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전의 요새들

봉달이 2017. 3. 28. 16:35

<떡밥 투척#1>일본 육군, 뤼순의 악몽을 놀이터로 구현하다<4>



제 22 연대의 암울한 동계관산 북 보루 공략기(3)


- 동계관산 북 보루의 형상은 대략 불규칙한 형태의 사각형이며 긴 변의 길이가 약 100m, 짧은 쪽이 약 70m인 구조물을 두께 12m의 콘크리트로 굳힌 튼튼한 흉벽(胸壁 혹은 胸墻(흉장)이라 표현..)이 주위를 에워싼 형태였고, 이 흉벽이야 말로 제 3 군이 퍼 부운 포탄의 효과를 모두 흡수해버리는 마물이었다.
- 이 보루의 주위에는 폭 16m에서 12m, 깊이 7m 내지 9m의 해자가 파여 있었고 해자에 진입한 적의 병력에 대비, 측벽에는 총안과 기관총을 배치해 적병이 해자를 건너 보루에 돌입을 시도하는 것을 쉽게 저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 해자 안에 빠지면 앞뒤 상하 좌우로 탈탈 털린다...


- 또한 물이 들어 있지 않은 해자 바닥에는 철책과 철조망이 설치되어 적병이 벙커 안으로 돌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구조로 되어있었고, 보루의 외부에는 전기 철조망과 지뢰가 매설되었으며 그 전면에 참호를 파고 수비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 여기에 콘크리트 구조의 작은 막사, 지하실, 지하도까지 만들어져 있었고, 보루 자체 화력으로 야포 8문, 속사포 9문, 기관총 수 십정이 구비되어 있었다.



  
- 이것이 바로 당대의 과학 기술과 축성 기술을 집약한 방어 구조물의 극치였고 막강한 전력을 갖춘 현대적 요새였으며, 이 한 곳의 방어 시설만으로도 당시 일본군의 입장에서 볼 때,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이들은 10년 전 청일 전쟁 때의 뤼순을 상상하고 있었다는..), 뤼순(旅順)은 이와 같은 본격적인 방어 진지와 이보다 약간 떨어지는 포대와 진지를 수없이 겹겹이 쌓은 현대적 요새의 집합체였다.
- 이런 헬 게이트에다가 대고 두 차례나 몸빵 닥돌을 감행한 노기의 제 3 군은 이런 자살적 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난 후에도 곧바로 다음 총공격을 실시해야할 필요성을 강요당했다(왜 되도 않는 인해 전술을 계속 감행했느냐..화력 지원할 포탄이 없었다..흑~~ 이 내용은 다음 <떡밥 투척#2>에서 좀 더 상세히 알아 보겠슴돠..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거기다 하나만 딸랑 있는 게 아니라 줄줄이 있다..ㅠ.ㅠ


- 이들이 2차 총공격을 감행하기 직전인 1904년 10월 중순, 러시아 해군의 발틱 함대가 발트해의 리바우 항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을 향해 출항했다는 보고가 도착했고, 이들은 발틱 함대가 일본 근해에 도착하기 전에 뤼순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무조건 격파해 이 두 함대의 합류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 발트 함대가 시시각각 극동으로 다가옴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이들과의 결전에 대비, 함정의 정비와 수리를 위해 적어도 2개월간의 준비를 필요로 했고, 따라서 아무리 늦어도 11월말(발틱 함대의 도착은 다음해 1월로 예측..)에는 뤼순에 대한 해상 봉쇄를 풀고 본토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다 이것들이 떴댄다아~~~!!!


