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전차의 삽질 원인

봉달이 2017. 7. 20. 12:11

2차 대전 초, 연합군 전차부대의 삽질 원인<29>



프랑스 기병군단의 퇴각


- 프랑스와 유럽 저지대 국가를 침공하는데 대한 전반적인 독일의 계획은 만슈타인의 낫질작전으로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 독일군의 가장 중요한 전력인 A집단군은 아르덴 지역을 거쳐 뮈즈(Meuse) 강을 도하해 나아가고, C집단군은 기갑 부대를 전혀 보유하지 못한 채 마지노선(Maginot Line)을 따라 프랑스 수비군과 대치하며 여기저기 견제 잽만을 던지면 되는 상황이었다.
- 독일군의 세 번째 주요 요소인 B집단군은 가믈랭의 띨띨이 계획에 의해 꿀렁꿀렁 전진한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연합군을 강타했다.
- 이들의 임무는 이 지역의 연합군을 A집단군의 주공 방향에서 북쪽으로 끌어내어 격파하고 격퇴하기위한 것이었고, 마침내 주력 기동부대였던 독일 제 16 군단이 겡블루(Gembloux)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마주쳤다.



 
-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중장이 지휘하는 독일 제 16 군단은 벨기에에서 연합군이 직면한 가장 기동성 있고 강력한 독일 군대였고, 회프너 휘하에는 약 700대의 전차로 구성된 제 3 기갑사단과 제 4 기갑사단의 2개 기갑사단이 있었으며, 독일 공군(Luftwaffe)에 의해 잘 지원되었다.
- 이 강력한 기갑 집단은 단지 연합군을 아르덴(Ardennes)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한 전력이 아니었고, 회프너 중장의 복안은 갱블루 틈새(Gembloux Gap)를 통해 진격하여 길을 막는 모든 연합군을 격퇴하고, 이들을 대서양 바다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회프너 중장의 복안은 모든 연합군을 격퇴하고, 이들을 대서양 바다로 몰아넣는 것..


- 한편, 갱블루 지역에 도착한 최초의 프랑스 군대는 르네 프리우(Lene Prioux) 중장의 기병군단이었고 이들은 제 2, 제 3 경기계화 사단(DLM Légère Mécanique Division)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프랑스 기갑부대는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따라오는 주력부대에 앞서 안뉘(Hannut) 지역에 서둘러 방어선을 구축했다.
- 이들 후방으로 북 아프리카 제 2 사단(DINA, Division d'Infanterie Nord-Africaine), 제 1 자동차화 보병사단(Motorised Infantry Division), 제 15 자동차화 보병사단, 모로코 사단(DM, Division Marocaine) 등으로 구성된 조르쥬 블랑슈(Georges Blanchard) 대장의 프랑스 제 1 군이 기갑부대의 뒤를 따라 겡블루 마을 인근에 방어선을 세웠다.


 벨기에군이 아작나며 프랑스군은 혼이 가출했다..사진은 봉쉘 요새에서 항복하는 벨기에군..


- 이들은 갑작스런 독일의 침공과 연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군의 예상치 못한 줄줄이 붕괴로 벨기에로의 이동을 서둘렀고, 지치고 지친 가운데 벨기에군에 의해 미리 구축된 방어진지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예정된 방어선에 도착했지만, 그곳엔 먼지만 휑하니 날리고 있음을 발견하자 혼이 반쯤 가출했다.
- 이것은 준비된 수비 위치로 이동할 것을 기대하면서 장거리를 털래털래 걸어온 뚜벅이 프랑스 보병들이 도착하자마자 허허벌판에서 곧바로 자신의 참호를 파고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쌔가 빠져라 말 타고 걸어오고 했더니..벨기에로 진입하는 프랑스 보병들과 모로코 사단.. 


