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국주의 과정은?

봉달이 2017. 4. 28. 16:53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나?<20>



일본 육군 정치 개입의 발단, 우가키 군축


- 앞서 제남사건을 통해 다나카 총리는 출병까지 단행하며 일본 군부에 우호적이었지만 그 직후 장쭤린 암살 사건까지 벌이고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다나카 내각마저 일본 육군은 엎어버리는 극악스러운 상황까지 나아갔다.
- 문제는 “그들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것은 중국 문제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그것을 "그들만의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여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이를 통해 정당 정치를 타파하여 군부 주도의 군국주의 체제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 따라서 산동 출병, 만주 사변 같은 사건들은 그들이 추구하고자하는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국가 개조를 추진하기 위한 수단 혹은 전진 기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 하지만 이들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일단 다시 시계를 되돌려볼 필요가 있다.
- 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 짓는 베르사이유 조약 2년 후인 1921년 11월, 미국의 주도로 워싱턴 회의가 열렸고 그 결과,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되며 일본 해군은 그 팽창에 제동이 걸리며 족쇄가 채워졌다.
- 일본 해군은 이 조약에 따라 건조 중이던 전함의 폐기, 항공모함으로의 개조, 신조 건함 계획이 중단되고, 병력 7,500명과 해군 공창 직원 14,000명이 정리되기에 이른다.




                             뭐, 해군놈들 문제지 우리랑 뭔 상관??

       
- 또한 워싱턴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영 동맹이 폐기되며 대신 4개국 조약(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이 체결되었고 태평양 상의 도서에 대한 4개국의 상호 권리 존중과 분쟁 발생 시의 협의가 규정되었다.
- 이는 주로 해군과 관련된 조약이었기에 일본 육군 입장에선 별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동시에 체결된 9개국 조약(위 5 개국에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추가)은 육군의 입장에선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 이 조약에 의해 중국에 진출하는 10개국 간에 중국의 독립, 영토 보전, 문호 개방, 기회 균등 등등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이 일본의 중국 대륙에 대한 특수 이익을 인정한 이시이-랜싱 협정(Lansing–Ishii Agreement)은 폐기되어 버렸다.


                      어랍쇼?? 중국을 건들지 말라고?? 이건 문제가 있는데...
 
-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에서 인적 물적 피해가 너무나 방대했기에, 해군력의 군축이 주요국간에 협의되고 이의 실행이 합의되었으며, 또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극동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이 도래하자 일본 육군도 더 이상 국회와 여론의 군축 요구를 쌩까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 이에 따라 워싱턴 협정을 이끌어낸 가토 토모사부로(加藤友三郎) 내각의 육군 장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는 1922년 8월과 이듬해인 1923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육군 최초의 군축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으흐흐.. 니네도 깎아! 일본 육군 최초의 군축을 단행한 야마나시 한조..


- 하지만 이 시기의 군축은 평시 병력의 감축을 통해 얻은 군사비 삭감 분으로 새로운 무기를 도입한다고 하는, 일종의 군 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인식되었으므로 그렇게까지 육군의 반발을 불러오진 않았고, 일본 육군은 야마나시 군축으로 4개 보병사단에 해당하는 병력 약 6만 명과 군마 13,000필을 감축, 장비의 현대화를 도모했다.
- 하지만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과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이런 육군 현대화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고 특히 관동 대지진에 따른 막대한 긴급재정 지출로 인하여 일본 육군은 우가키 군축이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일본 육군의 점진적 군축 계획은 관동 대지진으로 직격탄을 맞는다..


- 키요우라(清浦) 내각에서 육군 장관에 취임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이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에서도 그대로 육군 장관직에 유임되었고 그는 관동 대지진 이후 이의 복구를 위해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므로 이에 따른 군축을 요구하는 여론이 점점 거세지자 1925년, 군사 예산의 삭감을 목적으로 하는 육군 회계 규정 정리위원회를 설치했다.
- 하지만 우가키 군축은 겉으로는 여론을 의식해 예산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예산 감축 분만큼 장비의 현대화를 목표로 하였기에 앞선 야마나시 군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어쩌면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완전히 현대화된 열강의 육군에 비해 일본 육군의 경우는 그 장비 면에서 열악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였다.