-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뤼순 항의 조기 공략을 위해 견고한 요새 지대를 회피하고, 주 공격 목표를 항만 내부가 내려다보이는 203 고지로 옮겨 점령하며, 이곳에 관측소를 설치, 포격으로 항내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여야 한다고 육군에 제의했다(애초부터 그리 생각했지만 육군이 X고집을 피워서..)
- 그 직후인 11월 14일에 열린 합동 회의에서 기존의 대 피해와 해군, 대본영의 강한 요청을 감안, 육군 중앙은 기존의 작전을 변경하여 203 고지에 대한 공격으로 주공의 전환을 결정했지만, 현지의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巌)와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 제 3 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203 고지를 점령한다 해도 뤼순 요새가 함락 된 것은 아니라며 끝까지 정면 공격을 고집했다.
- 이들은 203고지를 점령해 뤼순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해도, 뤼순 요새 전체를 함락시킨 것은 아니므로, 정면 공격으로 요새를 점령해야 뤼순 요새와 함대 전체를 무력화시키게 되는 것이기에 이를 전략의 제 1 순위로 삼아야 한다며 자신들의 고집을 절대 꺾으려 하지 않았다(역시 영감탱자들의 X고집은 아무도 못 말린다..)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203만 떨어뜨리란 말야!.. 고건 안 되제~~ 존심이 있지..첨부터 다시~~


- 한편,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여태까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대 피해만 입은 노기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며 그에게 사직과 할복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이 무려 2,400여 통이나 날아들었고(악플 이빠이~~ -_-;;;) 뤼순은 해군의 초조함에 더해 전 국민이 주목하는 장소가 되어있었다.
- 따라서 전 국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노기 경질론까지 일어났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폭망하기까지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뻘짓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태동하며 이후 일본 군부 삽질 악순환의 원조 격이 탄생하고야 만다.


                      우리 애들 다 죽어간다~~!! 이거 우짤꺼냐, 노기상~~!!


- 바로 단순무식 플러스 맹목적 충성파인 노기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던 띨띨이 몽키킹 메이지가 이런 노기 경질론을 한마디로 일축하였음은 물론, 제 3 군에 대해 11월 22일, 이례적으로 이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칙어가 내려졌다(노기 파이팅~~~ 아주 쌩지랄을 하고 앉았다..원래 독재질하는 쌍X무 쉑들은 노기 같은 스타일 좋아라 한다는..우리도 많자녀?) 
- 더 웃기는 것은 바로 직전까지 작전 변경을 주장하던 육군 참모총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지네 대빵이 저런 식으로 나오자 바로 입장이 돌변, 공격 성공을 기원하는 시(詩)를 보냈다(이것들 모냐?? 안타깝다..-_-;;)


             메이지 대제와 노기 장군이라..흐흐..염병하네..띨띨이와 무뇌충이겠지...


- 일이 이따우가 되자 당시 일본 국민들도 두 패로 갈라져 한쪽은 “노기 장군은 배를 째라!(乃木将軍よ腹を切れ!)”는 맹비난의 전보가, 다른 한쪽은 그를 격려하는 전보가 수없이 제 3 군 사령부로 날아들었다(이래서 대가리가 띨띨하면 분열이 일어난다...어디서 많이 보는 듯??)
- 이렇게 지가 죽어라 추종하는 대가리로부터 강렬한 격려를 받은 노기는 신속하게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흑~~ 마마~~~ !!! 하긴, 저긴 진짜 마마지..쩝...-_-;;


- 하지만 이런 일개 방면군의 X고집에 중앙의 지휘부가 찌그러지는 행태는 훗날 관동군의 계속되는 폭주로 이어지게 되고(이런 걸 전략이 전술을 추종한다고...), 소위 “지휘관의 체면” 때문에 삽질 대작전이 용인되는 행태는 태평양 전쟁에서 발생하는 숱한 일본군의 뻘짓으로 부활하며(할힌골..진주만..미드웨이..,임팔 등등..) 아예 전통적 지랄병으로 자리 잡게 된다.



     야마모토의 체면 땜에 미드웨이에서 탈탈탈..무타구치의 체면 땜에 임팔에서 탈탈탈..


- 아무튼, 이런 몽키킹의 아무 생각 없는 뻠뿌질에 한껏 고문된 노기는 1904년 11월 26일, 제 3 차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고, 공격 개시 시점에서의 목표는 2차 총공격과 마찬가지로 송수산(松樹山), 이용산(二龍山), 동계관산(東鶏冠山) 같은 뤼순 동북부 일대의 고지를 공격하고, 고지에 위치한 포대와 보루를 점령하는 것으로 정해졌다(쉽게 말해 전에 했던 짓거리를 반복한다는 얘기..)


                       새로운 계획? 그딴 거 모르겠고 했던 짓을 또 한다...