- 1940년 5월 12일, 독일 제 3 기갑사단과 제 4 기갑사단은 벨기에 국경 인근의 에방-에말(Eben-Emael) 요새와 겡블루 지역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안뉘 인근에서 프리우의 기병군단과 충돌했고, 이 전투는 역사상 최초의 전차전 중 하나였으며, 이 전투의 과정과 결과는 기존의 전략과 전술에 발랑 뒤집으며 기갑부대만의 새로운 요소로 결정되었다.
- 어쨌거나 5월 12일에서 14일까지 3일 동안 프랑스 기병군단은 독일 기갑사단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그들의 후방, 겡블루(Gembloux) 지역의 프랑스 제 1 군은 강력한 기동군 집단에서 허접한 수비군 무리로 수준이 급전직하했고,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안뉘(Hannut) 지역에서 전투를 벌인 프랑스와 독일의 기갑부대는 수백 대에 이르는 각종 차량들의 까맣게 탄 고철 무더기를 벌판 여기저기에 남겨 놓았다(거기다 프랑스군은 연료 부족이나 수리 능력 부족으로 재가동이 가능한 수많은 전차들을 포기했다...)




- 하지만 프랑스 기갑부대의 북부를 담당하던 영국의 대륙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이 딜(Dyle) 강 뒤로 빠지고, 벨기에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보다 남쪽인 브뤼셀(Bruxelles)으로 후퇴하자 프랑스 기병군단은 양쪽 측면이 활짝 노출되기에 이른다.
- 사실 이때까지 벌어진 전차전에서 독일군은 상대적으로 월등히 큰 피해를 입었지만, 기갑전과 관련한 교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프랑스 기갑부대는 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해 확실한 지휘 통제를 받지 못했으며, 제병협동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 게다가 독일 공군의 맹폭을 받은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전차끼리의 사투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다 까먹고 있었고, 더불어 구태의연한 선형 방어 전술을 기갑부대에까지 적용하면서 프랑스 기병군단은 상대적으로 분산 운영되고 있었다.


                    구닥다리 선형 방어 전술을 기갑부대에까지 적용한 프랑스 전차부대..


- 독일 제 16 군단장 회프너 중장은 결코 이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고 5월 13일, 이들은 선형으로 늘어선 제 3 경기계화사단의 책임 구역에 전체 전력을 집중시켜 끝내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 이 사달이 벌어지자 마침내 5월 14일, 방어선에 구멍이 나고 측면이 노출된 프랑스 기병군단은 후방의 제 1 군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들이 후퇴하는 동안 독일 기갑사단은 그 꼬리를 물고 쫓아왔다.
- 프랑스 기병군단이 후퇴를 결정한 5월 14일 아침, 독일군은 재차 공세를 시작했고 호르스트 스툼프(Horst Stumpff) 소장의 독일 제 3 기갑 사단은 겡블루 인근 프랑스군의 새로운 방어선과 교전하기 시작했고, 요한 스테버(Johann Stever) 소장의 제 4 기갑 사단은 훼레즈(Perwez) 지역 돌파를 시도하였다.


         프랑스 침공 당시의 회프너 제 16 군단장(좌측)과 스툼프 제 3 기갑사단장..


- 당시 회프너 중장은 보병 지원 없이 전차 부대 단독으로 공세를 시작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들은 달랑 장갑차만을 보유한 프랑스 제 15 보병사단 소속 제 4 정찰대대가 지키고 있던 훼레즈 마저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군 진지를 돌파할 수 없었다.
- 거기에 더해 훼레즈 마을을 포위하기 위해 그 주변을 이동하던 독일 제 4 기갑사단의 전차들은 주변의 깊은 숲에서 저항하고 있던 프랑스 전차들과 조우, 악전고투 끝에 결국 보병 연대의 지원을 받아 겨우겨우 이들을 물리쳤다.



    쉬운게 하나도 없다.. 제 4 기갑사단은 보병 연대의 지원 하에 겨우겨우 훼레즈를 점령..


