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에 얽힌 작은 이야기들

봉달이 2017. 4. 16. 16:28

히틀러도 화학무기는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말입니다..<下>



1943년 12월 2일 저녁, 이탈리아 전선을 관할하던 연합군 지휘부의 안이한 생각을 단숨에 깨트리며 그 심장부에 대못을 박아 넣은 독일 공군의 바리 공습은, 항구 내에 정박해 있던  연합군 수송선과 부두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다수의 인명 손실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 제 2 의 진주만 기습은 그저 맹돌이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대처 능력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심각한 문제를 대두시켰다.


 
공습 하루 만에 628명의 환자와 의료진에게 공습에 의한 신체적 손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실명과 화학 화상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 수수께끼 같은 증상은 수송선들의 일부가 폭격을 받아 폭발한 직후 도시로 날아간 연기가 가라앉자 비슷한 증상으로 수백 명의 이탈리아 민간인이 병원에 도착하며 더욱 복잡해졌다.
1차 대전을 경험한 소수의 의료진 가운데에서 이런 증상들은 자신들이 앞선 전쟁에서 보았던 화학무기에 노출된 병사들 사이에 발생한 증상과 똑같다는 의견이 도출되었고, 당연히 그 첫 번째 용의자로 나치 독일이 지목되었다(게다가 이것들은 앞선 대전에서 이 악마적인 무기를 세계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상습범..)



                                이것들이 분명하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이에 따라 정확한 진상 규명을 위해 연합군 최고 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의 의료진이자 화학전 전문가인 스튜어트 알렉산더(Stewart F. Alexander) 중령이 즉각 바리로 파견되었다. 
이미 폭격 이후 1개월 만에 이상 증세로 입원한 628명의 연합군 소속 환자들 중 83명이 사망하였고, 병원을 찾은 민간인 사상자 수는 훨씬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바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알렉산더 중령은 최대한 빨리 환자들을 검사하고 면담하기 시작했다.
그는 환자들의 검사와 면담 직후, 환자들에게 나타난 증상들은 머스터드(Mustard) 가스에 노출될 경우 발생하는 증상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이 치명적인 화학 무기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증상은 확실한데 출처를 모르겠다...


그는 각 선박에서 발생한 유사 증상 사망자의 수를 계산한 다음, 당시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의 위치와 비교 검토했으며 그 결과, 대부분의 희생자는 미국 선적 EC2-S-C1 타입(Type) 리버티 형(Liberty ship) 수송선 “존 하비(John Harvey)”와 그 인근에 정박한 배들에서 나왔음을 확인했다.
또한 공습 직후 존 하비와 인근 수송선들의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급파되었던 영국 해군의 헌트 급(Hunt-class) 구축함, 제틀란드(HMS Zetland)와 비체스터(HMS Bicester)의 승조원들에게도 유사 증상이 발발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바리 항구 내 선박들의 정박 위치..위에 존 하비의 위치가 보인다..


이 영국 해군 소속 구축함들이 현장에 도착해 구조 활동에 나설 무렵, 폭격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가 적재한 탄약에 유폭되며 존 하비는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동시에 다량의 기름진 해수가 공중으로 솟구친 다음 구조 활동 차 외부 갑판에 나와 있던 인원들에게 비처럼 떨어졌다.
당시 이들 구축함들은 생존자를 구조한 다음, 피해를 입지 않은 유조선 라드롬(La Drome)을 불타는 배들로부터 멀리 떨어트린 후 타란토(Taranto)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몇몇 생존자들을 구조한 구축함 비체스터는 새벽 무렵 바리 항구를 벗어날 때, 자이로 콤파스가 오류를 일으켰고, 결국 육안에 의한 항해를 위해 장교들이 외부로 나왔는데, 그들이 타란토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 함선의 장교 전부가 실명 상태에 이르러 그 누구도 배를 항해 할 수 있을 만큼 볼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항구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머스터드 가스에 노출된 영국 해군의 헌트급 구축함 비체스터와 승조원들..


