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국주의 과정은?

봉달이 2017. 4. 19. 16:44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8>



통수권이란 요술 방망이와 군국주의의 부활


- 런던 군축 회담 당시 하마구치 내각은 경제 실태에 맞지 않는 일본의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환율을 전전 수준으로 유지하고, 경제 불황에 따른 정부의 재정 압박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대폭적인 세출 삭감을 수반하는 긴축 재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따라서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과 다른 열강과의 군사적 균형을 고려하면서 군축을 추진하여 해군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 이에 따라 1930년 4월 22일,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군사참의관(軍事参議官) 등의 설득으로 군부와 우익의 반대를 억제한 이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조인했고 10월 2일에는 이 조약의 비준 단계에 도달했다.



                                런던 군축 회담장의 일본 대표단..


- 하지만, 해군 군령부로 대표되는 강경파들과 이들과 결탁한 야당 정우회는 애초 해군이 원하던 수준을 달성시키지 못하고 조약에 서명했다는 것, 그리고 프랑스 등과 같이 일본도 조약의 부분 참여에 그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정부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등 대부분의 인사들이 하마구치 내각의 정책을 지지했지만, 군령부 부장 카토 간지(加藤寛治)와 차장 스에쓰구 노부마사(末次信正), 후시노미야 사다나루(伏見宮貞愛) 군사참의관, 그리고 “해군의 하나님(海軍の神様)”이라고 불리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등이 이에 맹 반대하고 나서며 일본 해군은 마침내 국제적인 시야를 가진 온건파와 군사 기술적인 면만을 고집한 강경파로 쪼개졌다.


                온갖 것들이 다 끼어들며 일이 복잡해 진다..후시노미야 사다나루..


- 특히, 일본 해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온 도고 영감탱이가 세상 물정 모르면 좀 찌그러져 있지 전면에 나서서 끝까지 반대 의견을 강경하게 표명한 것이 이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 해군 강경파들의 주장은 국방상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지만 정치권과 얽히며 이상한 쪽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병력량의 결정도 몽키킹의 고유 권한인 통수권(統帥権)에 관련된 것이므로 이를 무시하고 조약을 체결한 정부의 결정은 원천 무효라는 방향으로 번져갔다.
- 원래 통수권 문제는 메이지 이래로 계속해서 헌법 상 큰 모순을 안고 있는 조항이었는데 메이지 헌법에서는 “제 11 조, 덴노는 육해군을 통수하고, 제 12 조, 덴노는 지휘 하의 육해군의 편제와 병력량, 군비를 결정한다.”고 몽키킹의 권한을 규정하고 있었다. 
- 메이지 헌법의 문구만을 놓고 따지자면, 제 11 조에 의해 군(軍)의 용병, 전략, 전술의 지휘 통솔하는 것은 군대만이 가지는 특수 권한이며, 군대는 곧 몽키킹 직속 기관에 속하므로 내각 총리의 권한 범위 밖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 하지만 바로 뒤 조항이 이와 정면으로 상충되는데 제 12 조에 따르면 “군의 편제 권한, 상비 병력 결정 등은 몽키킹의 권한이지만, 이는 정부의 예산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므로 총리의 책임에 속하고 의회의 예산 결정권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 이에 따라 해군의 병력을 제한하는 것이 몽키킹의 고유 권한인가, 아니면 정부의 권한인가를 놓고 정치권과 해군 내부에서는 연일 설전이 벌어졌고, 일본의 신문들은 이 논쟁에 대해 매일같이 일면 톱으로 장식하며 화려하게 보도했다.
- 당시 야당이던 정우회는 조약에 대한 불만으로 뚜껑이 홀랑 열린 해군 군령부와 담합, 다카라베 타케시(財部彪) 해군 장관을 궁지에 빠뜨리고, 일이 잘 풀리면 하마구치 내각을 실각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이 논쟁의 선봉에 섰던 일본 해군의 대가리들..


- 정우회의 이 야심을 간파하고 있던 카토와 스에쓰구 등 해군 군령부의 대가리들은 이들을 이용하여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의 탈퇴를 노리고 의회의 비준을 차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발악을 다했다.
- 이런 군령부와 정우회의 “정부의 통수권 월권”이라는 주장에 하마구치 내각과 해군성의 조약 찬성파들은 저명한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말을 빌려 “병력량의 결정은 통수권 의 범위 밖이기 때문에, 내각의 책임 하에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당시 일본의 저명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홍석천??


