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국주의 과정은?

봉달이 2017. 3. 17. 15:40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5>



장쭤린 폭사 사건과 다나카 기이치의 몰락


- 런던 회담이 개최될 당시 일본에서는 강경 외교 노선을 펼치던 정우회(政友会)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이 1928년 6월 4일에 벌어진 장쭤린(張作霖) 열차 폭파 암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며 민정당(民政党)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들어선 상황이었다.
- 여기서 일본 해군 핵분열의 원인이 되는 런던 회담의 기폭제, 장쭤린(張作霖) 열차 폭파 암살사건(이 사건으로 정권이 바뀌며 런던 회담의 적극적인 참가가 이루어졌으므로..)을 잠깐 설명하고 넘어 가겠다(자세히 설명 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 대폭 요약하겠슴다..)


                          런던 회담에 임한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


- 1926년 7월 1일, 장제스(蒋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북벌 선언(北伐宣言)”을 발표, 1차 북벌(北伐)이 시작되었고, 국민당군은 전국 통일을 바라는 여론을 배경으로 베이징 정부와 각지 군벌들을 압도, 이듬해인 1927년에는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 이 국민당의 1차 북벌 과정에서 직계 군벌 세력들이 괴멸당한 장쭤린은 제 살길을 찾는 방법으로 중국에 이익권을 가진 유럽 각국과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하였고, 따라서 이전의 친 일본 노선에서 친 서구 열강 노선으로 자세를 전환하였으며, 이후 중국에서 권익을 확대하고 싶었던 유럽 열강과 특히, 대륙 진출에 뒤쳐져 있던 미국이 적극적으로 장쭤린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1926년 7월 1일,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는 북벌을 선언한다..


- 같은 시기, 국민당도 마찬가지로 구미 열강의 지원을 원했지만, 이들은 국공합작에 따른 공산당 세력의 확대를 우려, 국민당의 접근에 난색을 표했고, 결국 1927년 4월,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과 이에 동조하는 일부 노동자 세력들을 숙청, 그렇게 1차 국공 합작은 붕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북벌의 지속적인 추진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이 숙청 이후 장제스는 구미 열강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는데는 성공한다(그러면서 장쭤린은 또 다시 끈이 떨어진다..-_-;;)


                                       장제스의 1차 북벌 과정..


- 이후 국민당 내부는 국공합작으로 중국 공산당이 세력을 대폭 확대한 것도 있고, 지네끼리 이리저리 투닥거리며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으나 장제스가 사태의 수습에 성공하며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28년 4월 8일부터 구미 열강의 지원을 받아 다시 북벌 재개에 나섰다(2차 북벌..)            

- 국민당군이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옌시산(閻錫山), 펑위샹(馮玉祥) 등의 군벌(軍閥)들을 차례차례 흡수하며 베이징(北京)을 향해 진격하자 1928년 6월 4일, 베이징을 장악하고 있던 봉천(奉天) 군벌의 대빵 장쭤린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베이징을 빠져나와 원래 나와바리인 봉천(오늘날의 심양(沈諹)..)을 향해 날랐다.



                마침내 2차 북벌이 시작되자 장쭤린은 앗뜨거를 외치며 본진으로 날랐다..


- 한편, 중국 내부의 이런 상황들을 예의주시하던 당시 일본 정부의 수장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일찍이 그가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육군 소좌에 만주군 참모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장쭤린을 알고 있었다(러일 전쟁 때 만주지역 마적단 두목이던 장쭤린은 러시아군의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고 일본의 회유로 이중 스파이가 되었는데, 이때 그를 회유한 것이 다나카 기이치..)

- 따라서 이때도 그는 장쭤린은 앞으로도 이용 가치가 중분하기 때문에 동삼성(東三省)에서 다시 재기시켜 일본의 수족으로 삼는다는 방침을 세웠다(동삼성은 요새 동북 3성으로 불리는 만주지역의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마적단 두목 출신 군벌, 장쭤린..생긴 건 마적이 아니라 게이 스타일인데..흠냐..