여러 정보들을 취합한 결과, 이 모든 증상들은 화학 무기인 머스터드 가스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지만, 가장 중요한 그 출처는 명확히 밝힐 수는 없었는데, 마침내 항구 바닥에서 폭탄 파편이 발견되자 모든 의심과 미스터리가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항구 바닥에서 발견된 폭탄의 파편은 바로 미 육군 항공대가 보유 중이던 머스터드 가스를 내장한 M47A1 화학 폭탄의 일부로 확인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 항공대가 공중 폭격으로 화학전을 실시하기 위해 설계하고 생산한 M47A1 화학 폭탄은 폭격 후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기 위한 형태로 제조되었다.
이 폭탄은 화학전 하에서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기 위해 0.79mm 정도의 매우 얇은 표피를 가졌고, 전면은 반구형, 지름은 약 200mm이며, M108 퓨즈가 내장되어 폭발 시 내용물을 방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이 항구 바닥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들의 M47A1 화학탄 파편이었다..


이 폭탄에 내장된 머스터드 가스의 정확한 명칭은 설퍼 머스터드(Sulfur mustard)인데 세포 독성을 띄는 수포작용제로, 노출된 피부에 큰 수포를 일으킨다.
순수한 설퍼 머스터드는 무색이며 상온에서는 점성을 띄는 액체로 존재하나, 화학 작용제로 사용할 때는 황토색을 띄고 겨자와 같은 냄새가 발생해 겨자 가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출된 직후에는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고, 살포된 지역도 이상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무심결에 많은 양의 가스에 노출될 위험이 다분한데, 문제는 가스에 노출된 후 24시간 안에 심한 가려움증과 피부 자극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노출된 부위에 노란색 액체로 가득 찬 거대한 수포가  생긴다.


 
머스터드 가스 기체는 면이나 모 같은 일반적인 천을 간단하게 통과하기 때문에 노출 당시에 옷으로 가리고 있던 부위라도 수포가 생기며, 안구에 노출되었을 시에는 처음에는 따갑다가 결막염을 일으키고, 눈꺼풀이 부어올라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
만약 고농도의 가스를 흡입한 경우에는 호흡기의 출혈과 수포를 일으켜 점막에 손상을 주고, 폐수종을 일으켰다.
겨자 가스에 노출되어 입는 환부 부상은 화학 물질에 인한 화상으로, 노출된 가스 농도에 따라 1도에서 2도 화상, 심한 경우에는 3도 화상까지 이를 수 있고, 심한 화상(신체 면적의 50%를 넘는 화상)은 치명적이며 환자가 며칠이나 몇 달 후 사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또한 이 가스에 노출되었다가 생존한 경우에도 그 발암성으로 인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한편, 당시 바리 항구에 정박했던 엘윈 F. 놀스(Elwin F. Knowles) 선장이 지휘하는 수송선 존 하비(John Harvey)는 항구에 정박해있던 다른 대부분의 선박들과 같이 전형적인 미국제 풀빵인 리버티 형 수송선이었다. 
수송선 존 하비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윌밍턴(Wilmington)에 위치한 노스캐롤라이나 조선소(North Carolina Shipbuilding Company)에서 1943년 1월 19일에 건조 완료 되었고, 선체 번호 878번에 10,856톤의 화물 혹은 504명의 병력을 운송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다.



              수송선 존 하비는 풀빵처럼 찍혀나오던 전형적인 리버티 형 수송선이었다..


당시 이 배에 실린 화물들 대부분은 군수품과 식량 및 장비와 같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이런 물품들과는 달리 치명적인 비밀 화물도 함께 적재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약 100톤에 달하는 M47A1 화학 폭탄이었다.

 
1943년 말경의 상황이면 나치 독일이 독가스를 사용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는데, 이는 그 시점에서 전쟁은 그 전략적 우위가 서서히 연합군 측으로 넘어 가고 있었고, 독일은 모든 면에서 방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큰 좌절을 겪었고 북아프리카도 잃었으며, 상대방인 연합군은 이제 유럽 대륙에 있었고, 천천히 이탈리아 북부를 향해 진군하는 중이었다.



