문제나 가정생활의 문제를 벗어나 어지러운 민심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로 관심이 옮겨갔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그의 명성도 커져서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공자의 제자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확실하고 빠른 것은 『춘추좌씨전』 소공 20년에 보이는 금장(琴張)이다. 이미 공자가 20대에도 제자를 거느렸을 가능성은 있으나, 본격적인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육은 30대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노나라의 정치는 이 무렵 더욱 혼란해져 노나라의 정권은 완전히 삼환씨(三桓氏)의 손에서 놀아났다. 그 중에서도 계씨(季氏)의 세력은 더욱 커서 노나라 임금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방자했었다. 노나라 군대를 모두 자신들의 사병화 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채읍을 넓히고 많은 가신을 두고 나라의 재물을 멋대로 좌우하였다. 이러던 중 공자가 35세 되던 해(소공 25년) 공자로서는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곧 계평자의 방자함을 참지 못한 소공이 후씨와 합세하여 무력으로 계씨를 제거하려다가 삼환씨가 합세하여 반격하는 바람에 경우 목숨만 건져 제나라로 도망한 것이다. 제나라에서는 소공을 도와 다시 노나라로 돌아가게 해 주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소공은 7년 동안 타국에서 산 뒤 객사하고 말았다. 공자는 이런 극도의 비리를 보고 노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길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 소공이 망명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로 가서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으나 『사기』[공자세가]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대부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고소자의 힘을 빌어 경공(景公)을 만났다. 이 때 경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공자에게 니계(尼谿)의 땅을 떼어주고 중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경공은 등용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37세 되던 해(B. C 515) 겨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공자는 제나라를 여행하면서 제나라의 음악 책임자인 태사를 만나 음악을 논하기도 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듣고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등 음악 공부에 대하여 이해를 넓히는데 성과를 얻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뒤 노나라의 정치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공자가 42세 되던 해에는 노나라 소공이 제나라에서 객사하여 정공이 그 뒤를 이었으나, 정공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또한 노나라 권세가인 계씨 집안도 질서가 어지러워져 실제로는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논어』에서는 양화(陽貨)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특히 계평자가 죽은 뒤로 모든 권력은 완전히 양호에게로 돌아갔다. 『논어』[양화]를 보면, 양호는 권력을 잡은 뒤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정공 8년에 계씨의 또 다른 가신인 공산불뉴(公山不狃)가 양호를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계평자의 뒤를 이은 계환자가 계략을 써서 이들을 쳐부수었다. 공자는 이러한 혼탁 속에서도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더욱 분발하여 자신의 학문을 닦는 한편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이 무렵에는 공자의 명성도 더욱 커졌고 먼 곳으로부터도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계환자가 양호를 몰아낸 다음해(공자 51세) 공자는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중도재란 중도를 다스리는 장관으로, 공자가 그 벼슬을 맡은 지 일년만에 중도는 다른 고을이 모두 본받을 정도로 질서가 잡히고(『사기』) 예의와 윤리의 기틀이 잡혔다.(『공자가어』)

다음해인 노나라 정공 10년(공자 52세)에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화평을 위해 협곡에서 회합을 하였는데, 이때 공자가 예를 돌보는 관리로 정공을 수행하였다. 여기서 공자는 정공과 경공의 사이에서 외교상의 공로를 세움으로써, 제나라는 노나라의 영지였던 세 고을을 다시 노나라에게 돌려주고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는 다음해 곧 육경의 하나로 국토를 관장하는 벼슬인 사공에 임명되고, 다시 다음 해에는 나라의 법을 다스리는 벼슬인 사구에 임명되었다. 공자는 사구에 임명되자 곧 삼환씨의 세력을 누르고 노나라 공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삼환씨의 세 고을을 허물기로 하였다. 세 고을이란 계손씨의 비(費), 숙손씨의 후, 맹손씨의 성(成)으로서 이 세 고을을 헐어 없앤다는 것은 노나라 임금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군사적 통일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숙손씨와 계손씨에게서는 이루어졌으나 맹손씨에게서는 그 가신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밖에도 공자는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공자는 굳은 신념과 올바른 판단을 바탕으로 사구의 직책을 수행하여 명성이 국내외에 높아졌다. 그 때문에 다시 다음 해에는 사구에 재상의 일까지 겸임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혁신정치가 효력을 나타내자 이웃한 제나라에서는 크게 경계하고 공자를 제거할 계책을 꾸민 끝에 결국 벼슬자리에서 떠나도록 만들었다. 곧, 제나라에서는 정공과 계환자에게 악무에 능한 미녀 80명과 좋은 말 120필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정공 등이 즐김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행하도록 하였다. 공자는 이를 말리다가 결국 벼슬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주유열국

