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의 졸장들

봉달이 2014. 9. 10. 12:48

 

구 일본군에는 육군뿐만이 아니고 해군에도 똘끼로 충만한 인간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요새 일본극우주의자들이 찬양해마지않는 야마모토 이소로꾸도 따져보면 평장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도 해군내의 파벌과 보신주의에 목을 맨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성공한 작전이라곤 대전초기 기습전들뿐이었습니다..
그건 어찌보면 "자고있는 애들 때리기"였으므로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지금에 와서 보니까 그가 해군에 우글거렸던 다른 꼴통들 중에선 그나마 나았고 일찍 전사해 버렸으므로 일본에서는 명장이라고 찬양하고 난리를 치지만 우리까지 그런 시각을 가져서는 안되리라고 봅니다..
어쨌든 해군출신 오늘의 졸장들을 소개합니다..

 



1. 소 개

- 이 름 후쿠도메 시게루 (福留繁 1891년 2월 1일 - 1971년 2월 6일)
- 최종계급 구일본해군 중장
- 시대착오적 전술인 거함거포주의의 왕광팬(항공모함전단에 전함으로?)
  구일본해군내 성적지상주의와 보신주의의 거두
  전쟁초반엔 나름 작전이라고 짰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그냥 책상머리만 지킴.
  작전 계획이 미군 손에 넘어갔는데 이를 알면서도 함구(욕 먹을까바...), 작전은 계획 그대로 속행, 아군을 송 두리째 들어먹음

- 그의 침묵과 모르쇠로 수많은 아군을 도륙냄. 그래서 침묵의 (아군)도살자...

 

2. 개 요 
- 돗토리 현의 농가에서 태어난 후쿠도메가 해군을 지원하게 된 것은 돈이 없는 집안사정 때문에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

- 1912년 해군병학교 40기로 졸업한 그의 동기로는 오니시 다키지로, 우가키 마토메, 야마구치 다몬 등이 있음.
- 1926년 11월에 해군대학 24기를 수석으로 졸업(여기서부터 일본해군의 병폐가 나타남. 무조건 졸업성적순으로 진급하는...)
- 1932년에 유럽각국을 순시하는 파견단에 참가.
- 1933년에 해군대좌로 승진한 그는 이후 연합함대 참모, 군령부 제 1 과장, 지나방면군 함대총참모장, 전함 나가토(長門)의 함장 등을 역임.

 

3. 태평양전쟁 초기

- 1939년에 해군소장으로 승진 후 연합함대 겸 제 1함대 참모장으로 임명.
- 당시 진주만기습을 준비중이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합동훈련 후 "저것(비행기)으로 하와이를 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옆에 있던 그는"그것보다 함대 전부를 내 보내 결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
  즉 전함이나 순양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내보내 함포공격을 하자는 소리.이것은 당시 해군 내에 남아있던 대함거포주의자의 전형.
- 물론 전술전략의 귀재라 불린 후쿠도메가 진주만 기습작전을 총괄하여 진주만작전의 성공은 그의 공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실질적인 작전입안은 항공참모였던 겐다 미노루나 최종점검했던 쿠로시마 카메토(이 인간도 후에 뻘짓대마왕이 됨..꼴통..)가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음(그는 그냥 데스크 싸인맨..도장 쾅..)