                      문제가 슬슬 골 때려지기 시작한다..가스 한 방 놔드릴까??


아마도 그 자신이 1차 세계 대전 중에 화학 무기의 희생자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자신은 결코 화학전을 벌일 생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전략적 균형을 바로 잡을 수단 중 하나라고 믿으면 독가스의 사용을 승인할 만큼 충분히 무자비한 인물로 여겨졌고, 당시 연합군의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타분(Tabun..신경 작용제의 일종)이라 불리는 새로운 화학 약품을 포함한 다량의 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어떤 문명국가의 화학 무기 사용도 용납할 수 없다는 정책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적국이 감히 그런 무기를 먼저 사용한다면 미국 또한 같은 방법으로 응징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해 놓고 있었다.



                               내가 직접 마셔봐서 아는데..가스는 영 아냐~~


당연히 히틀러의 맞수이자 버럭 강경파의 대표주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언제든 화학 무기를 쓸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는 이미 전쟁장관 시절이던 1919년, “가스를 사용하는 것에 왜 이렇게들 까다롭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고, 2차 대전 시기에도 여차하면 화학 무기를 쓰겠다며 난리를 쳤다.
1943년, 동부전선의 우크라이나 도네츠 분지에서 독일군이 화학 무기를 쓸지도 모르겠다는 정보 당국의 보고를 받자 그는 “만약 독일이 러시아인들에게 가스를 쓴다면 우리도 가능한 한 최대 규모로 독일 도시들을 가스로 덮어버려야 한다.”고 대답했다(흑~~~ )
그는 “가스는 폭발력이 강한 폭탄보다 관대한 무기이며, 다른 어떤 전쟁 수단보다 적은 인명 손실로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까지 발언할 만큼 화학 무기 옹호론자였다(그 스타일로 봐서 충분히 이해한다..처칠 영감..)


                          난 가스 안 마셔봤걸랑~~ 그래서 그딴 거 모르걸랑~~


수송선 존 하비는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유럽 전선에서 사용할 독가스 폭탄을 선적할 선박으로 지정되었고, 이 사안은 선장조차도 이 치명적인 화물에 대해 전혀 몰랐을 만큼 최고 기밀에 속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승조원들 중 일부 눈치 빠른 이들은 이 항해가 결코 평범한 항해는 아니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는데, 일반 하물과는 다르게 미 본토에서 2,000발의 M47A1 화학 폭탄이 적재될 때, 제 701 화학전 중대(701st Chemical Maintenance Company)의 하워드 D. 벡스트롬 (Howard D. Beckstrom) 중위가 이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목격되었으며, 이후에도 벡스트롬 중위와 함께 독성 물질 취급 전문가인 6명의 병사들이 승선, 승조원들과 철저히 분리된 채 유럽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이상한 것들이 탔다..사진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 육군 화학전 중대의 훈련 모습..


존 하비는 독일 잠수함의 그물망을 성공적으로 뚫고 별 다른 사고 없이 대서양을 건너 알제리의 오란(Oran)에 잠시 들른 다음, 바리로 향하기 전에 시칠리아의 오거스타(Augusta)로 향했다. 
당시 이 수송선의 화물 보안 책임자, 토마스 H. 리차드슨(Thomas H. Richardson) 중위는 선적되어 있던 화학 폭탄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승조원 중 하나였고, 그의 화물 명단에는 2,000발의 M47A1 가스 폭탄이 선적되어 있음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었다.
리처드슨 중위는 당연히 이 치명적인 화물을 최대한 빨리 내려버리고 싶었지만, 11월 26일, 그들이 바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빨리 내려버려야 하는데...환장...