- 어쨌거나 당시 성능이 후달리는 전차를 보유한 독일군이 더 나은 성능의 전차를 보유한 프랑스 전차부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에는 결정적인 전술적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독일군은 20대 이상의 전차로 구성된 프랑스 전차부대와 조우하면 대대급(약 10대의 III호 전차와 6대의 IV호 전차를 포함한 약 80대의 전차로 구성..) 이하의 전력으로는 공격하지 않았다.
- 그 주된 이유로는 독일군 전차부대에 더 많은 무선 통신 장비가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지휘 통제 아래 더 나은 집단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이는 프랑스 장교들이 독일 전차들의 집중 공격에 놀랐다고 시인했던 데에서도 그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무전기의 유무는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 이 결정적인 차이는 단지 프랑스 기갑 부대만의 문제점이 아니라 프랑스군 전체의 문제였으며 1923년~1939년 사이, 프랑스 군의 예산 중 달랑 0.15%만이 무전기와 다른 통신 장비에 사용되고 있었다. 
- 당시 파리 교외에 있던 모리스 가믈랭(Maurice Gamelin)의 프랑스 육군 총사령부의 통신 사정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인데, 전군을 관할하며 전황 같은 신속한 정보 수집과 빠른 명령 전달 체계가 생명이어야 할 이곳에는 무선 및 군용 전화, 텔레타이프(teletype)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하다못해 연락용 비둘기(흔히 전서구(伝書鳩)라고 하는..)마저도 없었다.
- 이때 프랑스 육군 총사령부와 전선 부대와의 연락은 오로지 일반 민간용 전화와 오토바이에 의한 전령에 의존했고 전선에 지시나 명령을 전달하는 데 무려 48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육군 총사령부에는 연락용 비둘기도 없었다..-_-;;


- 참다못한 참모들에 의해 최소한 텔레타이프 한 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가믈랭의 대답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였고, 설상가상으로 가믈랭이 해임된 직후 새로 임명된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이 설치한 사령부에는 전화기가 딱 한 대 있었는데, 이 마저도 12시부터 2시까지 사용할 수 없었고, 그 이유는 바로 전화를 연결하는 교환수들이 점심시간을 지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노동이 당당한 프랑스 육군!! 전령을 보내라~~!! -_-;;;;)



                       밥 먹으러 가야거덩요~ 점심 시간엔 전화하지 마삼~


- 이러니 하찮은 전차부대 따위에 일일이 무전기를 설치한다는 게 통할 리가 없었고, 또한 프랑스 전차들은 장착한 상대적으로 우수한 주포의 장점을 살려 중장거리 전투가 유리했지만 골 때리게도 1인승 포탑을 장착한 관계로 이런 장점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으며, 되려 3인승 포탑을 장착한 독일 전차들이 관측과 전차병들 사이의 협력에서 우수했기에 중장거리에서 먼저 선빵을 걸어오기 일쑤였다.
- 게다가 프랑스 제 3 경기계화 사단(3e DLM)은 전쟁 발발 직전에 긴급히 창설된 신삥 사단으로, 훈련된 전차 승무원을 보유한 제 1 경기계화 사단과 제 2 경기계화 사단과는 달리, 말 타고 병역을 수행한 예비군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극히 일부만이 제대하기 직전에 잠깐 전차라는 놈을 구경이라도 했을 뿐이었다.
- 이들은 전선에 투입되기 직전에 급조된 전차 훈련을 받았으며, 프랑스 본토 쉬이프(Suippes)에서 몇 발의 전차포탄을 지급받았는데 그 직후 독일의 팬져(panzer)들이 눈앞에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이판인데 그들이 다른 전선에서처럼 와장창 무너지며 꽁지 빠져라 달아나지 않았다는 게 더 놀랍다는..)



                            전차나 비행기나 제대 말년에 걍 구경만 해봤으요~~


- 설상가상으로 제 3 경기계화 사단의 전차 대부분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3명의 승무원 대신 2명의 승무원만으로 전전에 나갔는데, 황당한 건, 당시 많은 프랑스 전차 승무원들이 전투가 시작될 무렵 훈련을 수료하고 배치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사령관에게 이들의 전선 투입을 건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이에 따라 많은 수의 프랑스군 전차들은 1명의 조종수와 1명의 포수 겸 장전수 겸 관측수 겸 전차장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프랑스 전차의 극악한 명중률에 대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명이 타는 걸 두 놈이 다 하랍신다...