- 하지만 말 안 듣기로 유명하고 폼생폼사의 전형이자 삐딱선의 표본, 관동군(關東軍) 수뇌부의 생각은 역시나 본국 정부의 방침과는 완전히 달랐다.
- 이들은 본국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들이 현지 사정을 어떻게 정확히 알겠느냐며 거의 양아치 무리에 가까운 군벌들을 통한 만주 지역의 간접 통치는 분명히 한계가 있고, 해답은 괴뢰 정권에 의한 간접 통치로 나아가야 한다며 어차피 그렇게 할 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만주국을 세우자!! 도대체 어떤 놈이 양아치인지..-_-;;) 
- 따라서 이들은 장쭤린의 만주 복귀는 관동군의 최종 목표, 즉, 만주국 건국에 장애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정부 방침과는 완전 반대로 장쭤린의 복귀를 적극적으로 저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어차피 최종 목표는 만주 괴뢰국 건설인데 뱅뱅 돌아가냐고오~~~

 
- 이런 방침에 따라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쵸타로(村岡長太郎..이름도 참..따로따로..) 중장은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북벌에 의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장쭤린 휘하의 봉천군벌의 무장 해제 및 장쭤린의 실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그 대책의 일환으로 관동군을 요녕성(遼寧省) 일대까지 진출시킬 것을 육군 중앙에 강력히 요청했다.
- 하지만 이미 장쭤린을 계속 이용해 먹기로 결정한 다나카 총리는 관동군의 요구를 당연히 묵살했는데(또한 중국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도 있었다..당시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중좌는 “미국의 전보 하나에 육군 참모본부가 기겁했다”라고..-_-;;) 이렇게 쌩 까인 무라오카 사령관은 열폭, 지 맘대로 장쭤린 암살을 계획하였고 관동군 참모 코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에게 이의 실행을 지시했다.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쵸타로(위)와 참모 코모토 다이사쿠..


- 관동군 사령부는 장쭤린 암살을 국민당의 범행으로 가장하기로 계획을 세웠고, 코모토 대좌의 지시에 따라 폭발물 준비와 실행은 현장 지역의 경비 담당이던 독립 수비대(独立守備隊..남만주 철도 경비부대..) 제 4 중대장 토미야 카네오(東宮鉄男) 대위와 조선군에서 관동군에 파견되어 있던 후지이 사다토시(桐原貞寿) 공병 중위 등이 협력해 이를 준비하기로 모의했다.

- 마침내 1928년 6월 4일 새벽, 국민당 북벌군과의 결전을 포기하고 봉천으로 토까던 장쭤린을 태운 열차가 봉천 근교 황구툰(皇姑屯)의 선로 입체 교차점을 시속 약 10km 정도의 느린 속도로 통과할 때, 열차 위쪽을 지나는 만철선(満鉄線)의 교각에 설치되어 있던 폭약 300kg이 폭발했다.



             일본이 관리하던 남만주 철도와의 교차점 교각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 당시 토미야 대위와 후지이 중위, 이 둘은 장쭤린이 타고 있다고 생각되는 중앙의 귀빈용 차량(과거 청 말기에 쌩육갑질을 하던 할망구 서태후(西太后)가 타던 거..)을 노리고 인근 독립 수비대 경비초소에서 폭약을 점화시켰고, 폭발과 함께 철교가 무너져 내리며 지나가던 열차를 위에서 덮쳤다.
- 장쭤린이 탄 열차는 총 20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가 타고 있던 것은 8번째 객차였고 무너져 내린 교각은 7번 객차를 덮쳤다.
- 이 폭발로 가운데가 절딴 난 열차는 1번에서 6번 객차가 200미터 정도 주행한 뒤에 전복되며 대파되었고 8번부터 후방 객차는 화재를 일으켰다.



