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 氏 의 세계/족보서문.가승

천설 2015. 3. 20. 08:46

 

蓋聞攝人心敦風俗 在乎明譜系 譜系不明 則孰知百派之同一源 而一源

之分 爲百派乎 噫 惟我宣氏 山陽大姓也 山陽之宣 自高麗進士公用臣始 勝國以來 至于今 六七百載 簪纓間赫 支裔繁昌 遂大於數州

使世之氏族 無譜則已 宣氏之大 而烏可以無譜哉 惜乎 昔在壬辰 世傳家乘失於兵燹之中 而可考遺籍 只餘參議公戶口一通耳 爲後裔者 於是乎慨然無譜 乃於康熙二十年辛酉 會于冠山鳳林寺 裒輯舊來家藏 參互考證 修成草譜 則自始祖用臣以下 系承次序 昭然明白 而于時作序文弁卷者 綾城七代孫 宣應賚是已 詠四韻尾繼者 亦綾城七代孫宣南斗是已 譜幾完成 各以障礙之事 未及鋟梓而罷矣

逮至戊午 會于本郡開興寺 更爲修正之時 後生弼夏壽龜輩 做出意外臆說 始祖二代謂之疑祖 而以始祖之第二孫允祉 起頭爲始 序列渠派 然後始祖用臣二代 則錄于其下 以及元祉 而次次分錄云云 則其奪宗亂倫之罪 孰有甚於此哉 門長聖龜 驚駭其言 正色甄責曰 始祖之曾孫 參議公戶口 旣已昭的 則爾何妄言之如是耶 壽龜等 終不悔悟 欲逞其奪宗暗計 雖渠輩暗慝執拗之心 非不知進士公之眞爲鼻祖 乃欲移揭於允祉之下者 厥有然矣

蓋進士公用臣之子 長曰承奉郞監察糾正儒 次曰進士佐 儒之子 長曰左右衛保勝郞將元祉 次曰按廉使允祉 而元祉子孫卽吾之派也 允祉子孫則彼之流也 吾派則其數孱微 山陽郡數面 戶疏而門寒 彼流則厥數繁衍 長寶樂三州 沙散而碁布 故這們中一種迂怪漢子 恃渠繁衍 蔑我孱微 不欲以一脉宗統 讓頭於吾 而嚗地之上 敢刱疑祖之說 便要其換易宗支 是其子孫之所忍言 所忍爲者乎 若售渠意而以此成譜 是孫而居祖上也 子而居父上也 倫綱之倒置 莫此爲甚 故力爭排闢 極其廓如 而終不變革他奸巧 因又譜事之未完矣

其後己巳 弼夏壽龜等 又弄陰謀 但與其同爲允祉之派 纂修譜系 一如戊午事云 故巡相韓益謩 時以此由呈議送卞正 則換易宗支 錯亂世代 誠極可駭云者 乃其題音 則彼流悖慢之狀尤益綻露矣 噫 吾之譜 旣成於辛酉 則辛酉之事 其亦弼夏等先父兄與吾先同貞合議 而奈之何壽龜等 不席先父事爲 而打成絶倫之計耶

大抵此事 直者吾也 曲者彼也 直者事直而勢弱 曲者事曲而勢强 直者雖弱不欲見脅於曲者之强 曲者雖强 亦難制壓於直者之弱 彼此相持 蚌𧑐其勢 於斯時也 壽龜等擧措 有若謝絃矢貌樣 便欲歸本 而以始祖用臣定爲始祖 則妄稱疑祖之罪 卒難贖也 欲其換次 而以渠先允祉爲始祖 則惟吾正直之義 亦難制也 理屈辭縮 退與渠派 暗然修譜 而開卷初頭 不書用臣三代 直書允祉 以渠若祖若父乃子乃孫 系系承承 以之印刊 是時則聖龜已死之後也 若聖龜在 則豈能使斥黜始祖 而以允祉爲始祖也哉

嗚呼 彼旣各立 不與吾同謀 而渠與渠修譜 則在吾輩 而何獨無完譜之道乎 於是與宗人宣瓚重宣德魯宣震喆等 修輯而成書 旣成而印刊 則上而昭穆之次第 井井不紊 下而枝分之派流 段段有序 而傍先允祉亦列於始祖第二孫行也 彼哉壽龜等譜錄 則允祉雖無來脉之可尋 觀吾譜則祖而居上 父而居亞 允祉陟降之靈 若不昧於千載之下 則其無感欣於九亰之上耶

噫 吾輩其始也 受姓於一本 天倫之懿 而豈不親且重乎 其支爲千萬分而又分 或相與爲塗之人是懼 不幸有不肖作梗 乃至有各譜之境 而竟止作塗之人焉 嗚呼痛哉 凡爲後昆者 欲知吾門往事之爻象 其將詳味乎此哉

