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옥의 시와 사진 이야기

사진은 詩를 쓰고 詩는 사진을 찍고

손훈영 첫수필집 『그 여자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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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22.

 

 

 

 

 

 

 

그 여자의 자서전

손훈영 수필집

 

 

 

 

 

 

        ■ 책을 내며


        글을 쓴지 10년 만에 책을 펴낸다. 그동안 많이 망설였다. 이제는 안다. 그 망설임은 출간이 나의 권한인양 했던 자의 착각으로부터 비롯된 불안의 한 형태였음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출판은 글을 쓰고 있는 자의 권한이 아니라 불가항력임을. 


        출판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일이기는 하나 더 중요하게는 출판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 넘는 일이다. 단편적으로 존재하던 하나하나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나온다는 것,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누드가 햇빛 속에 드러나는 일에 대해 문득 복잡해지면서 포기와 결의의 길항 작용에 마음은 자주 전쟁터가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의식의 반경을 확장한다. 그것이 글 쓰는 자들이 출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사건일 것이다. 


        출판이 결정되었을 때 하나의 방안이 떠올랐다. 그 동안 쓴 수 십 편의 글 중 이런 이야기 저런 견해들은 다 빼고 진짜 일인칭으로 된 글들로만 한권의 책을 묶자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자서전이었다. 내용은 자서전이지만 구성은 자전으로 하기로 했다. 자서전과 자전은 같은 건데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자서전은 말 그대로 자기 얘길 시간 순서대로 곧이곧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반면 자전은 자기 경험의 시간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의 삶에 찍힌 내적 외적 주요 변곡점들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억압과 분노는 고백을 전제로 한다. 발설해야 한다. 이 책은 불행에 감금된 수인이 스스로 봉인을 풀어 나간 흔적들이다. 쓰면서 자신의 곤경을 들여다 본 자의 기록들이다. 들여다봄으로써 절망의 무게를 들어낼 수 있었기에 이 기록들은 소중하다. 수치와 분노, 모욕감과 좌절을 이 한 권에 책에 담아 풀어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면 그것은, 아마 거짓말이 될 것이다. 삶이 이어지는 한 모욕도 수치도 이어진다. 단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노역을 통해 분노와 좌절을 이겨내는 다른 자세를 선택할 뿐이다.


        슬퍼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아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오늘은 아파서 꽃을 사고 슬퍼서 멋진 옷을 챙겨 입었다. 슬픔과 아픔이 나날의 동력이 되니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다.
   

        입추 무렵 손훈영

 

 

 


        ■ 저자 손훈영

 

        대구 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 2016면 매일신문,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6 수필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 차례


        책을 내며   4
        살다  9
        앓다  75
        쓰다  133
        맺다  195
        발문  213

 

 

 

 

        * * *

 

 


        공기가 달라질 때
                                                                                                                  

 

        긴 연휴가 끝나고 남편이 출근을 한다. 출근가방을 챙겨주며 현관까지 배웅을 한다. 삐리리리, 현관문이 잠긴다. 기다렸다는 듯 세상을 잠근다. 혼자다. 


        혼자인 것이 너무 좋은 월요일 아침이다. 연휴 동안 계속 식구들과 함께 지냈다.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가 되니 혼자인 것이 얼마나 좋은 상태인지를 절감한다. 나를 둘러싼 공기마저 가볍게 느껴진다. 아무런 저항 없이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다.