- 한편, 러시아 수비군을 실제 지휘했던 콘트라첸코 소장은 일본 제 3 군이 방어가 취약해진 북서쪽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 203 고지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예비 병력을 대기시켰음은 물론, 다른 보루와 포대에도 지뢰의 매설과 철조망 재가설, 벙커 사이의 연락망을 복구시키는 등, 방어 준비에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 또한 두 차례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물리쳤기에 당시 러시아 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으며, 일본군의 항내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함정에서 함포를 철거하여 육상 포대에 설치하고, 해군 병력도 추가되어 수비대의 전체 병력은 약 32,000명, 화포는 약 640문까지 회복되었다(게다가 증원군인 발틱 함대도 오고 있단다~~!!)


 
- 하지만 일본군 측도 제 1 차 총공격에서 3개월 정도 지난 11월 20일, 대망의 증원부대인 오오사코 나오하루(大迫尚敏) 중장의 제 7 사단과 공병 3개 중대가 대련에 상륙, 제 3 군에 합류했고, 타츠미 나오후미(立見尚文) 중장의 제 8 사단은 만주 북부에 파견되어 예비대가 되었다. 
- 이로써 노기의 제 3 군은 제 7 사단이 합류함에 따라 병력은 약 64,000명으로 증강되었고 보유 화력도 화포 약 420문, 기관총은 약 70정 정도로 강화되었다.



        오오사코 나오하루(위)의 제 7 사단이 합류하며 제 3 군의 전력은 대폭 강화된다..


- 당시 일본 육군의 기관총은 1 개 사단 당 20~24정 정도로 사단장의 직접 지휘 하에 있었으며 기동력이 떨어지는 공성 작전 시에는 주로 보병의 돌격 시 지원용 무기로 공격선에서 약간 뒤쪽에 배치되었다.
-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와 협력 관계에 있던 프랑스가 제작한 호치키스(Hotchkiss) Mle 1897 기관총은 일본 육군이 채택하였고,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미국인 개발자 하이럼 맥심(Hiram Stevens Maxim)이 개발한 맥심 기관총은 러시아 군이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런 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일본군은 프랑스제 호치키스를(위), 러시아 군은 맥심을 주력 기관총으로 사용하였다..


- 아무튼, 여기서 잠깐 당시 일본군 병사의 돌입과 러시아 군의 방어 과정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먼저, 일본군 병력이 러시아 진지에 접근하려면 먼저 지뢰밭을 통과해야 하는데, 당시 러시아 군은 밟으면 폭발하는 지뢰를 설치한 다음, 그 지뢰의 좌우에 도화선을 연결, 일본군 병사가 몸을 숨길만한 구덩이와 바위 그늘 등에 도화선을 연결한 지뢰를 다시 설치했다.
- 이렇게 하면, 먼저 지뢰를 밟은 병사가 날아가고 그 폭발에 반응한 다른 병사들이 인근의 구덩이나 바위 그늘 등에 재빨리 몸을 숨기면 그 직후 도화선에 배선된 지뢰가 유폭하면서 위험을 피한 일본군 병사마저 날려버렸다.


 
- 그렇게 어렵사리 지뢰밭을 꾸역꾸역 통과하면 그 다음은 철조망 지대에 막혔고, 만약 야간의 어둠을 틈탄 것이더라도 폭발음 방향과 철조망 부근을 탐조등으로 비추어 보면 올라오는 일본군 병사와 철조망에 붙어있는 일본 병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일본군이 철조망 지대에 걸리면 러시아 군은 기관총과 소총 세례를 퍼부었는데, 러시아 군의 맥심 기관총은 바퀴가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포와 산포처럼 어디서나 끌어올 수 있었다.


