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전차의 삽질 원인

봉달이 2017. 8. 20. 15:15

2차 대전 초, 연합군 전차부대의 삽질 원인<30>



겡블루 방어선 붕괴의 조짐


- 1940년 5월 14일 아침, 독일군은 공중 정찰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4 기갑 사단은 겡블루(Gembloux)에서 북서쪽으로 3km 떨어진 철도를 따라 위치한 에르나주(Ernage) 마을 근처에서 또 다시 프랑스 방어선과 마주쳤다.
- 당시 독일 사령부는 기갑 부대 간의 교전에 의해 프랑스 방어선은 상당히 얕아졌으며 주요 저항선은 좀 더 서쪽으로 밀려갔으리라 믿고 있었다.


지도 좌측 아래 프랑스 제 1군 방어선상에 겡블루와 에르나주가 보인다..


-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에르나주 방어선을 맡고 있던 프랑스 제 1 모로코 사단 제 7 연대가 보유한 신형 47mm APX 대전차포는 독일 전차의 얇은 장갑을 감안할 때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고, 상대적으로 위력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효과적인 호치키스(Hotchkiss) 25mm 대전차포(Canon de 25mm semi-automatique modèle 1934)도 함께 철도를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 모로코 제 7 연대는 대전차 지뢰도 함께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 기갑사단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근접해 왔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없었으므로 독일군이 방어선에 가까워지자 전선 후방의 곡사포 대대를 동원해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당시 프랑스 군이 장비한 47mm APX 대전차포와 호치키스 25mm 대전차포..


- 또한 다가오는 독일 기갑 사단을 향해 철도선, 에르나주 및 인접한 작은 마을들에서 일제히 대전차 포격이 가해졌고, 독일의 I호 전차와 II호 전차는 프랑스 방어선에 도사린 25mm 대전차포는 물론, 155mm 곡사포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랑스 야포에 취약했다.
- 이때 많은 독일 전차가 제방을 건너 프랑스 방어선과 가까워지면서 손상되거나 파괴 되었으며 프랑스 포병의 포격은 재편성을 시도하던 독일 기갑사단을 분열시키고, 수반하던 보병 차량을 파괴하고, 보병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며, 독일군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폴란드에서도 뽀록난 1,2호 전차의 양철장갑인데 별 수 있으랴...


- 이 혼란상을 지켜본 독일 제 3 기갑사단은 제 4 기갑사단의 우익으로 기동, 지원을 꾀했으나 이들은 프랑스 제 3 경기계화 사단과 맞닥뜨렸고, 곧이어 제 4 기갑사단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포병의 화염 속에 밀어 넣어지고 말았다.
- 어느 독일군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에르나주의 포격으로 인해 자신들은 “전멸(Annihilating)”했다고 묘사했으며,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포화에 완전히 노출되는 벨기에 평원보다는 차라리 참호로 되돌아가기를 바랬다고 되어있을 만큼, 이들은 절망적이었다.


전격전이고 뭐고 다시 참호전으로 돌아가고 싶다...ㅠ.ㅠ


- 하지만 바로 이때, 독일군의 전격전 신화를 가능하게 한 구원의 손길이 이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다시금 전세는 역전되었다.
- 지상군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스투카(Stuka) 급강하 폭격기들이 다시 겡블루의 하늘을 가득 메웠고 아들은 몇변씩 공중제비를 돌며 엄폐되어있는 프랑스군 야포진지를 찾아 폭탄을 내던졌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스투카~~!!!!


- 이 대규모 폭격으로 프랑스 야포진지는 하나하나 불타올랐고 대전차포를 포함한 대부분의 프랑스 야포들은 매장되거나 전복되었다.