4. 해군 을(乙) 사건

- 1941년 4월에 군령부 제 1 차장으로 취임 후 1942년 해군중장으로 승진

- 1943년 5월, 해군 갑(甲)사건(암호유출로 인한 야마모토 대장의 피습 전사사건)으로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대장의 참모장이 됨.
- 전황은 일본에 갈수록 불리해져가는데 후쿠도메는 유효한 작전을 입안하지 못한 채 그냥 책상머리에 앉아 허송세월을 보냄(아는게 전형적인 함대결전 꼴통사상이니...아무리 짜내봐야...)
- 그러고선 한다는 짓이 1944년 3월 31일에 미해군의 습격이라는 거짓정보를 믿고 연합함대 사령부를 팔라우에서 다바오로 이동하기로 결정.(늑대가 나타났다~보따리싸서 토끼자~)
- 후쿠도메는 정비도 되지 않은 비행정을 발진(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소년의 말에 깜짝 놀라서..)시켜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태우고 악천후속에 비행을 강행.
- 도중에 고가 사령관의 비행정은 실종(이후 전사처리..자알 한다..)되고 자신이 탄 비행정은 세부 해역에 불시착.
- 후쿠도메 및 수행원은 미군이 지휘하던 게릴라 부대에 잡혀 포로신세가... (해군 을사건)
- 여기까지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이 때 후쿠도메는 소지하고 있던 기밀서류를 몽땅 게릴라에게 빼앗김.(여기까지도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작전은 변경하거나 취소하면 되니까..)
- 이후 필리핀 게릴라지도자와 상호교환형식으로 풀려난 후쿠도메는 해군차관이던 사와모토 요리오 중장에게서 사건을 추궁당했지만 본인은 철저하게 혐의를 부인하고 모르쇠를 유지.
- 살아남은 해군 고위관료를 처벌하는 것은 사실상 불문에 붙여져 기밀서류 망실은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으며 후쿠도메는 되려 승진해서 1944년 6월에 제 2 항공함대의 사령관으로 배치됨.(이것들은 도대체가 머지?..해군이나 육군이나..)
- 그때 빼앗긴 기밀서류가 あ(아)호 작전(あ는 아메리카의 아를 의미..이때 명칭은 "신 Z호 작전"..)계획 서류였는데..
- 여기서 あ(아)호 작전이란..

 

5.あ(아)호 작전

- 흔히 "마리아나 해전"이라고도 불리며 이 해전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19일부터 6월 20일에 걸쳐 마리아나 제도 해협과 팔라우 제도해협에서 일어났던 미해군 기동부대와 일본해군 항모기동부대 사이의 해전. 미군측의 공식적인 호칭은 필리핀해 해전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 1944년 초부터 미군은 중부 태평양에서 공세를 본격화하여 2월에는 트랙공습과 함께 마셜 제도를 침공하여 이를 점령, 3월엔 팔라우를 공습해 정박함선과 기지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안기고 4월에는 뉴기니아 섬의 홀랜디아, 아이타페에도 상륙.

-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함대 사령부는 5월부터 6월에 마리아나가 서 캐롤라인 방면에서 침공을 받을 것이라 판단. 괌, 사이판, 티니안의 병력을 강화해 적을 팔라우 방면으로 유인한 후 기동부대와 기지항공대로 격파하는 작전을 입안.

- 이 작전이 あ(아)호 작전이었는데 후쿠도메 시게루가 현지 토민병에게 빼앗긴 아호 작전의 기본서류인 <신 Z호 작전>의 계획서가 미군에게 입수당하면서 그 계획 및 암호를 완전히 파악당하고 말았음.

- 미군은 파악한 일본해군의 병력, 항공기와 함선의 숫자, 보급능력 등의 중요정보를 바탕으로 약 1개월에 걸쳐 용의주도한 작전을 기획.

- 해군 을 사건에서 생존한 후쿠도메 참모장은 처벌을 우려해 일부러 정보유출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해군은 <신 Z호 작전>의 계획서가 미군에게 넘어간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

- 그래도 뭔가 게름칙해서 당시 일본해군이 했던 조치란게..<신 Z호 작전>에서 <あ(아)호 작전>으로 작전명을 변경한 것.(꼴통들..조치란게 고작 이름바꾸기.....-_-;;;)

- 명함만 바꿔서 기존 작전안대로 들이밀어 넣은 일본해군의 뒷얘기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비디오...

- 후쿠도메의 삽질스런 공헌으로 미리알고 곳곳에 매복한 미잠수함에 깨지고..미해군 항공대에 깨지고..(그유명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도 여기서...)
- 이때 일본해군의 피해는 항모3척 포함, 항공기 500여대,30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일본해군은..여기서...당황하지않고...끝~!!)
- 물론 마리아나해전의 대패배의 원인을 꼭 후쿠도메가 다 뒤집어쓰기엔 무리가 있음.
- 투입 병력의 차이,병기의 차이, 조종사의 기량차이 등등.. 이때엔 이미 미해군과 일본해군의 차이가 월등하게 차이가 났기때문에 후쿠도메가 아니더라도 일본해군은 박살이 났겠으나..
- 만약 후쿠도메의 삽질이 아니었더라면 작전변경이나 취소등으로 그렇게 단박에 개박살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사료됨.(뭐, 그래도 어차피..결국엔 박살날을 것...)

- 아무튼 여기서 대참패로 사이판을 포함한 마리아나 제도가 미군 손에 넘어감으로써 B-29에 의한 일본본토로 전략폭격이 가능해져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게 됨.