모든 벼슬을 버린 다음해인 B. C 497년(노 정공 13년 공자 55세)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서 국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 뒤 B. C 481년(노 애공 11년, 공자 68세)노나라로 되돌아오기까지 13년 동안 공자는 여러 나라의 임금들과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설득을 하였다.(『사기』의 [십이제후연표]에는 공자가 70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했으나 공자가 방문했던 나라 수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다.) 그런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이 긴 여정에서 공자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곧, 위(衛)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다가 광(匡)땅에서 양호로 오인 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으며, 두 번째로는 위(衛)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를 거쳐 다시 진나라에 가려고 송나라를 지나다 송나라의 대장군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한 일을 겪었다. 세 번째로는 진나라에서 삼년 가량 머물다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려고 광땅 근처의 포 지역을 지나다가 포땅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다. 또한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초나라 소왕이 공자를 초빙하였을 때, 진나라와 채나라에서는 공자가 강한 초나라로 가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공자의 가는 길을 막았다. 그 때문에 공자 일행은 꼼짝도 못하게 된 채 양식도 떨어지고 병든 제자가 생기는 등 고생을 겪었다. 이렇게 공자의 13년간의 주유는 수많은 고난이 뒤따랐으나 한편으로는 이미 이론과 실천을 겸한 정치가로서 명성이 높았고, 뛰어난 학문과 심오한 사상으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처지였으므로 찾아간 곳마다 상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세의 사람들은 공자의 사상에 한결같이 공감하고 찬동은 하면서도 도덕을 바탕으로 한 이상사회 건설에 발벗고 나서는 군왕은 없었다. 공자의 이상 실현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당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를 방문한 뒤에는 스스로 탄식하면서 노나라로 돌아갈 뜻을 비추었다. 결국 B. C 484년(노 애공11년, 공자68세), 계강자의 초청을 계기로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만년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국로(國老)의 대우를 받으면서 국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전적(典籍)의 편찬과 제자 교육이었다. 당시의 제자들은 염유를 비롯하여 자공, 자로, 자유, 자하, 재여, 등이 각기 정치에 참여하여 중요한 벼슬을 하고있었다. 이로 보아 공자의 학문은 노나라뿐만 아니라 가까운 외국에까지도 상당한 세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된다는 것은 요원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그 이상을 후세에 전해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자는 먼저 후세에 전할 전적으로서 육경을 편정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교육하려하였다. 육경이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경』 『춘추』의 여섯 가지 유가의 기본 경전을 말한다. 이들 육경은 앞서간 사람들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 생활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획득하는 한편 올바른 성정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데 큰 무게를 두었던 유가의 기본 경전이다. 공자의 교육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제자가 삼천명'(『사기』[공자세가])이라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 제자들 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아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으므로 스승인 공자도 높은 명성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거듭되었다. 69세 되던 해 외아들 리(鯉, 자는 백어(伯魚))가 50세의 나이로 먼저 죽었으며, 다음 해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기대를 걸었던 제자 안연이 죽었다. 공자는 이때,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噫 天喪予 天喪予:『논어』[선진])!" 라고 통곡하였다. 공자에게 안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으며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안겨주었다. 다시 그 다음 해인 B. C 481년(노 애공 14년, 공자 71세 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잡혔다 기린은 예로부터 어진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과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춘추』의 저술도 이 '서수획린(西狩獲麟)에서 끝맺고 있다. 