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에는

올빼미 2015. 11. 9. 18:42

 

사진을 통한 페양기생에 얽힌이야기

 

관객들, 공연 보러 구름같이 몰려"

평양기생학교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장면. 가운데 한복을 입은 기생이 가수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제공

평양기생학교 학생들이 풍자극 무용인 레뷰댄스를 추고 있다. 가운데 지팡이를 든 댄서 역시 남장을 한 기생이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제공

"모두 비상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단원들은 열광했다.(중략)노래가 끝나자 기생들을 찾아가 사인을 구하는 사람들이 쇄도했다. 기생들은 능숙한 솜씨로 서명을 했다."

1920년대 한 일본인 무리가 장고를 치며 일본 유행가를 부르는 평양기생들을 보고 남긴 글이다. 그들은 평양의 기생학교를 "진기한 것"으로 표현하며 "앞으로 5년, 10년 뒤에는 그녀들 중 놀라운 배우, 음악가 등 예술가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실제 당시 평양기생이라 하면 미와 끼를 갖춘 조선시대 최고의 '예능인'으로 손꼽혔다. 이들을 길러내는 평양 기생학교는 일본인들의 평양 관광 필수코스로 자리잡았고, 일본이나 타국 사람들이 평양 관광을 왔다가 기생구경을 하고 가지 않으면 의아해할 정도였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지난 24, 25일 한양대에서 열린 '동아시아의 문화표상'국제학술회의에서 평양기생에 대한 연구 논문인 '표상으로서의 평양기생'을 발표했다. 조선의 기생문화를 다룬 논문이나 책은 적지 않지만 그 대표격인 평양기생을 식민지 시기를 중심으로 다룬 논문은 별로 없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4년 37명에 불과했던 평양기생은 1929년 164명, 1934년 285명, 1940년에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평양기생수가 이처럼 급격히 늘어난 건 평양이 기생교육의 본거지로 자리잡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기생학교는 갑오개혁 이전 관기 교육시설에서 출발해 대한제국시절 '기생서재(書齋)'가 들어서며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기생서재가 많아지자 통합 작업도 있었고, 그 결과 1921년에 이 '기성권번 학예부'가 탄생했다. 이곳에서 기생들은 3년 코스로 시조, 가곡, 산수, 춤, 노래, 일본어 등을 익혔다. 그 중에서도 노래를 가장 중요시했는데 기생들은 양반들이 유유자적하면서 위엄을 잃지 않는 분위기로 노래하는 가곡, 애절한 아리랑 등을 배웠다.

1930년대 들어서는 근대화에 젖어 들기 시작한 젊은이들을 위해 풍자극 무용인 레뷰(revue) 춤도 배웠다. 기생학교 학생들의 공연을 본 한 일본인은 "꽃과 같이 아름다운 유명한 일류 기생들"이라며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자태는 해당화가 이슬을 머금은 듯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 평양기생들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해 "그녀들을 음악예술가로서 대우했다"고 했다.

평양기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음식점 누각이나 극장서 가무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밤마다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며 "수십여 명의 선녀같이 아름다운 예기의 얼굴들이 등불 빛에 둘러싸였다"고 보도했다. 공연이 끝나면 기생들에게 사인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도 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기생 중에는 가수로 직업을 변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평양이 '가수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기생가수들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예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손꼽혔던 왕수복은 1937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직후부터 북한서 민요가수로 활동해 공훈 배우가 됐다.

평양기생의 삶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기가 많고 잘 나가는 기생이 있으면 반대로 '잘 안 팔리는'기생도 있는 법이다. 이들은 대개 매음으로 빠졌고,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기독교, 청년회 등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언론 또한 기생들의 밀매음을 앞장서 비판하기도 했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그런 기생을 더러"더럽게 몸을 팔고 음란한 노래를 부르며 부끄러움 없이 시가지와 보통 인가 근처에 섞여 (중략)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보도했다. '기생=매음녀'라는 이미지가 생겨나 기생폐지론이 대두된 배경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평양기생들은 기생학교에서의 수업, 연주회, 대중가수로의 진출 등으로 인해 예능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며 이들을 대표하는 표상은 "연예인"이라고 평가했다.

 

왜? 평양 기생이 유명해 졌나?

평양 기생으로 유명한 장연홍

평양기생이 다른 지역 기생들보다 괜찮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평안도 여성들이 예뻐서였기 때문일까? 남남북녀이기 때문이었을까? 또 평양에 기생이 많이 몰린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기생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 조선 시대의 정치적·외교적 상황과 관련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돈이 많이 모이는 곳에 유흥가가 몰리듯이, 조선시대의 평양에도 돈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기생들도 그리로 몰렸다고 볼 수 있다. 부자가 많이 살았던 중국의 쑤조우·항조우에 미인이 많았던 것도 유사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평양에 돈이 많이 몰린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에서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안도에서 거둔 세금이 중앙에 상납되지 않고 평안도에서 자체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18세기 초반까지는 중앙 정부는 평안도 세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경국대전>의 속편인 <속대전> 권2 호전(戶典) 수세조(收稅條)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나온다.

