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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안양사(三聖山 安養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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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5.

 


        삼성산 안양사(三聖山 安養寺)

 

                                             전통사찰 제10



                                  


 

오늘날의 안양사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31번길 103(석수동)에 위치한다. 경수국도

에서 안양예술공원을 흐르는 내를 따라 오르다 안내판의 안내를 받아 왼쪽으로 200m 쯤 오르면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안양사는 위에 있는 오늘의 안양사 보다는 고려 태조 왕건의 명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하는 원

안양사와 원 안양사 전에 그 자리에 존재했던 사찰로 확인되는 중초사(中初寺)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안양사는 경기도 안양시의 지역 명칭이 안양사안양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사세가 컸고 또

 지역에 미친 영향력도 컸음을 알 수 있다.


         



     중초사 터[中初寺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석수동)에는 현재 김중업박물관이 있다. 안양예술공

원에 들어서면 개천 왼 쪽에 있다.

 

이 곳은 1950년대까지 창령 조씨 일가와 거주민들이 포도밭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1959년에

유유산업(유유제약 안양공장)이 들어서 2003년까지 공장으로 활용하였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매장문화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으며 이를 통하여 통일신라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 건물이 중첩된

층위가 발견되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국보 제4(1963. 1. 21)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유유산업 정문 왼쪽에 있었다. 이 당간지주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만들어진 연대와 사찰이름, 참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는 826년에 시작하여 827년에 완성하였고 황룡사의 주통(州統) 항창화상(恒昌和尙)

여기에 머무르며 공사를 지휘하였다 한다.

 

사찰의 이름은 중초사로 확인되고 사지 발굴시에 중초사의 건물지와 초석 등이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지주는 높이가 약 3.8m 이며 이래 쪽에 직사각형의 돌 받침이 있고 그 중앙에

지름 34cm의 구멍을 파서 당간을 받쳤다.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지주 사이는 60cm이며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구(竿溝)가 위아래 두 쌍이

있다.


         

                                                  중초사 당간지주


 

    안양사 터[安養寺址]

 

중초사 터 당간지주 옆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삼층석탑이 다소곳이 서 있다. 이 탑은

높이가 3.65m이며 고려시대 일반형 석탑으로 본래는 현재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80m 되는 곳에

 탑신부의 2,3층 몸통과 상륜부가 훼손된 채 있었으나 유유산업이 들어서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석탑의 조형상 당간지주보다 후대인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사는 827년경에 창건된 것으로 이해되는 중초사 터의 위에 900년에 왕건(이 때 왕건은 궁예의

수하 장수)의 명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최근 유적지 발굴조사에서 중초사와 관련된 선대유구와 유물로 강당지의 고려시대 자연석 초석

 아래로  원형의 초석이 중복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승방지와 서회랑지의 고려시대 층의

아래에서 선대유구와 신라후기의 기와편, 청자편이 출토되었다.

 

유적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문헌으로 전하는 중초사지 위에 안양사가 건립되었음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 된 것이다.



     

                                   고려 때 제작된 3층석탑


     

                                         안양사 터 발굴된 현장(주춧돌)


 

     안양사 창건 설화

장군 왕건이 곡양(현 금천의 신라 때 지명) 등지를 정벌할 목적으로 이 곳을 지나는데 삼성산

정상에서 오색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도승

능정(能正)스님이 수도하고 있었다.

 

장군 왕건이 그 스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뜻이 통하는 지라 이 곳에 절을 짓고 모든 중생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안양사라 하였다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능정스님은 신라의 스님으로 왕건을 도와주었고 그로 인하여 예우를 받았으므로 둘은 매우

가깝게 지낸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능정스님은 높은 교학과 불법의 도를 널리 폈던 인물로

편가 된다.

 

따라서 안양사의 창건 배경에는 왕건과 능정의 정치적 군사적 협력관계와 이로 인한 왕건의

후원, 비보묘탑의 도참설에 의하여 비보의 차원이 있었을 것이고, 고려의 숭불정책에 따른

의도적인 건립  이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안양사 7층전탑(塼塔, 벽돌로 만든 탑)

안양사지 유구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가람배치를 확인해 보면 당간지주, 중문, 7층전탑,

금당(대웅전), 강당, 승방, 부속사로 배열되어 있다.