- 이렇게 양 측의 주장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강경파의 수장, 군령부 부장 카토 간지는 더욱 극우적으로 변해갔는데, 그는 이즈음 일본 극우주의의 대표주자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와 그의 극우단체 국본사(国本社)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일부 미디어에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이 런던 회담에 참석한 다카라베 해군장관이 귀국할 때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움직임도 보도되었지만, 그 진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 하지만 런던 군축 회담에 참석했던 다카라베 해군장관을 암살하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해군의 소장파 젊은 장교들이 이런 “뜻 안 맞으면 상관이라도 사시미 멕이기”에 적극적이었다(잘 돌아간다..)



- 실제 1930년 5월 20일, 조약에 반대하던 해군 군령부 참모 쿠사카리 에이지(草刈英治) 소좌가 회담에 참석했다 홀로 귀국하던 다카라베 해군장관이 타고 있던 기차 안에서 스스로 배를 째는 골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 이 동네 건달들이나 하는 양아치 짓거리의 이유로는 신경쇠약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그가 타카라베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루지 못한 데 있다는 것으로, 당시 군령부 동료는 그가 귀국한 일본 대표단이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에 충격을 받고 암살을 실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기차에서 배 짼 일본 해군 군령부 참모 쿠사카리 에이지와 도쿄역의 환영 인파..


- 그러나 이를 조금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짓거리가 얼마나 병맛 짓거리인지 금방 알 수 있는데, 당시 이들이 주장하던 것이 바로 병력의 축소는 오로지 몽키킹의 권한이며 이를 거스르는 건 곧 반역이라는 주장인데, 스스로 배를 째는 것이야 말로 몽키킹의 허가 없이 지 맘대로 병력을 축소시킨 것이 되므로 이야말로 통수권 월권을 스스로 자인한 것이다.
- 또한 이노마의 이 짓거리는 그 직후, 일본이라는 나라를 헬 게이트로 몰고 가기 시작하는 한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데, 2년 뒤 벌어지는 일본이 군국주의의 구렁텅이로 가는 첫 번째 스텝, 5.15 사건에서 이를 실행한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장교들의 모토가 바로 “쿠사카리 소좌의 죽음을 기억하라”였기 때문이다(참조 → http://blog.daum.net/mybrokenwing/328)
- 아무튼 이런 사건이 벌어지자 조약 반대파는 이를 두고 해군의 젊은 장교가 군축 조약 성립에 분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이며 이것이 곧 해군의 주장을 대변한다고 강조하며 사태는 점점 더 뻘구덩이 싸움이 되어갔다.



- 이후, 카토 간지는 한층 더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며 국방의 문제를 발생시킨 책임을 지고 다카라베 해군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가뜩이나 얽인 데다가 하마구치 내각과 군령부 사이에 도고, 후시미노미야 등도 끌어 들여 극한의 대립과 충돌 사태가 삼파전으로 벌어져 일본 해군 내부는 더욱 혼란 상태에 빠졌다.
- 가뜩이나 난리 굿판인 가운데 1930년 6월 10일, 카토 군령부 부장은 갑자기 몽키킹을 찾아가 정부 탄핵을 읍소하며 동시에 이런 혼란 속에선 군령부 부장의 중책을 책임지지 못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정책은 건함 경쟁이 아니얍! 


- 이것이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대미문의 지 맘대로 덴노 만나기 사건으로 이는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 부장이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지 맘대로 대원수로서의 몽키킹을 직접 만나는 것을 말한다
- 이에 히로히토는 그의 거취 문제를 내각에 일임했고 다카라베 해군 장관은 가뜩이나 골치 아픈 가토를 단박에 경질한 다음, 구레 진수부 사령관 타니구치 나오미(谷口尚美) 대장을 그 자리에 앉혔다(하지만 카토는 집에도 안 가고 다시 군사 참의관에 임명..하여튼 희한한 것들..)


          하기 싫음 땔쳐~~!! 카토의 뒤를 이어 군령부 부장에 앉은 타니구치 나오미..


