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art 2007. 6. 9. 13:07
1936년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단재 신채호 선생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image_view.asp?photo_no=607908')">
▲ 위대한 한국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살아 있는 인류적 양심으로 우리 가슴에 각인되어 있다.
ⓒ 한길사
위대한 한국의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그의 <조선사 총론>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일편단심'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1880년에 출생했으니 향년 57세였다. 2월 18일 뇌일혈로 쓰러졌는데,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차디찬 일제의 그 감옥에서 서거한 것이었다.

선생이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단재의 죽음으로 나라의 정기(正氣)가 쓰러졌다"고 애도했다. 단재 선생은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선생의 유골은 가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여순에서 화장되어 봉안해와서, 일제 당국이 모르게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선생이 살던 옛 집터에 모셔졌다.

우리는 그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역사가인 단재 선생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철저한 비타협 노선으로 일관된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던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 선생의 삶과 사상으로 우리는 민족사의 빛나는 정신과 이론을 인식하게 된다.

선생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하나의 강렬한 상징 또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나는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나치에 의해 총살당한 위대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로 프랑스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에게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자기 조국을 위해 숨져간 마르크 블로크와 단재 신채호는 공간을 뛰어넘어 늘 살아 있는 인류적 양심이자 역사적 진실일 것이다. 행동하는 두 역사학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가슴에 각인되어 있다.

단재 신 채 호(丹齋 申采浩, 1880-1936) 
                                   

                                                                                 

1. 신채호는 누구인가?

최근 백여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때,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위대한 많은 선조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 분들 중에는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자신의 한 몸을 던져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한 독립운동가도 있고, 사상가로, 학자로 혹은 예술가로 활동한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그 자신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된 분이 있으니 신채호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근대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선각자의 한 분이다. 그는 한말 민족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에 태어나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교육 언론 역사연구 활동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긴 일제하에서는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사 연구와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결국에는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 분이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였고 그의 총명함이 들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당시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 좋은 스승을 모시고 벗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뒤 한때 시골에 내려가서 교사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곧 서을로 올라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해서 애국계몽운동과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을 써서 백성들의 애국혼을 불러 일으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이 때 그는 우리 나라 역사와 관련된 많은 논설과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백성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데에 힘썼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망하자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와 북경 상해 등 지와 한때는 연해주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망명 초기에는 만주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유적지를 돌아보고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찬탄하면서 역사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또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가 남긴 역사연구는 구시대 지배자 중심의 왕조중심 사관(史觀)과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함께 부정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웅혼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건설하였다. 그 때문에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은 신채호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방략에서 타협적이고 온건한 자치론이나 외교론을 배격하고 비타협적이고 무력에 의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고 이를 몸소 실천한 불굴의 독립투사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나는 분이다.

2. 신채호의 생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이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현재 대전직할시 대덕구) 산내면 어남리 도림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조 세종 세조 때 문신으로 활약한 신숙주(申叔舟)의 18대손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의 집안은 점차 몰락하여 그의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가 고종 초기(1867)에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벼슬에 올랐을 뿐 양반가문으로서는 크게 행세하지 못하였다.

신채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할아버지를 따라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거기서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가난한 살림에 어린 시절을 거의 콩죽으로 연명하였지만,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밑에서 9세에 <자치통감>을, 13세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재주가 뛰어났던 신채호는 이 때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며, 이 무렵 <삼국지(三國誌)>와 <수호지(水滸誌)>를 애독하며 한시(漢詩)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두뇌가 맑고 독서열이 높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그의 친우였던 신기선(申箕善)에게 소개하여 충청남도 목천에 있는 신기선 본가의 장서를 읽도록 하였다. 신기선은 뒷날 학부(현재의 교육부)의 대신 벼슬을 지낸 구한말의 관료였다. 그런 인연으로 신채호는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19세 때에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성균관에서 그는 변영만(卞榮晩) 같은 벗들을 사귀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학문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성균관장이던 이종원(李鍾元)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이 때 종로에 있는 서점에 나가서 그 전에 접하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의 독서열과 기억력은 대단히 놀랄만하였다. 그가 남긴 우리나라 역사 관계의 논문과 책들 중이는 이 때에 읽은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쓴 것이 많다.

