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전의 요새들

봉달이 2017. 4. 1. 16:19

<떡밥 투척#1>일본 육군, 뤼순의 악몽을 놀이터로 구현하다<끝>



일본 육군 종합 훈련장, 애들 놀이터가 되다


- 일본 육군 제 11 사단은 1904년 4월 24일 만주 지역에 도착, 6월 6일 제 3 군에 편입되어 25일부터 뤼순 공략 작전에 참가하였고 8월 21일부터 동계관산(東鶏冠山) 북 보루(北堡塁) 공격을 시작했다.
- 그러나 촌구석에서 총검술이나 연마하던 그들은 생전 접해보기는커녕 상상도 못하던 현대식 요새의 가공할 위력에 직면했고, 러시아 군의 격렬한 저항에 닥돌 공격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다 12월 18일이 되어서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겨우겨우 공략에 성공했다.
- 세 차례에 걸친 뤼순 요새에 대한 닥치고 돌격으로 발생한 제 11 사단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어서, 사단 전체 병력 약 20,000명 가운데 전사 4,072명, 사단장 츠치야 중장을 포함 10,259명이 부상으로 나자빠지는 처절한 결과를 나았다(제 3 군 전체로 보면 전사 15,390명, 부상 43,814명 합이 59,204명..)



                                    이게 지금 모하자는 거냐?? 


- 이 전투는 정신 승리론으로 무장, 필승의 신념만 있으면 그 어떤 장애도 뚫고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는 일본 육군의 무지함에 불꽃 싸다구를 날리며 현대 과학 기술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강조, 수 없이 많은 사상자를 양산시켜 일본 육군 대가리 계층들에게 충격과 함께 일대 경종을 울렸다.
-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충격보다 더 우선시 되었던 것은 이 현대적 요새의 함락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국민들의 저항을 불식시키고, 바닥을 드러내던 전비(戰費) 보충을 위한 국채 모집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원래 그런 거여..쫄따구들이야 죽어나던 말든 이기면 되는 겨..)


            일단 프로파간다가 중요하다..근성의 일본군은 몸빵만으로 요새를 점령한다!!


- 이에 따라 뤼순 공방전은 어처구니없게도 또 다시 현대전 하에서 정신 승리를 입증하는 증거로 활용되었고 동계관산 북 보루에는 1916년, 높이 6m의 승전비가 건립되었으며, 콘트라첸코 소장이 전사한 자리에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 또한 제 11 사단의 징병 지역인 시코쿠(四国)의 4개 현(카가와(香川), 도쿠시마(徳島), 에히메(愛媛), 고치(高知)..)에서는 러일 전쟁 종전 직후, 일본군 몸빵 닥돌의 근성을 널리 알리고 무식한 국민 개돼지들에게 그들 말로는 충군보국(忠君報国)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기념물 건립이 계획되었다.
- 1905년 12월, 국회의원, 사업가, 지방자치단체장 등등 소위 지역 유지들이 모여 기금을 마련, 제 11 사단이 탈탈 털리며 피떡이 되었던 동계관산 북 보루의 모조 건축물과 기념관을 건설한다고 결정했다.

- 하지만 원래 그 시작이 창대한 것들 대부분이 그 뒤가 흐지부지하기 마련이어서, 처음엔 앞 다투어 돈 낸다고 날뛰던 것들이 이후 온갖 핑계를 대며 난색을 표하고, 공사마저 실제 계획했던 것보다 더디게 진척되어 5년 뒤인 1910년이 되어서야 일본 육군이 기증한 러시아제 노획 야포 3문을 갖춘 모조(模造) 동계관산 북 보루가 준공되었다.


                         건설 직후의  모조(模造) 동계관산 북 보루...


- 오늘날 카가와 현 타카마츠시(高松市)의 유명 관광지 릿츠린 공원(栗林公園) 인근의 이레세오 산(石清尾山)에 건설된 이 시설은 이후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가 태평양 전쟁 패전 후 거의 매몰되어 버렸지만 2005년 12월, 러일 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재정비되었다.
- 웃기는 건 이 시설이 재정비되며 세워진 위령탑과 관련된 것으로 이 위령탑의 건립 취지는 “제 11 사단 다카마쓰(高松) 출신 전사자들의 영령에 바친다.”라고 되어 ​​있고 바로 옆에 2005년 12월 설치된 설명판엔 “우리 군(일본군)뿐만 아니라 희생된 러시아 군도 추모하며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라고 되어 있다.