 

6. 종전 후

- 1945년 1월에 제 13 항공함대 사령관 겸 제 1 남파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쿠도메는 2월에 제 10 방면함대 사령관직도 겸직.

- 주둔지이던 싱가포르에서 그대로 종전을 맞이한 후쿠도메는 전범으로 감금된 후 1950년에 풀려나 일본으로 귀환.

- 후에 일본해군 전몰자들의 모임인 수교회(水交會)의 이사장을 지내다가 1971년에 사망해 도쿄 타마묘지에 묻힘.

- 미해군과 필리핀 게릴라들의 수많은 증언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해군 을사건에 대해 부인했던 후쿠도메는 결국 자신이 승선했던 비행정의 병사가 후쿠도메가 반일 게릴라에게 정보문서를 건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함으로 사실이  뽀록남.
- 기밀서류는 미국에서 발견되었기에 후쿠도메의 은폐사실은 더욱 명확해짐.

 

7. 평 가

- 전 후 그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 그중 기밀분실을 제외하고도 그의 지휘관 혹은 참모로써의 대표적 삽질사례를 살펴 보면..
- 남태평양 해전에서 전투 후 나구모 함대의 존재기를 곤도함대로 이송했지만 즉시 다음작전을 입안하지 않아 과달카날 섬의 미군비행장을 내버려 둠.

- 과달카날 섬의 항공정찰을 부실하게 해 전투기 활주로의 건설을 탐지하지 못하여 일본군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듬.

- 제 2사단의 상륙에 경항공모함로 호위하지 않은 것은 그의 함대결전주의와 육해군의 소통부재를 불러 결국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을 기아상태에 빠트림(채식동물이니 풀뜯어 먹으면..-_-ㅋ).
- 남태평양 해전에서 <에섹스급>이 취역하기 전까지 미군항모보다 전력의 우세성을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전세역전의 빌미를 내줌.(결론적으로 도장이나 찍는 데스크 꼴통 참모란 얘기..)

- 항공기가 주력병기가 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소모전만 주도한 인물이었음. (이 증언자였던 사카이 사부로는 당시 해군상층부를 강하게 비판)

-  2 항공함대의 사령관시절에는 적 세력권에서 탈출하여 생환한 항공병들에게 추궁만 하고 자폭공격만을 강요함.(일본꼴통 졸장들은 닥공과 카미카제가 주특기..)

- 해군 을사건에서 나타났듯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던 그를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매우 싫어하며 <미숙한 대장장이>라고 부름

- 일본해군의 성적 지상주의 교육(해군병학교 성적순으로의 진급이 기본!)에 따른 교과서적인 탁상공론자에다 유연성이 부족했던 후쿠도메는 고가 사령관이 취임할 시점에선 이미 구식화된 인재였음.(빨리 짤랐어야..)

- 하지만 우리에게는 훌륭한 삽질로 패전에 공헌한 바가 크므로 욕 할 필요는 하나도 없음.

 

1. 소 개
- 이 름 쿠로시마 카메토 (黒島亀人 1893년 10월 10일-1965년 10월 20일)
- 최종게급 일본해군 중장
- 야마모토의 충복이자 라인의 최고 수혜자(이때까지는 그나마 준수했으며 평범한 평장..)
  야마모토 사후 똘끼 대폭발
  1억 총옥쇄의 열렬한 추종자(이놈 주장대로 좀 하지...)
  기상천외 자살병기의 발명대마왕


2. 개 요

- 히로시마 현 쿠레출생. 3살일 때, 모친에게 버림받고 고아가 됨. 이 때의 충격으로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버렸었다고 함.

- 출세지향형인 그는 쌔빠지게 공부하여 해군병학교를 지원. 그러나 아무리 명석한 그였지만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에서 입학당시 100명 중 60번째를 기록.
- 해군병학교를 졸업 후 해군대학 갑종 26기를 거쳐 순양함의 포술장 등,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코스에서 종사(앞서 서술한대로 병학교성적이 개판..)
- 1933년에 해군성 군무국 1과로 이동, 중좌로 진급한 후 제 5전대 참모를 거쳐 1937년에 제 2함대 선임참모가 되는 재능을 발휘해 일단 주목을 받음.
- 1938년에 대좌로 진급, 해군대학 교관을 거쳐 1939년 8월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자 10월에 연합함대의 선임(수석) 참모로 일약 발탁.