 

 

                              평양 기생학교

서북의 세곡(稅穀)은 본도(本道)에 유보하고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서북, 즉 평안도의 세금은 원칙적으로 평안도에서만 사용하게 한 조항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른 지방으로 옮길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평양의 관리들은 평안도에서 거둔 세금을 중앙 정부에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평양 관리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그런 평양 관리들의 '비자금'을 포착한 것이 기생들이고, 그 기생들이 평양에 모이다 보니 자연히 평양은 기생으로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기생들이 많이 모이면 괜찮은 기생들도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세금을 자체 관리한 평안도... 돈 몰린 곳에 기생 모이다

조선시대에 중앙 정부에서 평안도 세금을 중앙으로 거두어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대내외적 사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변방 방어의 필요성 때문에 평안도에 군수물자를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는 평안도가 대(對)중국 방어기지의 최일선에 있었음을 생각할 때에 당연한 것이다.

 

둘째, 평안도의 낮은 토지생산성을 감안할 때 중앙에서 평안도 세금까지 거둬들이는 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백성의 최저생계를 위협하는 것은 정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셋째, 운송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안도 물자를 중앙으로 운반하는 것은 그다지 실익이 없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사정은 동일했다. 전근대 중국 정부의 재정적 고민 중 하나는 조세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동안 운반 일꾼들이 그 곡식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그런 예는 예는 비일비재했다.

 

넷째, 한·중 간 사신의 접대 비용을 평안도가 자체 부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토지생산성이 낮은 평안도 사람들에게 사신 접대 비용도 부담하고 여분의 물자도 중앙으로 보내라고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중앙 정부는 공식적인 사신 일행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주·회령·경원에서 열린 중국과의 호시무역(互市貿易)의 비용도 평안도·함경도에 전가했다.

 

평안도 도민들은 여러 가지로 과중한 조세 부담을 안고 있었다. 1882년 조선과 중국이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5조에서 호시무역 경비 부담을 폐지하기 전까지, 평안도·함경도민들은 호시무역 경비까지 부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부마저 손을 내밀었다면, 평안도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평안도의 세금은 평양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했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 관리들의 호주머니에 '비자금'이 축적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평양기생이 유명해진 것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돼 있었을 것이다

평양 기생들

 

 

 

 

 

평양기생 남쪽사내 후리기

멀리서 보면 죽은 말 눈깔 같고 / 가까이서 보면 고름이 흐르는 종기 같네.

두 볼에 이빨 하나 없는데도 / 한 배의 생강을 모두 먹어 버렸네.’

   

 남쪽 출신의 상인 하나가 배에 생강을 싣고 평양으로 팔러 갔다가 기생에게 유혹당하여 지닌 돈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마침내 기생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한탄을 금치 못하여 시 한 수를 읊은 것이다.

 이빨이 하나도 없음에도 그 비싼 생강을 모두 먹어버렸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의 기생들은 정조도 사랑도 없는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였다. 돈을 울궈 내기위해 갖은 교태를 부리다가도 돈이 바닥난 것을 알면 헌신짝처럼 버렸다. 해서 기생의 교태와 눈물, 그리고 약속은 뜬구름이라는 속담까지 나왔는데, 이를 풍자한 노래가 <배비장타령>으로 줄거리가 다음과 같다.

 배씨라는 성을 가진 자가 있어, 평양감사의 비장이 되어 한 기생을 사랑하다 이별하고 돌아올 때 이빨을 뽑아주고 맹세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기생이 약속을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이빨을 돌려 달라고 하니, 기생이 이빨이 한 되나 담겨있는 상자를 열고서, 배비장의 이빨도 이 가운데 있으니 알아서 찾아가라고 했다.’

   

 배비장이 언약의 표시로 이빨을 뽑아준 것은 발치(拔齒) 풍속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몸에 이름을 새겨 넣는 연묵자자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애정 풍속인데, 이빨은 오래지나도 모양이 변하지 않기에 굳은 맹세의 표시로 뽑아 주었던 것이다.

해서 순진한 난봉꾼들 중에는 매양 만나는 기생들에게 이빨을 뽑아주어 앞니가 듬성듬성한 자도 더러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람을 ‘기생 치마폭에 빠진 합죽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아무튼 평양기생들은 오래도록 정분을 주고받은 한량과 송별할 때는 억지로 눈을 문질러 눈물을 쏟아내는 명연기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 팔도의 한량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서 평양을 색향(色鄕)이라 불렀으며, 평양기생의 사내 후리기를 으뜸으로 꼽았던 것이다

 

평양 기생학교 건물

 

 


 

 

왜색문화에 휘둘린 평양기생 공연모습

 

 

               일제시대때 평양기생 권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