                       꼬라지 자체가 다르다..동네 양아치 수준에 불과했던 일본 육군..


- 또한 이는 우가키가 일본 육군 사관학교 1기생으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지방 하급 무사 출신의 동네 양아치 무리(특히 초슈 파벌..)와는 달리 애초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은 군인이기도 하였고 두 차례의 독일 유학을 통해 근대식 군 체제를 일찍부터 습득하였던 인물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우가키는 자신이 단행한 군축으로 인해 육군의 배신자이자 공공의 적으로 불리게 된다.


                     졸지에 일본 육군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우가키 가즈시게..


- 이는 앞선 야마나시 군축과 우가키 군축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인데 바로 4개 사단을 통째로 없애버린 것에서 기인한다.
- 우가키 군축에 의해 일본 육군은 기존 21개 사단 중 제 13 사단, 제 15 사단, 제 17 사단, 제 18 사단 등 총 4 사단과 일종의 예비군 동원 사령부인 연대구(連隊区) 사령부 16개, 육군 병원 5개, 육군 유년 학교 2개교가 폐지되었다.
- 문제는 우가키가 야마나시와는 다르게 4개 사단을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데 있었는데 그저 소속 사병들을 퇴역시키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4개 사단 소속의 많은 장교들까지 전원 보직 해임 또는 예편시켜 버렸다.


              4개 사단이 통째로 없어졌다..사진은 우가키 군축 당시 해산 기념 사진..


- 이는 말 그대로 일본군 장교단의 밥그릇 자체가 없어져버린 일이었고, 초슈 파벌의 해체 이후 슬슬 격화되던 육군 내의 파벌싸움의 결과로 자리를 놓고 벌이는 개싸움이 치열하던 판에, 그 자리 자체가 없어지자 우가키는 단숨에 육군 전체의 적이 되어버렸다(특히 고위직 포스트인 사단장 4명, 보병 연대장 16명의 자리가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 가장 큰 반발을 불러왔다는..)
- 웃기는 건 실제 우가키는 1913년,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내각이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고자 육해군 장관 현역 무관제 폐지를 들고 나오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돌리다가 걸려서 육군성에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을 만큼 군국주의적 경향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 하지만 어느 정도 닳고 닳은 이 시기에 오면, 그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열풍에 힘입어 군대를 통제하려는 정부와 대립하는 대신, 이에 동조하며 입맛을 맞춰주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모험 할 나이는 지났다..적당히 타협해야지..쿨럭~~)




- 어쨌든 우가키 군축이 당장 자신들의 밥그릇과 맞물리며 일본 육군은 우가키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길길이 날뛰며 반발하였는데 특히 앞장섰던 조직이 앞서 일본 해군의 강경파인 군령부와 마찬가지로 육군에선 참모본부였다.
- 작전권을 지닌 참모본부와 상의 없이 육군성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일이었다는 것에서 우선적인 반감이 터져 나왔고 밥그릇 때문에 그렇다고는 솔직히 면이 안서니 이것들은 우가키가 신성한 통수권과 국방권을 두고 타락한 정치인들과 결탁했다며 맹비난했다.
-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식 반발이었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우가키에 의해 밥그릇이 실종된 것으로, 당시 일반적으로 일본 육군의 장교는 오늘날의 우리 군과 같이 민간의 일반 봉급생활자에 비해 퇴직 연령이 빨랐고 따라서 장교의 경제생활에는 항상 불안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밥그릇이 깨졌다....ㅠ.ㅠ


- 게다가 민간의 경우는 소위 낙하산 취업이나 재취업의 길을 열 수 있었던 반면, 퇴역 장교는 재취업이 어렵고, 승진 경쟁에서 탈락되면 어중간한 나이인 사십 대에 예편되어 연금만으로 생활하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 따라서 예편된 장교들의 가장 큰 생활 기반은 바로 군인 연금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이 시기에 예편된 장교들은 1차 대전 직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게 된 것에 더해, 한창 벌 나이에 세상 내던져졌고, 이를 바라보던 당시 일본 육군 장교들 사이에선 세상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말이 유행했다.