항구는 선박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접안을 기다리는 수송선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부두를 따라 엄청난 화물들이 쌓여 있는 가운데, 치명적인 화학무기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가려 있었기 때문에, 존 하비에게 특별한 하역 우선권은 전혀 부여되지 않았다.
마침내 독일 공군의 기습 폭격이 시작되었을 때, 존 하비의 승조원들은 배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는데 선박은 직접적인 폭탄 피해를 입지 않았고 큰 손상도 입지 않았지만, 곁에 있던 피해 선박들로부터 화재가 번지며 끝내 위험에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그 상황은 화재와 화학 폭탄으로 인해 몇 배나 위험한 상황이었고, 놀즈 선장과 벡스트롬 중위 등 대부분의 승조원들은 자신의 위치를 떠나기를 거부하며 화재 진압에 매달렸지만, 결국 이들의 영웅주의는 궁극적으로 헛된 것이 되었다.


수송선 존 하비는 선적되어있던 폭발물들이 화재에 유폭되며 버섯 모양의 불덩어리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고, 배수량 14,245톤, 길이 134m의 화물선은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당시 승선해있던 모든 인원들은 그 즉시 사망했는데, 인근에 정박한 항공 연료를 운반하는 유조선인 펌퍼(USS Pumper)에 탑승한 사람들은 존 하비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순간, 폭풍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갔고, 이 유조선은 존 하비의 폭발 위력으로 인해 35도로 기울어지며 뇌진탕에 의한 사상자가 속출했다.


                               존 하비가 폭발하며 머스터드 가스의 비가 내렸다..


이 폭발로 수송선 존 하비에서 36명의 승조원, 10명의 해군, 28명의 호송 경비대원을 합해 75명이 사망했지만, 진정한 재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존 하비가 폭발하던 시각, 인근 해상은 피격당한 선박들로부터 탈출한 사람들로 가득했고, 바다 위를 떠다니며 구출되기를 기다리던 생존자들 중 하나인 수송선 존 바스컴(John Bascom)의 경비대장 K.K. 베솔(K.K. Vesole) 소위는 호흡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헐떡거리고 있었고, 연기가 이상한 것을 지적한 그는 “마늘 냄새가 난다.”라고 말했지만 그 이유를 깨닫지는 못했는데, 마늘 냄새는 머스터드 가스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이 치명적인 가스는 바다 위를 부유하는 기름과 지역 전체에 자욱한 연기에 섞여 있었다.


 

                                      바리의 악몽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손상되고 가라앉은 배들에서 연료유가 새어 나오자 유독 물질과 머스터드 가스의 혼합물은 물에 뛰어 들었던 생존자들의 피부에 침투하여 화학적 화상과 일시적인 실명을 유발하는 이상적인 용매로 작용했다.


한편, 알렉산더 중령은 존 하비가 운반한 화물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물과 기름으로 희석된 머스터드 가스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와 함께 밝혀진 증거를 바탕으로 미군의 화학탄에 의한 피해 상황을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또한 그는 희생자들의 부검을 직접 실시하여 수많은 조직 샘플을 확보했고(1943년 연말까지 미군들 중 80명 이상이 가스의 영향으로 사망했다...) 이 샘플들은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 머스터드 가스에 노출된 환자에 적용되는 기초 화학 요법의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처음에는 자신들이 선제공격에 사용될 수 있는 화학 무기를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숨기고 독일의 소행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하였으며, 그 비밀을 지키기에는 너무 많은 증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1944년 2월까지 이 재앙을 은폐하려 하였다.
하지만 1944년 3월,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알렉산더 중령의 보고서를 승인하였고, 미 육군 참모 총장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또한 이 사실을 시인하며, 미국은 보복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학 무기를 사용할 의향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와 관련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미국도 처음엔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당시 이 사실을 비밀로 분류한 문서..


그러나 이마저도 부인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였다.


그는 이 사건은 반드시 비밀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특히, 영국군의 관할 하에 있는 항구에서 독일 공군의 급습으로 대피해가 발생한 것도 당혹스러운데, 화학 무기의 존재와 그로 인한 피해를 알리는 것은 독일인들에게 안성맞춤의 프로파간다 소재를 넘겨주는 것이라 주장했다.
결국 화학 무기의 존재와 피해 상황은 미국 측 기록에는 공식적으로 언급되었지만, 처칠은 영국내 관련 기록을 모조리 삭제하고, 머스터드 가스에 의한 피해자를 “적의 행동으로 인한 화상”에 의한 사상자로 기록하도록 조치했다.


