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錦山) 그 속으로 가야 금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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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2013. 10. 16.

보물섬 남해 팸투어 4 남해 금산(錦山) 그 속으로 가야 금산이 보인다

 

10월 5일 새벽 5시 팸투어 일행은 독일마을을 떠나 남해 금산(錦山 명승 39호)에 올랐습니다.

금산과 보리암은 남해 제 1경이니 빼어난 경치가 남해군에서 최고입니다.

아직 정상에 오른적이 없기에 정상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이나 그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모르기에 낯선 새벽바람탓도 있었지만 상기되었습니다.

 

남해 금산은 소금강 또는 남해금강이라 불리는 삼남 제일의 명산으로 금산(681m)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38경에 이르는 기암괴석이 있으니 산만을 보고는 금산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남해 금산은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이성계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산에 비단을 선물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약속을 지킬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중신들과 회의를 가졌으나, 별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중신 중 한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그 산 전체를 덮을 만한 비단이 없으며, 비단으로 산을 감싼다 해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누더기가 되므로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비단 대신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 두모마을에서 보는 금산

 

처음 머문곳은 문장암을 지나 금산 1경인 망대로, 금산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해맞이는 구름층으로 못 했기에 섭섭했습니다.

안치환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노랫말처럼 금산 일출도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망대는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05m)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으며 아래로 상주마을이 바다를 품고 있습니다.

망대에는 기념물 제 87호인 남해 금산 봉수대(南海錦山烽燧臺)가 있는데 고려 의종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 문장암 (由虹門 上錦山 유홍문 상금산 / 주세봉)

 

 ▲ 상주 은모래해수욕장

 

봉수대는 조선시대 군사통신 수단을 대표하는 것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렸으며, 밤에는 횃불을 올린 통신수단입니다.

현재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약 500여 기 내외의 봉수터가 동·남·서해 연안의 만이나 곶뿐만 아니라 도서 혹은 육지내륙의 산정이나 산중에 소재하고 있는데 봉수대는 5기가 기본인데 김해나 가덕도 등 대부분의 지역에 복원된 봉수대는 1기입니다.

남해 금산의 봉수대는 봉수대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였는데 비록 1기라도 고증을 거쳐 복원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등산인구가 많기에 대부분의 등산로는 반지르르할 정도로 잘 되어 있으며 안전난간, 계단, 이정표도 한눈에 들어 올 정도로 잘 되어 있기에 웬만해서는 조난의 위험이 없습니다.

망대를 내려 대숲을 걸어 단군성전을 지나쳤습니다.

걸음이 느리기도 했지만 눈밭에 넘어진 후 모든 것에 소심해졌기에 일행을 따라잡을 수 없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단군성전 입구에 잘 자라고 있는 배추밭 울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보리암 울도 그랬는데 대나무를 엮어 울을 만들었는데 가지런한 울이구나 싶더군요.

비록 텃밭농사이긴 하지만 농사일이 이제 예사로 보이지 않거든요.

 

 

부소대는 2013년 9월에 개방된 탐방로로 두모계곡~부소암~복곡헬기장 2.8㎞으로 2011년에 지정되어 목재 덱·안전난간·계단·다리 등 각종 안전시설, 종합안내판, 이정표, 노선안내판, 다목적 위치표시판 등을 설치하여 올 9월에 개방했으니 그동안 금산을 찾은 이에게도 생소한 부소대일 수 있습니다.

 

 

부소대는 사람의 뇌모양의 큰바위며 혈관같은 바위의 골에는 나무와 풀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소대는 두모마을에서 보일 정도로 크며, 철다리를 건너야 부소암에 다다를 수 있는데 철다리는 남해 바다의 모든 바람을 모은 정도로 세찼기에 작은 간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습니다.

 

부소대는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돼 살다가 갔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앉아 천일을 기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입니다.

부소대는 금산 38경중 하나로 법왕대라고도 합니다.

 

 

부소대에 기대어 있는 부소암(扶蘇庵)입니다.

쓰러질듯 하는 작은 암자의 보살이 건네는 따뜻한 커피에 일행은 잠시 자리에 앉아 남해를 바라봤습니다.

밤새 염불을 했다는 보살은 암자에 대해 잠시 이야기 했는데 간섭하는 이 하나 없고 무서움조차 느낄 수 없는 곳이 부소암이라고 했습니다.

법당이라고 할 것 까지 없을 듯 한 법당엔 돌부처가 있었으며, 뒤로 호랑이를 탄 마애불이 태극을 이고 있었기에 태극모양은 언제부터 있었느냐고 하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부소암이 최근에 개방되었다고 하여 모든 것이 잘 보존되어 있느냐고 하면 그러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애불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기 위해 바위를 쪼았으며, 마당에는 돌확과 다듬이돌 여럿 있는데 살림집이나 절간이나 많이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욕심을 부리거나 요구하지 않았을 텐데 부처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중생들이 저지런 짓이기에 씁쓸했으며, 마당 바위의 네발고사리가 멋스러웠지만 물길을 내기 위한 호스들이 정돈되지 않았기에 보살에게 에둘러 이야기 했는데 기억을 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마당 아래로 두모마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두모마을은 남해의 가천다랭이논처럼 계단논이 있는데 겨울날 겨울초가 유명하기에 언론에 소개되기도 하는 마을입니다.

 

 

쪼개도 모자랄판인 시간이 자꾸 지체되었습니다.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금산산장으로 갔습니다.

상사바위가 보이는 금산산장 아래로 다시 남해 상주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으며, 산장에서의 식사는 아침식사답게 시락국, 나물, 묵무침 등으로 소박했으며 주인이 직접 담근 막걸리가 곁들여 졌습니다.

결코 위생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익고 있는 막걸리를 당당하게 보여주는 주인의 행동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종편의 유일한 볼거리인 '먹거리 x파일'을 보면 세상에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며, 비록 작지만 텃밭농사를 하다보니 시중의 말간 채소를 보면 농약을 몇 번 쳤기에 말갈까 싶기도 하거든요.

 

 

 

 

흔들바위, 일월봉, 화엄봉을 눈도장찍고 보리암으로 갑니다.

보리암으로 가는 길 뿐 아니라 금산에는 구절초가 유난히 많았으며, 누린내풀, 며느리밥풀꽃, 까실쑥부쟁이 등 가을들꽃을 만났습니다.

위태로운 보리암은 화엄봉에 다다르기전에 눈에 들어 왔습니다.

보리암은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입시철이면 수험생부모들이 붐비기로 소문난 암자입니다.

 

보리암은 683년(신문왕 3) 원효 스님이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 합니다. 그때 암자의 이름은 보광사라고 했으며 산은 보광산이었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금(錦)산으로 바꾼후 조선왕조를 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1660년(현종 1)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고,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901년과 1954년에 중수했고, 1969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74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기도할 것이 많은지 암자로 가는 길에도 돌멩이탑을 쌓았으며 합장하여 삼층석탑을 돌고 해수관음보살에게도 연신 절을 합니다.

해수관음보살앞의 석탑은 시도유형문화재 74호 '보리암전삼층석탑'입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으로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으며, 위층 기단은 아래층에 비해 폭이 크게 줄었으며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습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습니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으며,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