                                   지뢰 다음은 철조망...ㅠ.ㅠ


- 맥심 기관총 총신은 냉각수가 들어간 굵은 냉각기로 덮여있어 급탄만 계속한다면 20초 정도는(발사 속도는 분당 550발) 계속해서 사격이 가능했고, 이는 동시대의 볼트 액션식 소총 30정의 화력에 필적했다.
- 제 3 차 총공세 당시 뤼순 요새의 러시아 군이 보유한 맥심 기관총은 일본군에게 포위된 이후 추가적인 보충이 없었기에 다소 줄어든 약 40정 정도였지만 그래도 일본군 측에 주는 위협에는 변함이 없었다(뭐, 1차 대전의 대 학살극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



                                꾸역꾸역...탈탈탈탈... ㅠ.ㅠ


- 어쨌든 일본 제 3 군의 휘하 부대들은 제 3 차 총공세에서의 주 목표인 러시아군 보루 점령을 위해 계속해서 참호 및 갱도를 파며 접근해 갔고, 일부 참호선은 보루 전방 약 50m 앞까지 진출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러시아 수비대의 총격과 수류탄, 화포 등의 방해로 충분히 접근 할 수는 없었다.
- 또한 이들은 이전의 전투에서 철조망 제거 작업 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감전사하거나 철조망을 절단하는 과정에 러시아 군에게 포착되어 집중 사격을 받고 공병대가 전멸할 정도의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경험이 비일비재 하였으므로 이에 대비한 훈련도 실시했다.
- 이들은 철조망 절단 시 감전되지 않도록 절단기 손잡이 부분을 대나무로 자작하였고, 직접적인 철조망의 절단보다는 이를 지지하는 목제 기둥을 신속하게 톱으로 절단하는 훈련도 실시하였으며, 항상 공병이 전멸하면서 작전이 나가리가 되었으므로 공병 위주의 철조망 파괴 작업을 일반 보병에게도 훈련시켰다.


                                   오메~~ 전기 철조망이여~~~


- 한편, 이 시기 동계관산 북 보루의 점령을 맡은 제 11사단 22 연대는 2차 총공세에서 5일 만에 제 5 중대와 제 8 중대, 2개 중대가 거의 괴멸되는 막대한 타격을 입고(사상자 262명) 후방으로 물러난 제 2 대대를 다시 일선에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제 3 대대의 일부를 붙여 러시아 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2차 총공세의 암담한 실패는 인간 정신력의 한계를 훨씬 초과하였다고 전해지며 11월에 들어서자 제 3 군 지휘 계통 곳곳에 혼란이 발생했다.
- 그러나 제 7 사단이 새롭게 합류, 전력이 증강되고, 제 9 사단의 일부가 동계관산 북 보루 공략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 11 사단의 책임 지역에 합류하자 부대의 혼란상은 서서히 진정되는 분위기였다.



                                   뛰쳐 나갈 땐 멋지구리 했지만...


- 두 차례나 연이은 닥돌을 감행했다가 작살이 난 이후에야 지휘부는 기존의 공격 방법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을 알았고, 결국 러시아 진지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기 위해서는 더욱 지하 깊숙이 참호 형태의 공격로를 만드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그렇게 작업을 기존의 참호 파기에서 땅굴 파기로 전환한 이들은 연대로부터 공병 제 8 대대 1 중대를 새로 보강 받아 완전히 광부로 변신하였고 그렇게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 11월 17일, 마침내 이들은 동계관산 북 보루 모서리 부근에 도달, 외벽 폭파를 위한 구멍을 파다가 우연히 지뢰 폭발로 인한 구멍을 발견했고 그 즉시 폭약을 설치, 외벽 폭파를 감행했다.
- 마침내 이들은 러시아 군 방어 갱도의 입구를 노출시켰고 게다가 정면 외부 방벽에는 수비병이 배치되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를 점령하고 밖으로 모래주머니를 쌓아 러시아 군의 역습에 대비했다.
- 그 후에도 공격로의 추진과 폭파는 반복하여 수행되어 하루 만에 들어 보루 모서리와 주변부 25m의 외부 방벽을 점령하였고 그렇게 북 보루 정면의 외부 해자는 완전히 일본군 손에 넘어갔다.



                   동계관산 북 보루 외벽 폭파 순간과 일본군의 침투 상황..


- 이 시기, 노기 제 3 군 사령관은 전체적인 공격 작업의 진전 상황을 보고받은 직후인 11월 26일, 제 3 차 총공세를 실시할 것을 명령했는데, 제 11 사단장 츠치야 미츠하루(土屋光春) 중장은 제 3 군의 총공세에 앞서, 돌격을 방해하는 동계관산 포대 중턱의 벙커를 제거할 목적으로 11월 23일, 제 12 연대에게 이의 점령을 명했다.
- 하지만 이들은 일부 병력이 러시아군 벙커를 탈취하고 폭약을 설치하는데 까지는 성공하였지만, 곧바로 반격에 나선 러시아 군에게 탈탈 털리며 싸그리 가루가 되었으며, 다음 날인 24일에도 공격을 반복했지만 사상자만 속출하자 결국 이를 중지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아직 남아있는 러시아 군의 외부 참호선..