                               아직 남아있는 러시아군 벙커 재현물..


- 이 시설이 재정비되던 2005년 일본은 비록 고이즈미(小泉) 내각 하의 자민당(自民党) 정권이었지만 지금처럼 일본의 우경화 기운이 노골적이지는 않은 시기여서(당시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참배한 걸로 주변국도 난리였지만 지네끼리도 난리였다..) 저런 식의 묘사가 어쩌면 가장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 그러나 오늘날 아베 정권 하의 난리 굿판은 새삼 설명하기도 짜증날 만큼 난리 부르스 육갑이라 당연히 위령탑의 저 문구를 놓고 새로운 악마적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최초 저 위령탑이 건립될 당시 새겨졌던 문구는 “아군이 동양의 화근(禍根..러시아)을 거세한 전쟁을 표창하고 충군보국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라고 되어 있었으므로, 당초의 건립 목적을 후세에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안 된다며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라고 지랄염병을 하고 있다고 한다(동양의 화근이 도대체 어딘지 모르겠다는..이런 걸 “과거로의 회귀”라 한다..오늘날 우리도 빤히 보고 있고..)


                               요사이 지랄하고 있는 이곳의 위령탑..


- 한편, 러일 전쟁 직전 일본 육군은 현대전 요새 공성전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넘어 아예 고려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러시아 군이 축성한 견고한 요새, 보루, 포대에 대해 인해전술에 의한 닥돌만을 감행, 완전히 콩가루가 되었다.
- 따라서 러시아 군의 군사 시설 정보를 수집, 어떻게 현대적 요새 공성전에 임해야 하는 지 그 대안에 대해 모색하였다.


                            닥돌은 콩가루만을 양산했다..그 대안은??


- 이미 뤼순 공방전에 돌입하기 직전인 1904년 6월경까지 일본 육군은 요새 공사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통해 러시아 군 요새의 기본 구조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고, 초가을 무렵이면 상당히 자세한 정보를 축적하기에 이른다.
- 또한 9월에는 랴오양(遼陽) 요새를 점령,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가 이곳의 러시아군 요새를 직접 방문, 내부 구조를 파악했고, 10월에는 발곤산(鉢巻山)과 이용산(二龍山) 중턱에 위치한 보루들을 점령, 러시아군 보루의 현대식 구조를 충분히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 이것들이 제작한 러시아 요새의 모형...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지랄병인지 닥돌에 닥돌을 감행한 일본 육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나서야 요새 공략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는데 그때서야 “앗! 뜨거”를 외친 일본 육군은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현대적 요새 공략법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 이들은 자신들이 획책하고 있던 대륙 진출과정에서 벌어질 제 2, 제 3의 러일 전쟁을 상정, 그 과정에서 마주칠 것임이 분명한 러시아 군의 현대적 요새를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것을 연구하고 훈련할 목적으로 “모의 전술 훈련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 1905년, 몽키킹 메이지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근위병들을 데리고 대규모 군사 연습을 실시한 후 군사 연습장로서 유용하다며 나라시노(習志野)라고 명명하였고, 이후 일본 육군의 연습장으로 활용된 현재의 치바현(千葉県) 후나바시(船橋) 인근 지역이 러시아 요새 모의 훈련장으로 낙점된다.


               요새 공략법을 위한 최신 훈련 장소로 나라시노가 낙점된다..


- 이들은 당시 일본 육군에 있어서 듣도 보도 못한 유럽의 최신 기술과 공법을 이용한 러시아 요새를 분석한 후 추후 만주나 시베리아로 쳐들어가 전쟁을 벌일 것에 대비해 실제로 연습을 해 두는 것이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따라서 러시아 군 최고의 요새 축성 권위자, 로만 콘트라첸코(Roman Kondratenko) 소장이 구축한 현대식 요새로 인해 막대한 사상자를 낸 뤼순 요새를 그대로 카피, 이곳에 실물의 6분의 1 크기의 구조물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카피판 뤼순 요새의 건설 당시..


