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전차의 삽질 원인

봉달이 2017. 7. 13. 16:06

2차 대전 초, 연합군 전차부대의 삽질 원인<28>



운명의 날과 전체 상황


- 1940년 5월 14일은 어쩌면 제 2 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 있어서 가장 운명적인 날이자 결정적인 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먼저 히틀러의 서유럽 침공 계획에 있어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 네덜란드가 5월 10일, 독일의 작전 개시 달랑 이틀 만에 전 전선에 걸쳐 괴멸되었고, 비록 5월 17일까지 소소한 저항이 이어졌지만, 네덜란드군은 5월 14일 저녁, 항복을 결정했다(정식 항복문서 서명은 5월 15일 오전 10시 15분..웃기는 건, 군대만이 항복하고 네덜란드 국가 자체는 항복하지 않았다..)



                        불과 4일만에 네덜란드군은 완전히 붕괴되며 항복을 결정한다..


- 당시 네덜란드는 적국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 역량이 국가적으로 충분하였는데, 여기에는 높은 교육 수준으로 군사 훈련을 금방 습득할 수 있는 젊고 부유한 국민들이 다수를 이루었고, 이런 인적 자원에 더 해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발전된 군수 산업 등 산업기술적인 시설 측면 등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들은 이런 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았고 이는 국가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들의 안이함에 더해 외교 측면에만 매달렸기에 일어난 막장적 사태였다(체코슬로바키아의 재현..)
- 오죽하면 침공 당시 독일군은 네덜란드 군과 비교해도 장비나 훈련에서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신화도 가능하다는 사람마저 존재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그 국가 역량으로 보아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 평가되었는데...


-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프랑스 전역에서의 독일군은 장비의 단점을 우수한 전술로 극복해 마치 신화처럼 비춰져도 별 의의가 없을 만큼 빛나는 것이었지만, 네덜란드에서의 전투에서는 확실히 모든 면에서 독일군의 우위가 도드라져 있었다.
- 당시 네덜란드군은 대규모 부대의 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비 부족이 심각했고, 보유하고 있던 병력은 달랑 8개 사단에 1개 자동차화 경보병 사단이 전부였으며(벨기에도 비록 충분하진 않지만 23개 사단을 보유..), 기갑 전력은 더욱 형편없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던 최소한의 기갑 전력인 140대의 전차도 보유하지 못했다.
- 그들이 가진 전차로는 작전이 불가능한 프랑스제 르노 FT-17 전차 1대(!!!)가 전부였고 이 달랑 1대 있는 전차는 대전차 장애물이 제대로 작동되는 지 시험하는 테스트에 사용되던 시험용이었다.


           당시 네덜란드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차같은 놈..테스트용 르노 FT-17..


- 그밖의 기갑 전력으로는 2개의 장갑차 중대가 있었는데 그나마 1개 중대는 랜즈버크(Landsverk) 장갑차 12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다른 1개 중대는 DAF M39 트럭에 자잘한 무장을 붙인 급조차량 12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 기타 포병의 야포 견인용으로 사용되던 5대의 카덴-로이드(Carden-Loyd) 마크 VI 소형 전차(소위 탱켓(tankette)이라 불리는..)로 이루어진 1개 소대, 이것이 네덜란드군 기갑 전력을 탈탈 턴 모든 것이었다.



        네덜란드 기갑전력의 꼬라지..랜즈버크 장갑차(위) 12대와 카덴-로이드 탱켓 5대..


- 네덜란드군 포병의 꼬라지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곡사포와 야포를 갖가지 종류를 합쳐 676문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제 1 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다가 전쟁 종결 후 벨기에가 전쟁 배상으로 접수하고 이를 네덜란드가 구입한 독일제 15cm sFH 13 같은 골동품과 그 비스무리한 영국군이 1차 대전 시기 사용하던 오드넌스(Ordnance) BL 6인치 26cwt 곡사포 같은 것들이었고, 이런 야포들은 대부분 유탄 작약에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할배 야포들이었다(웃기는 건 네덜란드는  200문의 최신형 야포를 독일에 주문하고 이의 도착을 눈 빠져라 기다렸다는 거..흠..줄 리가 있겠냐?)
- 네덜란드 공군은 155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74기가 복엽기였고 이마저도 작전 가능한 기체는 탈탈 털어 121기가 전부였다.