신채호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청년 신채호는 한학을 공부하였지만, 이 때 여러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들과 함께 이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민공동회가 보수세력에 의해 해산당하자 신채호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잠시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신채호가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갖다 주었다. 유학을 신봉하던 그를 개화 자강론자로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무렵 한때 고향 마을에 설립된 문동학원에 내려가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하지만, 1905년까지 성균관에서 계속 공부하여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언론활동과 역사연구로 국권수호운동에 나서다.

1905년 그는 장지연이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로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신채호의 뛰어남을 들은 장지연은 노일전쟁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하자 언론으로 백성을 계몽하여 국권을 보전하고자 그를 초청한 것이다. 황성신문은 1898년에 독립협회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창간되었는데, 신채호가 입사할 당시에는 장지연과 박은식 등 개신유학파의 선배들이 있었다. 박은식은 서북지방 출신의 유학자였으나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는 황성신문의 기자로 날카로운 논설을 써서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한편 교육 역사 관계의 글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있었다. 박은식은 뒷날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등의 훌륭한 역사책을 썼고 임시정부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활동한 분이기도 하다.

신채호가 황성신문에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저 유명한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는데,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이 사실을 폭로함과 동시에 사설에 '이 날에 소리놓아 크게 울리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백성들의 분노를 대변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이유로 황성신문을 무기정간하고 신문을 압수했으며 장지연과 신문사 직원들을 구속하였다. 그 이듬해 2월 황성신문이 복간되긴 했으나 장지연은 사장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신채호는 황성신문을 사임하였다.

황성신문을 사임한 후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박은식도 대한매일신보로 잠시 옮겼으나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그는 돌아갔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한국과 영국이 합작으로 창간한 신문인데 사장은 영국인 베텔(Ernest T. Bethell, 裵說)이었고 양기탁(梁起鐸)이 총무로 있었다. 발행인이 외국인이면,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도 신문을 간행할 수 있었다.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용기있게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항일운동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였다. 황성신문을 사임한 신채호는 양기탁의 권고로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채호의 애국적이고 정열적인 호소는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용기와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하는 동안 신채호는 당시 많은 애국인사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한 활동에도 함께하게 되었다.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신민회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쓰러져가는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전덕기 양기탁 등과 손잡고 조직한 비밀독립운동 단체이다. 신민회에는 이동령 이동휘 이승훈 이갑 유동열 노백린 김구 이종호 등이 참여하였고, 당시 언론활동을 통해 문명(文名)을 날리고 있던 신채호도 가입하여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전덕기가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던 남대문 근처의 상동교회와 양기탁이 총무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사가 신민회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면서 상동교회에도 자주 출입하며 신민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채호는 1905년 말부터 1910년 4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하면서 주로 언론 문필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펴 나갔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몇가지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시대의 긴박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적 각성을 고양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언론구국 활동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활동은 주로 대한매일신보와 여러 종류의 잡지들을 이용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이십세기 신국민(新國民)>을 비롯하여 <일본의 삼대충노(忠奴), 일본의 큰 충노 세사람>,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이십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 <유교계에 대한 일론(一論)>, <영웅과 세계>, <국수보전설(國粹保全說)>, <'애국' 두자를 구시(仇視)하는 교육가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學部)>, <가족교육의 전도(前途)>, <동화(同化)의 비관(悲觀)>, <진화와 퇴화>, <신 가 국 삼관념(身家國 三觀念)의 변천>, <西湖問答>, <정신상 국가>, <국민의 혼>,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한국과 만주>, <만주와 일본> <국한문의 경중>, <국문연구회 위원 제씨에게 권고함> 등의 많은 논설을 썼다. 또 대한협회월보 등의 잡지에도 <대한의 희망>을 비롯하여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대아와 소아> 등의 논설들은 실었다. 이러한 논설들은 이 무렵의 그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던 때에 그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각계각층의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보게 해 준다.

한말 신채호가 본 우리 나라의 형편은 <대한의 희망>이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는데, 원래 국한문체로 된 그 글의 첫 부분을 쉽게 풀어 본다.

