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국주의 과정은?

봉달이 2017. 4. 21. 14:09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19>



파국의 신호탄 - 제남(済南) 사건


- 일본 해군이 세계적인 해군 군축의 여파로 급속도로 그 기세가 쪼그라들며 끝내는 자기네끼리 분열하는 나락의 끝으로 떨어질 때, 한 국가 안의 두 군대, 아니, 내부의 적에 가까운 육군은 그 꼬라지를 보며 배꼽을 잡고 낄낄거리고만 있었을까?
- 1926년 7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蒋介石)는 국내의 세력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군벌과 장쭤린 베이징 정부 박멸을 목표로 북벌을 시작했다(1차 북벌..)
- 이 과정에서 중국에 거주하던 몇몇 외국인과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이 침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1926년 4월 18일, 주중 영국 공사가 일본 측에 2개 사단의 파병을 제의했지만,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내각의 외무장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나중에 하마구치 내각의 외무장관도 역임..)의 불간섭주의와 국제 협조 노선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장제스의 1차 북벌 과정에도 일찌감치 개입할 수 있었지만 처음엔 이를 거부했다..


- 하지만 와카츠키 내각의 뒤를 이어 다나카(田中)의 내각이 탄생했고, 이들은 강경 외교 노선을 표방하는 차원을 넘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재림이라 보아도 무방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총리의 주도 하에 칭타오(靑島)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핑계로 5월 28일 만주의 보병 제 33 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이후 제 10 사단과 제 14 사단의 일부도 합류..)
- 이들은 5월 30일, 대련을 출발, 다음날 칭타오에 입항, 상륙을 완료했지만(1차 산동(山東) 출병..) 국민당 내부에서 장제스의 남경(南京) 정부와 공산당 중심의 무한(武漢) 정부 사이에 대립이 발생, 북벌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이에 근거를 잃어버린 일본 측은 8월 24일, 파견 병력의 철수를 결정했다.



- 그런데 이 제 1 차 산동 출병이 진행되던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 다나카 총리의 주재로 일본 정부 및 군부의 대가리들을 모여 소위 동방회의(東方会議)라는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만주와 몽고, 특히, 동북 3성(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역은 국방상 중대한 이익이 있기 때문에, 만일 중국의 내전이 만주에 파급될 경우, 이를 보호하고 일본의 세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적당한 조치를 취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당시 이 회의에서는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패권을 다투고 내전 상태이며, 군벌이 각지에 분산되어 세력을 유지하는 상황이므로, 일본은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아 무력에 의한 대륙 진출을 도모한다는 의견과 어디까지나 현재의 권익 보호를 첫째로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의견이 도출되었다(적극적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간섭한다는 건 마찬가지..)


                 이것들은 갈가리 찢어저 지네끼리 난리법석이니 이때를 노리자!


- 이에 대해 다나카 총리는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생겼을 때는 단호한 조치 즉,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명분으로 출병도 불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아베가 요새 지랄하는 것과 그 주장이 똑같다..한반도 위기가 어쩌니 하는..개인적으로 이런 걸 쪽발들의 감출 수 없는 전통적 足가튼 습성이라 본다..)


                아베의 이 지랄병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정신 차리자..


- 이에 따라 만일 중국의 내란이 격화될 경우, 국민당과 손잡고 공산당의 중국 공산화를 저지한다는 방침도 정해졌으며, 또한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중요 거점으로 간주되었던 만주와 내몽고 동부의 권익은 중국 대륙과는 별도로 분리하여(만몽 분리 정책) 이 지역은 무조건 지배하에 둔다는 방침까지 결정되었다.


              만주와 내몽고 동부의 권익은 대륙과 분리하여 무조건 지배하에 둔다!!


- 회의 당시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중장이 다나카 총리를 향해 “이런 방침을 실행에 옮긴다면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적어도 미국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가만있지 않는다면, 영국은 물론 다른 열강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인데, 미국에 대한 대책은 물론,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 결심과 준비가 되어있는가?”라고 물었다.
- 이에 대해 다나카 총리는 대게의 군국주의 추종자들이 그러하듯이 졸라 무책임하게 “당연히 결심했다.”라고 대답했고, 무토 중장이 “나중에 또 맘 바뀌는 것 아니냐?”라고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는 이미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며 딱 잘라 단언했다(하..얼척이라고는 없는 것들..세계 대전이 뭔지도 모르는 색기들이..)


                        무토 노부요시 : 그랬다가 세계 대전 일어나면 우짤건데?