 

고려시대 안양사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으나 고려 후기에 최영(1316~1388)장군이 7층전탑을

중건한 기록이 전한다.

 

도은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이 지은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에는 이런

내용이 전한다.

 

안양사 7층 석탑은 고려 왕건이 비보묘탑설에 의하여 능정스님과 금주현(지금의 서울 금천구.

당시 안양은 금주현 소속)에 세웠다. 탑은 절의 남쪽에 있으며, 층마다 기와가 덮여 있고 탑

아래층의 둘레가 열 두 간(한 면이 약5.4m)이다. 벽마다 부처님과 보살, 천인상이 그려있다.

 

고려 우왕 7(1381)에 안양사 스님 이 최영장군에게 무너진 탑을 이야기 하자 최영장군이

같은 해 8월에 기공식을 하고 10월에 낙성식을 하였다. 낙성식 때 왕이 내시 박원계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사리 12과와 부처님 치아 사리 1과를 탑 가운데에 모셨다. 낙성식에 1000명의

스님이 불사를 올리고 3000명의 재가 신자가 보시하였다.

 

13823월에 단청을 입히고 13838월에 탑 안의 사방 벽에 약사회와 석가열반회, 미타극락회,

금강신중경을 그렸다. 또 회랑 12간 벽에는 십이행년불을 그려 넣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7층 전탑의 규모와 안양사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7층전탑


     

                                              고려시대의 안양사 건물도


       

                                 중초사 터와 안양사 터가 중첩됨을 밝힌다.

 

     조선시대의 안양사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06년에 태종이 안양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1411년에는 상왕(정조)이 온양온천에

가려다가 조정의 반대로 온양에 가지 못하고 안양사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안양사는 수도도량

으로서의 역할뿐 만아니라 원()으로서의 기능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17년에는 윤돈이 과천현감을 하다가 발령을 받고 한성으로 돌아갈 때 수원부사 박강생과

금천현감 김문이 윤돈의 전별식을 안양사에서 가졌다. 이 때 김문이 소주를 과음하여 갑자기

죽는 사고가 있었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세우고 불교를 배척하였다. 태종은 절을 모두 혁파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세종은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찰에 속한 토지와 노비를 모두 혁파하여 사찰을 모조리

 폐사 시켰다.

 이 대 안양사도 유생들에 의하여 폐사를 면하지 못한 듯싶다.

 

1450년 정인지가 문종에게 말하기를

하남도 산림(山林)의 골짜기 마다 모두 고탑(古塔이 있으니 다 옛 절의 터입니다. 안양사는 황폐

된지 오래되어서 초막(草幕)으로 변하고 간가(間架)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듣자하니 그 초가에

 한 늙은 승려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그 제자들이 이 절의 골짜기에서 화장하여 부도를 세워 향화(香火)를 받들고 드디어 초막을 짓고

거처하였습니다.

 

무식한 무리들이 영이(靈異)하다고 생각하여 다투어 미포(米布)를 내어 중창(重創)하여 제법 큰절이

되었습니다. 비록 옛 터에 수창(修創)하였다 하더라도 창건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한갓 형식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문종은 비록 옛 터의 다 허물어진 곳에다 다시 세우는 것이라 하더라도 금하는 것이 가하다.”

하교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안양사는 15세기 중엽에는 이미 폐사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의 안양사 창건(創建)

 

이제까지 살펴 본 원안양사 터에서 동쪽으로 200m를 가서 다시 북쪽으로 200m 쯤에 이르면

안양사라는 돌기둥 하나가 맞이한다. 또 조금 오르면 일주문이나 금강문은 없고 다이야몬드형으로

생긴 바위에 안양사라고 새긴 표지석이 우둑 서 있다. 이 표지석은 현 주지스님의 글이다.

 

이 안양사는 염불암(현재 염불사) 주지스님이셨던 박기석 스님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분은 당시

염불암과 함께 두 개의 절을 사유(私有)하고 있었다.

 

이를 1955년도에 성인(成人, 비구니)스님께서 인수 받았다. 인수 받을 당시에는 현 요사 채와

종무소 자리에 작은 규모의 건물 한 채가 있었으며, 현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작은 규모의 대웅전이

있었다.