"오호라, 오늘 우리 대한에 무엇이 있는가. 국가는 있건마는 국권이 없는 나라이며, 인민은 있건마는 자유가 없는 백성이며, 화폐는 있건마는 주조권(鑄造權)이 없으며, 법률은 있건마는 사법권이 없으며, 삼림이 있건마는 우리 것이 아니며, 광산이 있건마는 우리 것이 아니며, 우전(郵電)이 있건마는 우리 것이 아니며, 철도가 있건마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니, 그렇다면 교육에 열심하여 미래인물을 제조할 대교육가가 있는가 이것도 없으며, 그렇다면 식견이 우월하여 전국 민지(民智)를 계발할 대신문가가 있는가 이것도 없으며, 대철학가 대문학가도 없으며, 대이상가 대모험가도 없는지라. 비고 빈 나라에 갈팡질팡 허둥대는 사람들이 되어 그 참담한 광경은 배고파 우는 아이에 양식마저 깨끗이 치운 가난한 집의 궁상이며, 그 처참한 정상은 남편을 전장에 떠나보내고 외로이 잠자리에 든 여편네의 긴밤이요, 그 생활은 도탄의 물불이 바야흐로 깊은 날이며, 그 산업은 지리파멸됨이 이미 극심한 후이니, 오늘 우리 한국민의 소유가 무엇이라 말할꼬."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신채호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長物)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는, 바로 이 희망을 가지고, 절망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한말의 저 비극적인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자신이 선두에 서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필봉으로써 백성들을 계몽 격려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한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 자신이 새로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에 그는 백성들이 영웅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웅을 기대하기 보다는 차차 새시대에 필요한 '신국민'이 되어 나라의 독립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그는 '신국민'을 설명하기 위해, "태고시대의 민족으로서는 중고시대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중고시대의 민족으로서는 20세기에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고 하면서, 20세기의 신국민은 평등 자유 정의 의용(毅勇) 공공의 덕목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와 국민경제의 실시, 입헌국가의 건설, 의무교육의 실시 등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적 국가'(국민국가)가 아닌 나라는 바로 입헌국이 아니고 한두 사람이 전제하는 나라라고 지목하면서, 그런 나라와 세계대세를 거스리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한말 우리나라가 입헌국가로서의 국민국가가 변화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말 나라가 망한 것은 백성이 새국민으로 되지 못했고 제도를 국민(입헌)국가로 변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말 그가 언론인으로서 얼마나 예리한 예언자적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둘째는 신채호가 이 기간에 우리 나라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혼과 대외투쟁의식을 고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때 많은 역사관계 논설과 논문, 단행본들을 써서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다.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와 같은 논설과 <독사신론>과 같은 논문 그리고 을지문덕전 최도통(영)전 이순신전 같은 영웅전 등, 이런 글들은 모두 그가 이때 저술한 것이다. 그의 역사연구는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민족운동의 한 방편이자 민족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는 우선 과거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자'들이 서술했던 우리나라 역사를 노예적 사대적 자기멸시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런 역사는 철저히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처음부터 중국의 역사와는 다르며, 오히려 중국에 대결하거나 중국을 정복해 온 역사를 견지해왔다고 주장하면서 그 역사 속에 민족자주독립의 웅혼한 기상과 세계평화 실현을 위한 높은 이상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그 밖에도 그의 역사연구와 그 업적 영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망명하여 여러 곳에서 국권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다.

일제는 1904년-1905년의 일 로전쟁에서 승기를 제압하면서 한국에 대한 독점적 침략을 노골화한다. 1905년 11월에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두어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다. 일제는 이어서 1907년에는 '헤에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한편 한국의 행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행정 각부의 한국인 장관 아래 일본인 차관을 두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였다. 일본인 통감에 일본인 차관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내정은 일제 침략자의 손에서 좌우되었다. 일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써 한국의 사법권을 빼앗아 갔고, 1910년 5월에는 경찰권까지 빼앗아 갔다. 그 해 8월 일제는 그나마의 대한제국의 황제조차 자리에시 내쫓고 그들의 총독이 들어섰다.