               야포는 1차 대전형 15cm sFH 13이고 주력 전투기는 복엽기인 Fokker D.XVII...  

 
- 가짜 전쟁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 엄격한 중립주의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에서 독일군 침공의 경우에 대비한 방어 계획을 흥정하고 있었다. 
- 하지만 이런 흥정은 어떤 전략을 채용하는지에 대한 엄청난 차이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벨기에와 함께 필-람(Peel-Raam) 방어선을 바라고 있었지만 벨기에는 자신들의 알베르 운하(Albert Canal) 방어선을 고집했다.


                                     당시 네덜란드가 주장한 필-람(Peel-Raam) 방어선..


- 이것은 엄청나고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의견차였고, 결국 그들은 이 논의를 위해 프랑스를 초대했는데 이 결정은 가뜩이나 혼란으로 가득 차 시궁창인 계획을 완전히 뻘구덩이로 만들었다.
- 프랑스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Maurice Gamelin)은 네덜란드를 포함하는 연속적인 방어선의 구축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그런 현실과는 동 떨어진 아이디어의 이면에는 훗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본토에 대한 반격을 가할 때, 네덜란드를 통해 독일의 지그프리드(Siegfried) 방어선을 우회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이런 몽상은 훗날 몽고메리에 의해 마켓가든 작전으로 현실화되며 완벽한 쓰레기가 된다..)



             보급로가 없지만 그래도 독일은 먹고잡다...가믈랭(위)과 몽고메리의 환상..


- 하지만 이 영감은 독일의 공격 이전에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중립국 위치를 포기하고 연합국 측에 서지 않는 한, 보급로를 그들 국가까지 멀리 연장한다는 것은 택도 없는 소리라며 엉뚱한 소리를 해댔고, 이들 두 나라가 이 꼴통영감의 협박을 거절했을 때, 가믈랭은 연합군 수뇌부 회의에 나가 네덜란드의 브레다까지 진출할 것을 주장했다(보급로는 연장하지 않지만 군대는 간다! 이런~ -_-;;;)
- 그러나 네덜란드는 가믈랭이 요구한 방어선을 강화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면 필-람 방어선을 포기하고, 제 3 군단을 링게(Linge)까지 철수시켜 그렛베(Grebbe) 방어선 남쪽 측면을 보호하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가 계획한 여러 방어선들...


- 그렇다면 마지노선, 혹은 다른 전선이 뚫렸을 때를 대비해 전략 예비대로 남겨두었지만 가믈랭이 여기서마저 홀랑 빼내어 네덜란드로 보내버린 프랑스 제 7 군(VIIe Armée)은 어떻게 되었을까?
- 당시 앙리 지로(Henri Giraud) 대장의 프랑스 제 7 군은 프랑스군의 전략 예비대에서 가믈랭의 과대망상으로 네덜란드 제일란트(Zeeland)를 넘어 브레다(Breda)로 향하고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벨기에까지 향하도록 명령 받았다(흠냐...-_-;;;)


                   전략 예비대 따윈 없다..제일 위가 네덜란드로 닥돌할 제 7 군..


- 당시 이들은 네덜란드의 중요 항구인 앤트워프 전면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네덜란드 북쪽을 연결하고 이후 라인 강을 넘어 연합군의 왼쪽 측면을 보호한다는 거창하고 휘황찬란한 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프랑스 제 7 군은 제 4 보병사단, 제 21 보병사단, 제 60 보병사단, 제 25 자동차화 보병사단(Division d'Infanterie Motorisée), 제 9 자동차화 보병사단, 제 510 전차대대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군의 가장 강력한 기갑 부대이자 최정예부대인 제 1 경기계화 사단(Mechanized Light Division)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이지만 파나르(Panhard) 178 장갑차를 보유한 기갑 정찰부대 2개 대대가 보강되었다(정찰부대는 지휘관 이름을 따서 보솅 그룹(Groupe Beauchesne)과 레스토끄 그룹(Groupe Lestoquoi)으로 명명..)