 
- 당시 장쭤린은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차량으로 봉천에 옮겨진 후 사망했고, 경비병과 수행원 등 17명이 이 사건으로 사망했는데, 얼척없는 사실은 이 열차엔 중국인들만 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 육군에서 공식 파견된 군사고문 기가 세이야(儀我誠也) 소좌와 장쭤린의 개인 고문 마치노 타케마(町野武馬) 예비역 대좌도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 둘은 나중에 사건의 실체를 알고 열라 지랄했다는..-_-;;;)


           씨박! 나도 일본군 장교다! 그것도 같은 육군!... 당시 열차에 타고 있던 기가 세이야..


- 당시 관동군 수뇌부는 미리 매수한 중국인 아편 중독자 3명을 현장 근처에 데리고 간 다음, 총검으로 살해하고 시체를 방치한 후, 이 사건은 국민당군 공작대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였으나, 이 천하의 상등신들은 이들 3명 중 1명이 죽은 척하였던 것을 몰랐고 현장에서 도망친 생존자가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張学良)에게 알려 그 전모가 중국 측에 알려지고 만다(게다가 이후 벌어진 합동 현장 조사에서 폭파에 사용된 전선이 일본군 경비초소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도 걸린다는..-_-;;)

- 물론 일본 측이 끝까지 잡아떼서 결국 공식 조사 보고서는 배후 불명이 되었지만 일이 이 꼬라지가 되자 이 허름한 계획의 전모는 아무리 숨기려고 해봐야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합리적 의심은 있지만 관동군 사령부 압수수색은 군사 비밀 보호를 이유로 불발..뭐, 그런..-_-;;)



      이 등신들은 온갖 증거를 죄다 흘려놓고 토깠다...당시 제 4 중대장 토미야 카네오(위)..


- 아무튼 이 사건이 미국과 유럽 각국의 관심을 끌며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자 같은 해 12월 24일, 다나카 총리는 히로히토를 찾아가 이 사건은 “관동군 참모 코모토 대좌가 단독으로 계획, 소수의 부하 장교들과 공모해 벌인 짓이므로 관계자를 처분하겠다.”며 일본이 행한 짓임은 인정하면서도 몇몇 하급 장교들에게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워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 그러나 이 짓거리도 영 신통치 않게 되는데, 이렇게라도 이 사건을 무마하려던 다나카가 택도 아니게 육군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어찌어찌 꼬리 자르기로 무마시켜 보려고 했건만...다나카 기이치..


- 당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 장관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관동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관동군을 옹호하는 편지를 히로히토에게 보냈고, 일본 육군은 육군대로 군법회의를 열라는 다나카의 요구를 쌩까며 사건의 당사자인 코모토 대좌를 본토로 이동시킨 다음,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따위의 얄팍한 행정 처분만 내리고는 흐지부지 시켰다.
- 또한 다나카 종리가 국제적인 신용 문제이므로 용의자들을 군법 회의에 처해 엄벌을 내리겠다며 호언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강한 반대 때문에 결국 찌그러지자 이제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고, 당시 야당이던 민정당은 이를 정면에서 성토하고 나섰다.


               같은 편인줄 알았던 육군이 되려 지랄한다..육군 장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 이렇게 안팍으로 쪼이던 다나카 총리는 1929년 6월 27일, 몽키킹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 사건은 범인 불명으로, 그 책임자를 단순히 행정 처분으로 끝낸 것은 육군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헛소리를 나불댔다가 히로히토로부터 “이노마 뭐래? 니가 전에 말한 것과 얘기가 틀리자나?”라는 소리를 듣고는 영혼이 가출하고 만다.
- 이후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시종장(侍従長,,내시 대장..상선(尙膳) 비스무리..)에게 “몽키킹이 가로되, 니 낮짝은 다시 보기 싫다요~~”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자 다나카는 질질 짰다고 하며, 그 5일 후인 7월 2일, 사표를 내던지고는 내각이 총사퇴하기에 이른다.