- 하지만 연합군의 항공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 이유야 당연하게도 연합군 상층부(특히 프랑스군..)가 자신들의 공군력을 전 전선에 걸쳐 흩뿌려 놓았음은 물론, 지상 지원에 대한 교리도 명확하게 없었고, 통신 체계 또한 개판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지상 지원 즉, 공군력의 전술적 사용 자체를 프랑스 군은 금지시켜 놓고 있었음에 있었다(공군력은 오로지 전략 폭격 같은 전략적 수단이지 지상군 지원 같은 찌질한 데 사용하는 게 아니야!! 냠~~ -_-;;;)
- 따라서 영화 <덩케르크>에서 영국 육군 병사가 공군 장교를 향해 “너흰 도대체 어디 있었냐?”는 푸념을 늘어놓는 데에는 단지 덩케르크의 상황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 전체에 걸쳐 벌어졌던 악몽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스투카의 폭격에 파괴된 프랑스 포병대.. 공군 이것들 어디 갔냐!!!

     
- 독일 육군의 경우, 훗날 이들이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 보병들을 침묵시키고 독일 보병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결정적 요인은 바로 루프트바페에게 있었다.”고 할 만큼 자신들의 자존심을 꺾어가며 추켜세운 데에는 그만큼 독일 육군은 공군의 지상 지원에 의존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한편, 에르나주에서 독일 보병은 루프트바페의 폭격에 힘입어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려했고, 완고한 북아프리카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프랑스 군대와 대전차포에 대항해 전차들이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했으나, 전차 부대는 전방의 전초 기지까지는 억지로 뚫을 수는 있었지만 곧이어 프랑스 전차와 폭격에도 살아남은 대전차포에 의해 반격을 당하면서 전진 속도는 느려 터져만 갔다.
- 마침내 전선 여기저기에서, 숱한 병사와 전차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독일군은 프랑스 방어선을 뚫을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군은 방어선의 주요 위치에 5월 14일까지도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계속 밀어 넣었지만 그때마다 줘 터진다...


- 5월 14일에서 15일까지 프랑스 포병은 독일군 집결지를 계속 포격했고, 가뜩이나 짜증 만땅인 가운데 제 16 기갑군단장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중장은 남쪽에서 진격을 시작하는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중장의 제 19 기갑 군단과 전개 과정을 일치시키라는 제 6 군 사령관 폰 레이헤나우(Walther von Reichenau) 원수의 닦달에 뚜껑이 홀랑 열렸다.
- 이에 따라 회프너 중장은 다음날인 5월 15일, 모 아니면 도, 혹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영어로는 올 오어 낫씽(all-or-nothing) 작전을 구상,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 넣는 올인을 강행하기로 하며, 핏대 올리는 윗선인 폰 레이헤나우 원수에게 루프트바페의 대규모 지원과 제 6 군 산하 모든 포병 전력의 지원을 요청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짜증나는 소리 뿐이고 위에선 줘짠다..큭~~


- 마침내 다음날인 5월 15일에 벌어진 대규모 충돌은 그 양상에 있어서는 전날의 전투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격렬했다.
- 독일군의 주된 공격은 지형이 전차 사용에 더 유리한 제 1 모로코 사단 전면에 집중되었고, 뷔제(Beuzet) 인근의 프랑스 제 15 보병사단(DIM.. division d'infanterie) 제 4 보병연대를 공격한 소수의 독일 전차들은 25mm 및 47mm 대전차포에 의해 허무하게 격퇴되었다.
- 겡블루와 페르바(Perbais)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는 특히 에르나주 주변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새벽부터 밤까지 지속되었고 독일군은 페르바와 에르나주, 두 마을을 함락시킬 수 있었지만 프랑스 방어선을 완전히 뚫지는 못했다.



올 오어 낫씽!! 또 다시 대규모 닥공을 감행했지만...