나라가 위기를 맞으면 온갖 거짓된 애국자들이 출몰하는 법, 이 때에 일진회를 선두로 벌써부터 조국을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장인환 안중근 이재명 같은 열혈 애국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병럭을 강화시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활동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활동에 발?춰 한층 예리하게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한편 일제의 앞잡이들인 이들 매국노들과도 싸웠다. 앞서 거론한 그의 글에 매국노를 신랄하게 응징하려는 내용들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다. 신채호는 점차 시들어가는 조국을 보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의 애국거사가 일어나자 일제는 신민회 간부들을 일부 체포했다가 그 이듬해 2월에 석방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간부들은 해외망명을 논의 결행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1세되던 1910년 4월, 신채호는 이미 쇠잔해진 조국을 뒤로 하고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먼저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도착, 여준 이광수 등의 환영을 받으며 '샌님'의 일화를 남겼고, 얼마 안있어 압록강을 건너 안동을 거쳐 청도(靑島)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같이 망명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 앞으로 독립운동을 본격화하자는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독립군 기지를 위한 자금은 이종호(李鍾浩)가 그의 조부 이용익(李容翊)이 상해 덕화(德華)은행에 예치해 놓은 돈을 인출하여 충당키로 하였다. 즉 그 돈의 일부(약 3천 달라)로써 만주 밀산현(密山縣)에 있는 미국인 경영의 태동실업회사 소유의 토지를 매입, 개간하여 신한민촌(新韓民村)을 만들고 독립군기지로 활용하되 거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1910년 9월에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약 3년간 그곳에서 신민회원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12월에 그는 이곳에서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광복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1913년에 이르러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간행이 어려워지자, 신채호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규식의 초청으로 그곳에 갔다. 그는 상해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무장투쟁론을 전개하는 한편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신채호는,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양자로서 일찌기 미국에 유학한 바 있는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영어학습에서 뜻만 중요시하고 발음은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이웃'을 뜻하는 단어 'neighbour'의 발음이 '네이버'인 줄 알면서도 '네이 그후 바우어'라고 발음하였다는 것이다. 또 영어를 읽으면서 중간중간에 '하여슬람'이라는 소리를 섞어 한문 읽듯이 천천히 읽어갔다고 한다. 읽고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는 있지만 발음까지 굳이 영국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그의 고집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신채호식'으로 익힌 영어이지만 그는 기본(Edward Gibbon)의 <로마제국흥망사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와 카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숭배론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 같은 책을 영어로 읽었다고 하니 그의 재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신채호는 대종교의 3대교주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으로 가서 1년간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인 만주를 실제로 답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답사를 통해 "집안현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역사연구에서 사적답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이때의 체험에서 느낀 점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는, 발로 걸어다니면서 역사적인 유적 하나하나를 확인해 가는 답사야말로 문헌상의 부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 신채호는 윤세복의 부탁으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이 학교의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때 집필된 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그가 쓴 '조선상고사'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다.

신채호는 1915년, 일찍 서울에서부터 개화운동가로 어울린 바 있던 이회영(李會榮)의 권고를 받아 북경(北京)으로 옮겨 3 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그는 주로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만주에서 우리 고대사의 유적지를 널리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 아마 이 곳에서도 그는 때때로 북경 교외로 나가 조선고대사의 유적을 두루 답사한 듯하다. 1921년경 국어학자이기도 한 이윤재(李允宰)가 북경에서 신채호를 찾았을 때, 그는 북경 근처에도 '훌륭한 조선고적'이 있지마는 누가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중국은 우리 조선의 사료를 탐색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다 우리가 할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종래 우리나라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안목이 좁아 사료를 반도 안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그랬던 만큼 신채호는 북경에서 역사연구를 하면서 유적을 답사하고 사료를 찾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만리장성이 뉘 것이냐>라는 논문에서 보이듯이, 그가 만리장성을 언급하면서 우리 교대사와의 관계를 소개한 것이나 연개소문의 유적을 중국 동북지방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때의 답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북경에서 국사연구에 매진한 결과 그는 상당한 분량의 원고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윤재가 방문했을 때, 신채호는 모두 다섯책으로 된 원고뭉치를 보였다고 하는데, 1)조선사통론, 2)문화편, 3)사상변천편, 4)강역고(疆域考), 5)인물고의 다섯편과 이 밖에 또 부록이 있을 듯하다고 전하였다. 아마도 이 원고의 대부분은 이 무렵 그가 북경에 체재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채호는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중화보(中華報)'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글을 기고하였다. 그의 결벽성과 강직성은 원고의 한 글자도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화보'에서 그가 보낸 원고의 토씨 한자(矣)를 고쳤다 하여 그 후에 집필을 거부하였던 것은 그의 성품의 일단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논설로 '중화보'의 발행부수가 4, 5천부나 늘어난 것을 감안하여 사장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사과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야단을 쳐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채호는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무시해서 글자를 고친 것이라고 하고 생계를 위해서 집필한 자신을 두고 지조를 깨뜨린 것처럼 후회했다고 한다.