- 그 정확한 공사 시기는 불분명하나 러일 전쟁 직후에 건설된 이 구조물은 이용산 보루와 비슷하며, 지역 농가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인부를 동원, 밤낮 3교대로 계속 공사가 이어지는 대공사였고, 당시에는 아주 희귀했던 가솔린 엔진 발동기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 실제 러시아 군 요새와 똑같이 해자를 파고 측면을 두꺼운 콘크리트로 덮었으며, 측벽 벙커도 만들어져 있었으나 동계관산 북 보루 같이 2층 구조의 큰 구조물은 아니었고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 당시 일본 육군은 이곳을 통해 현대적 요새를 만났을 때의 다양한 케이스를 상정하여 실제 병사를 움직여 연습하고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실제 러시아군 요새(위)와 나라시노의 일본 육군 연습장..


-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실제 그들이 상정하였던 “실제 병력을 동원한 요새 공성(말 그대로 육박돌입전이다..어떻게 하면 몸빵닥돌이 잘 먹힐 것인가를 연구하였던 것..)”이라는 헛지랄은 시대에 역행하는 완전한 뻘짓임이 드러나게 된다.
- 일본 육군은 이 연습장이 완공된 직후에 벌어진 제 1 차 발칸 전쟁(First Balkan War, 1912년 10월 8일~1913년 5월 30일)을 통해 현대적 요새, 아니, 구닥다리 요새라도 현대적 방어 태세(기관총과 속사포, 지뢰와 철조망 등)가 복합적으로 결합되면 이들이 추구하던 몸빵닥돌이 얼마나 허무한 결과를 낳게 되는 지 똑똑히 목도하게 된다.



        쌔빠지게 만들어 놨더니 다음 전쟁은 얘네들 생각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굴러간다..


- 1912년 11월 3일부터 시작된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공성전에서 공격 측인 게오르기 바조프(Georgi Vazov)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 제 2 군 153,700명과 세르비아군 2개 사단 47,275명을 합해 200,975명은 달랑 52,597명이 도시를 방어하는 오스만 수비군을 향해 5개월간의 포위 공격과 두 차례의 대담한 닥돌을 감행, 불가리아 군 사상자 7,953명(전사 1,298명 부상 6,655명), 세르비아 군 2,370명(전사 453명 부상 1,917명), 합이 10,3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피해를 입었다.
- 비록, 다음 해인 1913년 3월 26일, 끝내 아드리아노플이 함락되며 동맹군의 목적은 이루어졌지만 이 공성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동맹군은 총 18,282명의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킨 후에야 겨우겨우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요새를 향한 보병 닥돌의 결과는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 또한 아드리아노플 공성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12년 10월 28일에 벌어진 스쿠타리(Scutari) 공성전에서도 공세 측인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연합군은 약 40,000명의 병력을 동원, 약 20,000명의 오스만 군이 지키는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이들은 전체 병력의 37.5%에 달하는 15,000명의 사상자만 발생시키고 요새 점령은 완전히 나가리가 되었다.
- 이후 무려 6개월 동안 요새를 지켜낸 오스만 군은 마침내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고서야 1913년 4월 21일,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연합군에게 요새를 넘기겠다는 제안을 했고, 이들은 요새포 같은 중화기를 제외한 모든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도시를 떠날 수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오스만 군 지휘관인 사드 파샤(Esad Pasha)는 몬테네그로 왕으로부터 10,000 파운드의 돈까지 받았다.



                    이런 일은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사진은 스쿠타리 요새..


- 돌아가는 꼬라지가 이따우가 되자 일본 육군의 현대적 요새 닥돌 공략 전술은 점점 회의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그들이 구상한 이 쓰레기 전술에 쐐기를 박는 일까지 벌어진다.
- 1914년,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요청으로 연합국 측에 달라붙은 일본은 실제 연합국이 원하던 유럽 전선 파견 같은 건 모조리 쌩 까고 자기네 밥그릇 닦는 데에만 열중하였으며, 그 첫 번째 목표로 중국내 독일 세력의 근거지, 산동반도의 칭타오(青岛) 점령 작전에 곧 바로 착수했다.



              칭타오에 상륙하는 일본군 병력과 요새 내의 독일군 기관총 팀..