- 에르마주의 모로코 사단 제 7 대대(RTM.. Régiment de Tirailleurs Marocains)는 2개의 중대가 완전히 괴멸되며 대대의 약 700명의 병력이 단지 74명까지 줄었지만 이들은 다음 날인 5월 16일까지도 마을 곳곳의 폐허를 돌아다니며 저항을 계속했다.
- 여기에 더해 호치키스(Hotchkiss) H35 전차 45대로 구성된 프랑스 제 13 기병대대(BCC.. Bataillon de Chars de Combat)와 르노(Renault) R35 전차 45대로 구성된 제 35 기병대대가 겡블루-에르나주 철도선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자 살아남은 소수의 모로코 제 7 대대 병사들은 놀랍게도 독일군에 대해 총검 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니네가 왜 그래에~~?? 최후까지 독일군에 맞선 제 1 모로코 사단 병사들..


- 14~15일 양일 동안, 루프트바페는 이 지역에 맹폭을 가했지만 프랑스 포병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데에는 실패했고 프랑스 전선은 독일군의 모든 지원과 강력한 돌파시도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프랑스 군의 전술상 승리라 보아도 무방했다.
- 그러나 독일군은 같은 시간에 세당(Sedan)에서 돌파구를 만들었다.
- 5월 15아침,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가 이끄는 독일 A집단군은 구데리안 중장의 제 19 기갑군단을 앞세워 세당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영국 해협까지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세당이 퐁 뚫렸다..에구구~~


- 이에 혼이 나간 연합군 수뇌부은 벨기에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전면 후퇴를 고려하였고, 결국 철수 작전을 5월 16에서 17일 야간까지 센느(Seine) 강, 5월 17일에서 18일 야간까지 덴데르(Dender) 강, 마지막으로 5월 18일에서 19일 야간까지 스헬더(Schelde) 강으로 각각 3회에 걸쳐 철수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그러나 바로 겡블르 방어선과 딜(Dyle)강에 방어선을 구축한 연합군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독일군의 강력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기에, 일부 지휘관들은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s)과 루뱅(Louvain)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 뜻을 나타내었다.
- 하지만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 그리고 프랑스 제 1 군이 5월 16일, 프랑스 아르덴 방면으로 진행한 강력한 독일의 기갑 부대와 갱블루로 진격하는 독일 제 6 군으로부터 측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했기에 결국 도미노 식으로 이들마저 철수를 강요당하게 된 것이었다.


거기서 버티면 피X 싼다~~~ -_-;;

  
- 당시 벨기에군은 프랑스 제 7 군, 영국군과 함께 벨기에 중심부의 K-W 방어선(쾨닝슈이트(Koningshooikt)와 와브르(Wavre) 사이..)에서 독일 제 14 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연합군 수뇌부는 이들이 어느 정도 방어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판단, 이들을 냅두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앤트워프-나무르 방어선을 포기하고 스헬더 강까지 토깠다(동맹 좋아하네..일단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 벨기에 남부 전선에서는 리에주의 요새 지대에서 벨기에군이 독일 제 6 군에 대해 저항을 계속할 동안, 벨기에 제 7 군단이 이 지역에서 철수하였고 북부 전선에서는 5월 15일, 네덜란드가 항복함에 따라 프랑스 제 7 군은 앤트워프로 이동, 프랑스 제 1 군을 지원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 중부 전선에 위치한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은 독일군의 압력을 받지 않아서 실제 이 시기에 전투가 발생한 유일한 지역은 영국 제 3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루뱅(Louvain) 지역뿐이었으며 이후 영국 원정군은 세당이 뚫리며 판세가 물 건너 간 것으로 판단, 스헬더 강 주변에서 삐대며 적극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하지만 15일 오후 늦게까지 겡블루의 프랑스군 방어선은 회프너의 회심의 일격에도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이 시점에서 프랑스군이 벨기에 샤를루아(Charleroi) 북동쪽에 주둔하였으며 70여대의 르노 B1 bis 중전차를 포함, 약 200여대의 각종 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제 1 기갑사단(DCR division cuirassée)을 동원해 반격을 가했다면 독일 제 16 기갑군단은 엄청난 피해 속에 철수하였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 하지만 세당이 뚫리며 이미 혼이 가출한 프랑스군 총사령부는 온갖 혼란 속에 스스로 녹아내렸고, 그들은 세당의 구멍을 막는답시고 이 강력한 프랑스 기갑 부대를 철수시켰다.
- 이에 따라 느려터진 이것들은 이동 과정에서만 전력의 반이 날아갔고, 3일 후인 5월 18일에는 사단장 마리-제르망 브루누(Marie-Germain Bruneau) 소장과 사령부 인원마저 독일군의 포로가 되며 콩가루가 되었다.