- 야마모토 사령관의 휘하에서 참모장은 여러 번 교체되었지만 쿠로시마만은 유일하게 부동으로 총애를 받음.


3. 태평양 전쟁 초기

- 상당히 준수한 시절.
- 쿠로시마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상관을 만나 그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과 겐다 미노루 소좌가 작성한 진주만 공격의 항공작전 초안을 쿠로시마는 기함인 나가토의 선실에서

  심혈을 다해 전체작전을 기안.(지독한 헤비 스모커였던 그는 담배를 문 채로 식사도 거른 채 두문불출했다고 전해짐..진주만관련 영화에서 자주 나옴..)

- 그렇게 실시된 진주만 공격은 꽤 성과를 올렸지만 겐다, 쿠로시마가 주장한 반복공격은 나구모 사령관의 거부로 좌절, 결과적으로 진주만의 시설과 연료탱크가 보존되어 미해군 반격의 기초가 됨.

- 진주만 작전으로 큰 공훈을 세운 쿠로시마는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작전까지도 입안. 하지만 미군의 암호해독에 의한 작전 노출, 전력차의 미스로 실패.
- 1943년 4월에 야마모토 사령관이 피격되자(해군 갑사건) 1943년 7월에 4년 이상 일한 연합함대 수석참모에서 군령부 제 2부장으로 발령(이때부터 끈 떨어진 연..)


4. 활약상

- 야마모토 피격후 쿠로시마는 분노(숨어있던 똘끼 대폭발)하여 인간을 무기로 한다는 <특공>이란 수단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함.(야마모토와 카미카제가 먼 상관? 희안한 놈...)

- 1943년 7월 군령부 제 2부장으로 취임한 쿠로시마는 병기개발을 담당하는 제 2부에서 특공무기의 계획에 들어감.(이때부터 발명왕의 길로..)
- 그해 8월, 해군수뇌부 회의에서 쿠로시마는 필사필살(必死必殺)의 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 전투기에 의한 돌격대 전법을 주장(이노마에 의해 일본해군 특공작전은 그 목표가 세워짐..)
- 최근 증언에 의하면 특공의 입안자는 쿠로시마, 주도는 군령부 제 1부장인 나카자와 소장과 겐다 미노루가 했다고 함
- 1944년 3월에 쿠로시마가 이끄는 군령부 제 2부는 특공병기의 시제방침을 결정해 잠수함 공격용 잠항정, 대공공격병기, 어뢰정, 자주(自走)폭뢰, 인간어뢰 등을 개발함.
- 10월에 레이테 해전에서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에 의해 카미카제 특공대가 출격하면서 특공작전은 개시. 그리하여 종전까지 특공에 투입된 젊은이는 9,500명 이상이었음.
- 이후 많은 다른 군인들처럼 본토결전을 주장하면서 1억 옥쇄를 부르짖음.

 

5. 종전후

- 1945년 5월에 군령부 제 2부장을 사임한 후 대본영의 해군참모 겸 군령부 선임으로 일하다가 종전을 맞이함
- 기회주의자였던 이인간은 전후 전쟁범죄에도 관련되지 않고 자결하지도 않음.(부하들에겐 숱하게 강요하고서는 자기는..)
- 만년에 철학과 종교에 심취(캬~ 철학과 종교라..꼴갑을 떰..-_-;;)한 채 천수를 누리다가 1965년에 폐암으로 72세로 사망
- 유언은 "남쪽섬으로 비행기가 간다"..였다고..(갈 때까지 헛소리를..)

 

6. 그의 발명작들



1) 카이텐(回天 이름도 거지같음..하늘로 돌아간다니..)

  인간어뢰. 2인승.1인승이 있으며 요거 한대로 몇 만톤짜리 단 한방에 보냄.속도는 1형이 12노트, 2형이 20노트. 1,2,3,4,10형의 총 5가지가 설계 실전에 쓰인 것은 1형이 유일 100여 차례의 공격에 투입되어 얻은 전과는

  유조선인 USS MISSESSINEWA 와 구축함 USS Underhill, 단 두 척 뿐.

 

2) 카이류(海龍) 
  특공잠항정이라는 명목으로 제작. 특공병기가 다 그렇듯 이놈도 제정신이 아닌데, 어뢰 2발과 600Kg급 탄두를 장착한 물건으로, 갑표적+가이텐이란 발상으로 만들어졌으나 사실상 어뢰 달아놓은 가이텐이나 마찬가지.

