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과 대원군 이하응에 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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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 자료/여흥민氏 역사 자료

2019. 10. 9.

민영익과 대원군 이하응에 묵란도

자 료 / 하얀그리움



우리나라에서 묵란도는 난초 그리기와 서예의 관련성을 강조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그 중에도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민영익이 쌍벽을 이뤘다. 이들의 난초는 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 화풍은 사뭇 대조적이다. 대원군의 난초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면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고 원만하다. 이 대조적인 화풍은 그들의 판이한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화면 한쪽에 한떨기 춘란(春蘭)을 즐겨 그렸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가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에서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나간다. 또 중간중간 각을 이루며 반전을 거듭한다.
반면 민영익의 난초는 여백이 없다. 줄기는 고르고 일정하며 끝은 뭉툭하다. 대원군이 붓끝으로 섬세하게 그렸다면 민영익은 붓 중간으로 굵기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대원군 난은 휙휙 휘늘어지지만 민영익 난은 줄기가 뻣뻣하다.  이는 두 사람의 삶에서 비롯된다.
대원군의 힘차고 날카로운 화풍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밀접하다(남연군의 묘 참고). 임금의 아버지를 이르는 칭호인 대원군으로 더 잘 알려진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조선 말기 아들인 고종을 섭정하면서 권력의 핵심을 오갔던 대정치가이다. 영조의 5대손으로 1843년 흥선군으로 봉해지고 1846년 대존관이라는 직책을 맡은 후 종친부 유사당상, 도총관 등 한직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리면서 왕족에 대한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약조받았다. 1863년 철종이 후손없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어린 고종의 섭정을 했다. 쇄국 정책과 친정 문제로 고종과 명성황후에 반목해서 운현궁으로 은퇴하였다가 임오군란과 더불어 복직되었다. 그러나 곧 청나라 군대에 의해 중국으로 연행되어 4년의 억류 생활 끝에 돌아와 고종의 형인 재황을 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이끌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그는 혼란한 시대의 정치가로서 숨가쁜 행보를 계속하면서도 많은 난 그림을 남겼다. 특히 김정희의 난을 본받아 함초롬이 피어난 춘란(春蘭)을 그린 그의 난초그림은 '석파난(石坡蘭)'으로 불리며 당대의 으뜸으로 꼽혔다. 부드럽게 뻗은 가늘고 긴 잎새와 넓은 공간 사이의 긴장감이 특징적이다. 인품이 고고하여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댈 수 없기 때문에 난초를 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던 김정희도 석파의 난은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자신보다는 석파의 그림을 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그의 난은 '귀인의 난'이라 하여 널리 일본에까지 명성이 높았고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이 많아서 김응원 등의 대필 화가들을 통해 대신 제작되기도 했다. 대원군 난초는 그의 생전부터 가짜가 많았다. 당시 그의 난초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대원군은 사랑방에 사람을 앉혀놓고 대신 그리게 한 다음 자신은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만 찍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시 그 다운 꾀돌이의 발상(안동김씨 세도하에 살아남기 위한 과장된 처세술, 아버지 남연군의 묘의 이장, 아들을 왕에 오르게 하는 묘략 등)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으로 <괴석묵란>, <묵란도>, <석란> 등 난 작품이 많이 남아 있고 서예에도 뛰어났다.

명성황후 민씨의 유일한 친정 조카였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낸 정치가인 동시에 묵란과 묵죽을 잘 그린 문인화의 명수로도 유명하다. 불과 18세의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김옥균이 주도하는 1884년의 갑신정변 때는 생부인 민태호가 피살되고, 그 자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는 등(민영익과 최초병원 및 기독교 참고) 한말의 급박한 정치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던 인물이었다. 20대 전반에 미국과 구라파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서양 문물을 남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음에도, 명성황후 민비의 척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는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그 뒤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하였다.

상해에 마련한 거처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서울의 죽동 본가를 하루에도 천 번이나 찾아가 보고 싶은 뜻을 담아 '천심죽재(千尋竹齋)'라 명명하였다. 운미는 이 천심죽재를 중심으로 당대의 명가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 중국의 많은 서화가들과 깊은 교우를 하며 한묵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후에 그 아들이 영구를 가지고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민영익은 묵란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오늘날 적지않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오창석을 위시한 당시의 중국문인들과 교유하여 남다른 독특한 그림 세계를 이룩하였다.   망명생활의 고뇌와 우울은 서화의 세계로 전념케한 주요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문인화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국제 조류에 뒤지지 않는 화경에 이르렀고, 석파 이하응과 더불어 묵란도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의 묵란(墨蘭)은 이루지 못한 가슴속의 뜻과 망국의 슬픔을 단숨에 풀어내려는 듯 진한 먹과 힘찬 필선이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난초 그림은 추사 김정희 이래 지나치게 사의적(寫意的)이고 고답적인 화풍을 일변시켰다. 그의 난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大院君)의 석파난(石坡蘭)과는 달리, 짙은 먹을 써서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가장 특징적이다.