그 다음 해(공자 72세)에는 오랜 제자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던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그곳 내란에 휩쓸려 비명으로 갔다. 이러한 겹친 불행을 겪고서 B. C 479년(노 애공16년 공자 73세) 4월 기축일 공자는 일생을 마쳤다. 공자가 서거하자 노나라 애공도 공자의 그 높은 덕을 추모하는 뇌문(誄文)을 지어보냈다.(『사기』) 『예기』 [단궁]을 보면, 공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칠일 전에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곧 공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을 거닐면서 "태산이 무너지려는도다, 들보가 부러지려는도다, 철인이 시드려는도다!"라고 읊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칠일 후에 돌아가셨다고 쓰여있다. 노나라 성 북쪽의 사상(泗上)에 장사지냈는데, 오늘날 이곳을 공림이라 부른다. 공자는 만년에 일생의 학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열 다섯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논어』 [위정])." 칠십 세에 이르러 도달한 경지는 바로 성인의 경지이다. 공자는 칠십 평생 끊임없는 학구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제자 수가 3천명이었는데, 그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의 [중니제자열전]에는 공자로부터 학문을 전수 받아 이에 통달한 제자가 77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맹자』 [공손추], 『대대례』 [위장군문자], 『회남자』 [요략], 『한서』 [예문지] 등에 모두 공자의 제자 수를 70명이라 하고 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이나 『공자가어』 [제자해] 등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들은 모두 80명 정도이다. 『논어』 에는 27명의 이름이 보이는데, [선진]에는 이른바 공문 사과(孔門四科)의 십철(十哲)로서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여, 자공, 염유, 자로, 자유, 자하를 들었다. 공자는 하은주 삼대의 문물제도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해서 유교사상을 확립시켰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낱낱이 익혀 드디어는 인사백반(人事百般)에서 우주진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 몸을 닦아 남을 편안히 한다(수기안인:修己安人)는 신념으로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결국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으며, 만년에 조국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는 『시경』 『서경』 『역경』등 전적 편찬과 제자 교육에 열중하였다. 그를 만세의 스승이라고 일컫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위대성을 기리는 동시에 그가 남긴 가르침이 실천 도덕에 바탕을 둔 인류의 영원한 생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예로 표현되는 사회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만년에 공들여 육경을 편정한 것은 후세에 그의 이상을 전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노력이었으며 3천여의 제자를 가르친 것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인간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경험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단정하기를 꺼린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그의 사상 또한 실천을 전제로 한 도덕이 핵심을 이루고 있고 교육 방법도 현실적인 가치체계를 중요시하였다. 그의 교과목은 예악사어서수등 육예로서, 이 육예에 통달해야 군자라 할 수 있고 완인(完人) 전인(全人)이라 할 수 있었으며, 제자 중에는 72명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이상과 사상은 『논어』에 그대로 표현되어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생시에는 실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 제자들이 각지에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가 일어남에 따라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이는 맹자였으며, 또 전국시대 말기에 순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후 한 나라의 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함으로써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고 이후 2천여 년 간 동양의 사상계를 이끌어왔다. 후세의 제왕들도 공자의 봉작을 계속 높여, 왕(王)과 성(聖)의 칭호로 올림으로써 지극히 존숭받게 되었으며, 각지에 '공묘(孔廟:文廟)'가 세워져 춘추로 석전을 받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양력5월 11일(돌아가신 날)과 9월 28일(태어나신 날)에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서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한편 공자의 후예는 중국에서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져 세전(世傳)되고있다.