- 카미오 미쓰오미(神尾光臣) 중장 휘하의 일본 육군 제 18 사단을 포함한 약 29,000명의 병력과 각종 화포 142문으로 구성된 일본 주력군이 칭타오 공략을 목표로 1914년 9월 1일부터 산동반도에 상륙했다.
- 하지만 이들은 육군 내부와 각종 매스컴에서 쏟아지는 즉시 보병 닥돌이라는 여론을 무시하고 화력전에 의한 공략 작전 준비가 완료되기 전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다(당시 일본 여론은 왜 부대를 돌격시키지 않는가? 뤼순의 격전을 아는 탓에 겁먹었나? 라며 카미오 중장을 조롱했다..무식한 것들..)



                         왜? 독일군 요새에 겁먹었나? 이런..니가 해보지??


- 마침내 준비가 완료되자 일본군은 당시로는 최첨단 공성포인 95식 24cm 유탄포 1개 중대 4문을 비롯, 38식 15cm 유탄포, 38식 10cm 캐논포 등 142문의 중화기에 의한 포격으로 칭다오에 건설된 독일의 현대식 요새를 무력화시키는데 집중했다.
- 약 일주일간 계속된 일본군의 집중포화에 독일군의 주요 방어요새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1914년 11월 6일, 결국 칭타오의 독일군 수비대는 일본 측에 항복의사를 보냈다(자세한 내용은 요기로 → http://blog.daum.net/mybrokenwing/223)
- 이 칭타오 공성전을 통해 일본 육군은 똑같은 현대적 요새에 직면했지만 전사 216명, 부상 67명이라는, 뤼순 공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미미한 손실을 입고서도 의도한 목적을 100% 달성시켰다(뤼순은 전사 15,390명, 부상 43,814명, 합이 59,204명..크흑~~ )



 
- 그렇다면 이런 결과들이 도출된 가운데 현대적 요새 공성법을 몸빵 닥돌로 몸소 익히기 위해 대공사를 벌여 건설한 나라시노의 일본 육군 종합 훈련장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 이곳은 완공 직후 대여섯 차례 훈련을 벌였다고 전해지지만 이후 이따우 작전은 완전 쓰레기임이 증명되자 바로 버려졌고 이후 폐허가 되어 동네 애들 놀이터가 되었다(이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었는지 택도 아니게 203 고지라 불렸다고..)



           일본 육군의 대야망은 어린이 놀이터가 되었다..술레잡기 하기 좋았다고...


- 1962년까지 비록 황량하고 괴기스런 흉물로 방치되었지만 그래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었는데, 주택 건설 붐이 일어나며 이곳이 주택지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 당시 해체해서 다른 곳에 복원해야 한다는 구 일본군 출신 할배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견고한 콘크리트 건축물이며 해체 철거와 복원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므로 그대로 묻어 버리는 쪽으로 결정되었고 이후 폭파되어 홀랑 땅 속에 묻혔다.


         이제 요새 공략은 보병 닥돌로 되는 게 아니야...사진은 칭타오의 독일군 요새..


- 이렇게 일본 육군의 시베리아를 향한 대야망은 그 시작부터 돌부리에 걸리며 홀라당 나자빠졌고 나라시노의 헛지랄은 일본 해군이 오로지 전함 야마토를 통과시키기 위해 간몬 해협(関門海峡) 준설 사업에 거액을 투자한 것과 같이 완벽한 삽질이 되었다(뭐 이것들이야 워낙 삽질하기로 유명하니 별 새롭지도 않다는..)
- 하지만 요사이 다시 이 폐허를 파내어 복원하자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하니 이것들의 양아치 짓거리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다.