처칠의 이런, 어쩌면 비열한 시도로 인해 더 많은 사망자가 초래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만약 전투 중 행동이란 단어가 사라지면 더 많은 희생자, 특히 이탈리아 민간인이 적절한 처우를 받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실제 화학 무기에 의한 이탈리아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집계는 현재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비문명화된 종족들에 대한 독가스 사용을 적극 지지한다! 크흑~~~ ㅠ.ㅠ


하지만 독일은 진실을 알게 되었고 악명 높은 선전 방송인 액시스 샐리(Axis Sally)를 통해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독가스로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며 연합군을 조롱했다.


바리 공습에서 발생한 연합군 및 상선 승조원의 가스 사상자는 628명이었고 이들 중 69명이 2주 이내에 사망했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존 바스컴의 헤이트만 선장처럼 이후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집계한 수치에는 치명적인 화학 물질에 노출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이탈리아 민간인들은 이 기록에 포함되지 않았고, 이들 중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사망하거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례가 다수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하며, 공습 이후 민간인들은 도시 밖으로 대량 이주 처리되었다.



                당신의 아들들이 당신의 독가스로 인해 죽어갔습니다..액시스 샐리~~


바리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습은 화학 가스 노출로 인한 피해 또한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바리 공습은 전략적 재앙도 함께 몰고 왔다.


항구는 끔찍한 사건 이후 3주 동안 완전히 폐쇄되었고, 공습 직후인 1944년 1월 12일,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중장의 미 제 5 군은 추축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는 안지오 상륙 작전(Operation Shingle)과 연계하여 이탈리아 전선의 교착 상태를 깨트리기 위한 대규모 공세 작전의 일부였다.
하지만 미 제 5 군은 라피도 강을 건너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결국 보급 부족으로 인해 철수해야만 했는데, 당시 발표된 공식적인 사유로는 악천후가 보급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되었지만 실은 바리 항구의 폐쇄가 그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직후 벌어진 연합군의 공세는 라피도 강의 대학살로 불리며 탈탈 털린다..


또한 지상군과 마찬가지로 제 15 공군도 독일의 바리 공습 성공으로 인해 엄청난 좌절을 겪었는데, 당시 제 15 공군은 1943년 12월 4일부터 영국 주둔 제 8 공군과 함께 독일 본토와 점령지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단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직전에 발생한 바리 기습으로 인해 제 15 공군의 전쟁 참여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실제로도 제 15 공군은 1944년 2월까지 전쟁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유일하게 화학 무기와 관련된 사건이었던 바리 공습은 2배의 재난을 불러왔고, 피해와 비극은 전시의 기밀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오늘날 숀 스파이서(Sean Spicer) 백악관 대변인이 “히틀러 같은 비열한 인간도 화학무기를 쓰지 않았다”고 떠들어 대며 당시 연합군이 마치 선을 대변하는 존재처럼 부각시켰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어쩌면 처칠이 히틀러보다 전쟁과 관련해선 더 악마적인 존재였을 수도..)


따라서 굳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만큼 보복한다!”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오버해서까지 극악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겠으나,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포장하며 천사 코스프레를 떨 필요도 없지 않은가 싶다.
 
전쟁이란,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악하다.




<사진 출처>

http://www.oldmagazinearticles.com/article-summary/ww1-first_use_poison_gas_artillery_gas_shells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1184&ntt_writ_date=20170413
http://www.bmpt.co.uk/the-bari-raid-1943_topic576.html
http://www.halcyon-class.co.uk/sharpshooter/sharpshooter_1943.htm
http://chemicalweapons.cenmag.org/when-chemicals-became-weapons-of-war/
http://www.oldtyneside.co.uk/page%20295/page%20295.htm
http://www.historyinanhour.com/category/blog/world-war-one/
http://www.andrewclem.com/War/WorldWarTwo.html
http://www.vintag.es/2013/05/old-photos-of-adolf-hitler-in-period.html