민영익의 난 그림은 약간 갈필의 기운이 있는 짙은 먹을 써서 잎이 길고 빳빳하게 올라가며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특징이며 비수(肥瘦)의 변화가 거의 없어 강직한 느낌을 주는 한편 서로 얽힘이 적어서 정돈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특히 뿌리가 드러난 '노근난(露根蘭)'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 유민화가 정사초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가 민영익을 만나고자 했으나, 민영익이 거절하여 안중근 의사는 많은 비판을 하였다고 한다. 비난 받아야 하지만, 노근난을 그렸던 그의 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닐 것이다. 행서에도 능했으며 <묵란도>와 <묵죽도>가 여러 점 남아 있다.

그는 대원군과는 전혀 다른 그의 성향이 부드럽고 안정된 난초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원복 학예연구관은 『그의 중국생활은 국제조류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경지의 난초를 탄생시켰다』고 평가했다.

전각가(篆刻家)가 아니면서 한국 전각 발전에 공헌한 두 사람은 단우 이용문(丹宇 李容汶)과 원정 민영익(園丁 閔永翊)이다. 이용문은 애인가(愛印家)로서 그가 수장하고 있는 印 370 방을 찍어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를 편찬하였고, 민영익은 오창석(吳昌碩)의 印 300과를 수장하였는데, 그 인들이 일부 국내로 들어와 전각가들로 하여금 현대적인 인풍의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하응, 「묵란도」151.5×40.8cm
민영익, 노근묵란도 (露根墨蘭圖)
 소장 : 호암미술관

*화  법: 종이.수묵
     *크  기: 128.5×58.4cm
그의 대표작인「노근묵란도」를 보면, 뿌리가 노출된 난을 포함하여, 크게 두 무더기로 나눠진 구도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구도이며, 이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南宋末) 유민화가(遺民畵家) 정사초(鄭思肖, ?∼1332)의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 찍혀 있는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민영익인(閔泳翊印)’외에도 화면 곳곳에 안중식,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도영(李道榮, 1884∼1933), 최린(崔麟, 1878∼1950이후)의 후기찬문(後記讚文)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잎끝이 뭉툭한 난잎, 예외없이 꽃 중심부에 찍힌 묵점, 장봉획을 사용한 고른 잎의 선 등에서 운미란의 특징을 잘 살필 수 있다. 이와같이 운미의 난은 개성이 뚜렷하여 쉽게 타인의 것과 구별이 되는데, 그것은 전통의 흐름에서 볼 때도 확연히 이탈하여 국내에서는 스승을 찾기가 힘들다.
상해시절에 교유했던 오창석과의 강한 연결은 두 사람의 밀접한 교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먹물만으로 간결하게 난을 키웠지만
고결한 의지와 청조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悲感마져 감도는 이 작품에서
조선 선비들의 깨끗한 몸가짐도 은연히 풍겨나는 듯 하다.

(紙本水墨 42.2x65Cm)개인소장
민영익/ 묵란
화 법  : 종이에 수묵    크 기 : 42.2cm x 77.8cm
   소장처 : 호암미술관
- 대체로 난을 그릴 때는 잎은 진한 먹으로 그리고 꽃은 엷은 먹으로 그려서, 난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서로의 조화를 꾀한다. 그런데 민영익의 이 〈묵란〉은 마치 그림과 글씨가 어울려야만 조화를 이룰 것처럼 먹의 농담이나 글씨의 느낌에서 난과 제시(題詩)가 조화를 잘 이루었다.
난은 비교적 담묵으로, 글씨는 진한 먹으로, 또 꽃의 화심(花心)은 진한 먹으로 또렷하게 점을 찍어 균형을 맞추었다.
민영익의 난초 그림은 매우 유연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인데, 무심한 듯하면서도 빼어난 난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대체로 난을 그릴 때는 잎은 진한 먹으로 그리고, 꽃은 엷은 먹으로 그려서, 난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서로의 조화를 꾀한다. 그런데 민영익의 이〈묵란〉은 마치 그림과 글씨가 어울려야만 조화를 이룰 것처럼 먹의 농담이나 글씨의 느낌에서 난과 제시(題詩)가 조화를 잘 이루었다.
난은 비교적 담묵으로, 글씨는 진한 먹으로, 또 꽃의 화심(花心)은 진한 먹으로
또렷하게 점을 찍어 균형을 맞추었다.

민영익의 난초 그림은 매우 유연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인데, 무심한 듯하면서도 빼어난 난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민영익의 墨蘭圖>
소장: 호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