이렇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생활하다 보니 이 무렵의 궁핍함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발보다도 큰 베집신을 끌고 다녔고 굶는 날이 많았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우응규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돈을 방석 밑에 두고 갔지만 방소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그는 그것도 모른 채 굶고 지냈다. 어쩌다가 그 돈을 발견할라치면 그것을 자신이 떨어뜨린 것으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신채호의 이같은 '괴벽스러운' 모습은 핀잔을 받기도 했지만, 뜻있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신채호와 깊은 교제를 나눈 바 있는 벽초 홍명희(洪命憙)는 북경시절의 단재 신채호를 이렇게 말했다. "북경서 달포 동안 단재와 교류하는 동안 비로소 그의 인물을 잘 알았읍니다. 단재가 고집세고 괴벽스럽다고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단재의 인물을 잘 알면 고집이 세고 맘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이 눈에 거칠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로 서다. - 임시정부와 신채호

1919년 3 1독립운동,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생존권을 박탈당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하려고 총궐기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후 무단통치로 숨통을 죄고 토지조사사업으로 한국인의 생존의 바탕인 토지마저 빼앗아갔다. 생존권을 박탈당한 백성들은 남부여대(南負女戴)하고 만주로 시베리아로 새 삶의 터를 찾아가야 했다. 나라 안에 머물 수 밖에 없던 동포들은 일제의 철권통치 아래서 신음하며 곤고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고통받던 우리 민족이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사에 새 기운이 도는 기회를 이용하여 민족독립을 선언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이 한국사 뿐만 아니고 세계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중국 인도 필립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만 보아도 알 수 있다.

3 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2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戊午獨立宣言)>를 선포하자 신채호는 여기에 서명하였다. 북경에서 3 1운동을 맞아 감격하면서 그는 독립운동 방략에서 활동적이고 투쟁적인 점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3 1운동에서 힘을 얻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상해로 가서 이 해 4월 '29인 모임'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를 성립시키고 이어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은 김대지 김동삼 김철 남형우 백남칠 선우혁 손정도 신석우 신익희 신채호 신철 여운형 여운홍 이광 이광수 이동영 이시영 이홍근 이회영 조동우 조동진 조성환 조소앙 조완구 진희창 최근우 한진교 현순 현창운 등이었다. 그들은 4월 11일 제 1회 회의를 개최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가결하고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뽑았으며, 각부의 총장과 차장을 선출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키고 폐회하였다. 이 때 신채호는 과거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다 하여 그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선되자 신채호는 그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초기에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신채호가 임정과 완전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임정활동에 나선 것은 제 6회 의정원회의(8월18일-9월 17일)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임시정부를 1919년 9월부터 출범시키려고 결의했던 때다. 그 정도로 신채호는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1919년 10월, <신대한(新大韓)>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 임정을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야만성과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안 제출, 독립운동 방략으로서의 외교론, 임시정부 독립노선의 불철저한 전투성,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渡日) 등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신채호는 이 무렵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취하하라는 편지를 두번이나 보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박은식 김창숙 등과 함께 이승만의 탄핵파면을 임시정부에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반대활동에 앞장 섰던 신채호는 1920년 4월 <신대한>의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옮겨갔고, 이어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박자혜(朴慈惠)와 결혼하여, 이후 3년간 "활기에 넘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박자혜는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활동하던 중 3 1운동에 참가, '간우회(看友會)사건'으로 북경에 망명 유학 중이던 28세의 신여성이었다. 이듬해 신채호는 아들 수범(秀凡)을 얻었으나, 1922년말에는 아들과 아내를 귀국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채호는 원래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중요시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이 방략에 따라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 발기하는 한편 '군사통일주비회(籌備會)'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는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그에 의하면 독립군이 1920년의 봉오동(鳳梧洞)전투와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시 참변 이후에 무장투쟁이 부진하게 된 것은 독립군단들이 분산되어 작전과 지휘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21년 1월에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로서 순한문의 월간 <천고(天鼓)>를 창간하여 다시 문필로써 독립운동에 나선 신채호는 김정묵(金正默) 등과 '통일책진회'를 발기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임시정부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마침내 관철되어 1922년 4월 22일 의정원에서도 인민청원안의 심의 형식으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가결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 무렵 가족을 한국으로 보내고 의열단 선언을 작성하기 위해 상해로 왔던 그는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70여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모여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존속했던 임시정부를 완전 부정하고 노령 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안창호 등 초기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과 상해교민회의 인사들,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일부(김동삼 등)가 개조파로서 활동하였다. 여기에 비해 창조파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부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신채호 박용만 등 북경 군사통일회와 김규식 등 상해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이 가담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한 창조파는 이해 8월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옮겼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파의 임시정부는 활동이 중지될 수 밖에 없었고, 독립운동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신채호 노선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21년에 대한독립군단이 겪은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을 알고 있는 신채호는 이때 창조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더욱 실망하게 되었다.

