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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티스트 2016. 5. 2. 15:53

    빛가람 路에서 - 운(運)이란, 지속적인 윤회(輪回)이다.

    2016. 04.25(월) 14:48확대축소
    박양수 편집부국장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운(運)을 잘 타야하고, 때를 잘 만나야 하며,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운(運), 둔(鈍), 근(根)!
    운(運)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鈍)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내는 끈기와 근성(根)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이 정리된 '호암어록'에 나와 있는 말로 회장 역시 성공요인의 첫 번째를 운(運)으로 꼽았다.
    운이 안 좋을 때는 근성을 갖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운이 다가오면 겸손으로 잘 지켜야 한다는, 왔다가도 가 버리는 운의 지속적인 윤회(輪回)를 귀담게 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운(運)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일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우연하게 다가오는 행운도 분명히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의 탄생 배경에도 보인다.
    하지만, 운이 있다손 치더라도 얼마나 노력을 하여 능력을 기르고 운을 받을 준비를 하는가에 따라 복을 받는 것이 매우 다르다는 점도 명심해야만 한다. 능력을 배양하고 세상의 흐름을 보는 눈을 맑게 하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운(運)은 타고 난 거니까’라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운만 믿어서 안 된다. 때를 잘 타야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한다.
    중국의 대표적 문장가인 한유(韓愈)는 말했다. “세상에는 백락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으니,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닌가보다. (世上伯樂한 然後에 有千里馬하니 千里馬는 常有로되 而伯樂은 不常有라.)”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名馬)는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그 명마를 알아보는 백락(말의 좋고 나쁨을 잘 감정하고 매매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는 뜻이다.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말도 백락을 만나지 못한다면 평생 소금수레만을 끌다가 삶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이다. 주위 배경에 어떤 귀인(貴人)이 있느냐에 따라 성공의 여부가 갈린다는 것이다.
    이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한자숙어만큼 세상의 이치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능력 있는 사람들은 많으나 그 능력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해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이다.
    많은 희비(喜悲)가 교차했던 이번 4·13총선의 결과가 이를 대변해준다.
    몇 번이고 출마했지만 고배를 또 마시고, 단 번에 출마했지만 당선의 영예를 안은 출마자들의 결과를 보면 무형(無形)의 운(運)은 그야말로 연구대상이다.
    누구의 덕을 입었건, 어느 당(黨)을 선택했건, 어느 바람(風)이 불었건 간에 관운(官運)이란 무서운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어쩌면 사람의 인생은 하늘이 지어낸 작품처럼 정해진 트랙을 어김없이 밟아 가는가보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윤회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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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