- “저희는 군국주의 왕정 시대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사회와 격리되어 머리 속에 심어진 것이라고는 군인 정신이었고 몸에 새겨진 것은 우향우, 좌향좌였습니다. 세상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인간관계는 젬병이었으며 군대에서의 계급과 훈등(勲等)의 혜택 또한 사회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가장 잘 된 것이 체조 교사였을 만큼 세상의 낙오자로 느껴졌으며 어쩌면 군대식 교육의 인과응보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출처 : 히로다 데로유키(広田照幸), <육군 장교의 교육 사회사-입신출세와 천황제(陸軍将校の教育社会史―立身出世と天皇制)>
- 이러한 상황에서 군인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고, “쪼들리게 가난한 소위, 어떻게 억지로 살아가는 중위, 겨우겨우 대위까지 합이 140엔. 며느리도 못 받는다. 아~ 귀여워”라는 노래까지 있었으며, 이런 군인 경시의 풍조 속에 이른바 청년 장교(青年将校)라는 소장파 장교들 사이에선 “십 년간 와신상담”이라는 표어까지 태어났다.



 
- 따라서 이 시기 일본 육군의 장교들은 지금은 인내하는 시기이지만 반드시 자신들의 시대가 올 것이고, 이를 악물고 군축으로 상징되는 자신들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면 지위와 신분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한 나라의 지배를 맹세하기에 이른다(그래서 와신상담..언젠가 홀랑 엎을 것이다!!) 
- 이후 일본 육군은 우가키 군축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정치적 노선을 가지게 되고 그 수단과 목적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며 마침내 그 파국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 이처럼 일본 육군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시기는 우가키 군축 이후 시기가 되었고 자신들의 입으로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밝히는 사례도 있었는데 1932년 11월경, 당시 육군성 군사 과장이었던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 대좌는 다음과 같이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한때 구국의 영웅이었던 장교들이 졸지에 멸시의 대상이 된다..


1. 1차 대전 후 전세계적인 군축의 흐름과 다이쇼 데모크라시 아래의 반전 평화 사상의 유행으로 군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메이지 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저하되고,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생긴 일에 대해 군인들이 엄청난 불만을 갖게 되었다.
2. 통수권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함으로써 작전뿐만 아니라 군의 평시 편성권도 군 통수권에 포함시켰으며 또한 군에 대한 지휘와 명령은 몽키킹만의 고유 권한 화하여 군에 대한 내각의 참여를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그러면서 반대로 군이 정치를 좌우하는..)
3. 1차 대전 이후의 불황과 1923년 관동 대지진 재건 비용을 염출하기위한 긴축 재정의 일환으로 군인의 급여 인하(10%)가 단행된 것. 이것은 인플레이션과 겹치며 실제 장교 급여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4. 청일 전쟁 후부터 다이쇼 초기까지 매년 평균 800명 이상의 장교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다이쇼 말부터 쇼와 초기에 오면 대량의 젊은 육사 출신 장교들을 군이 떠안게 된 것. 그러나 군대의 고위직 자리는 올라갈 정도로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군축까지 벌어지면서 승진 경로가 완전히 막히거나 정체 현상이 생겼다.