                             다나카 기이치 : 아, 내가 첵임지께!... 흑~~ ㅠ.ㅠ


- 중국은 물론 열강의 반발도 당연히 예상되는 이런 강경 정책을 이들이 굳이 발표한 까닭은 “중국은 무력으로 위협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이노마들의 오래된 “중국은 허접하다”란 시각에서 비롯되었고(히틀러의 대 소련 “허물어져가는 헛간” 이론과 비슷..중국 쌈마이 설이랄까..) 이런 일본의 움직임은 산동 출병과 더불어 당연히 안팎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 이런 결정은 6월 1일자로 관동군이 육군성과 참모 본부에 제출한 “대 만주 몽고 정책에 관한 의견”과도 일맥상통했는데 이에 따라 관동군의 만주와 몽고 정책이 동방 회의에 의해 뒷받침되게 되었다.


                지네들의 중국에 대한 썩은 야망을 온 동네방네 떠들고 자빠진다..


- 이후 1928년 3월, 국민당의 북벌이 재개되며 이들이 광저우(広州)를 출발, 일본이 절대 손아귀에 놓아서는 단언한 동북 3성 중의 하나인 산동성에 근접하였고 4월 말, 마침내 약 10만 명의 국민당군이 성내에 진입하자 다나카 내각은 옳타꾸나를 외치며 제 2 차 산동 출병을 단행했다.
- 이 조치에 따라 중국 주둔군 천진(天津)부대의 3개 중대(임시 제남 파견대(臨時済南派遣隊)라 명명..)와 본토로 부터 제 6 사단의 파병이 결정되어 4월 20일, 임시 제남 파견대가 제남(済南)에 도착하였고, 4월 26일에는 일본 본토로부터 제 6 사단의 선발대인 사이토 류(斎藤瀏) 소장의 혼성 제 11 여단이 제남(済南)에 도착, 약 6,000명의 일본 육군 병력이 산동성에 배치되었다.



북벌군이 산동성에 진입하자 사이토 류 소장(아래)의 11여단이 제시까닥 본토로부터 파견된다..


- 5월 1일에 이르면 국민당의 북벌군이 제남에 입성하면서 이미 도착해있던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침내 5월 3일, 소부대의 충돌에서 비롯된 양쪽 군대의 마찰은 전투로 발전했다(당시 충돌의 원인은 양측이 주장하는 바가 각자 다르므로 명확하지 않으나 아무튼 둘 다 뻘짓거리 한 것만은 확실..)
- 5월 7일 오후 4시, 일본군은 후쿠다 히코스케(福田彦助) 제 6 사단장 명의로 중국군의 철수 및 군단장의 처형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고 기한까지 답변이 없자 제 6 사단은 5월 8일 04시,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 이미 5월 4일 오전, 비상 국무회의를 열고 관동군에서 보병 1 여단, 야포병 1 중대, 조선군에서 혼성 1 여단과 비행 1 중대의 증파를 결정하고 있었던 다나카 내각은 일이 이렇게 확대되자 아싸라비야를 외치며 5월 9일에는 보병 제 3 사단의 추가 파병이 결정되었고(제 3 차 산동 출병..) 5월 11일에 이르면 일본군은 제남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당시 일본군(청색)과 국민당군(적색)의 제남에서의 대치 상황..


- 이 과정에서 중국 측은 민간인을 포함, 사망자만 약 3,000 ~ 6,123명, 부상자는 1,450 ~ 1,701명으로 추산되었고 이에 반해 일본 측은 전사 26명, 부상 157명이 발생했고 민간인은 사망 15명, 부상 15명이라는 중국 측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숫자였다
- 또한 최초 충돌 당시 일본 민간인 사망자 12 ~ 13명 중 대부분은 일본 영사관의 피난 권고를 무시하고 남아있던, 아편 밀수입 등 어둠의 업계 종사자들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있던 사사키 도이치(佐々木到一) 중좌가 이 사건 과정에서 간첩으로 몰려 국민당 병사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뒤 겨우겨우 일본으로 돌아왔다.
- 그는 두들겨 맞은 게 억울했던지 일본 민간인 피해를 엄청 과장하여 보고하였고(아, 열라 맞았다, 이기야!) 육군성은 300명 이상의 일본인이 학살 됐다는 보도 자료를 돌려 여론을 부채질했다.



          제남 사건의 조사 당시와 두들겨 맞고와서는 엉뚱한 소리 지껄인 사사키 도이치..