- 하지만 런던 군축 조약이 완전히 비준되기 위해서는 아직 군사 참의관 회의(軍事参議官会議)와 추밀원(枢密院)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 여기에는 또 다른 한 명의 꼴통 분자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는 바로 죽지도 않고 애 먹이는 영감,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 그는 런던 조약의 파기를 끝까지 주장하며 결코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다카라베 해군 장관의 즉시 사직을 주장했으며, 이런 도고의 X고집에 히로히토도 질려서 “저 영감을 설득하려면 모든 걸 달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해진다.
- 결국 7월 23일 해군 군사 참의관 회의에서 군령부와 해군성은 추후 해군 병력에 관한 사항에 관해서는 해군 장관과 군령부 부장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는 각서가 교환되고 나서야 도고는 약간 수긍의 자세를 보였다(위아래도 없는 콩가루 군대의 전형을 보여준다..명령에 죽고 산다며? 합의보다 망하겠다..뭐 실제로 그랬지만..)


                   클라스는 영원하다..X고집 영감의 전형 도고 헤이하치로(중앙)..


- 또한 하마구치 총리가 나서서 런던 조약으로 해군의 작전 계획에 전력 부족이라는 결함이 생기겠지만 제한에서 벗어난 함선들을 충실히 건조하고 항공력의 강화 등에 투자하면, 국방에 거의 지장이 없고, 또한 이 조약에 오래 구속되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조약 기한이 끝나는 대로 최선의 방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이 영감탱은 겨우 조약 승인에 동의했다.
- 추밀원에서는 7월 말부터 조약과 관련한 심사가 시작되었지만,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위원장을 비롯해 심사위원 전원이 정부 비판파가 임명되었고, 조약 찬성파는 완전히 배제되어 심사는 무려 2개월에 걸쳐 논쟁만을 양산하였으며, 오죽하면 이 마지막 단계에서 조약 비준의 불발 가능성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였다.


                                 이젠 비준 과정을 놓고 씨름이 벌어진다..


- 이에 따라 야당 정우회는 이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임시 전당 대회를 열어 또 다시 우려먹던 사골, 내각의 통수권 월권을 꺼내 들며 이를 비난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 그러나 당시 일본의 미디어들은 추밀원을 비난하는 기사를 내보내며 정부를 응원하였고 여론은 또한 조약을 지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 또한 사이온지 긴모치를 비롯한 원로들도 정부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고, 추밀원 고문관 중에도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를 비롯한 많은 조약 찬성파가 존재했다.
- 형세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자 반대로 일관해온 이토 미요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찬성파로 홀랑 돌아섰고 결국 10월 1일, 추밀원 본회의는 심사위원회의 결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다음날 정식으로 런던 조약은 비준되었다.



                온갖 돗데기 시장이 벌어진 후에야 런던 조약은 비준된다..이시이 기쿠지로..


- 하지만 이때 돌출된 통수권 문제는 일본 해군에 엄청난 상처를 남기게 되고, 군부의 위기의식을 증폭시켜 정당 정치의 몰락을 가져오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직후 시작되는 본격적인 일본 군부의 독재 시대를 여는 서곡이 되었다.
- 러일 전쟁 이래로 일본 군부는 헌법에 보장된 통수권 독립을 방패로 의회와 정부의 통제를 최대한 무시하고 군을 마음대로 움직여 국정을 좌우하려는 충동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었다.


                              몽키킹을 등에 업고 우리 맘대로 할테닷~~!!


-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호헌 운동을 주도하던 정당 정치인이었던 이누카이와 정우회의 정치인들이 이런 군의 비민주적인 충동을 모를 리 없었다. 
- 하지만 런던 조약 직후 군의 병력 규모를 결정하는, 어쩌면 군의 충동을 억제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권한을 정부의 소관 밖이라고 주장한 것은 정당 정치의 자살 행위와 다름없고, 또한 단지 정권을 빼앗긴 위한 술책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눈앞의 이권에만 눈 먼 멍청이 짓거리의 대 향연이었다.
- 실제 약 2년 후 5·15 사건(1932년)이 발생했을 때, 통수권의 독립을 외치며 총리 공관에 뛰어든 젊은 아해들에게 목숨을 잃었던 이가 바로 이때 정권 획득에 눈이 멀어 일본 해군의 주장을 적극 뒷받침했던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바로 그 사람이었다(지가 뿌린 씨앗을 지가 거둔..역사의 아이러니??)



                             지가 판 무덤에 데꿀멍된 이누카이 츠요시..