- 이것이 육군 중앙 유년 학교를 차석으로, 육군 사관학교를 수석, 육군 대학교도 차석으로 졸업하며 “나가타 앞에 나가타 없고, 나가타 후에도 나가타는 없을 것(永田の前に永田なく、永田の後に永田なし)이라 불리었고,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와 함께 일본 육군 최고의 수재로 평가받는 나가타 데쓰잔이 스스로 실토한 군이 정치에 관여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시와라 간지(위)와 함께 일본 육군 최고의 수재로 평가받는 나가타 데쓰잔..


- 이 중 1, 3, 4번은 어디까지나 국내에서의 군인의 사회적 지위와 처우 방법에 관한 문제이지 만주 문제 등 외교 문제에 직접 결합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이후 이런 문제들은 그저 정당 정치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치부하였다(전부 정치질 하는 쓰레기들 때문이야!!)

- 이런 막무가네식 책임 떠 넘기기의 결과, 군은 정당 정치에 의한 민주주의적 국가통치에 대해 강한 적대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끝내는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 이르기까지 일파만파로 번져가게 된다(발단은 밥그릇 싸움이었는데 나중에는 전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튄다는..)
- 한편, 당시 일본 육군과 정치권의 거물이던 우가키 가즈시게는 군축으로 인해 단박에 육군의 적으로 돌려짐은 물론, 권력의 핵심이자 그 정점인 총리 자리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다.

-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이는 당연히 육군 내부의 격렬한 반발 때문이었고, 오죽하면 그가 총리가 되면 육군 대신은 영원히 공석이 될 것이라는 협박도 여과 없이 그대로 그에게 전달되었다(오죽하면 우가키의 별명이 위성(衛星)이었다..항상 권력의 핵심을 맴돌았지만 그 정점에는 이르지는 못했기에 붙은..)



                   우가키는 권력 주변을 맴돌기만 하였기에 별명이 위성이었다..


- 이것은 이후 일본 육군의 거물급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의 정치적 야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우가키의 꼬라지를 보면서 그들은 그 교훈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다.
-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육군이고 만약 그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거슬리게 되면 곧바로 조직의 적이 되어 개인적 입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물론, 잘못하면 암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 따라서 이후 일본 육군의 대가리 자리에 오르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 군내의 강경파와 극단주의자들을 기꺼이 지지하며 독려하였고 더 나아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부에 대고 끝없는 강경책만을 제시하고 강요하게 된다(머뭇거리는 순간, 바로 육군의 적이 되어 암살 표적지가..-_-;;)


                  이때부터 일본 육군 대가리들은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 된다..


- 한편, 우가키 군축으로 일본 육군은 전차 연대와 고사포 연대, 비행 연대 같은 현대화 부대가 신설되고, 자동차 학교와 통신 학교가 개교하였으며 항공기와 전차, 기관총, 자동차 견인형 야포가 보급되며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 하지만 여전히 사단의 편제 장비 내용은 열강 육군에 비해 현저하게 열등했고, 또한 장교 진급의 정체와 채용 인원의 감소는 중일 전쟁 이후 일본 육군의 장교 부족 현상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 더 웃긴 건, 우가키 군축에 의한 육군성에서의 예산 절감 효과는 군축 실시 전에 비해 달랑 10% 감소 정도에 그쳤는데 반해, 이 난리법석으로 인해 일본 육군 내부에는 심각한 충격파가 전해졌고, 그 파장으로 인해 파벌 항쟁의 격화를 초래하게 만들었다(돈 아낀다고 시작한 짓거리가 전쟁의 헬 게이트를 열어젖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twitter.com/kjiruk/status/651039758240485376
https://wapbaike.baidu.com/item/%E5%B1%B1%E6%A2%A8%E5%8D%8A%E9%80%A0
http://ritkanlathatotortenelem.blog.hu/2013/12/09/napi_erdekes_25_kep_249
http://royallibrary.sakura.ne.jp/ww2/prime_japan/ugaki.html
http://shirase100.org/2016/04/05/cat01_03/


오랜만에, 1등, 크흡...
포스팅 감사합니다.
축 (1등)
(만세)
(-0-)
중위가 연봉 412만엔
중좌가 1800만엔
중장이 2800만엔이면 별로 적은돈같지가 않은데...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건지요?
이미지는 그냥 참고삼아 퍼온 겁니다..
그리고 이미지에도 중위 월급은 310엔이라 되어있지요..