        스즈키 간타로(위) 왈 "너님 아우토~~"..크흑..모든 책임을 지고..징징~~ ㅠ.ㅠ


- 이렇게 일본 육군의 삐딱선으로 다나카 기이치가 실각에 이르게 되는데, 웃기는 건 이런 육갑질로 인해 일본 군부 스스로가 무덤을 파게 된다는 사실이다.
- 이때 실각한 다나카 기이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재림이라 생각될 만큼 계속 찌그러지던 일본 육군에 있어서는 희망의 표본이었고 군국주의의 화신이었다고 봐도 무방한 인물이었다.
- 그는 러일 전쟁 시기 만주군 참모로,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의 수하였고,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게 발탁되며 1907년, 달랑 육군 중좌의 위치로 당시 일본의 전쟁 수행 기본 전략을 담은 “제국 국방정책(帝国国防方針)”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높은 평가를 한 몸에 받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재림이자 일본 육군의 호프...


- 이후 초슈 파벌의 적극적인 후원과 군인으로써는 제법 유능했던지라 육군 대장까지 승승장구하던 그는 1925년, 치안 경찰법에 의하여 현역 군인은 정치 결사에 가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역에서 퇴역했지만, 곧바로 정우회 총재로 취임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주도하던 당의 정책을 철저한 군국주의자답게 군비 강화, 대외 강경 노선으로 전환시켰다.
- 이후 치안 유지법을 강화시키고 군부와 연계하여 중국으로의 적극적인 진출 방안을 도모하는 등 예전의 정우회가 얻어냈던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렀고, 무엇보다 진보층의 지지를 얻던 민정당에 대항하여 보수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이를 친군화 우경화(親軍化 右傾化) 정책이라 한다..)



- 하지만 장쭤린 폭사 사건으로 인해 관동군과 대립하고 친정인 육군에게 뒤통수를 처맞고는 그가 홀라당 데꿀멍되자 다음에 들어선 정권은 바로 야당이던 민정당 정권이었다.
- 다나카 내각과 대립각을 세웠던 하마구치 내각은 들어서자마자 외무대신에 국제 협조주의를 표방하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를 기용하였고 그 슬로건마저도 당시 일본 군부의 대가리들이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외부적으로는 국제 사회와 협력하고 내부적으로는 군축을 단행한다!”였다.


         국제 협력을 우선시 한 시데하라 외교로 유명해지는 시데하라 기주로..


- 따라서 일본 육군은 자기 편 감싸기라는 얄팍한 이유로 굴러 들어온 호박을 걷어찬 것도 모자라 스스로 구덩이를 파 놓고는 거기에 자신을 내던진 꼴이 되었으며, 해군 또한 육군의 삽질로 같이 한 몸뚱이로 묶여 같은 구덩이에 데꿀멍 되기에 이른다.
- 바로 이 시기 하마구치 내각은 런던 군축 회담의 참가를 제의받았고, 게다가 핑계거리도 좋아서 당시 일본은 군사비가 해마다 늘면서 국가 예산의 40%를 상회할 정도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었으니 얼씨구나하고 런던 회담의 참가를 결정하였으며, 결국 일본 해군은 육군이 날린 부메랑에 지네가 먼저 뒤통수를 처맞게 된다.
- 여담으로 다나카 기이치로는 실각한지 3개월 만에 협심증으로 급사했는데, 웃기는 건 비슷한 떨거지들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권력에서 멀어지자마자 급사했다(하여간 비슷한 것들은 지구를 떠나는 것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s://ja.wikipedia.org/wiki/%E5%BC%B5%E4%BD%9C%E9%9C%96%E7%88%86%E6%AE%BA%E4%BA%8B%E4%BB%B6
http://www.lishiquwen.com/news/61234_all.html
http://holywar1941.web.fc2.com/kindai-santou.html
http://www.geocities.jp/fujimoto_yasuhisa/isizaka/kobore.htm
http://news.ifeng.com/history/vp/detail_2011_01/23/4408596_0.shtml
https://ja.wikipedia.org/wiki/%E5%B9%A3%E5%8E%9F%E5%96%9C%E9%87%8D%E9%83%8E