                        프랑스 제 7 군은  제 1 군의 뒤를 잇는 강력한 전력이었다..


- 따라서 당시 프랑스 제 7 군은 비록 네덜란드에 투입될 독일군보다는 더 많은 기갑부대와 차량화된 기계화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양군이 도달하여야 할 각각의 거리를 감안하면, 독일군이 도달하기 전에 배치지점까지 프랑스군의 전 부대가 온전하게 먼저 도달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 결국 독일군보다 먼저 도착하여 그들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철도 운송을 이용하는 것뿐이었지만 이 또한 브레다 인근에 전력을 집중하는 단계에서 그 운송 능력이 지극히 취약해 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 이에 따라 프랑스 제 7 군의 이동과 배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 며칠이라도 네덜란드군이 필-람 방어선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어야 했고, 그래야만 프랑스의 기동군이 네덜란드 영토 내에서 그나마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얘네들이 버텨줘야...


- 하지만 앞서 밝힌 바대로 모리스 가믈랭은 네덜란드의 외교적 포지션을 놓고 협박이나 하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대로 프랑스를 믿지 못하며 독일 침공 시 필-람 방어선을 포기한다는 내부결정을 내려놓고 있었으니 이게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이렇게 따로국밥으로 놀면서 전략 예비대마저 없애고 네덜란드에 병력을 투입한다는 결정을 내린 가믈랭, 이 똘추 영감은 또 뭔지..)
- 골 때리는 건, 이런 내막은 짐작조차 못하던 당시 프랑스 제 7 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뫼즈 (Meuse) 강과 필-람(Peel-Raam) 방어선에서 네덜란드군 5개 사단이 강력한 저항으로 그들이 브레다 근처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 즉, 적어도 4일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계획은 프랑스 군의 생각과는 달랐다..그래서 지네끼리 삿대질을...


- 하지만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이 시작된 1940년 5월 10일 저녁 22시 경, 프랑스 정찰부대의 파나르(Panhard) 178 장갑차가 네덜란드 국경에 도달하기 시작하며 이들은 프랑스 제 1 경기계화 사단의 선도 부대가 되었지만, 가믈랭의 거창한 작전은 이걸로 종치며 그 허접한 종말을 고했다(땡그랑~~~)
- 5월 11일 이른 아침, 독일 제 9 기갑사단이 뮈즈(Meuse) 강을 건넜고 이 독일 기갑부대는 펠-람 방어선을 넘자마자 공중 투입된 독일 공수부대와 연결되었으며 이미 전체 네덜란드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저런 판이니 맘 먹은 대로 될리가 있나..네덜란드군 벙커 관광 온 독일군들..


- 그렇게 독일 제 6 군이 전진하는 프랑스 제 7 군의 오른쪽 측면을 위협하고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더 이상 방어선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결국 맹돌 원수 가믈랭은 제 7 군에게 왼쪽 측면은 일단 철수하라고 명령했으며, 이때 제 7 군은 제 1 경기계화 사단 제 2 여단이 네덜란드 남부 틸뷔르흐(Tilburg)까지 도달했지만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 5월 11일 13시 35분, 마침내 가믈랭은 네덜란드에 진출한 모든 프랑스군을 철수 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후 프랑스 제 7 군은 여기저기 뚫린 방어선의 구멍을 땜빵하기 위해 온 동네 돌아다니다가 결국 콩가루가 되었으며, 사령관 앙리 지로 대장은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군을 막기 위한 작전을 지휘하다 5월 19일, 와시니(Wassigny) 인근에서 독일군에 잡혀 포로 신세가 되었다(이후 수용소를 탈출해 자유 프랑스군의 수장 자리를 놓고 드골과 권력 투쟁의 길로..)