- 그동안 제 22 연대는 이 틈을 타 계속 갱도를 파며 전진, 마침내 3차 총공세 전날인 11월 25일, 동계관산 북 보루 방어벽 폭파를 위한 폭약 설치를 마칠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www.geocities.jp/ramopcommand/_geo_contents_/071212/ryojyun.html
http://mapio.net/pic/p-39315856/
http://www.portsmouthpeacetreaty.com/process/war/war5.html
http://3443.or.jp/tsushin/t1505/150504.htm
http://www.xn--u9j370humdba539qcybpym.jp/thesis/081118/081118_gakushi360.htm
http://sas.historiana.eu/sas/collection/the-visual-front
http://shinkokunippon.blog122.fc2.com/blog-entry-1406.html

늘 써주시는 글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다 어디서 찾으시는지..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내공이 있으신 분이니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현대전에서 피해율 30%이상이면 전멸이라는 이야기는 인터넷 밀매 사이트에서 흔히 보이는 이야기인데, 어디에서 근거한 이야기인지 알수 있나요? 저는 군생활을 꽤 오래하고 나온 편인데 그런교리를 군내에서 본적이 없어서요.
30% 전멸 공식은 남은 70%가 전략적 가치를 잃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군이 2차 대전 겪으면서 체험적으로 습득한 것으로 30%의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해당 제대가 수행할 임무에 치명적 차질이 생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1개 사단에서 1개 이상의 연대급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 그 사단이 그 상태로 못 싸운다는게 아니고, 사단급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항상 적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을 많이 받은 정예 병력 일 수록 병력손실이 발생해도 임무를 꾸역꾸역 수행해왔으니까요
<피해율 30% 이상 전멸론>은 전쟁 이론, 혹은 경영학 이론을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보았던 란체스터 법칙(Lanchester's laws)을 인용한 것에서 나온 걸로 보입니다..

즉, 란체스터 제 2 법칙, 총기와 화포, 항공기가 발달한 쪽이 다수에 대한 공격이 가능한 전투를 전제로, 양측의 전투력을 제곱한 후 전투력이 우세한 쪽이 승리한다는 이론을 가정한 것이죠.
보유한 전력(E)이 동등한 1일 경우, A군 5와 B군 3이 싸우면 실제 전력 차이는 A군 25 대 B군 9이므로 A군이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며 잔존 전력도 A군이 2가 아니라 그 제곱인 4가 살아남는다는 얘기인데..
즉 성능이 같은 아군 전투기 5대와 적군 전투기 3대가 공중전을 벌인다면 최종적으로 살아 남는 아군 전투기는 2대가 아니라 그 차이의 제곱인 4대가 된다는...

따라서 방어자의 경우 최소 70%가 있어야 그나마 동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30%의 전력 손실을 입으면 어차피 전멸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저런 얘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지금 포스팅하는 일본 해군이 군축 회담에 임하는 자세에서도 이 논리를 적용했죠..)

이전 포스팅에서 육군 교범 어쩌구하며 이 얘기를 쓴 것 같은데 제가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이전 구닥다리 논리를 적용한 것 같네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전멸이니 섬멸이니 괴멸이니 하는 것은 구 일본군의 판단 기준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이 해방 후 그대로 우리 군에 남아 꽤 장시간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군에서도 전멸의 정의를 1명의 생존자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웃기는 얘기로 할힌골에서 츠지 마사노부가 부대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자 연락병에게 전멸이 무슨 소리냐! 니가 살아남았자나! 라고 했다는데..-_-;;

어쨌든 그들은 단위 부대로써 조직적인 전투의 지속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전멸"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들의 기준으로 보면, 전멸(全滅)은 부대원 30% 상실과 담당 전투 지역의 60%를 상실했을 때를 일컫는 용어라고 합니다.
이 상태에선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투 단위로 계상하지 개편 때까지 없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전멸이라고 했다는 군요..

