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者)는 어떻게 살았을까?

댓글 3

[문순c네]/출동! 문순c

2008. 6. 12.

  

                            이 자(者)는 어떻게 살았을까?



금병산 자락 완전 촌놈

56년생,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정족 2리가 제 고향입니다. 김유정이 살았던 실레마을과 바로 붙어있는 마을입니다.(김유정 문학촌장이신 소설가 전상국 선생님은 중학교 은사이시다.)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금병산 자락의 궁벽한 시골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자와 옥수수 맛이 일품인 곳이죠. (지금도 음식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데 감자와 옥수수 맛에 대해서는 아주 까다롭게 군다.) 아버지를 따라서 퇴계원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4학년 때 춘천 초등학교로 옮겼습니다. 이때까지 가난했지만 꿈같이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에 강도가 들면서 행복이 깨졌습니다. 개머리판 없는 칼빈 소총을 든 2인조 강도가 들었습니다.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총격전을 벌여 그 중 1명이 죽었습니다. 1명은 도망쳐서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분 이 글 읽으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공소 시효도 지났을 테니까 꼭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왜 그분들이 단칸 셋방살이 하는 육군 대위의 집에 거창하게 칼빈 소총을 들고 들어 왔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만나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아버지는 제대 후에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내 마음고생을 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건 사고를 겪은 개인과 그 가족은 죽을 때 까지 그 충격에서-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리를 해주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제도가 아직 미비하다.)    

 

                  

 

6.25의 노래

이후 대학 졸업 때 까지 거의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춘천에서 보냈습니다. 별명은 ‘감자, 굴뚝새’(얼굴 색깔 때문에 굴뚝에 들어갔다 나왔느냐고 해서....., ‘최면술’이라는 별명을 고집하는 녀석도 있었다.) 등이었습니다. 강도 사건 이후 집안이 어려웠지만 어머니가 잘 지탱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10월 유신이 선포됐습니다. 당시 학생회장 선거가 유신에 대한 찬반 대결 구도로 치러졌습니다. 유신에 반대하는 출마자 편을 들었다가(당시에 고등학생들이 유신 찬반을 둘러싸고 강당에 모여서 정견 발표도 하고 득표 활동도 하면서 비교적 활발하게 학생회장 선거 운동을 했다.) 이 후 대학 시절까지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게 됐습니다. (잘하거나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힘의 관계가 워낙 비대칭적이었고 대부분 지하운동이어서 학생들도 조직화돼있지를 못했다. 말하자면 요즈음 촛불 문화제에 나오는 분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시에도 시위를 할 때에 부를 노래가 없어서 ‘6. 25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운동권이란 말은 요즈음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이고 또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 낸 말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했던 내 친구들은 대부분 평범한 민초들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조사를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 같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이야 말로 이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영어 교육 피해자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영어학을 전공했습니다.(내가 우리나라의 잘못된 영어 교육의 피해자이고 또 대표적인 표본이다. 대학원 논문도 영어로 썼는데 미국 사람 만나면 무조건 도망간다. 말을 못한다. 한심해서 정말...)  


기관총 사수

군대생활은 화천 북방 7사단 8연대에서 했습니다. 철책사단입니다. 박정희 사단이고 정승화 사단이기도 합니다. 주특기로는 104를 받았습니다. M 60이라는 이름의 기관총 사수 역할입니다.(실제로 사수는 고참이 하고 나는 쫄병이어서 삼발이라는 돼지발톱처럼 생긴 받침대와 탄약을 들고 다녔다. - 엄청 무겁다.) 7사단은 북측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사단입니다. 늘 긴장이 높은 지역이었고 신문에 날 정도의 큰 전투가 두 세 차례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대 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일했습니다.(제대할 사람을 육군 본부에 보고해서 승인을 받은 뒤 1주일에 한 번씩 전역을 시키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한 번은 실수로 제대자 명단 가운데 1명을 빼먹었다. 그 분은 1주일 늦게 제대를 했는데 군대에서 1주일이면 세월이다. 그분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나중에는 연대장 당번병(이 때 함께 당번병을 했던 한 분은 지금은 세계적인 화가가 됐다.)으로 제대했습니다.


대규모 채용 덕분에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에 대비해서 방송사들이 대규모로 인력을 채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방송사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동기생이 300명이 넘는다.) 직장을 얻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은 검다고 할 시절이었으니까요. 당시의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괴로웠습니다. 시위 현장에 가면 학생들이 우리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요즘 시위대는 참 점잖다.) 갈등도 많았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87년에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고 방송사에 노동조합이 만들어 지고 저도 이런 저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1년 만에 복직했습니다. 87년에 중매로 결혼을 했습니다. 집사람을 최루탄이 난무하는 명동성당 부근으로 불러낸 일로 지금도 자주 항의를 받고 있습니다. 딸 둘을 두고 있습니다.  

  

                     

                      

삼순이 맞아?

갑자기 방송사 사장이 되면서 ‘쓰나미’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노조위원장 출신에 48살이라는 나이 그리고 직급이 낮기(부장 대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선진국-특히 일본-에서는 일반화된 과정이다.) 저 자신도 사장직이 참으로 어색하고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사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첫째 ‘방송을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둘째 ‘방송도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과제는 달성했다고 자부합니다. 당시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인사권, 편집-편성권에 대해 전혀 간섭받지 않았습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대통령과 방송사 사장들은 언제나 서로 통화하며 인사와 편집 방향에 대해 상의해왔습니다. 노대통령은 저에게 인사권, 편집-편성권에 어떤 형태로든 단 한 차례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대통령으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 세상이니 만큼 주변적인 인물들로부터 사소한 청탁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은 아니나 관철된 바는 없다. 오히려 어떤 이에게는 ‘대통령에게 이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러면 얼른 전화를 끊는다.) 두 번째 목표였던 ‘방송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달성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재직 중 끊임없이 ‘몸에 밴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는 점과 ‘관계의 역전 - 겸손함’을 강조했습니다. 다음 경제적으로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미 진입해 있던 저투자-저성장-저분배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고투자-고성장-고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 구조를 ‘많이 벌어서 많이 쓴다.’ 또는 ‘많이 써서 많이 번다.’로 요약해서 사원들과 공유했습니다. 경영 수치상으로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러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재임 중 뉴욕 필 평양 공연을 여럿이 힘을 합쳐서 성사시킨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황우석 사태 때는 죽다 살아났고 노조위원장 출신이 돈벌이에 눈이 멀어서 방송의 공공성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방송사 사장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CEO들, 경제인들에 대해 많이 이해를 하게 됐다. 대부분의 사장들은 저처럼 밑바닥부터 올라간 분들이다. 이 분들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하루에 밥을 5번 먹는 것도 아니고 비싼 옷을 여러 벌씩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개의 경우는 우리들과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 반면에 스트레스는 많고 무섭게 고독한 분들이다. 나의 경우도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꼽으라면 이 자리를 꼽을 것이다. 차라리 군대를 한 번 더 다녀오는 편이 낫다. 정말이다.)   


정치는 사랑이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슬로건 하나를 얻었습니다. ‘정치는 사랑이다.’ -제가 평생 고민해온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확대할 것인가?’를 좀 편안하게 표현한 것이죠. 다행히 제가 살면서 겪은 여러 일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현장 기자-노동조합 간부-해고자-사장) 편견 없이 사랑을 실천할 자양분으로 작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