               연합군의 벨기에-네덜란드 최대 진출선과 포로 신세가 된 앙리 지로..


- 한편, 네덜란드군이 항복을 결정한 1940년 5월 14일, 남쪽의 프랑스 본토에서도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전날인 5월 13일 오전 8시, 스당(Sedan) 지역에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집중폭격이 감행되었고, 연이은 편대의 출격과 교대를 통한 릴레이 폭격이 스당을 뒤덮었다.
- 독일 기갑부대가 뮈즈(Meuse) 강을 도하하기 위한, 약 90여분 동안의 이 선제 폭격에는 750여 대에 이르는 수투카와 폭격기가 집중되었고, 구데리안이 큰 위협으로 평가한 이 지역의 프랑스 제 55 보병사단 포병대는 이 폭격으로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도하 작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뫼즈 강을 건너는 독일 기갑부대와 작살나며 구멍이 퐁 뚫리는 세당 방어선...


- 이후 온갖 삽질과 뻘짓과 병크와 띨띨이 짓으로 점철되며 이 지역의 프랑스군 방어선이 와해되었고(이거 다 쓰려면 끝도 없으므로 다음에 기회 봐서..) 이후 시도된 반격마저 좌절되었는데 운명의 5월 14일에 시도된 프랑스 제 21 군단의 반격은 제 3 흉갑기병사단(Cuirassée Division)과 제 5 경기병 사단, 제 3 차량화 보병사단(Division d'Infanterie Motorisée), 제 1 기병여단 등 어마무시한 기갑 전력과 여기에 더해 제 2 군 예하의 예비대와 제 10 군단의 잔여 병력 등 막대한 전력을 동원하였지만 이 마저도 온갖 삽질로 시궁창이 되었다.
- 프랑스 육군에서 최초로 기계화 기병사단을 창설하고 훗날 최초의 기갑사단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공로한 장 플라비니(Jean Flavigny) 중장이 지휘하는 이 군단은 5월 14일 이른 아침부터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 프랑스 전역 초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뮈즈 강 건너로 돌려보낼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는 이 반격 작전에서 이들은 실로 어이없는 쌩쇼로 일을 망치고 만다.



                               이 지역의 프랑스군 반격이 거의 최후의 기회였지만...


- 5월 14일 6시, 반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제 3 흉갑기병사단은 온갖 뻘짓거리로 시간을 보내다가 13시가 되어서야 기동을 시작했고, 제 21 군단 역습부대 전체는 무려 17시 30분이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완료한다.
- 그리고 여기서 더 큰 뻘짓이 발생하는데, 겁에 질려 후퇴한 병력들과 역습에 실패한 제 10 군단 예비대를 확인한 플라비니 장군이 역습 자체를 취소해 버렸고, 이후 집중되어 있던 프랑스 기갑부대를 산산조각으로 해체해 분산 방어에 투입하기까지 하면서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기회는 완전히 나가리가 되었다.
- 이때 아르덴 숲을 뚫고나온 구데리안의 독일 기갑부대가 측방의 위협을 무시하고 오로지 영불 해협으로의 닥돌에 몰빵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가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고 이는 이후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된다.



                                절호의 반격 기회가 무산되자 이후로는 일사천리...


- 그럼 왜 기동력이 생명과도 같다는 전차부대가 공격 준비와 이동에만도 거의 하루를 홀랑 날려먹고 급기야는 작전 자체를 취소하는 이런 사달이 벌어졌던 것일까?
- 해답은 의외로 간단해서 앞서도 수차례 설명했던 대로 당시 프랑스 육군은 고정된 전투 지역을 돌파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상대적으로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전차마저 그 장점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전차는 무조건 보병과 같이 움직이는 거이얍!!