이것은 러일 전쟁 등의 경험에서 얻은 구분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공식 전사인 전사총서(戦史叢書)에 따르면, 일본 육군 대학교 강의 중에 스즈키 시게야스(鈴木重康) 중장이 최초로 이 내용을 언급했다는군요..
그에 따르면 일본 육군에서는 단시간에 부대의 30%의 타격을 받은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전투력이 손실되고 50%의 타격을 받은 경우에는 섬멸적 타격, 즉 부대 보충뿐만 재편도 불가능하다며 궤멸(潰滅)이라 판정했다고 합니다(웃기는 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 걔네들이 옥쇄라고 하는 건 섬멸(殲滅)이라 하는군요..)

물론 현대전 하의 교리에선 전혀 씨도 안 먹히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콩가루나 아작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는..

감사합니다..
그런 비유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행 교리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일단 현재 전투피해평가나 상대적전투력비율 환산 교리에는 30%이상 피해를 입은 부대에 대해서 전투력 수치에 합하지 않는다는 등의 교리가 전혀 없습니다.
전투지휘훈련 등에 사용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에는 전투력 20%(피해율 80%)이 되어도 부대 운용이 가능하고요

사단급 작계를 보아도 예하대대 전투력 수치가 30%정도는 되어야 재편성을 하지, 70%수준에서 전투력 복원에 들어가는 작계를 본적이없습니다.

이 부대 전투력 수치라는게 그렇게 복잡한 계산식으로 나오는게 아니라 인력과 장비에 가산점 더해서 수학적으로 합한 값입니다.
결국 전투력 수치가 그냥 100%에서 피해율 뺀걸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값입니다.
수사영-송수산-이룡산-동계관산 이 라인을 일제 닥돌로 뚫으려 들은 미친짓거리를 했다니... 수사영쪽은 사실상 회랑지대, 나머지 구간은 그냥 절벽 낭떠러지 산맥 ㅡㅡ;; 그냥 서쪽 203고지쪽으로 3개사단 밀어넣어도 될까 말까 인데.. 허허 야스쿠니가 참 좋은곳인듯 합니다 ㅋㅋㅋㅋ
좋은 곳이죠. 너무 좋아서 일본군 지휘관들이 자기는 양보하고 부하들 먼저 보내는..
죽어서까지 종노릇하라고 우리 선열들을 붙잡고 안 놔주는..
다음 원폭 투하 예정지죠.
그곳으로 3차례나 지랄했죠..
1차 대전에서의 닥돌 전술을 두고 미친 짓거리의 반복이라 그랬는데..
사실 그 원조는 일본군이었다는...
일본의 호치키스, 러시아의 맥심.. ㅋㅋ
2차대전 전에도 일본은... 성능떨어지는 걸 골라 사는 버릇이 있는 것 같던데.
우리 육군이 수리온하고 도팡을 고르고 해군이 링스 고른 게 생각나요. ㅠ.ㅠ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해군 쪽은 영일 동맹 체제 하에서 영국으로부터 한껏 푸쉬를 받았죠..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갈 생각을 안했다는 거...

우리의 무기 선택은..흠...좀 거시기 합니다...
중소구경화기쪽 이야기였습니다.
말씀대로 전함같은 건 푸시를 받았지만 나중에 걔들이 고른 걸 보면, 아직 안목이 없어 선택지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봉달이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궁금한 점이 해결되었습니다.

결국 30%피해 전멸론의 핵심은
1. 구일본군 군사용어를 현대 한국어의 의미로 해석하면서 생긴 오해
2. 란체스터법칙에 있어 적과의 상대적 전투력비율%를 아군부대의 100% 대비 전투력수치%와 혼동한것
이정도로 정리하면 되겠군요

일본군 교리의 30%, 50%기준은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도 드는데, 통신장비나 전술정보망 같은것이 없던 과거의 군대라면 현장에서의 전투력복원이 현재보다 난해했을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수 있겠습니다.

간단한 질문에도 근거와 자료를 찾아서 자세히 답변해주신점 감사드립니다^^
넵..대충 유추해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같이 논의해 봤으면 합니다..
게중 아는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답변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