上之三十三年 丁丑三月下澣 橫城縣監 五代孫翊昇

 

번 역3. 보성선씨족보서(寶城宣氏族譜序) [정축보서, 1757]

 

대체로 인심을 가다듬고 풍속을 후덕하게 하는 것은 족보의 계통을 밝히는데 있다고 들었다. 족보의 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면 모든 종파가 그 근원이 하나이며 하나의 근원이 나누어져 모든 종파가 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 오직 우리 선씨들은 산양(山陽 보성의 옛 이름)의 대성(大姓)이다. 산양의 선씨들은 고려 진사공(進士公) 용신(用臣)으로부터 비롯되어 고려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육칠백 년 동안 큰 벼슬을 한 사람이 간간이 빛났으며 후손들도 번창하여 마침내 여러 고을에서 큰 집안이 되었다.

가령 세상의 다른 씨족들이야 족보가 없다 해도 그만이겠지만, 선씨처럼 큰 성씨가 어찌 족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애석하구나! 옛날 임진년 난리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가승(家乘)을 전란 중에 잃어버리고, 상고할 수 있는 남은 문적이라고는 단지 참의공(參議公)의 호구단자 한 통뿐이었다. 후손된 사람으로서 이에 족보가 없는 것을 개탄하여 강희(康熙) 20(1681) 신유(辛酉)에 관산(冠山)의 봉림사(鳳林寺)에 모여서, 옛날부터 집안에 남아 전해오던 것을 모아 서로 참고하고 고증하여 초보(草譜, 족보 초안)를 만들었으니, 시조인 용신(用臣)에서부터 그 아래로 계통을 이은 순서가 환하고 명백해졌다. 그리고 그 당시 책머리에 서문을 지은 사람은 능성(綾城)에 사는 7대손 선응뢰(宣應賚)였으며, 사운(四韻)의 시를 지어서 말미에 붙인 사람도 또한 능성에 사는 7대손 선남두(宣南斗)였다. 그러나 족보가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각각 장애가 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인쇄를 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무오년(1738)에 이르러 본군의 개흥사(開興寺)에 모여서 다시 족보를 수정할 때, 후손 필하(弼夏)와 수구(壽龜) 등이 뜻밖의 억지 주장을 만들어내어, 시조 2대를 의심스러운 조상이라고 하면서, 시조의 두 번째 손자인 윤지(允祉)를 첫머리에 올려 시조로 삼고는, 그들의 파를 순서대로 나열한 뒤에, 시조인 용신(用臣) 2대는 그 아래에 기록하여 원지(元祉)에 이르도록 차례대로 나누어 기록해야 한다고 운운하였다. 그런 즉 그들의 종통을 빼앗고 윤리를 어지럽힌 죄가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문중 어른인 성구(聖龜)가 그 말에 놀라 정색을 하고 꾸짖기를,

시조의 증손인 참의공 호구에 이미 환하고 정확하게 나와 있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렇듯 망령된 말을 하느냐?”

하였는데, 수구(壽龜) 등이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종통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끝내 이루려고 하였다. 비록 그 무리들이 음흉하고 간특한 마음을 집요하게 갖고 있었지만 진사공이 참으로 시조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니, 시조를 윤지(允祉)의 아래에 옮겨 게재하려는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

진사공 용신(用臣)의 아들 중에 큰아들은 승봉랑감찰규정(承奉郞監察糾正) ()이며 둘째아들은 진사(進士) ()이다. ()의 큰아들은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 원지이며 둘째아들은 안렴사(按廉使) 윤지(允祉)이다. 원지의 자손이 바로 우리 종파이며 윤지의 자손이 저들의 종파이다. 우리 종파는 그 수가 적고 미약하여 산양군의 여러 면에 거주하지만 호수(戶數)가 드물고 문중이 한미한데, 저들의 종파는 그 수가 매우 많아서 장흥, 보성, 낙안 세 고을에 걸쳐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고 바둑판처럼 퍼져 있다. 그러므로 저들 중에서 어떤 괴이한 자가 그들의 번성한 것을 믿고는 우리의 잔약함을 능멸하여, 한 줄기 종통의 앞자리를 우리에게 양보하지 않으려고 백주 천하에 감히 의심스러운 조상라는 주장을 만들어 제멋대로 종파와 지파를 바꾸도록 요구하니, 이것 그 자손들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말이며 차마 할 수 있는 짓인가.