- 프랑스군의 군사 교리는 기본적으로 방어 지향적이었고 전차도 보병을 지원하는 일종의 지원 병력이자 부속물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개념 하에 설계되고 생산된 프랑스군의 최신예 전차인 호치키스 FCM 36(Char léger Modèle 1936) 전차의 경우, 무조건 보병과 함께 진격해야한다는 명령까지 내려져 있었다.
- 어차피 보병과 함께 진격한다는 개념 하에 생산된 이 전차에게는 당연히 빠른 속도가 요구되지 않았고 결국 이 전차의 최고 속도는 불과 24km/h였으며, 당시 프랑스 전차부대가 달랑 2km를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5월 14일, 07시 30분부터 08시 45분까지 무려 1시간이 넘어 걸린 것이었다(당시 독일의 1호, 2호 전차는 같은 시간에 9km를 이동했고 불과 몇 분전에 유리한 위치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여 이들을 막아냈다..)




무릇 전차란 보병의 행군 속도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겨! 그래서 저 꼬라지가..호치키스 FCM 36..


- 제 1 차 세계 대전 당시 걸작 전차로 유명한 르노 FT-17 전차를 개발하고 보병 수송용 장갑차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육군이었지만, 전후의 군 체계는 완전히 옛날로 회귀하며 수구화되었고, 다시 말을 보병 수송 수단으로 바꾸었으며 또한 전차 운용에 대해서도 종래대로 보병 지원이 목적이라 평가하고는 전차들을 각 보병 사단에 분산 배치해 버린 것이다. 
- 한편, 당시 프랑스군에서 최고의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인정받던 장 플라비니(Jean Flavigny) 중장이 내린 이런 못난 결정에 대해서 오늘날 전사가들 가운데에는 “1940년 5월 14일,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전차 선진국이던 프랑스는 시대에 역행하며 폭망했고 플라비니 중장은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


- 이때부터 이미 프랑스군 사령부는 갑작스러운 공세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패배감에 휩싸였으며, 다음날인 5월 15일 아침, 프랑스 총리 폴 레노(Paul Reynaud)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패했습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우린 망했슈...


- 이는 프랑스 전역의 전투가 시작된 지 달랑 5일만의 일이었고, 당시 벨기에의 겡블루 갭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 기갑부대에게도 똑같이 운명의 날 심판이 내려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www.tanks-encyclopedia.com/ww2/france/FCM-36.php
http://www.wo2kennemerland.nl/Overhalen/bezet.html
https://www.pinterest.co.kr/pin/558939003730302187/
https://thearmoredpatrol.com/2016/02/25/tbtd-the-only-dutch-tank-in-wwii-the-dutch-defensive-strategy/
http://www.technologijos.lt/n/mokslas/istorija_ir_archeologija/S-60014/straipsnis/Sarvuota-Lietuva-kiek-is-tikro-musu-kariuomene-turejo-tanku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Netherlands
http://www.waroverholland.nl/index.php?page=part-ii-the-peel-raamline
http://www.anp-archief.nl/page/86776/nl
http://www.encyclopedie.bseditions.fr/article.php?pArticleId=113&pChapitreId=34368&pArticleLib=1940+%5BNazisme%A0%3A+au+fil+des+jours+%282i%E8me+guerre+mondiale%29%5D
http://www.breachbangclear.com/gunther-korthals-grabbing-initiative-like-boss/
https://actu.fr/normandie/elbeuf_76231/le-fabuleux-destin-de-jean-flavigny-le-general-qui-a-mecanise-la-cavalerie_10586670.html