 

9]. 공자님에 대한 여러가지 서술들. 백과사전.사전 중심임. 루머나 검증되지 않은채 출판사들을 통하여 발간되는 자료들은 배제하겠습니다.

 

1. 중국상하오천년사에 나타난 공자님. 

 

공자, 유학의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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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이며 노나라 추읍(, 산동성 곡부시) 사람이다. 춘추 말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인 동시에 유가학파의 창시자이다. 공자의 선조는 은나라 왕실의 후손이고, 공자의 아버지 흘()은 무장으로 추읍의 대부()였는데 공자가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머니 안씨()와 형 맹피()를 따라 곡부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집안 형편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학업을 그만두고 숙손()의 소를 방목했다. 숙손의 집에는 장서가 많았는데, 공자는 그 집의 책들을 빌려다 보곤 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점차 학문이 높아져갔고, 이에 따라 명성도 높아져갔다...

그후 5년 동안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정리에 전념했다. 『시경』과 『상서』를 정리 편찬하고 『예』와 『악』을 증보 수정했으며 『춘추』를 수정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는 3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중에서 덕이 높고 육예에 정통한 현인이 72명이나 되었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후손들에게 풍부한 사상을 전해주었다. 인도주의로 충만한 인()을 강조했는데 이는 동란이 많았던 춘추시대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대변해 준 사상이었다. 공자가 정리 편찬한 『춘추』, 『시경』, 『상서』 등은 후대의 학술사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말한다.(左), 『시』, 『서』, 『역』, 『예』, 『춘추』를 말한다.(右)

 

. 출처: 공자, 유학의 선사 [先師孔丘]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

 

2. 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 나타난 공자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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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BC 551년 ~ BC 479년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사상가이자 교육자ㆍ철학자, 유교의 개조(). 본명은 공구(), 자는 중니(), 공자의 '자()'는 존칭이다. 공부자()라고도 한다. B.C. 551년 현재 산동성() 곡부() 지방인 노()나라의 작은 마을인 추읍()에서 태어났다. 이 때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태어난 지 10여 년 뒤이고,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시기에 해당한다.

공자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불우하였고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당시 공자의 집안은 몰락하여 겨우 벼슬을 할 수 있는 계급인 사()에 속해 있었다. 사계급은 위로는 귀족과 대부, 아래로는 서민의 중간에 있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 출처: 공자 [孔子]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3.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에 나타난 공자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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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시대저서

B.C. 551년 ~ B.C. 449년
중국 춘추시대
논어(論語)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이다. 춘추시대 말기의 유명한 사상가이며 교육자, 유가학파의 창시자이다. 공자의 먼 조상은 은왕실의 후예인 송나라의 귀족이었는데 난을 피해 노나라에 정착하였다.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어릴 때 창고를 관리한다든지 목장을 돌본다든지 하는 비천한 일을 많이 했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육예를 익혔으며 30세에 들어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고 사학()을 개설하였다.

50세 이후에는 정치의 길로 들어서 노나라에서 대사구(사법부 장관)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55세 때 당시의 실권자였던 계환자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관직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났으며, 그 후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떠돌며 제후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펼쳤다. 14년에 걸친 천하주유를 마치고 다시 고국인 노나라에 돌아오자, 노나라 애공과 계강자가 자주 정치적 자문을 구하였으나 끝내 등용하지는 않았다. 말년에 제자들을 교육하는 한편 고전을 정리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 출처: 공자 [孔子]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강신주, 김교빈, 김시천, 김종미, 박인성, 이승환, 이태호, 최영진, 최진석, 한정길, 김혜경, 김호동, 한형조, 황희경, 이창일)

 

 

4. 인문전략연구 디지털인문학:중국인문학에 나타난 공자님.

 

이름: 공자(孔子), 공구(孔丘), 니부(尼父), 공부자(孔夫子)
국적: 노나라(鲁国), 화하족(华夏族)
출생년도: 기원전 551년 9월 28일
사망년도: 기원전 479년 4월 11일
출생지: 노(鲁)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山东) 곡부(曲阜)
시호: 니부(尼父),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포존후(褒尊侯), 문성니부(文圣尼父), 추국공(邹国公), 선사니부(先师尼父), 선사(先师), 선성(先圣), 선부(宣父), 태사(太师), 륭도공(隆道公), 문선왕(文宣王), 현성문선왕(玄圣文宣王), 지성문선왕(至圣文宣王), 문선제(文宣帝),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 지성선사(至圣先师),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圣文宣先师), 지성선사(至圣先师), 대성지성선사(大成至圣先师)
활동분야: 유학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가, 정치가, 고대의 성인현자
주요저서:
주요경력: 유학(儒学) 창립, 사학(私学) 창립, 만세사표(万世师表), 5대 성인(五大圣人)
생평:
공자(孔子)는 춘추(春秋) 시대 말기에 노(鲁)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山东) 곡부(曲阜)에서 태어났고,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이며, 자는 중니(仲尼)이다. 본적은 송(宋)나라 율읍(栗邑), 지금의 하남(河南) 하읍(夏邑)이다. 공자는 최초로 개인이 강학(讲学)하는 기풍을 일으켰고, 유가학파(儒家学派)의 창시자로서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교육자이다. 그에게는 제자가 3천 인이 있었고, 그 제자 가운데 현자가 72인이 있다. 공자 사후에 그 제자와 제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언행과 사상을 기록하여 엮은 《논어(论语)》는 유가의 경전으로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삶의 가르침이 되고 길잡이가 되고 있다. 공자는 고대에는 ‘천종(天纵)의 성인’으로, ‘하늘이 내려준 목탁(天之木铎)’으로 불렸고, 후세의 위정자와 사람들에 의해 ‘공성인(孔圣人)’, ‘지성(至圣)’, ‘지성선사(至圣先师)’, ‘대성지성문선왕선사(大成至圣文宣王先师)’로 일컬어지며 ‘만세의 사표(万世师表)’로 받들어져 왔다.