만약 저들의 뜻대로 족보가 만들어진다면, 이는 손자가 할아버지의 위에 있게 되고 아들이 아버지의 위에 있게 되는 것이니, 윤리(倫理)강상(綱常)이 뒤집히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껏 다투어 배격하고 끝까지 확실하게 하려고 애썼으나 끝내 저들의 간교한 행태를 바꾸지 못하였고, 따라서 족보 만드는 일도 매듭을 짓지 못하였다.

그 후 기사년(己巳年, 1749)에 필하(弼夏)와 수구(壽龜) 등이 또 제멋대로 음모를 꾸며 단지 그들 윤지(允祉)의 파가 되는 사람들만 함께 족보를 만들면서 한결같이 무오년(1738)에 했던 것처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순찰사 한익모(韓益謩)가 당시 이 일로 올린 논의에 변정(卞正=辨正)을 보내면서, ‘종파와 지파를 바꾸고 세대가 뒤바뀐 것은 참으로 지극히 놀랄만한 일이다 운운하는 내용으로 그 제김(題音 판결문)을 내렸으니, 저들 패거리의 패악스럽고 방자한 실상이 더욱 더 드러난 것이다.

! 우리 족보는 이미 신유년(辛酉年, 1681)에 완성되었으니, 신유년의 일은 또한 필하(弼夏) 등의 선부형(先父兄)과 우리 선조가 같은 마음으로 합의한 일인데, 어찌하여 수구(壽龜) 등은 선부형들의 일을 따르지 않고 윤리를 끊어버리는 음모를 꾸미는가.

대저 이 일에서 옳은 쪽은 우리들이요 옳지 못한 쪽은 저들이다. 옳은 쪽에서 주장하는 일은 옳지만 형세가 미약하고, 옳지 못한 쪽에서 주장하는 일은 옳지 못하지만 형세가 강하다. 옳은 쪽은 비록 형세가 미약하지만 옳지 못한 쪽의 강한 형세에 굴복 당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옳지 못한 쪽은 비록 형세가 강하지만 역시 옳은 쪽이 미약하다고 하여 억누르기는 어렵다. 피차간에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마치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과 같은 형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구(壽龜) 등이 저지른 일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모양이 되었으니, 원래대로 돌아와 시조인 용신을 시조로 정하게 될 경우 제멋대로 의심스러운 조상이라고 일컬었던 죄를 끝내 면할 수가 없고, 조상의 순서를 바꾸어 그 선조 윤지를 시조로 삼을 경우 우리 쪽의 바르고 곧은 의리를 제압하기 어렵게 된 형국이었다.

 

이리하여 사리가 모자라 주장이 몰리게 되자 물러나서 그 쪽 파들과 함께 몰래 족보를 만들었는데, 책을 펴는 첫머리에 용신(用臣) 이하 3대를 적지 않고 곧바로 윤지(允祉)부터 써 넣은 뒤 그들의 할아비며 아비며 아들이며 손자를 대대로 이어 적어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이때는 성구(聖龜)가 이미 죽은 뒤였으니, 만약 성구(聖龜)가 살아있었다면 어찌 시조를 내쫓고 윤지(允祉)를 시조로 삼는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 저들이 이미 각자 독립하여 우리들과는 함께 의논하지도 않고 저들끼리 족보를 만들었으니 우리들 입장이라고 어찌 유독 족보를 완성할 방법이 없겠는가. 이에 종인(宗人) 선찬중(宣瓚重), 선덕로(宣德魯), 선진철(宣震喆) 등과 함께 편집하여 족보를 만들었다. 이미 완성하여 간행을 하고 보니 위로는 소목(昭穆)의 순서가 뚜렷하고 분명하여 문란하지 않고, 아래로는 나누어진 유파가 하나하나 질서가 있게 되었으며, 방계(傍系) 선조인 윤지(允祉) 역시 시조의 두 번째 손자 항렬에 자리하게 되었다.

저 수구(壽龜) 등이 만든 족보 기록에서는 비록 윤지의 내력을 찾아볼 수 없겠으나, 우리 족보를 보면 할아비는 위에 있고 아비는 그 다음에 있어서 윤지의 움직이는 혼령이 만약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없어지지 않았다면 무덤에서라도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겠는가.

! 우리들은 애초에 하나의 근본에서 성()을 받았으니 천륜의 아름다움으로 볼 때 어찌 친근하고도 소중한 사이가 아니겠는가. 그 가지가 천번 만번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지다 보면 혹 길에서 만난 사람처럼 될까봐 두려운 법인데, 불행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손이 트집을 만들어 각각 따로 족보를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마침내 길에서 만난 사람처럼 되고 말았다.

아 슬프다. 무릇 후손된 자로서 우리 문중의 지나간 일의 모양새를 알고자 한다면 아마도 여기에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상 33 정축년 3월 하순에 횡성현감(9세 선후덕) 5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