강력한 프랑스 제 1 기갑사단은 쫄보 대가리들 덕에 암것도 못하고 가루가...

 
-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되자 마침내 겡블루에서 분전하고 있던 프랑스 제 1 기병군단과 제 1 군은 남쪽에서 포위된 프랑스 제 9 군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두려움과 혼한 속에 어쩔 줄 몰라하던 프랑스군 총사령부로부터 철수를 명령받았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47_mm_APX_anti-tank_gu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rich_H%C3%B6pner.JPG
http://foxtrotalpha.jalopnik.com/the-real-history-behind-the-story-of-dunkirk-1797174357
http://www.worldwarphotos.info/gallery/germany/tanks-2-3/panzer-38t/
http://la-guerre-en-image.forumactif.org/t87-soldats-des-colonies

식민지 출신의 병사들이 저렇게나 용감하게 싸웠네요. 본국출신 프랑스 병사들보다 더 나은듯 합니다만 어째든 뒷맛은 씁슬하네요..
흐..그런가요?
요즘 이거저거 쓰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쩝~~ 제가 스스로 판 무덤이쥬~ ㅠ.ㅠ
모로코 사단이 그리 용맹했다니... 역시 프랑스 군은 믿을 게 못된다는 반증 같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후의 일이지만 알제리한텐 그렇게 몹쓸 짓하던 것들인데, 모로코인들은 참 헌신적으로 싸워줬네요...
제가 지금 포스팅하고 있는 대만 시리즈도 조금 있으면 그런 케이스가 나옵니다...
T34의 전설에 대해 다른 시각이 있는 자료가 있어서 링크걸어둡니다.
http://panzerbear.blogspot.kr/2016/01/t-34.html
네..전에 6.25 북한 전차 이야기 쓸 때 본 자료네요..
문제는 당시 미 에버딘 전차 시험장에서 T-34를 조사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냈지만 결정적으로 관통력 시험은 하지 않았죠..
그저 소련제 강판이 허접하다..뭐 그런 정도로만..
그게 훗날 이땅의 난리 부르스를 가져온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M24 채피 경전차 가지고 뎀빈다던가 하는..

감사합니다..^^
모로코군..2차대전 시 소련군 만큼이나 강간으로 대동단결한 군대..몬테 카시노 전투 후 이태리 중부에서, 독일 내 프랑스 점령지였던 바덴뷔르텐부르크주에서..오죽하면 이태리어에 <모로코인에 강간당한 여자들>이라는 의미의 Marocchinate라는 단어가 생김..소피아 로렌 주연의 두 여인(Ciociara)이 이떄를 배경으로 한 영화
넵..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때 모로코 군은 주로 2차 대전 발발 후 자유 프랑스 군에 의해 징집된 군대였고 겡블루를 지키던 군대와는 조금 달랐죠..
아무튼 저 당시 이탈리아 전선의 모로코 군은 강간에 특화된 군대가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전쟁사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수도서울이 휴전선에 가까이 있지만 않다면 북한이 아무리 전면전으로 밀고와도 충분히 방어하고 반격을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지금 같이 휴전선 금방이면 방어선이 부족하고 2-3개 전선에서 무너지면 그냥 패닉이 되서 손을 쓸수가 없게 되겠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조금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