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 태평양

봉달이 2018. 6. 18. 16:04

이제는 기괴한 그들..일본군의 삽질 대전차 전술 TOP 5..<6> 



1945년 1월 9일, 월터 크루거(Walter Krueger)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 6 군 약 175,000명의 병력이 루손 섬 북서쪽 링가옌 만(Lingayen Gulf)에 상륙하며 필리핀 루손 전투(Battle of Luzon)가 시작되었다.


1945년 1월 9일, 미 제 6 군이 링가옌 만에 상륙하며 루손 전투가 시작되다..


루손 방어전은 투입 병력면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육군 최대의 작전이 되었는데 이 작전을 위하여 중국 대륙과 본토의 병력을 송두리째 불러 모아 투입하고 있었으며, 사단 숫자만 보아도 제 8 ,10, 19, 23, 103 보병사단과 제 2 전차사단이라는 6개 사단, 그리고 레이테 전투에 투입했다가 탈탈 털리고 남은 제 1, 16, 26, 102 보병사단과 제 30, 105 보병사단의 떨거지들까지도 루손의 제 14 방면군 지휘 하에 들어가 있었다. 


루손 전투에는 12개 사단이라는 일본 육군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 집중..

 

1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일본 육군이 한 전장에 투입한 것은 중국 대륙에서 몇 차례의 대규모 작전과 버마 전선뿐이었고, 이만큼의 대병력이 투입된 지역이므로 제 2 전차사단 같은 기갑 부대까지도 투입되었다.
도서전(島嶼戦)과 달리 필리핀에는 나름 평원 지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차를 투입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제공권이라고는 전무한 전장에서 과연 전차기동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은 떠들어봐야 입 아프므로 사뿐하게 논외로 치겠다.


필리핀엔 평지가 있으므로 전차를 써볼 만 할 것임..과연 그럴까?

 
어쨌든, 루손 섬에는 드디어 제 2 전차사단의 배치가 결정되었고 이렇게 파견된 부대는 만주로부터 출발 당시, 병력 약 8,000명, 전차 220대, 야포 36문, 속사포는 기동 보병연대가 보유한 것을 포함해 약 45문, 자동차 1,500대라는, 당시 일본군 보병사단에 비하면 상당량에 달해, 큰 이견 없이 이들이 곧 루손 수비의 핵심이 되리라 기대되었다(이동과정에서 야금야금 까먹고 실제 필리핀에 도착한 것은 병력 약 6,500명, 전차 약 200대, 야포 23문, 자동차 1,400대 정도...)
1944년 12월, 레이테 전투에서 일본군의 대패가 분명해지자 루손 섬의 일본 육군 제 14 방면군은 휘하 전력을 “상무집단(尚武集団)”, “진무집단(振武集団)”, “건무집단(建武集団)”이라는 3개 집단군으로 나누어 재편성, 거점에 근거한 방위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중국에서 방귀 꽤나 끼던 제 2 전차사단을 필리핀으로 보내랍신다!


이에 따라 기갑전력이 태부족이었던 제 14 방면군은 제 2 전차사단도 조각조각 나누어 곳곳으로 분산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 육군의 최정예 기갑사단이던 제 2 전차사단은 기갑사단의 가장 큰 장점인 집단적인 전력의 사용을 스스로 포기한 채 각 보병사단에 배속된 보병 지원용 전차 전력 정도로만 사용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기갑부대의 가장 큰 장점인 대량 운용에 따른 방어선의 돌파나 전황의 역전 같은 건 일본군은 애초부터 포기했다는 얘기인데, 하긴 제공권이 전무한 마당에 기갑부대의 대량 집중적인 운용은 거의 뻘짓에 가깝다는 것이 노르망디의 독일 기갑사단들의 사례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분산해 축차 투입하는 것 또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공권 없는 전차 부대란 공허할 뿐이다..그러나..