[기원전 551년][노 양공(襄公) 22년] 1세,
음력 9월 28일, 지금의 산동(山东) 곡부(曲阜) 동남쪽 지역인 노(鲁)나라 창평향(昌平乡) 추읍(陬邑)에서 출생했다.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纥, 자 叔梁, 이름 纥)이고, 어머니 안징재(颜征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남몰래 치성을 드려 공자를 낳았는데 공자의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태어난 날짜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기록이 있고, 1년의 차이가 나는데, 지금은 《사기‧공자세가(史记·孔子世家)》의 기록을 따른다.】

[기원전 549년][노 양공 24년] 3세,
아버지 숙량흘 별세, 곡부에서 25리 떨어진 방산(防山)에 묻혔다.
숙량홀 사후에 숙량홀의 첫 번째 부인인 시씨의 마음씨가 그렇게 착한 것이 아니었기에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돌봐줄 사람을 잃었다. 맹피(孟皮)의 어머니는 이미 숙량흘이 사망하기 1년 전에 시씨의 학대에 시달려 죽었다고 한다. 안징재는 시씨에게 내쫓겨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인 맹피와 공자를 데리고 곡부 궐리(阙里)로 와서 세 사람이 가난하게 살았다...

 

[기원전 535년][노 소공 7년] 17세,
어머니 안징재가 사망하여 부모 합장했다.
상복을 입고 노나라 대부 계씨(季氏)가 일급 벼슬의 귀족을 초대한 잔치에 참석하러 갔다가 가신(家臣) 양호(阳虎, 阳货)에 의해 출입을 제지당했다.
노나라의 한 마을(巷党)에서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孔子问礼)

 

. 출처: 인문전략연구 디지털인문학:중국인문학/한국연구재단

 

5. "2천 년을 기억하는 스승과 제자"에 나타난 공자님.

 

영원한 스승, 공자()

사마천은 공자()를,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떠받드는 영원한 스승이라고 찬양했다. 공자가 사망한 후, 10여 세대가 지난 사마천의 시대에는 왕후장상()들이 공자()의 학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유가()의 맥()을 잇는 유학자()들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공자는 살아서는 3,0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렸지만, 죽어서는 만민()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는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시경()』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을 가야 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비록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공자를 그리워하고 존경해왔다. 나는 공자()가 남긴 저술()을 읽으면서 그 인품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 공자의 묘당()·수레·의복·예기를 둘러보았다. 또한 여러 유생()들이 그곳에서 예()를 공부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당시 나는 공자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역사상 제왕()에서부터 현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살아서는 영화를 누렸지만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공자는 평생을 포의( : 재야의 선비)로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학자들은 그를 떠받들며 모시고 있다. 천자()와 왕후()에서부터 육예( : 예·악·사·어·서·수)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자()의 언행을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공자는 진실로 최고의 성인()이다.

- 사마천, 『사기()』 「공자세가()」편

 

. 출처: 공자[孔子] (2천 년을 기억하는 스승과 제자, 2006. 10. 9., 고전연구회)

 

10]. 중국인문학에 나타나는 공자님의 아버지와 어머니. 공자님은 문선제이시고, 균천(鈞天)께서 내려보내신 성자시기 때문에 공자님 부모 앞에 서술합니다.

 

1. 중국인문학에 나오는 공자님 아버지 숙량흘

 