(1등) (!)(!)(!)
히호(~)(~) (-_-);;
또 2등.... -_-;;;;;;;;;
(꺄오)
동메달이라능....
10000 독자중 (3등)이시라니 (우왕굳).... (만세)
매일 흥미진진 하네요 감사감사!!
별 말씀을 다하심다..꾸벅~~ ^^
1. 장작림 폭살사건에 대해서 소련정보기관이 배후 주모자로서 개입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책을 중국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20년대 소련이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구 제정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이권들을 지키기 위해서 반공주의자인 장작림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배경 설명 등 귀가 솔깃한 주장들이 많아서 살 까 했는데,

실행자인 고모토 다이사쿠의 은사인 오카다 케이스케 운운 하는 문장을 보고 사는 것을 기겁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지금의 한국 이상으로 지연과 학연에 얽힌 사람들이었는데, 오카다 케이스케는 해군 제독에 후쿠이 현 출신자고 고모토는 효고 현에 육군이었으니까요.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을 같은 인맥으로 얽어 놓고 있는 글을 보고선 신뢰감이 급락하여 구매를 포기했습니다.


2, 다나카 기이치가 정우회에 입당하던 사정은 또 복잡한 편인데, 당시 사이온지 긴모치의 신임을 받았고 차기 정우회 총재로 유력하던 요코다 센노스케가 선거 참패 책임을 져야 해서 총재 선거에 불출마한 상황인데, 도코나미, 구하라, 스즈키니 하는 거물들이 총재를 하겠다고 다툴 경우 정우회가 쪼개진다고 본 정우회 전 총재이자 전 총리이던 타카하시 고레키요가 외부 인사를 총재로 기용하자고 해서 불려온 사람이 다나카 기이치였습니다. "달마" 타카하시와 다나카가 같이 찍은 사진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죠.

다나카가 입당할 때에 2백만 엔을 입금하고 있었는데, 이 돈이 혹시 육군대신 관방비를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잔뜩 부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시베리아 출병을 하면서 연해주 현지에서 주둔 부대가 압수한 대량의 금괴를 일본 본토로 보낸 일이 있었는데, 정작 본토에서는 수령한 일이 없다고 하는 소동이 벌어진 일도 있었는데, 저 2백만 엔이 바로 그 금괴 대금이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3. 다나카는 정우회에 입당하고 이어서 총리가 되면서 대중국 연약외교를 해체한다는 큰소리와 함께 외무대신직도 겸직하고는 정무차관으로 같은 대중국 강경론자인 모리 가쿠-웃기게도 20년 이상 미츠이 물산에 중국 전문으로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죠-를 앉혔는데, 정작 다나카는 총리 취임한 후에 대중국 강경론을 접기 시작합니다. 군인으로만 있던 시기와는 달리 총리라는 매우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접하게 된 여러 방면에서의 정보들을 접하게 되자 강경론을 더 이상 고집할 수가 없게 된 것이죠.

다나카의 자세 전환에 반발한 모리가 여전히 강경론을 고집하면서 나온 것이 군대와 외교 및 재계 인사들을 모아서 회의하니 이것이 '동방회의'이고 여기서 중국에 대한 강경방침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위조품으로 시끄러운 다나카 상주문도 원형은 동방회의에 참가한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을 정리한 문서를 중국인이 빼내고는 다나카가 천황에게 올린 글로 고쳤다는 것이 유력한 정설입니다. 위작이라고 무시하기에는 상주문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만주국 운영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던데다, 무엇보다도 일본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내용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옷~~ 역시..
혹시 일본 근대 정치사 전공하셨나요?
어찌 이리 자세히 아실 수가...
암튼 감탄의 연속입니다...

근데..
다나까가 뽀린깐 돈은 300만엔 아니었나요?
그렇게 기억하는데..가물가물..
암튼 당시 구축함 1척 건조비가 1,000만엔 이었으니..쩝..-_-;;

감사합니다..^^
봉달이님 : 중국철학과 중국의학을 전공했습니다.
일본근대정치사는 군사 취미를 즐기다 보니 단편적으로 알게 된 것이고요.

다시 알아보니 3백만 엔이 맞습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왜 여기는 추천이 없는거죠?
추천받아 마땅한데
추천 받을만 한 글이 못 되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