'조선혁명선언'에서 독립운동의 원칙과 방략을 밝히다.

신채호가 국민대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기 전에 그는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이미 강조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1922년 12월에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 내용은 그들의 폭탄제조소가 있는 상해로 가서 이를 시찰하고 의열단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에서 폭력노선의 독립운동을 표방하면서 창립된 독립운동 단체로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원봉이 의백(義伯)으로서 이를 지도하고 있었다. 암살 파괴 폭력을 운동방법으로 택하고 있던 의열단은 이미 괄목할 만한 성과도 거두었고 결사적인 단원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방법은 은연중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의열단으로서는 자신들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김원봉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자신들의 무력투쟁의 이념에 가장 동조적이었던 신채호를 찾아와 이렇게 간곡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요청하면서 이 선언문 작성을 돕도록 무정부주의자 유자명(柳子明, 본명 柳興湜)을 같이 합숙토록 해 주었다. 수원 농림학교 출신의유자명은 3 1운동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북경대학 이석증(李石曾) 교수 등의 부정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1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가장 탁월한 이론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때 무정부주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여 1923년 1월 전 5장 6,400여자로 된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때문에 이 때 작성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는 그의 민족주의사상과 무정부주의사상이 혼재하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략을 천명한 이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운동사상 가장 강건 웅혼하면서도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략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문서로서 손꼽히고 있다.

자주적인 '국사' 연구는 바로 훌륭한 독립운동이다.

1923년 8월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 영토내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무정부주의와 다시 접촉하는 한편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신채호는 북경의 순치문(順治門) 안에 있는 석등암(石燈庵)에 들어가 구차스럽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1924년 3월에는 북경 교외의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신채호는 불교사상의 깊은 진리를 이 때에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유마경(維摩經) 능엄경(楞嚴經)에 밝았고, 특히 마명(馬鳴)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깊이 연구하여 친구에게 읽기를 권하기도 했다. 그의 승려생활은 그 이듬해까지 약 6개월간 계속된 듯하다.

수도생활을 통해 신채호는, 창조파 임시정부 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을 딛고 서서, 마음의 평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듯하다. 이 때 그는 임시정부운동 등 일종의 정치운동이 유생의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고 다시 국사연구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자신의 사명이 굳건한 민족사를 쓰는 것이며, 이 역사연구야말로 정치운동, 무장운동 못지 않은 독립운동임을 확신했다. 그에게는 깨달음과 행동이 일치했다. 1924년 여름 그는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의 초고를 완성했을 정도가 되었고, 가을에는 국사연구를 본격화하기 위해 6개월간의 승려생활을 마치고 하산하였다.

그는 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에게 편지를 써서 대학도서관을 열람하는 데에 편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석증의 알선으로 그는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에 출입하면서 선진(先秦)문헌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역사 관계 중국서적을 수많이 섭렵하였다. 신채호의 국사연구에서 보이는 100여종이 넘는 수천권의 참고문헌들은 대부분 중국의 대학도서관 등에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문헌들을 독파한 시기는 이에 앞서 4년간 북경생활을 하면서 국사연구를 했을 때와 이 시기에 국사연구를 본격화했을 때로 보인다.