이름: 숙량흘(叔梁纥)
국적: 춘추시대(春秋时期) 송나라(宋国), 화하족(华夏族)
출생년도: 기원전 622년
사망년도: 기원전 549년
출생지: 송나라 율읍(栗邑),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 하읍현 성북쪽 6킬로미터 거리 왕공루촌(河南省商丘市夏邑县城北六公里王公楼村)
시호: 제국공(齐国公), 계성왕(启圣王)
활동분야: 정치가, 군사가
주요저서:
주요경력: 추읍(陬邑)의 대부(大夫)
생평:
숙량흘(叔梁纥)은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흘(纥, 音hé)이고, 자(字)가 숙량(叔梁)이다. 그가 형제 가운데서 셋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아버지로 춘추시대(春秋时期) 송나라(宋国) 율읍(栗邑),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丘市) 하읍현(夏邑县) 성북쪽 6킬로미커 거리의 왕공루촌(王公楼村)에서 태어났다. 송나라의 전란을 피해 노나라(鲁国) 창평(昌平)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성(山东省) 곡부시(曲阜市)로 왔다. 그는 주대(周代) 제후국인 송나라 군주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문무에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노나라에서 전공을 두 차례 세운 유명한 무사였고, 일찍이 추읍의 대부(大夫)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나라 명장 적사미(狄虒弥), 맹씨(孟氏)의 가신 진근부(秦堇父)와 함께 ‘노나라 세 명장(鲁国三虎将)’이라 불린다.
숙량흘은 첫 번째 부인 시(施)씨에게서 딸 아홉을 낳았고,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였고 백니(伯尼), 또 맹피(孟皮)라고 하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맹피의 다리가 불구인 까닭에 숙량흘은 불만을 품었고 다시 안징재(颜征在)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고 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안징재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았다. 15세였다고 한다.
기원전 549년, 공자 나이 3세에 아버지 숙량흘이 사망하였고, 방산(防山)의 양지쪽에 묻혔다. 묘지는 현재 양공림(梁公林)이라 불린다. 숙량흘은 아들이 공자이므로, 금대(金代)에 제국공(齐国公)에 봉해졌고, 원대(元代)에 계성왕(启圣王)에 봉해졌다. 그래서 양공림을 계성왕림(启圣王林)이라고도 부른다.

 

. 출처: 인문전략연구 디지털인문학:중국인문학/한국연구재단

 

2. 중국 인문학에 나오는 공자님 어머니 안징재. 

 

이름: 안징재(颜徵在, 颜征在)

국적: 동주(东周), 춘추시대((春秋时期) 노나라(鲁国). 화하족(华夏族)

출생연도: 기원전 568년

사망연도: 기원전 535년, 노 소공 7년

출생지: 취푸(曲阜)

시호: 계성왕 부인(启圣王夫人)

활동분야:

주요저서:

주요활동: 성인 공자(孔子)를 낳고 길렀다.

생평:

안징재(颜徵(zhēng)在)는 공자(孔子)의 어머니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纥)의 시(施) 부인은 딸 아홉을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숙량흘은 두 번째 부인을 얻어 아들 맹피(孟皮)를 얻었으나 다리가 불구였으므로 당시 예법대로 대를 잇기 어렵다고 생각해 세 번째 부인을 얻었다. 숙량흘 나이 66세였고, 안징재는 15세였다. 안징재가 공자를 낳기 전에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기도하였다 하여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 지은 것이다.

공자 나이 3세에 아버지 숙량흘이 사망했고, 안징재는 홀로 공자와 맹피를 키웠다. 공자 나이 17세에 어머니 안징재가 과로로 사망하니,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공자는 당시 사회의 풍속과 달리 아버지와 함께 합장했고, 또 무덤을 흙으로 높이 쌓았다. 부부의 묘는 현재 ‘양공림(梁公林)’이라 불린다.

 

. 출처: 인문전략연구 디지털인문학:중국인문학/한국연구재단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의 유교와 세계의 유교를 되돌아보고,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고 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음.

http://blog.daum.net/macmaca/2967

 

2.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 일제강점기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유교를 인정않았음.

http://blog.daum.net/macmaca/2632

3. 한국은 수천년 동아시아세계종교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나라.최고제사장은 고종후손 황사손(이원).5,000만이 조선성명 유교한문성씨.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신도(불교),불교,기독교는 주권없음.일제강점기 유교를 종교로 불인정.해방후 교육은 유교가 주류.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승만)연설문.우리나라 종교 유교 강조,유교 교훈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설파.아세아 동방 모든나라가 다 유교의 덕화 입었다고 하시며,유교의 교훈 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훈시.삼강오륜 중시연설.

http://blog.daum.net/macmaca/2803

 

4. 하느님에 대드는 불교일본의 성씨없는 점쇠賤民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

http://blog.daum.net/macmaca/3044

 

5. 한국인은 행정법.관습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179

 

6.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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