  대부분 요코스카 항만의 방어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일부는 미우라 반도에 배치. 가이텐과 달리 실전에 참가한건 단 한대도 없었음.(210대나 처 만들었는데 그나마 다행...)



3)신요(震洋)
  자살특공보트. 합판을 짜맞춰 만든 소형선박에 폭약(약250kg)을 설치하여 들이받는 것. 길이 5 ~ 6미터에 배수량은 1 ~ 2톤으로 스펙은 각양각색.일단 가이텐, 오카같은 다른 자폭병기보다는 만들기 쉬워서 6,000여척이 제작되어 필리핀과 오키나와, 일본 본토에 배치.
  군함에 부딪힌다면 그 피해는 예사롭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자살병기란 특성상 훈련이 안되므로 실제로는 무경험자가 탑승(한번 들이박아 보고 난 다음에..흠..-_-ㅋ) 덕분에 실제 출격할 때는 목표에 접근하기도 전에 자기네들끼리 충돌한다던지, 잘 나가다가 조악한 신관 덕분에 갑자기 혼자 폭발해버린다던지 하는 문제가 있었음.
  또한 본질적으로 내파성이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날씨가 나빠져서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게 치면 그냥 박살나거나 가라앉는...출격은 했는데 전부 저 모양이 됬는지 남아있는 실전기록은 없음. 
  해군과 늘 대립하며 비협조적이던 육군도 이에 뒤질세라 마루레라는 이름으로 특공정(艇)을 내놓기도 하였음(미친것들..이런건 죽이 잘맞나 봄..)



4)후쿠류(伏龍 엎드린 용이란다..이름도 참..) 
 인간 기뢰(일본군 막장행각의 끝이라 보면 됨..)
 맨몸뚱이에 잠수복 하나 입혀놓고 폭탄을 쥐어준 후 자폭시키는 무기가 개발되어서 훈련까지 들어갔는데 이것이 바로 후쿠류.(후루쿠가 아니고?)
 원래는 인간 기뢰가 아니라 미군 기뢰를 제거하기위한 인간 소해함이었다고 함.(인간기뢰나 인간소해나..죽긴 마찬가지..)
 그러다가 미군의 본토상륙이 임박해오자 이것을 미군 상륙정파괴용 특공병기로 사용하기로 결정.
 사용법은..
 1.잠수복을 입는다.
 2.일명 봉기뢰라고 불렸던 5식 격뢰(五式撃雷)를 든다.
 3.일반적으로 10명이 한 조가 되어서 본토 인근 바다에 미리 잠수해서 대기한다.
 4.마침 머리 위로 미군의 배가 지나가면 들고 있던 기뢰로 찌른다.(머리위로 지나갈 확률은 각자 알아서 생각해보시길..)
 5.결과도 알아서..(이걸 생각해낸 인물이 바로 위대할손 쿠로시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후쿠류 부대는 원래 요코스카의 5개 대대를 포함해서 사세보 등지에 총 10개 대대가 창설될 예정이었고, 요코스카에서 훈련되던 잠수부대 480명을 시작으로 해서 총 3,000명이 훈련을 받았음.
 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그 전에 종전이 이뤄져서 실전 투입은 없었음.
 이 부대에는 주로 장남들이 많이 투입되었음. 이유는 '혼자서 고독하게 버틸 수 있어야 된다'라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지원도 아니고 강제 차출이었다고..큭~ 차남은 고독을 못버티나 봄..불쌍한 장남..)

참고로 위의 사진은 그 유명한 야스쿠니신사 박물관에 전시된 걸 촬영한 것이라고..(저게 자랑스러워 할 물건이라고 전시까지나...저런걸 보면 도대체 먼 생각들을 하고 사는지..)
 

5) 그외 기타등등 잡종뻘짓 무기들...


                          (대공미사일...ㅡ,.ㅡ;;)

 


   (대전차총검술(?)을 위한 각종 결전무기들.....움하하하하하 쿨럭~ )

 


       ( 대전차 자폭지뢰...총검술보단 낫다...)

태평양전쟁 관심많았다가 도라도라도라보다가 검색했는데 너무 잘봤습니다 좋은 공부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런 놈들에게 합병당한 한국이 할 말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