신채호는 이 무렵 중국의 역사가요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의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1922>을 읽고, 그의 역사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방법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첫부분인 '총론(總論)'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썼을 것으로 보이는 논문들 중에는 뒷날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책에 실린 것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조선상고사> 총론의 맨 첫귀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신채호의 역사관을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되는 귀절이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는 북경시절에 안질을 버릴 정도로 국사연구를 열심히 하였고, 논문과 저서도 남겼다. 이 때도 그에게는 많은 원고뭉치들이 있었다. 그는 1922년말에 한국으로 돌려보낸 그의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이미 써둔 논문들을 국내의 신문들에 발표하여 그 원고료를 가족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1월에는 동아일보(편집국장 洪命憙)에 <조선 고래(古來)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게재하였고, 그 뒤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계속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上古史 吏讀文 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 고증(三國史記中 東西兩字 相換 考證)>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등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또 1926년 2월 2일부터 시대일보(편집국장 韓基岳)에 <부(父)를 수(囚)한 차대왕(次大王)>을, 5월 20일, 22일, 25일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년대에 대하여>가 발표되었던 것이다.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무정부주의적인 운동방법도 수용하다.

국민대표회의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신채호의 노선이 실패한 후, 1923년 후반기에 중국에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일부에서는 무정부주의의 방법을 공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원로 이회영(李會榮)과 무정부주의 이론가 유자명 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의 무정부주의자 이석증(李石曾) 교수 등과 접촉하고 있었다. '의열단 선언(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면서 이미 무정부주의자 유자명과 합숙한 바 있는 신채호도 이 당시 북경 독립운동가들의 분위기에 따라 무정부주의 서적을 읽기 시작했으나, 그의 민족주의 의식이 강열하였으므로 쉽사리 빠져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4년 승려생활을 청산한 후, 이회영 유자명 이석증과 만나면서 무정부주의에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바쿠닌(Mlkhail Bakunin),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의 저작들과 유사복(劉師復)과 이석증의 논설들, 행덕추수(幸德秋水)의 작품들을 읽었다. 1925년경에 발표된 그의 글 속에는 이미 크로포트킨에 동조하는 내용이 비쳐지고 있다. 지행(知行)이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 그에게는, 이같은 지적 전환은 이미 행동을 수반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1927년 중국 천진에서 중국 일본 조선 대만 안남 인도의 6개국의 대표 120명이 모여 '무정부동맹동방연맹(無政府同盟東方聯盟,일명 A동맹연맹)'을 조직하였는데, 신채호는 대만의 임병문(林炳文)의 안내로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해에 본국에서 좌우합작의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그는 홍명희와 안재홍의 권유로 여기에 참가하였다. 이는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민족독립운동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충만한 <대흑호(大黑虎)의 일석담(一夕談)> <용(龍)과 용의 대격전(大激戰)> 등의 글을 남겼다.

신채호는 1928년 4월에 한국인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채호는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북경우무(郵務)관리국 외국위체계(外國爲替係)에 근무하는 대만 사람 임병문과 협의하고 외국위체(換)를 위조하여 그것을 찾으려고 5월 8일경 대만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가 수상서원(水上署員)에게 체포되었다.

대련(大連)으로 호송된 그는 7개월간 미결감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후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채호는 위체를 위조한 '사기행각'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57세의 평생, 순국의 제물로 바치다.

그는 1929년 5월 9일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중사상범으로 다루어져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친지들은 그의 친구이자 일가벌되는 친일파 부호의 보증으로 가출옥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옥중에 있던 그는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의 절의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 한토막이다.

신채호가 수감 중에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의 국사연구 업적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홍명희 등은 1924-25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여러 논문들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이름으로 1930년 6월 15일에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신채호의 학문과 절의를 흠모하고 있던 안재홍은 <조선사(朝鮮史, 뒷날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를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당시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이어서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0일까지, 그리고 1932년 5월 27일에서 31일까지 모두 40회에 걸쳐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홀로 있던 감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사흘 뒤인 2월 21일(음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당대의 가장 위대한 근대민족주의 역사가요 행동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는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외롭게 그의 평생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이 5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