1939년 당시의 경성의 물가를 보면 (물가(2007.10.30) 박기주ㆍ이영훈ㆍ조영준)

소고기 한 근 0.6엔 (일제강점기 당시의 근은 약 320g)
쌀 한 되(0.8kg) 0.27엔
콩 한 되 0.28엔
?나무 한 관(3.75kg) 0.13엔이였다.

출처: BEMIL사진자료실 2차대전과 군인들의 월급
봉달이님 제가 알량하게나마 소화 초기 1926년-1935년 정도의 사회인 월 급여를 찾아보았는데,

소학교 선생 초임 남성48엔 여자41엔
중학교원 평균 85엔
고등학교 졸업 초임 35엔
전문학교 졸업 초임 58엔
제국대학 졸업 초임 70엔
순사 47엔 순사부장 48엔 경부보 54엔
여급 30-35엔
관청임시고용 일당 1엔50전 공원1엔90전 석공2엔 대공1엔80전

정도인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직업군인에게 경제적인 불안이 있다라고 한다면 장교보다는 하사관에게 있는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사관학교 졸업자는 보통9년차 10년차에 대위가 되어 158엔의 급료를 받는것을 볼 때, 이들의 경제적인 불안이 실체적인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만연하였던 장교의 특권의식에 비롯하여서 "나는 이정도 돈을 받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라는 왜곡된 발상에 기인하는것인지 봉달이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 제 사견을 말씀드리자면 그 당시 만연하였던 장교의 특권의식에 비롯하여서 "나는 이정도 돈을 받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라는 왜곡된 발상에 기인한 것에 더해 경제적인 불안 또한 실체적으로 가중되었다 생각됩니다.
당시 일본 장교의 시각에서 보자면 총체적 난국이었죠..

잘 아시다시피 메이지 유신 이후 1차 대전 종결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부는 끝없이 팽창만 했을 뿐 결코 제동이 걸린 일이 없었기에 본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군축의 영향과 1923 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의 재정 지출, 1차 대전 후의 인플레이션의 영향은 그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성공 세력의 일원으로 군부를 장악했던 소위 지역 파벌의 시대가 지나고 근대 교육을 받았다는 사관학교 출신의 소장파 장교들에겐 더욱 그러했죠.
일본 내 수재 중의 수재 집단이라는 그들이 청운의 꿈과 입신양명의 야망으로 군대에 들어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육군에 있어서 인사 행정의 문제도 있었고, 군인의 처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죠.

물론 일본 군부의 상층부가 난 해당 없으니 모르겠다 식으로 앉아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는데, 당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보직의 신설이나 해당 계급의 상승 같은 조치를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재정상의 관점에서 쓸데없는 낭비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그 결과, 군축을 요구하는 정치적 압력도 더해져, 사단의 감축과 조직 개편 및 대량 예편이 강행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퇴역 처리된 한 영관급 장교의 증언을 보면 연금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1차 대전 이후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받게 되었다고 징징거리고 있고 육군 장교야 말로 스모 선수 다음으로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 육해군의 사관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들의 70~80%는 40~50세 사이에 무능하다고 비판받으며 예비역이 되었고 이 안에는 30대도 드글드글했으니 불만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봅니다.
물론 이런 사정은 현대의 우리 군도 마찬가지지만요..

감사합니다..
히로다 데로유키의 글이라는 인용문을 읽다가,
옛날 교련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군인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부와 기술은 그 때와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이 다른데,
사람들 생각이란 건 쉽게 점프하지 못하고, 하나 하나 단계를 꼭꼭 밟아 가며 길가에 개똥도 밟게 해야 하느님 직성이 풀리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