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교통사고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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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동네 이야기

2010. 6. 27.

남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성에게 누명을 씌운 것은 여성의 남편이었으며, 남편은 여성의 친구와 같이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성에게 변호사였던 동료가 말해줍니다. “당신이 만약 감옥을 나가서 남편을 죽여도 당신은 다시 감옥에 들어오지 않아요. 동일한 범죄로는 또다시 재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과연 이 말은 사실일까요?

 

위 내용은 토미 리 존스, 애슐리 쥬드 주연의 미국 영화 ‘더블 크라임’의 일부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인데요,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법제도에서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란 뭘까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서는 두 번 처벌하지 않는다는 형사법상의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도둑질을 해서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갔다면 그 사건으로 인해 다시 감옥에 가거나 처벌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헌법 제13조 제1항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제1항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왜 필요할까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당연히 국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한 번의 잘못으로 몇 번이나 처벌을 받는다면 정말 억울하겠죠? 또 피고인이 재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거듭되는 기소로부터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여기서 잠깐!!

영화 ‘더블 클라임’의 내용은 사실일까요? 여주인공 동료의 말대로 감옥에서 나가 남편을 살해해도 정말 다시 감옥에 들어오지 않게 될까요? 우리 법으로 판단하면, ‘다시 감옥으로 들어온다’입니다.

여주인공이 남편을 살해했다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은 재심을 받아 무죄가 되고, 남편을 진짜 살해한 사건은 정식으로 형사 처벌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두 개의 사건은 서로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주인공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은 어떻게 보상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보상 받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일사부재리의 원칙

 

지난 3월,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전자발찌 소급하여 활용하자는 논란이 일었을 때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거론되었습니다. 전자발찌를 소급하여 활용하면 같은 죄에 대해 두 번 처벌을 받게 되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전자발찌는 형벌이 아닌 범죄예방적 조치인 ‘보안처분’이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례도 있습니다. 그 결과 지난 3월 31일 ‘전자발찌법 개정안(특정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는데요. 이 개정안은 오는 7월 16일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전자발찌를 소급하여 활용하게 될 대상자는 2008년 9월 이전에 1심 판결을 받아 당시 형 집행 중이었거나 집행이 종료된 지 3년이 지나지 않은 성폭력 범죄자입니다.

 

 

  

 

작년에는 이 원칙이 악용된 끔찍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군산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81세 할아버지를 차로 치어 숨지게 한 33세의 박모씨. 이 사람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죄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단순과실에 의한 교통사고인 줄 알았던 이 사건이 한 검사의 끈질긴 조사 끝에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박모씨는 사고를 내기 두 달 전에 4개의 운전자 보험에 들었고, 사고 후 보험금으로 1억 1천여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중 5천만원은 유족에게 합의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본인 몫으로 챙긴 것이지요. 법망을 교묘히 피해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박모씨에 대해 군산지청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악용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며 살인죄로 다시 기소했습니다.

 

군산지청은 한 사건에 대해 판결이 확정되면 이를 다시 심리·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존중해야 하지만, 이 경우엔 운전자가 고의로 사람을 살해한 뒤 이를 은폐했기 때문에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1심과 2심에서는 그래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되었는데요. 지금은 대법원에 항소되어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외국에서의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어떨까요?

 

로마시민법에 처음 명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등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 2005년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폐기했습니다. 유전자 감식 등 첨단 수사기법이 많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새롭고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날 수 있다며 ‘새롭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경우’라는 전제 하에 다시 재판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수백년 간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해줬던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등 단점이라면 단점이라 할만 한 점도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재판과 처벌 과정에 항상 신중을 기하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제대로 제몫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