이런 분산 계획에 따라 제 2 전차사단의 3개 전차연대 중 전차 제 6 연대(연대장 아이다 군페이(井田君平) 대좌)는 루손 남부의 수비를 맡고 있다가 12월 말 사단으로 복귀를 명령받았고 미군의 상륙 시에는 마닐라를 향해 이동 중이었다.
전차 제 7 연대(연대장 마에다 다카오(前田孝夫) 중좌)는 제 3 전차 여단장 시게미 이사오(重見伊三雄) 소장의 지휘 하에 링가옌 만 주변 지역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사단 주력은 전차 제 10 연대(연대장 하라다 카즈오(原田一夫) 중좌)를 기간으로 마닐라 동북쪽 지역에 위치하여 루손 섬 남북 모두에 진출 할 수 있는 것처럼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력 병력 중에 한 축인 기동보병 제 2 연대(연대장 타카야마 요시노부(高山好信) 중좌)가 이미 다른 곳에 전용되어 사단과 분리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런 분산 운용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지는 미군이 루손 섬 렝가옌 만에 상륙한 직후부터 그 징후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아무리 허접해도 전차부대란 모름지기 집단 운용이 기본이다..

 
1945년 1월 9일 아침, 미 제 6 군 소속 제 25 사단과 제 32 사단을 포함한 6개 사단 약 175,000명이 링가옌 만에 상륙을 개시했고, 이들은 우선 이니스 스위프트(Enis P. Swift) 중장의 제 1 군단 소속 2개 사단을 주축으로 교두보를 확보한 후 북상하며, 오스카 그리스월드(Oscar Griswold) 중장의 제 14 군단 소속 제 1 기병사단과 제 37 보병사단이 마닐라 공략을 목표로 남하하는 것이 작전 목표였다.


링가옌 만에 상륙하여 아래 위로 분단한다!

 
일본 측은 제 23 사단과 독립 혼성 제 58 여단, 거기에 제 23 사단에 배속된 제 2 전차사단 전차 제 7 연대가 반격에 나섰다.
당시 전차 제 7 연대는 제 1 중대 (95식 경전차), 제 2~4 중대(97식 중전차 개), 제 5 중대 (97식 중전차)를 포함 전차 대수는 총 50대였고 1월 16일 저녁, 이들의 지원 하에 제 23 사단과 독립 혼성 제 58 여단의 각 1개 대대가 미군 교두보에 대한 야습을 감행, 나름 기대 이상의 전과를 내기도 하였다(뭐 할 줄 아는 게..)


당시 일본군의 야습 닥돌을 기록한 기록화..이런 걸 자랑이라고..


그러나 이 지랄도 그때뿐이어서 일주일만 지나게 되면 미군 교두보 주위의 방어선이 조각조각 잘려나갔고 1월 27일이 되면 일본 육군 제 2 전차사단의 선봉, 전차 제 7 연대가 산 마누엘(San Manuel)에서 탈탈 털리며 콩가루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미 1월 17일, 링가옌 만 정면의 비나로난(Binalonan) 인근에서 미 제 716 전차대대 소속 M4 셔먼 전차 4대와 맞붙어 전차 제 7 연대는 투입한 97식 중전차 9대를 모조리 잃은 상황에서 그 10일 후인 1월 26일 야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전차 야습을 벌인다(보병이고 기갑이고 주특기는 야습! 나머지는 모름!)


일본 전차부대는 산 마누엘에서 쌩 쇼를 벌인다..


당시 전차 제 7 연대를 중심으로 한 시게미 지대(重見支隊 Shigemi Detachment)는 산 마누엘(San Manuel)을 사수하기로 결심하며 부채 모양의 참호선을 파고 97식 중전차 35대와 95식 경전차 5대를 포탑만 내놓은 채 묻은 다음, 벙커로 바꿨으며, 15문의 75mm 야포와 47mm 대전차포 및 박격포 15문을 보유한 기동보병 제 2 연대 제 1 대대가 이 지역에 지원되었다.