- 한편, 조약 비준 1개월 뒤인 1930년 11월 14일 아침, 오카야마 현(岡山県)에서 열리는 육군의 특별 훈련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 역에 나간 하마구치 총리는 플랫폼에서 극우주의자 사고야 토메오(佐郷屋留雄.. 당시 23세)에 의해 권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 1921년 11월에 발생한 하라 타카시(原敬) 총리 암살 사건 이후, 도쿄 역은 총리의 승강 시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하마구치 총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지시함에 따라 당시 역의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하마구치의 암살 시도 직후와 도쿄역 내 암살 장소..


- 일단 하마구치는 목숨은 건졌지만 이듬해 4월 13일에 총리직을 사임했고, 약 4개월 후인 8월 26일, 부상이 악화되며 결국 사망했다.
- 현장에서 체포된 대가리 안에 극우적 망상으로 가득한 범인 사고야는 범행 동기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하마구치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덴노의 통수권을 침범했다. 그래서 그랬는데, 왜?”라고 진술했지만 “니가 말하는 통수권이 도대체 뭔데?”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이 자슥 뭐래? 이래서 무식한 것들이 이념에 빠지면 무섭다는..)


           덴노의 통수권을 침범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몰라..암살범 사고야 토메오..-_-;;


- 야당인 정우회도 여당인 민정당도 합심하여 군인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고, 정치가 군부를 통제해야 하는 것은 정권의 유무를 떠나 정당 정치 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의 정치권은 외교 문제를 정쟁의 도구로 삼아 정당 정치를 부정하는 통수권 문제를 정쟁에 이용함으로써 이렇게 스스로 무덤을 팠다.
- 한편, 1931년 말, 육군 참모총장에 몽키킹의 핏줄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閑院宮載仁)가 취임하자 1932년 2월, 해군도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며 후시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가 해군 군령부 총장에 취임했다.


                   후시노미야 히로야스.. 딱 보면 바로 몽키 핏줄임을 알겠다는..


- 후시노미야는 강경파의 정신적 지주로 온건파를 제거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1933년 10월에는 해군 군령부 조약이 개정되며 해군 군령부는 “해군”이 빠진 군령부가 되고 해군 군령부 부장은 군령부 총장이 되었는데, 이것은 육군의 “참모 본부”와 “참모 총장”에 대응시킨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군령부 총장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고 해군 장관의 지휘권과 내부 통제권을 축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이후 병력의 결정권을 해군성에서 군령부로 이관, 군령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고 해군성의 기능을 제도적 인사적으로 약화시키는 데 성공, 이때부터 함대파가 일본 해군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 이때부터 일본 해군 내에서는 전쟁을 피하고 국제 공조를 유지하자는 온건파인 조약파의 인물들은 죄다 예비역으로 돌려졌고 1933년 11월, 강경파인 함대파의 중심, 스에쓰구 노부마사(末次信正) 중장이 연합 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마침내 조약파는 전멸했다.


    이노마까지 대가리 자리에 오르며 일본 해군의 미래는 절딴난다...스에쓰구 노부마사..


- 이렇게 통수권 문제는 군부의 정치 관여를 유발하고 정당 정치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일본이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twitter.com/bot_hagetatsu
https://ja.wikipedia.org/wiki/%E8%B0%B7%E5%8F%A3%E5%B0%9A%E7%9C%9F
http://www.lishiquwen.com/news/22171_all.html
http://rekishi.blog41.fc2.com/blog-entry-37.html
https://kotobank.jp/word/%E7%9F%B3%E4%BA%95%E8%8F%8A%E6%AC%A1%E9%83%8E-15208
http://murakumo1868.web.fc2.com/02-modern/02-001.html
http://murakumo1868.web.fc2.com/01-modern/0012.html
https://ja.wikipedia.org/wiki/草刈英治

까뒤집고나면 일본도 참 허술한 나라였는데... 방향설정 잘하고, 이래저래 아다리 맞아서 탄력받아 치고나가고 30년대까진 좋았네요.^~^

국운이란게 뭔지... 지금은 기대 안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참여해야 얼척없는 일 안당하겠지요.
확실히 프랑스와 이태리는 런던 조약 전체에 대하여 국민여론을 반영하여 참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약 성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국과 별개의 협정을 맺어서 보조전투함 규제를 인정하였습니다. 프랑스가 1930년대 내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경순양함과 조약 제한 배수량을 초과하는 대형구축함들을 건조하긴 했지만 이들 함종의 총배수량에서는 영국 대비 35%에 근접한 것도 조약과는 별개로 협정을 준수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