보면 볼수록.. 처칠은 개또라이가 맞는 듯합니다.. 어디 독일 총통이 아니라 영국 수상이었던 덕에 위인 소리를 그나마 듣지 싶은... (그것마저도 영국인들 한정이겠지만)
그래서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 그걸 왜 줬는 지 모르겠지만.
영국애들 자화자찬하는데는 이골이 난 애들이니까요...^^
영국애들 자화자찬하는데는 이골이 난 애들이니까요...
동감!! ^^
오반지 모르지만 처칠이 냉전시기 캄보디아에 태어났으면 폴포트급 같은 살인마가 될 수도 있었단 느낌입니다.

국가적으로 제어가 되는 영국 태생이고, 극적인 시대
전승국의 수상이라 과는 묻히고 공은 확대돼서 미화되어 남아있는... 위인전에 등장할 인물은 절대 아니란 생각입니다.

잔혹한 인성을 가진 인간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위인전은 어쩌면 그때그때 시대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어쩌면 우상화의 기본적 산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때 두화니 영감도 위인전에 등장했으니..
처음 알게되는 내용들이 많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별 말씀 다하십니다..^^
처칠이야 말로 저질이죠.
크흑~~ -_-;;
이런 이야기는 처음 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처칠.. 영국이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인재기도 하죠.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인간은 거의 없어요.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은 그냥 평범한 필부일 수 있습니다. 처칠과 대략 동시대 사람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제대로 된 "까방권"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도 모든 자리에서 입바른 말만 하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위인이라고 배운 사람, 존경하던 사람의 다른 면모를 보면서, 실망하고 욕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평가가 좋은 사람은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행동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간에, 그런 사람들이 자라고 살아온 시대를 읽는 것도 재미있죠.
히틀러도 당시 독일 국민들이 꼴 필요한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선택했죠
스탈린도 역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구요.

만약 우리가 냉전 몇 십년동안 연합국의 자화자찬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과연 처칠이라는 인물을 지금처럼 좋게 평가할까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겁니다.
조조라는 인물이 지금은 꽤 배울 점 많은 사람으로 인식을 하는 것도 그래서죠.

객관적으로 보시죠. 처칠이 사이코 패스가 아니라는 증거가 과연 있는가?

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가 어떻게 되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 부분에서 죄의식이 없습니다.

히틀러 또한 게르만 민족만 잘 되면 다른 인류들은 절멸해도 좋다 주의...
아주 일맥상통하죠.

히틀러는 최악의 인간이고 처칠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건...
확실한 이중잣대입니다.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일단 벌어진 전쟁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란 점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히틀러는 전쟁을 시작해서 져서 독일을 망국의 길로 이끈 정치가죠.

처칠이 전쟁을 시작했나요? 처칠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나요?

"객관적으로 본다"는 말이 무엇인가요?
처칠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라? 불량감자님은 윈스턴 처칠의 머리뚜껑이라도 열어보셨습니까? 저 사람의 일생에 대해 문헌 조사를 어디까지 해보고 객관적으로 보라 말하는 지 모르겠는데, 참으로 자신만만하시네요.
워워~~
괜한 논쟁거리를 제공해서 두 분이 대립하게 만든 것 같네요..캬캬

제 생각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어차피 시대가 사람을 불렀고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진 거죠..
뮌헨 회담 직후 런던에 돌아온 체임벌린이 자신이 서명한 주데텐란트 합병 승인 서류를 흔들면서 비극은 시작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전 정권의 나약함으로 영국은 전쟁이란 낭떠러지에 몰렸고 당연히 그 난국을 타계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으니 처칠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을 뿐이죠.
그렇지 않고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었다면 처칠은 어쩌면 시대를 따라가지 못 하고 뒷방에서 허공에 주먹이나 날리며 궁시렁거리는 괘팍한 꼴통영감으로 그렇게 사라져 갔을 수도..(바로 지금 우리들도 그런 부류들을 보고 있지요..댓통 후보로 우르르 나왔던데 그 중에도 제법 면면이 보이더군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승만이 그런 뻘구덩이를 만들지 않았다면 4.19 직후의 그런 정치적 혼란상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박정희라는 사람은 우린 전혀 모르는 인물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생각해보니 장담할 수만은 없겠네요..일본 군국주의의 대표적 지랄병인 2.12 쿠데타를 이 땅에서 꿈꾸던 사람이었으니..아무튼..)
처칠은 영국의 국가적 이익을 철저히 추구했던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고 또한 그런 자신이 추구하는 국가적 대사를 위해 소수의 희생 따윈 과감히 감수한 인물인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오죽하면 2차 대전이 종결되자마자 소련을 침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으니..