        사람이 무리 속에서 늘 즐겁다는 것은 어쩌면 심오한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유머러스하고 싹싹해 항상 모임에서 환영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둑한 고민과 회색빛 허무에 점령당한 채 혼자 생각만 많은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잘돼야 예술가고 대개는 부적응자로 간주된다. 행동보다 생각이 많고 광장보다 밀실이 더 좋은 나는 분명 예술가는 아니니 그러면 부적응자인가.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맞다.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자주 심심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은 나만이 가진 어떤 특수한 체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밤이었다. 문학회 행사가 있었다. 반주 음악이 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혼자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오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밤하늘은 여전히 빗물을 물고 있었다. 톡톡 얼굴에 와 닿는 빗방울이 여진처럼 남아있는 행사장의 소란을 씻어주었다. 돌연 심장 깊숙이 홀연함이 감싸들었다. 갑자기 세상의 얼굴이 바뀌고 새로운 기운이 솟아났다. 타인과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메말라가던 내 존재가 아연 활기를 띄며 생기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모임에 함께 있다 헤어져 돌아설 때면, 그 순간 매번 느껴지는 어떤 느낌이 있다. 공기가 달라진다는 느낌이랄까. 나를 에워싸고 있던 대기의 질감이 부드러운 타올천처럼 온 몸에 감겨져 온다. 주름져 있던 가슴이 폐활량 깊이 들이마신 공기로 한껏 펴진다. 몸과 마음이 경계 없이 서로에게 스며든다. 두 개의 내가 비로소 하나가 되는 느낌, 문득 세상이 조용해지는 느낌이다. 


        ‘로리 헬고’라는 작가가 내성적인 사람에 관해 쓴 한권의 책이 있다. 모임에 나갈 때면 자주 가면을 쓰고 필요이상의 외향적 연기를 하곤 한다는 께름칙함이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게 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 나를 가장 잘 읽어 주는 책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나를 가장 잘 이해시켜주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 성격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마이어브릭스 성격검사(MBTI)를 토대로 한 성격테스트를 해보니 내 성격은 아주 내향적으로 나왔다. 성격은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나누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성격은 내향성 쪽으로 완전히 치우쳐져 있었다. 떠들썩한 것이 싫고 어울려 다니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은 이유가 내 환경의 특수성으로 인한 마음의 어둠 때문인 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책에 의하면 나는 갈데없는 내향적 인간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마음이 왜 그리 힘들고 갈등에 빠져들곤 했었던 지가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본성은 내향적인데 내향적 성격은 좋지 않는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지낼 수 있는 외향성 쪽으로 끊임없이 바꾸려고 애썼기 때문이었다. 


        내성적인 사람이란 혼자 산길을 걸으며 자신의 마음속을 하나 둘 뒤집어 펼쳐보는 사람이다. 타인과의 불화보다 자신과의 불화를 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협동보다 단독 작업에 능하고 스포트라이트보다 조용한 그늘이 더 편한 사람, 화려한 파티보다 코드가 비슷한 한 둘 지인들과의 소박한 담소를 더 우위에 두는 사람, 자기 안에 고독을 위한 장소가 상비약처럼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지금, 나는 안과 밖이 모두 자연스럽다. 몸과 마음이 어긋남 없이 편안하다. 상반된 두 개의 감정 사이에서 참 오랫동안 갈팡질팡했었다. 내내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나하는 또 하나의 마음 사이에서 자주 흔들려왔다.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는 마음과 혹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하는 자체검열은 언제나 쌍을 이루어 나를 교란시켰다. 


        ‘공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는 감각이야말로 내가 나임을 일깨워주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내 존재의 특별한 감수성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를 잘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와 세상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인간상 사이에서의 갈등을 접기로 한다. 굳이 사교적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이런 나의 성격적 특성을 살려 나만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내면 깊숙이 내려 갈수록 나는 점점 더 만족스러워진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분명히 알수록 지금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을 알고 안정될수록 내 주변과 지인들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를 하게 된다. 혼자서만 지내면 세상에 대해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사람이 될 거 같아 불안했었는데 오히려 더 열려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니. 


        호젓한 물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외진 까페에서 어둑한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대면할 때, 부드러운 귤빛 등 아래서 오래 된 책을 넘겨보듯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볼 때, 그 때는 바로 ‘숨은 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신에게 위로 받은 온전한 몸과 마음은 우리들을 두려움 없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어 타자와의 진실한 교류를 도모할 수 있게 한다. 


        고독이 모자라 우리는 외롭다. 고독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다. 고독이 익을수록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도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대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힘은 바로 고독력이다.