<사진 출처>

http://blog.sina.com.cn/s/blog_4b61b3900102e5q6.html
https://blogs.yahoo.co.jp/y294maself/28251829.html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Balkan_War
http://bnr.bg/en/post/100190089/100-years-since-the-first-balkan-war-the-battle-near-edirne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Scutari_(1912–13)
http://www.worldwar1gallery.com/china/gallery.html
http://pages14-18.mesdiscussions.net/pages1418/photos-14-18/lieux/navale-japonaise-tsing-sujet_872_1.htm

러일전쟁에서 노획한 전함들을 써먹겠답시고 돈을 쏟아부어 열심히 고쳤더니 드레드노트가 등장하면서 쓰레기화된 것과 묘하게 일맥상통하는군요.. ㅡㅡ
본문에도 말씀드렸지만 뒷북 울리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습죠..-_-;;
이백삼 고지 영화가 정말 기억에 남는게... 잘짜여진 벙커, 참호, 기관총, 철조망 그리고 야포망... 현대 지상전의 근간이 확립된 시기 아직도 전열보병시대(!) 로 착각(?)하고 그놈의 무사도인지 사무라이 정신인지에 미쳐 목숨을 내다버리는거라는 식 닥돌이 얼마나 미친짓 거리였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 영화 였죠. (수많은 닥돌놀이 장면들중에서도...22연대가 동계관산보루 낭떠러지 해자에 인간꼬치+혈죽 놀이 장면이 그래서 참 인상적이었음...;;) 다행히 엠엔케스트 시절에 본거 스샷 해둔 파일들 살아 있어서 봉달이 님 덕분에 쭉 봤는데 참 가관의 추억돋았습니다 ㅎㅎ 혹시라도 현 아베 자민당 내각이 실각하고 다시 민주당등 타 야당이 정권 잡으면 이백삼 고지 리메이크판 영화 꼭 나오길 바래봅니다. ㅎㅎㅎ 우연히 들렀다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
흐흐..203고지..장엄합지요..
제작비 엄청 들였다는데...
문제는 노기를 너무 띄워놓고 있다는...
그 영감,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꼴통이었는데 말입니다..
하긴 그런 식으로 자위라도 해야..쩝..

감사합니다..^^
저 칭타오 공격이 봉달이님의 다른 글하고 연결됐던 걸로..
그 때 쏟아부은 포탄 소비량에 놀라서 일본 군부가 다시 사람을 갈아넣는 걸로 바꿨다는 내용을 읽고 얼마나 웃겼던지. ㅋㅋ

이번 연재 제목이 놀이터였던 게 여기서 나온 말이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
큭~~
포탄 소비량에 깜짝 놀란 건 뤼순도 마찬가지였습죠..
저렇게 사람을 갈아 넣고도 포탄이 모자라~~를 떠들어댔던 게 뤼순 공방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떡밥에서 다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늘 재미 있게 보고 있습니다. 정토웅 교수님이 쓴 "20세기 결전 30장면"에도 뤼순 공방전이 나오는데 여기서 노기 마레스케의 두 아들도 전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합니다.지휘관의 헛발질에 어이없이 죽어나가던 수 많은 일본군 병사들 중 그나마 뤼순에서 죽은 병사들은 좀 덜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말씀하시는 그 부분을 노려 프로파간다를 전개했습니다..
뤼순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루가 되자 세계 최강 일본군이라 알고있던 일본 국민들로부터 수많은 항의를 받게되죠..

그러자 일본 군부와 정부가 내세웠던 논리가 바로 "아들 하나 잃었다고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노기는 아들 둘을 다 잃었다!" 뭐 그런 헛소리를..
너희들은 하나만 잃었으니까 덜 억울하다 그건가? -_-ㅋ

제 생각엔 아마 뤼순에서 죽은 병사들이 제일 억울했을 겁니다..캬캬
프로파간다라구요? 크헉! 속았네요. 하긴 믿을 놈들을 믿어야지! 의미없이 죽어간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조금 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더라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참!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노기의 두 아들이 전사한 건 사실입죠..
근데 그걸로 선전질을 했다는 거..
이래서 제목이 놀이터였군요 ㅋㅋ
이제야 의미를 알겠습니다
차라리 저돈으로 포병전력을 강화하지...
포병 전력 강화는 열강들에 비해 자신들의 후달리는 생산력을 이미 일찌감치 알아버렸고 따라서 포탄보다 사람을 갈아 넣자는 생각이 우선이었죠..
일본군의 대표적인 삽질 교리로 알려진 정신 승리와 근성론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칭타오전투가 일본 육군의 빛이자 암흑이죠. 확실히 화력전으로 가면 효과있다는걸 깨달은 동시에 화력전으로 가기엔 무시무시하게 돈이 들어 일본으로선 대규모 화력전은 무리다는 것도 깨달아서 일본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육탄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