따라서 두 분의 말씀 모두 옳은 말씀이고 그 부분에 대해 이견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세대 이후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와 저의 이전 세대까지만 해도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 하에 그 틀에 딱 맞춰진 교육을 받아왔던 까닭에 2차 대전에 관련한 부분은 상당부분 한쪽으로 쏠리거나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추축국이 악의 근원인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승전국 중에서도 미국과 영국은 무조건 선인이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독소 전쟁과 관련한 부분은 아예 모르거나 그저 단편적인 지식으로 점철되어 있습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승전국에 대한 무조건 적인 우상화와 그 리더들에 대한 위인화인데 이 또한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바로 잡아야 할 부분으로 보입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왜 제 블로그 간판이 “삐딱한 전쟁사”인가 하면, 이미 우리가 교육받아오고 마치 정설으로 생각하는 그런 부분들에도 많은 왜곡과 잘못된 시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만약 인기에 부합한다거나 입 바른 소리만을 듣고 싶다면 우리 사회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분들의 시각과 입맛에 맞춘 내용들을 더욱 예쁘게 포장하여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분들의 인기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우리 사회의 밀매를 자처하는 대부분이 우파적 경향을 보이고 계시기에...)
하지만 제 생각을 피력하자면 전쟁사, 특히 근현대 전쟁사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 너무도 한 쪽으로만 치우친 경향이 있고 부각시키고 싶은 부분만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다분하다 생각되며 이는 어쩌면 후 세대에게 잘못하면 잘못된 역사를 주입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란 제 조그만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제 세대에 있어서 처칠은 오로지 자유 진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인물”로만 평가되고 교육받았으나 그들을 지도자로 옹립한 영국 국민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를 외면했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영국이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필요에 의해 선택된 “한시적인 선출직 공무원”이었고, 국민들로부터 그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인정받기에는 충분했지만, 전후 세계질서의 정립과 전후 복구에는 전혀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했기에 한마디로 토사구팽 당한 것이죠.
처칠의 토사구팽, 이것이야 말로 오랜 시간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확립하고 이를 유지해온 영국이라는 나라와 국민들의 수준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으며, 민주주의가 낙후되고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국가일수록 이런 팩트는 감추고 처칠의 강력한 리더쉽과 전쟁의 승리라는 공만을 강조하는 교육을 시도하는 것 아닐까요?

