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조 청백리(淸白吏) 좌참찬 조원기(趙元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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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 자료/조선실록의 인물들

2021. 12. 5.

중종조 청백리(淸白吏) 좌참찬 조원기(趙元紀)

자 료 / 하얀그리움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 8월 7일 정축 1번째기사 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정원이 금부 당상의 뜻으로 아뢰기를,
"판부사 조원기가 오늘 출사(出仕)하는 길에 금부 문밖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릴 때 중풍(中風)에 걸려 인사불성이 되었으므로 의원을 시켜 치료중입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내의원(內醫院) 관원을 시켜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라."
丁丑/政院以禁府堂上意啓曰: "判府事趙元紀, 今日仕進, 到府門外, 下馬時中風, 不省人事。 已令醫員, 時方救療。" 傳曰: "令內醫院官員, 持藥往救。"

중종 28년 8월 7일 정축 2번째기사
의정부 좌참찬 조원기가 졸(卒)하니,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기(元紀)의 부고(訃告)가 왔으나, 상은 바야흐로 사직제(社稷祭)를 위하여 재계중이었으므로 입고(入告)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조원기는 평생 동안 사소한 물건 하나도 남에게서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부자리 하나 변변한 것이 없고 방이라곤 겨우 비바람을 막을 뿐이었는데도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으니, 이는 천성이 고결해서이다. 흥조(興祖)와 헌조(憲祖)란 서자 둘을 두었는데, 우애가 지극히 독실하여 원기가 죽은 뒤에는 한집에 살면서 내것 네것을 따지지 않고 의식을 함께 하니, 시의(時議)가 훌륭히 여겼다.
議政府左參贊趙元紀卒。 賜謚文節。
【元紀訃聞至, 以社稷齋戒, 不入啓。】
【史臣曰: "趙元紀, 自少至老, 一介不取於人, 位至崇品, 門庭冷落, 而寒無坐席。 居室僅蔽風雨, 略無憂慮, 天性然也。 有庶子二人, 曰興祖、憲祖, 友愛篤至。 自元紀卒後, 同居一室, 不畜私儲, 衣食必共之, 時議美之。"】

중종 28년 8월 8일 무인 1번째기사
정원에 전교하였다.
"좌참찬 조원기에게 예에 따라 특별히 부의(賻儀)할 것을 이미 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청백리(淸白吏)이니, 백면포(白綿布) 1동(同), 관면포(官綿布) 1동, 정포(正布) 1동을 별도로 제급(題給)하고, 승전(承傳)의 문서에 청백리의 사연을 모두 기록하여 뒷사람을 격려하라."
戊寅/傳于政院曰: "左參贊趙元紀, 別致賻, 則已依例給之, 然此淸白吏也。 白緜布一同、官綿布一同、正布一同, 別爲題給, 承傳內, 俱錄淸白吏辭緣, 以勵後人。"

1457년(세조 3) - 1533년(중종 28) 8월7일 77세 卒,
자(字) 이지(理之), 호(號) 돈후재(敦厚齋), 시호(諡號) 문절(文節),

증조부는 개국공신 조온(趙溫), 조부는 증참판 조육(趙育),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조충손(趙衷孫),
어머니는 증 정부인 남씨, 남상명(南尙明)의 딸, 조광조(趙光祖)의 숙부이다.
부인은 정부인 나씨, 나성손(羅誠孫)의 딸,

[생원]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9위(24/100)
[진사]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5위(20/100)
[문과] 연산(燕山) 2년(1496) 병진(丙辰)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1위(21/33)

9세 때에 장기를 두고 놀이에만 치중하자 어머니가 한탄하는 말을 듣고 반성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1483년(성종 14) 사마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사관(史官)으로 재직 중 임금이 생존시에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초(史草)를 연산군이 보고자 제출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여 파직되었고, 곧 복직되어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조원기가 대간 시절에 간언했던 내용을 문제 삼아 장을 치고 외방에 유배시켰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사성이 되었다. 조원기는 목민(牧民)하는 데 자상하고 무관의 일도 잘 아는 까닭에 경원부사로 나갔는데, 그 곳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그 공으로 대사간에 승진되었고, 이어 좌부승지로 재직 중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
1516년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을 지냈다.
1523년 명나라 황태후가 상을 당하매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26년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조원기의 조카 조광조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 심히 근심하며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
저서로는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관 안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홍문관(弘文館) - 청선고(淸選考),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부제학(副提學) - 청선고(淸選考),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517 - 청선고(淸選考),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기도(京畿道) 개성유수(開城留守) 1519 - 청선고(淸選考),

참고문헌 - 성화19년계묘식2월○일생원진사방목(成化十九年癸卯式二月○日生員進士榜目),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묵재집(默齋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청선고(淸選考),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