 

성인스님은 각고 끝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천불전을 신축하였으며 1983년에는 심검당을 지었다.

성인스님이 1983년 입적하자 영심스님(현 안양사 주지)이 뒤를 이었다.

 

영심스님은 1945년생으로 6살에 성인스님의 인도로 불문에 들어 와 10살에 이곳 안양사에 성인스님과

함께 들어왔다.

 

스님은 현재의 대웅전을 지으시고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셨으며 종전 대웅전

자리에는 명부전을 모시고, 천불전을 16나한전으로 개축하면서 산신각, 범종루, 대형 미륵부처님상을

2004년까지 완성하였다.

 

안양사 입구에 단아하게 앉아있는 안심당은 경기도청 직원들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5급 사무관 시

험준비를 하던 곳인데 안양사에서 매입하여 안심당을 세웠다.

 

안양사 대웅전 앞에는 승탑과 탑비의 귀부(龜趺)가 남아있다. 승탑은 탑신과 기단중석도 없고 하대석은

2단의 8각 지대석으로 복연으로 장식하고 상대석은 앙연으로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8각으로 추녀가

있고 3단의 옥개 받침위에 올려 있다. 양식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규모나 정교함, 그리고 비문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큰스님의 탑으로 생각된다.

 

승탑 옆에는 경기도지방문화재 제93호인 귀부가 남아있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 남아있는데

몇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이루고 굄대와 귀부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다. 전체적인 모양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이며 높이 1m, 길이 3m, 너비 2.18m이다. 승탑주인공의 행적 등을 담을

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승탑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탑이나 비의 제작연대가 원 안양사가 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니, 그 당시의 고승이셨을 것이다.

 

       


     


     

                                                             요사 채


     

                                       요사채 바로 옆에 있는 명부전

                                    당초에는 이곳이 대웅전였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10왕을 모셨다.


      

                                                 심검당(1983년 건립)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 보현보살을 모셨다.


     


     

                                                             산신각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


     


     

                                        안양예술공원 지역에서 가장 눈에 잘 들어 온다


     

                                                                승     탑


      

                                                                   귀      부


     

                                                                    안심당


     

                                                      명부전 옆에 있는 우물

     



 

       원 안양사와 현 안양사의 관계는?

 

통일신라시대인 827년경에 창건된 중추사 터 위에 왕건이 900년에 안양사를 세웠으며,

사찰은 조선 15세기 중엽까지 존재하였음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안양사와 현재의

안양사와는 어떤 관계일까? 즉 어떻게 계승되어 왔을까?

 

중초사지에 안양사를 창건한 것은 세운지 80여 년이 된 중초사가 천재지변, 화재 등 알 수

없는 사유로 폐사되고 그 곳에서 노스님이 소규모의 사찰을 운영하던 때 왕건과 인연이 되어

중창 내지는 창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양사는 조선의 억불에 눌려 태종, 세종 때에 유생들에 의하여 완전히 폐사되었는데

뜻있는

스님들의 원력으로 중건하였으나, 문종 때 다시 시련을 겪는다. 이 때 사찰은 폐사를 맞이

하였으나 현재의 안양예술공원 일대가 모두 안양사의 경지였을 것이며 현 안양사 자리에는

안양사의 창건자인 능정스님의

승탑과 탑비가 있었거나, 아니면 큰 스님의 거처인 암자가 있었는데 그 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곳에 승탑과비를 세운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1899년에 작성된 경기도 시흥군읍지나 이전의 해동지도, 금천현지도 등 조선말의 기록에

호압사와 삼막사, 망월사, 염불암 등은 보이나 안양사는 안 보인다.

 

아마도 현재의 안양사는 일본제국주의 때 요사 채와 두 간 정도의 전(殿)에 부처님, 또는

지장보살 정도를 모신 소규모 사찰로 운영되던 것을 1955년 성인스님이 인수한 후 현

주지스님이신 영신스님이 오늘과 같이 사격을 갖춘 사찰로 일으켜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 안양사는 대한불교태고종 소속사이며, 비구니스님의 사찰이다. (031- 471 - 4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