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며 앞선 박정희식 리더쉽이라던가 경제 부흥이라는 슬로건, 즉 과는 철저히 외면하고 공만을 부각시켜 능력 따윈 전혀 검증되지 않은 그 딸래미에게까지 정권을 세습시켜 이 나라 정치의 낙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죠..
꼭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라 인도의 간디니 네루니, 파키스탄의 부토, 버마의 아웅산 등등 그저 애비와 할애비의 명성과 이름(그것도 공만이 부각된) 만으로 정권을 세습하는 경우는 항상 비극과 국민의 희생만을 불러왔고 그런 식으로 보자면 저런 나라들을 후진국이네 어쩌네하며 욕 할 당위성 따윈 우리들에겐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 드리지만 처칠의 공과나 하마평을 두고 두 분이 소모성 논쟁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으실 듯합니다..
어차피 시각의 다양성이란 점에서 보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고 따지고 보면 정답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하긴..
냠 님의 말씀대로 처칠의 머리뚜껑을 열어 보지 못 했으므로 그의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같은 논리로 말씀 드리자면 닭의 머리뚜껑을 열어 보지 못하므로 “선한 의지”의 참과 거짓, 유무 또한 알 수 없을 듯합니다..
에구..-_-;;
앞 글을 보고 저는 당연히 나치들이 화학탄을 쓴 것으로 예측을 하였으나,
완전히 헛발 짚었네요. 반전이 쩝니다.
옷~~ 어제 댓글 보고는 jaykim9님께 완전히 뽀록났다고 생각했는데요..캬캬
마누라가 몰래 뀐 스텔스 방귀에 남편이 중독된 꼴과 비슷하군요...^^a
그러면서 옆집 아저씨를 의심하는..캬캬
약리학교과서중 가장 유명한 것인 goodman & gillman이라는 책인데 이 두명은 예일대의대 교수였고 당시 바리항의 대참사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유해를 부검하여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류최초의 항암제를 만들었습니다. 45년 원폭투하에서 얻은 희생자들의 데이터는 항암치료의 2대축인 방사선치료의 기반이되었고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듯 대량살상무기가 암치료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중의 아이러니아닐까 싶네요.
저도 그 내용은 보았는데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언급하지는 못했습죠..
괜히 어줍쟎게 아는 척 했다가 쿠사리 먹을까봐서리..캬캬

어쩌면 인류사의 의학 발달 과정은 거의 대부분 전쟁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방귀에 포함되어 있는 천연 황화수소가 암을 비롯한 수 많은 중병의 치료제이며 예방약이라는 군요, 그래서 부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다 초월하여 방귀까지 사랑하야 아예 엉덩이에 코를 박고사는 진정한 애처가들은 절대로 암을 비롯한 중증질환에 걸리지 않는다는군요.----- 사랑은 곧 생명-----

엄처시하에서 헤매는 우리들의 자화상 밀덕들의 고민 해결책이기도 할듯.....그대여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박을지어다.......아도매치나 불평과 분노는 산자들의 특권....


주의) 비행기타고 하늘을 나르는 중에는 절대 절대 금지...폭사하는 수가 있다...
.... 예전에 태평양전사의 초절정고수인 대사님 블로그에서도 나왔던 문제인데....

본좌가 항상 궁금하게 생각했었던 것이 왜군이 중국전선에서 아무 꺼리낌없이 생화학무기를 여러번 사용했었는데...그런 왜군들이 왜 태평양 전쟁에선 한번도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는가하는 것이었는데...

대사님이 아주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더군요....
"쓰면 뒤지니까...."

왜군 지휘부도 또라이이긴하지만 바보는 아니라서 미군을 상대로 생화학무기를 쓰면 그 댓가는 백배천배의 보복으로 돌아오니 무뇌아가 아닌 다음에야 도저히 쓸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백배천배란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일본 뿐만이 아니라 독일이 보유하고 있었던 화학무기까지 다 합친 숫자보다 연합국의 보유량이 더 많았기 때문인데...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백배나 많은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또 수시로 그에 대한 경고를 했었더군요...

"화학무기를 너그가 먼저 쓰면 우리는 그에 대응하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유를 가지고 무제한 보복을 하겠다"고... 그러니 히틀러가 아무리 또라이라도 무뇌아는 아니라서 2차대전 전기간을 통틀어 독일이 연합국을 상대로 독가스를 쓴 적은 한번도 없죠..


그래서 예전에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이런 경우엔 정답입니다..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






..... 그나저나 저 "바리"란 지명을 오늘 처음 알았고....

숨을 깔딱 대던 이탈리아 주둔 독일 공군이 43년말에 백대 넘게 폭격기를 동원해 폭격을 했었고 그 피해는 참으로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

그때문에 동경 폭격이후 승승장구 하며 장군으로 진급하여 욱일승천기세로 뻗어나가던 둘리틀 장군이 쪽박 차게 되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세상은 넓고 초절정 고수들은 너무 많아 함부로 명함을 내밀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새삼 절감 하였읍니다 크흐흐흐흐
현처리님은 얼마든지 명함을 내미셔도 되십니다..크흐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