이렇게 일본군 전차부대가 산 미누엘 마을에서 나름 대비를 하고 있던 1월 19일부터 미군은 5일간의 사전 폭격으로 이곳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폭격이 끝난 1월 23일, 미 제 5 사단 제 161 보병연대가 제 716 기갑대대 소속 전차의 지원 하에 마을 남쪽에 있는 언덕을 점령했다.
이후 산 마누엘에 대한 정면공격은 1월 24일, 셔먼 전차 6대의 지원 하에 제 161 보병연대 제 1 대대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대전차 참호와 47mm 1식 기동 속사포(一式機動四十七粍速射砲)의 집중 사격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며, 이 공격에서 미군은 전차 1대가 파괴되고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나름 성과를 보이기도..당시 산 마누엘에서 파괴된 M7 프리스트 자주포..

 
제 161 보병연대 제 2 대대는 남쪽에서 마을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첫 번째 공격이 일본 전차 3대에 의해 중단되자 두 번째 공격을 감행, 5대의 일본군 전차가 파괴되었으며, 그 다음날인 1월 26일 아침, 제 1 대대와 제 3 대대, 그리고 12대가 넘는 M4 셔먼 전차가 합세하여 공격이 강화되었고, 이 공격에서 대부분의 일본 전차들이 파괴되었다.


산 미구엘에서 파괴된 일본군의 95식 경전차..


당시 전차 제 7 연대에 소속되어 미군 전차와 전투를 치르고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일본 육군 전차병 카이 마사야쓰(甲斐正保)는 수기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적은 M4 전차를 주력으로 M3 전차, 포병, 보병, 거기에 바다와 하늘에서 하나가 되어 공격 해 왔다.
M4 전차는 우리 97식 중전차의 47mm 전차포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포를 맞아도 태연한 얼굴로 굴러왔다. 이에 반해 우리 전차는 M4 전차의 포탄을 한발만 맞으면 장갑판이 깨끗하게 꿰뚫어져 버렸다.



다음날부터 어제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활용하여 적 전차의 측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부대는 적 진형 깊숙이 치고 들어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전차 전투를 벌이기로 하였고, 지나친 접근전으로 상대가 대전차포를 사용하지 못할 때에 M4를 기습하여 후퇴시켰다.
하지만 이것으로 또 몇 대의 우리 전차가 없어졌다.



1월 27일까지 남아있던 전차 제 7 연대 소속 일본군 전차들은 이제 마을 뒤쪽 언덕으로 밀려났고, 이제 그들에게 탈출 경로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시게미 이사오 소장은 역시나 일본군 장교스럽게도 그들다운 최후를 선택했으며, 그것은 바로 전차를 끌고 적진을 야습한다는 황당한 발상이었다(전략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종특인 나가서 죽자..뭐 그런..)


당시 상황을 기념한 디오라마라는데..육갑도 가지가지다..

 

웃기게도 이를 실행한 시게미 이사오는 일본 육사 27기생으로 햐쿠타케 슌키치(百武俊吉), 마에다 다카오(前田孝夫 당시 전차 제 7 연대장), 하라다 카즈오(原田一夫 당시 전차 제 10 연대장) 등과 함께 일본 육군 기갑부대를 이끈 선구자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일본 육군의 구데리안 정도랄까?)

일본 육군에서 출세가 보장되는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 1 차 상해사변에서는 전차 중대를 이끌고 참전했으며 전차 학교 강사, 전차 제 9 연대장 등을 거쳐 지금 장성자리에 오른 그가 이런 멍청하기 짝이없는 행동을 감행한 이면에는 앞뒤 꽉꽉 막힌 꼴통들의 집합체, 즉 일본 육군의 최고 대가리 계층이자 윗선의 구태의연한 자세가 크게 한몫했다(이 부분은 추후 장기 연재를 계획 중..)


나름 일본 전차 부대 발전에 한몫했던 시게미 이사오는 그렇게 자폭..

  

기갑부대와 함께 20년 이상을 함께했고 항상 그 선두에 섰던 그가 이런 멍청한 결정을 내렸던 그 순간은 분명 자포자기 무념무상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쓸만한 인재도 없다..하긴 1945년이니 있으면 뭐 하겠누..

 
그렇게 일본 육군 전차 제 7 연대는 1월 28일 야간, 01시를 기해 남은 13대의 전차로 반자이어택을 수행했고 당연하게도 10대는 미군 방어선에 닿기도 전에 작살났으며 나머지 3대는 퇴각했다가 자폭처리 되며 버려졌다
이 전차 반자이어택 과정에서 제 3 전차 여단장 시게미 이사오(重見伊三雄) 소장과 연대장 마에다 다카오(前田孝夫) 중좌가 전사했고 전차 제 7 연대는 750명이 전사했으며 전차와 중화기 모두를 잃었다.