- 이 사건으로 인해 이전까지 영국을 주적으로 삼고 배척하던 중국내 여론은 그 대상이 일본으로 순식간에 바뀌었고(가뜩이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의 대일관도 결정적으로 악화되었으며, 1차 산동 출병에는 별 반대 의견이 없었던 열강도 이 사건 이후 영국은 국민당과의 접촉을 시작하였고, 원래부터 국민당에 호의적이었던 미국의 여론을 부채질하여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측은 이 사건을 일본이 계획적으로 북벌을 방해하려 한 것으로 해석하였고 그 결과, 이 사건은 그들에게 씻을 수없는 원한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정책도 독선적이고 과대 망상적인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으니, 그만큼 이 제남 사건은 이후 중일 관계를 피투성이의 원수 관계로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일의 대립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 한편, 일반적으로 30년대 일본 군부의 폭주는 앞서 설명한 관동군 독단의 장쭤린(張作霖) 열차 폭파 암살사건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 어리석음의 극단으로밖에 설명할 수없는 사건이 왜 지극히 군부에 호의적인 다나카 총리의 의향을 무시하고 이 시기에 일어났는지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상당히 골 때리는 일일 수밖에 없다.
- 이는 이 사건이 단순히 관동군의 일부 강경파 무뇌충들이라는 소수에 의한 단순 모략이 아니라, 장쭤린 배척이라는 관동군과 육군 중앙부 수뇌부들의 단결된 의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고, 만주의 유지를 위해 문제의 일괄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가장 명쾌한 수단이라는 일본 육군 수뇌부의 공통된 의견 하에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럼 도대체 왜 만주 문제의 해결책을 둘러싸고 정부와 육군 사이에 이 정도나 엄청난 의견 차이가 발생했을까?
- 장쭤린(張作霖) 암살사건은 제남 사건 이후 장제스의 북벌에 대응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정부와 육군 사이의 대립에서 태동된 것으로, 제남 사건 이후 국민당 북벌군은 제남을 우회하여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 1928년 5월 중순 무렵에는 장쭤린이 눌러앉아 있던 베이징의 함락도 시간문제가 되었다.
- 이에 일본 정부는 국민당 북벌군의 북방 진출이 곧 만주의 이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 보고, 장쭤린의 북경 정부와 장제스의 남경 정부에 대해 내전이 만주까지 파급될 경우, 치안 유지를 위해 일본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란 내용의 의사 표명이라 쓰고 협박이라 읽는 의향서를 보냄과 동시에 이를 약속하는 각서 체결을 요구했다(또한 장쭤린에게는 베이징을 포기하고 봉천으로 돌아가라고 권고..가 아니라 협박했다...)



            국민당군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일본은 자기 밥그릇이 불안하기 시작했다..


- 문제는 5월 16일, 다나카 총리가 베이징 주재 공사에게 훈령한 전보에 이 각서와 관련한 조치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고, 거기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 “장쭤린의 군대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만주로 철수한다면 이를 허용하지만, 만약 국민당군과 교전하거나 혹은 교전 후 패배하여 만주로 퇴각하는 경우에는 이들도 국민당군과 마찬가지로 무장 해제하지 않고 만리장성 이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불허한다.”



       고작 철도에 대한 관할권만 있는 것들이 아예 만주로는 들어오지도 말랜다..양아치들..


- 이것은 장쭤린의 봉천군과 장제스의 국민당군 둘 다 만주에 진입할 경우, 무장 해제시킨다는 내용으로, 이런 방침은 이미 2차 산동 출병이 결정된 다음날인 4월 20일에 관동군 참모장 사이토 히사시(斉藤恒)와 와다 에이타로(畑英太郎) 육군 차관에 상신되어 내각에 보고되었고, 또한 5월 16일, 외무성 아세아국과 육군성 군무국 사이에 만들어진 이런 조치 방안은 장쭤린에 대한 하야 권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 다시 말해, 일본군이 만주 철도와 그 지선을 경비하는 것은 조약상의 권리이지만, 이를 넘어 만리장성 이북으로는 소속에 관계없이 무장한 중국군은 단 1명도 넘지 못하며, 전부 무장 해제해야 한다는 것은 조약상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야말로 중국에 대한 심각한 내정 간섭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bbs.tiexue.net/post_11743885_1.html
http://www.lishixinjie.com/lishi/36769.html
http://www.qstheory.cn/ts/zxyd/dsdyjsc/201106/t20110620_88406.htm
http://www.geocities.jp/kawasaki_to/d-mansyuuteikoku.html
http://www46.atpages.jp/mzprometheus/%E6%AD%B4%E5%8F%B2%E5%80%AB%E7%90%86%E5%AD%A6/13591
https://ja.wikipedia.org/wiki/%E4%BD%90%E3%80%85%E6%9C%A8%E5%88%B0%E4%B8%80
http://kk1234ang.egloos.com/v/2794336
http://www.jlifeus.com/e-pedia/09.ZZgrass/01.AsiaPacific/top.htm

중국 공산당의 목숨을 살려준 일본군부라고 보면 되겠죠? ^^

그 때를 다룬 글을 보면서 열거된 군벌 목록과 퍼진 지역을 보고 한 생각인데,
당시 중국을 모델로
장개석의 야망(모택동의 야망)이란 이름으로
삼국지스타일이나 옛날 남북전쟁게임스타일로
땅따먹기 게임을 만들면 그럴 듯 하겠습니다.
흠..어디선가 그런 게임을 본 듯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