 

 

손훈영 첫수필집 『그 여자의 자서전』 을 읽고 / 최형만

 

 

 

 

최근에서야 나는 손훈영 수필집 그 여자의 자서전을 다 읽었다. 세어보니 읽는 데만 거의 보름 넘게 걸린 셈이다. 물론 한번 붙잡으면 놓지 않는 내 성격상 빨리 읽기로 작정했다면 읽는데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글쓰기를 그렇게 소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곱씹고 곱씹으면서 읽었다. 내가 이 수필집을 작품이라고 칭하지 않고 글쓰기라고 한 이유는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길 작품이라고 하면 작품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글쓰기라는 말에는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에 방점이 찍힙니다.”라는 말에 충분히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필집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한국수필문학관장인 홍억선 수필가가 발문에서 충분히 밝히고 있으므로 나는 굳이 내용에 대해서는 중언부언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머리가 아팠다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나의 습관이나 천성에서 비롯된 오랜 고질병과 같은 것인데 어떤 한 가지에 꽂히면 헤어날 줄 모르는, 안 좋게 말하면 예민하고 까탈스러움일 테고 좋게 말하면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나의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 글을 쓰면서 너무 감동한 나머지 본문에 실린 글 중에서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글을 필사도 할 겸 이곳에 옮겨 적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모든 글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오늘날의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새롭게 보여주는 사유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수필의 대부분은 생활의 소소한 일상을 조곤조곤 풀어내서 이미 목적으로 설정해둔 어떤 인식으로 끌고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래선지 어딘지 모르게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거나, 혹은 그 인식의 공간이 단순히 한 가지 글감을 써내기 위한 얕은(?) 수준에 그칠 때면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오늘날 전문 수필가의 수필집보다 소설가나 시인의 산문집이 더 잘 팔리는 세태를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물론 전부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전문 수필가의 수필을 읽고 감동을 받는 일은 과거보다 훨씬 드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손훈영의 수필집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봤던 것일까?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시집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시인이 시집을 낼 때면 모든 시를 좋은 작품으로 채우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일부러라도 쉬어가듯 편하게 읽히는 시를 넣는다고 들었다. 이는 시집 한 권을 다 읽어내는 독자의 피로감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손훈영의 수필집 그 여자의 자서전은 독자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흔히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흥미를 끄는 식의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글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써 내려간다. 저자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지탱하는 온전한 삶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어조로 말한다. <플랫폼에 부는 바람>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살을 붙이고 허구라는 틀에 세상의 진실을 쏟아 넣어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라면 저의 글쓰기는 문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나를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글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굳이 허구라는 틀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고 싶지 않습니다. 내 한정된 에너지는 내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만으로도 늘 간당거립니다.”

 

나는 다방면의 책을 제법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책을 읽으면서 형광펜을 긋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번 수필집을 읽으면서 한 편을 통으로 옮겨 적고 싶었다거나, 곳곳에 형광펜으로 그어가며 읽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 구절들은 또 어떤가.

 

삶 속에 켜켜이 끼워져 있는 허무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더라면 글 같은 건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알뜰히 돈을 모으고 건강을 위해 헬스장을 다니며 부산하게 친구들과 모여 점심을 먹었을 것이다. 한 점 의혹 없이 이 삶이 주는 재미를 확신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글 감옥에 유폐시킨 것은 불굴의 의지 때문이 아니다. 내 안에서 끝도 없이 자가분열하는 허무감, 그 해체의 공포가 나를 글쓰기라는 바다에 투신하도록 이끌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무엇이 되었나,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허나 무엇이 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으로 나는 나의 불행과 허무를 견디어 왔다는 것이다. 곳곳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죽음의 크레바스를 지나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글쓰기에 감사하고 언어에 감사한다.”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좋은 글은 글 속에서 작가의 삶이나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다. 좋은 글은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만나게 되는 글이다. 시든,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좋은 구절을 발췌하기 위하여 읽는 것도 아니고, 저자가 살아온 삶이 미치도록 궁금해서 살펴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읽어낼 때 비로소 좋은 책으로 남는 법이다. 그렇게 마주한 자신의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대면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책을 통한 가장 값진 수확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상당히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올 연말에는 지인들에게 이 책 한 권씩을 선물할 생각이다. 책값이야 좀 나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