전차 제 7 연대의 전차 반자이어택 다음 날의 모습..탈탈..

 
이후 사단장을 포함한 제 2 전차사단은 필리핀 전역으로 흩어진 채 사단 규모의 전혀 조직적인 전투를 벌이지 못하며 곳곳에서 각개격파 되어 갔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일본군이 가진 거의 유일한 반격 전력인 제 2 전차사단은 가뜩이나 전력이 분산된 마당에 미군 상륙 지점을 방어하는 지원 전력으로 전락하였고, 주력은 제 23 사단 방어선의 동남쪽으로 전진하여 필리핀 거주 민간인 등 급히 동원된 비전투원들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받는다.


 최정예 기갑사단에게 민간인들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라니...


여기에 더해 민간인과 함께 약 60킬로미터에 이르는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도 모자라 야간을 이용하여 전차를 기동시켜 반격을 가하라는 명령도 떨어졌고, 남쪽에서 전차 제 10연대와 6 연대가 야습을 이어갔지만 별 성과도 없이 전차만 까먹을 뿐이었으며 1월 31일에는 전차 제 6 연대장 아이다 군페이(井田君平) 대좌도 야습과정에서 전사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2월 6일, 사단은 후방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미 병력 약 2,000명과 전차 80대, 화포 24문, 자동차 약 370대를 잃은 상황이었고, 이들이 후퇴한 산악 지대는 말 그대로 전차의 대규모 기동은커녕 이동도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계속되는 축차 투입에 소모되다가 결국엔 후퇴 명령이..

 
결국 일본 육군 제 2 전차사단은 이때부터 기갑부대가 아니었으며 부대 병사들은 전차를 버리고 보병 부대가 되어 1945년 3월 초부터 6월 초에 이르는 동안 미군과의 의미 없는 소모전을 계속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www.xuehua.us/2018/05/07/700%E8%BE%86%E5%9D%A6%E5%85%8B%E5%AF%B9%E8%BD%B0-%E6%8E%A8%E5%9C%9F%E6%9C%BA%E5%BC%80%E8%B7%AF%E6%8E%A8%E5%80%92%E4%B8%80%E5%88%87%EF%BC%9A200%E5%A4%9A%E8%BE%86%E5%9D%A6%E5%85%8B%E7%87%83%E8%B5%B7/zh-tw/
https://history.army.mil/books/wwii/MacArthur%20Reports/MacArthur%20V2%20P2/ch15.htm
https://worldoftanks.asia/ja/news/general-news/sp-jp-3-tanks-in-battle/
http://ww2in172.com/?tag=u-s-army
https://www.pinterest.co.kr/pin/763289836815083009/

오홋 일빠다 역시 자주와야하네요 내용은 보지도 않고 먼저 댓글부터 올립니다
푸하학~ 일빠하면 뭐 있나요? 캬캬캬캬
일빠하고나면 이겼다는 승리감 든다고 할까요 뭐 ㅇᆞ런거라도 이겨보고 싶다는 똘짓입니다.
왜 이 글들을 보면서 6.25 당시 수많은 육탄용사들이 생각나는 것일까.
6.25 때 한국군 지휘관의 대부분은
일본군 말단 위관장교 출신들이 대부분 입니다

알고있는 지식이 현재 블로그의 상황과 다르지 않을겁니다.
태평양 전선의 왜놈들에겐 M4 셔먼은 킹타이거 전차 였네요.
그러고 보니 필리핀 전투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도 없었네요. 오. 덕분에 잼나게 읽고 있습니다.
봉달님 저 죄송하지만 제가 애기한 궁성사건 애기 언제 해주실수 있으신가요?ㅜㅜ
그 포스팅 매우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화 자체하고 실제궁성사건하고 얼마나 거리가 다른지 매우 궁금합니다.
봉달님, 포스팅 감사.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