아...또 변두리만 돌다가 넘어가네요..쩝...
이거 빨리 끝내야 되는데...한 10편 생각하고 시작한 게..쩝~~
진도가 안 나간당~~
이런 글일수록 오래오래 우려서 세세한 부분까지 최대한 느긋하고 섬세하며 세밀하게 향과 맛을 음해가면서 즐기심이 좋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한 200년 묵은 와인처럼 말씀이죠......
그러면 좋은데 워낙 밀린 숙제들이 많아놔서...
벌이기만 하고 마무리가 잘 안되는 것이야 제 문제이긴 하지만요..ㅋㅋ
헐~~ 날씨도 더운데 뭐라 드릴 말씀도 없고...
별 말씀 다 하십니다..
에어컨 팡팡 돌립니다..
전기세야 나중 문제고..ㅋㅋ
이번 포스팅의 내용은 삽질이지만, 네델란드가 인구비례 최강대국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발군의 시민의식을 가진 국가...
전부터 느끼지만 이 시리즈 포스팅의 내용도 당연히 좋지만 타이틀도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흡인력있네요.
네덜란드..공감합니다..
북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성숙한 시민의식..
상당히 부럽습니다...
네덜란드가 무너진 이유가 단순하게 독일의 빠른 기습인줄 알았는데 영웅적인 저항이나 이런 행위는 전혀 없는거네여 저런 준비상태면 아예 대비가 없는것과 마찬가지인데 물론 네덜란드가 지형상 고정방어 진지를 구축하기에 좋은 지형은 아니지만 그래도 벨기에 정도는 준비할 줄 알았는데 절망적인 수준이네요 그리고 프랑스의 항복은 프랑스자체의 무능이 가장크지만 중요한 순간에 주변국들의 적절하지 못한 전술적인 판단들도 한몫을 하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1차 대전의 헬 게이트였죠..
전쟁에 대비한다는 생각보다 전쟁을 회피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으니...
또한 그런 정치인들의 생각이 국민에게 어필하기도 했구요..
어차피 정치인들이야 표를 먹고 사니...
....허허허..이쯤 되면 총체적 난국이란 표현조차 어색하고 걸맞지 않는 상황인데...

모리스 가믈렝이 그렇게 삽질을 해댄 것은 "....당시 매독3기의 신경매독 환자여서 정신이상이 와서 그랬다..."라고하는 기록 조차 이젠 그 진위가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모리스 가믈랭이 독일의 고용간첩이었거나 반역자여서 저그나라 망하게 할려고 작정을 하지않은 다음에야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삽질을 밥먹듯이 했는데....그때문에 후세 프랑스사가들이 저그들도 도저히 가믈랭의 행동이 이해가 안되니 신경매독 환자운운하는 설을 만들지 않았나라고 의심 할 정도입니다...

이건 도저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독일전차들의 성능을 훨씬 뛰어넘는 우수한 전차들을 갖고서도 보병지원 화기로 분산배치해서 각개격파 당하고 기동력들 전혀 활용하지 못한 윗대가리들의 망발이 어느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드골같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전 프랑스군 지휘부 전체가 그랬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고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 되어있었던 숙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44년 후반기 라인강을 향해 쾌속진격을 계속하던 미제3군의 패튼장군에게 어느 참모가 측면이 너무 노출되니 측면을 보강해야한다고 진언하자 패튼은 "측면? 그건 귀관이 걱정 할 문제가 아니다..측면은 독일 놈들이나 걱정하라고 해"라며 뒤도 안돌아보고 앞만 향해 진격을 계속했는데....그래도 되니까 한 겁니다...

측면을 비워두든 후방을 비워두든 되는 집안은 뭘해도 되니까 냅다 지른건데.... 아르덴느를 돌파 한 구데리안 장군 측방의 위협을 무시한 채 영불해협을 향해 닥돌에 몰빵 한 것도 그래도 된다는 감 과 확신이 있어서 인데.... 감 과 확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있었던 숙명이라는 것이 본좌의 지론입니다 흐흐흐





마지노선(물론 아르덴은 마지노선이 아닙니다만..)이 뚫렸으니 우린 전쟁에 졌다!라는 프랑스의 패배의식도 크게 한 몫한 듯 보입니다..
저 순간에 바로 항복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니...
지금 네덜란드군은 전차 1대도 없다는데 저때도 50보 100보 수준이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