- 비슷한 전투에서 경험 많은 현역 전차병으로 구성된 제 2 경기계화 사단이 비교적 가벼운 손실을 보인데 반해, 안뉘 전투에서 대부분 예비군으로 구성된 제 3 경기계화 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었고 상대적으로 성능이 뛰어난 소뮤아(Somua) S35 전차도 분산된 개별 역습은 독일군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 당시 프랑스군 전차들의 명중률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로 당시 이들이 보유한 전차탄에는 예광탄(tracer shell)이 없었으며, 제 3 경기계화 사단의 모든 호치키스 전차들은 훨씬 더 긴 사정거리와 향상된 관통력을 가진 L/35 37mm SA38 전차포를 장착한 H39 전차가 아니라 곡사포에 가까운 L/21 37mm SA18 전차포를 장착하였으며 성능이 떨어지는 구형 H35 전차였다.



   신형 H39 전차(위)와 구형 H35 전차는 그 화력 차이에 있어 완전히 다른 놈이었다..


- 따라서 훈련이 불충분하고 예광탄도 없는 1인승 포탑 안의 프랑스군 포수가 아군 전차끼리의 협력도 없는 가운데 빠른 독일 전차를 실제 타격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 측의 상황 또한 일방적으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 독일 전차들의 주포로는 IV호 전차에 장착된 7.5cm L/24 주포를 제외하고는 프랑스군의 소뮤아 S35와 호치키스(Hotchkiss) H35 전차를 적당한 거리에서 관통시킬 수 없었으므로 근접한 거리까지 접근해야 했다.


     적절한 거리에서 프랑스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전차였던 IV호 전차..


- 독일 전차병들은 S35의 47mm L/32 SA35 주포에 대항, 근거리에 접군하기 전까지 수많은 포탄을 날려대야 했고 S35 전차는 장거리(약 800~1,000m)에서부터 독일 전차들을 손쉽게 파괴할 수 있었다.
- 따라서 당시 독일군은 S35 전차 10대가 이끄는 역습조차도 비관적으로 간주하였고 안뉘 전투 도중, 무작정 전진하는 독일 전차들은 측면과 후방에서 자주 역습을 받게 되는데, 이런 엄폐 후 역습 방식의 프랑스군 전술은 대부분이 묘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멍이 슝슝...피곤하다...


- 이에 대해 당시 독일 전차부대의 한 장교는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은 단 1인치의 땅도 내주지 않으려는 강인함을 보였고, 회프너 장군은 프랑스 기갑 부대의 진정한 전력과 배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blogs.usyd.edu.au/theoryandpractice/2015/02/
https://2eguerremondiale.fr/evenements/front_ouest/bataille_de_france/percee_de_sedan
http://www.geheugenvannederland.nl/nl/geheugen/view?coll=ngvn&identifier=SFA03%3ASFA022803535
https://www.pinterest.co.kr/pin/123708320994880443/
http://maximietteita.blogspot.jp/2017/05/battle-of-saumur-1940.html
http://picssr.com/photos/41818881@N06/interesting/page331
https://www.reddit.com/r/wwiipics/comments/30eom8/french_tank_crew_stand_behind_their_char_b1_heavy/


프랑스 지휘부도 통신 장비 상태도 나빴다니 충격이네요. ㄷㄷㄷㄷ
가믈랭의 사령부 얘긴 꽤나 유명한 얘기죠..
게다가 가믈랭은 하루종일 틀어박혀 지도만 봤다고 합니다...
최근 개봉작 텅게르크에 맞춰서 거기까지 가는건가요^^
거기까지 가기엔 너무 멀듯 합니다요...
사실 지금도 스토리 끌어가는데 힘이 듭니다요..
봉달이님 그렇다고 포기하시면 진심 슬픕니다 백성들의 뜻을 들어주셔서 연재를 하여 주시옵서서 통촉하여 주시옵서서
어제 극장에서 "던커크"를 봤습니다. 큰 기대를 해서인지, 큰 감동은 없었지만, 그럭저럭 놀란감독의 특성이 묻어난, 잘 만든 영화같습니다.
영화에 연결되는 내용이라 의미가 깊네요.
헤...
저도 곧 가서 볼려구요...
저는 BBC다큐드라마로 봤는데 영화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희대의 망작 인천상륙작전보다는 낳겠지요 당연한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