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말

뮤즈 2017. 12. 28. 23:56

 

 

 

 

 

 

 

 

 

 

 

 

 

 

 

 

 

다시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업적

 

 

 

1980년 오늘 5월 24일 새벽 3시, 박정희를 시해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지 오직 나흘만에.

50대 이상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김재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거의 조작된 가짜 뉴스라 생각하고 모두 지워버려라. 김재규는 살신성인하여 단 한 명의 인명만 빼앗아 유신을 멈추게 했고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수십 년 앞당겼다. 중앙정보부장인 그는 당시 부산과 마산의 시위 사태를 직접 체험하고 그 심각성을 보고하며 강경 대응보다는 긴급조치를 완화하고 김영삼을 구속하지 말 것을 건의했다. 잘못하면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날 수 있다고 했으나 오히려 박정희는 그를 질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4·19처럼 서울서 크게 데모가 나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그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내렸으니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표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안 그래?”

이 때 같이 있던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이 거든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닥 없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한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잠시 후 총성이 울린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것이다.

김재규는 육사동기생이자 고향선배인 박정희를 5·16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발탁하여 중책을 준 은인으로 생각했다. 박지만과 박근혜의 문제를 포함하여 국정에 대해 수없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유민주주의 회복의 마지막 수단으로 그를 시해한 것이다.

김재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정치적 확신을 갖고 군사독재를 끝내려고 10·26 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나 신군부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사형에 이르게 되었다. 정치권은 그의 구명운동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민주주의 열매를 따는 데 정신이 팔려 군부의 명백한 불법과 탈법 행위를 바로잡지 않았다. 결국 광주의 희생이 따르고 군부독재가 다시 이어졌고, 박정희에 대한 왜곡된 환상은 박근혜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10월 26일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이다. 안중근의 거사는 일본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으나, 김재규의 거사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만일 그가 거사를 하지 않았다면 서울 시민의 엄청난 희생이 따랐을지도 모르며, 우리나라도 제2의 북한이 되었거나 아니면 저 멀리 있는 시리아나 리비아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가 박정희에게 협력한 허물은 있지만 유신을 타도한 민주혁명은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주화 공로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혁명을 결행하였으나 혁명과업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하여 수행될 것이며, 국민 여러분은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김재규에게 빚을 졌다. 이에 나는 주장한다. 김재규에 대한 재심을 다시 하여 그의 공과를 명백하게 다시 밝혀야 한다고.

참고.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문영심

<의사 김재규>, 김성태

 

 

 

경기도 마석에 위치한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는 문익환 목사님, 전태일 열사, 박종철 열사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http://blog.daum.net/shyeun55/16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개척한 혁명가 김재규 장군은 마땅히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어야할 것입니다.

-김재규-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6.25를 통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바쳐 지켜온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3천7백만 우리 국민이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이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

하지만 그의 희생으로 장기집권 독제와 국민의 희생을 막았다

10 . 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만세!

-최후의 진술에서.

김경숙 열사 37주기] “사장이 어린 여공들을 버렸습니다” 2016.08.11 | 여성신문

박정희 대통령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저격하면서 유신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김경숙 열사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내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됐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만들어

유신독재가 시작한 날도 10.17

 

박정희가 김영삼 야당총재를

국회에서 재명 처분 한 날도 10.4

 

순하고 순한 부산사람들이

유신독재를 타도한 날도 10.16

 

마산사람들도 뒤질세라

박정권 타도를 외친 날도 10.18

 

박정희가 유신정권으로

평생충성을 약속한 동기생,동향인

김재규의 권총에 쓰러진 날도 10.26

 

다 망해가는 여당 기생충들이

9년전 망상으로 야당의 유력대선후보를

흠집내어 매장시키려고 "중국공산당 숫법"으로

시작한 날도 10월 어느날,

 

이에,야당의 대응전략이 챙피할 정도입니다.

 

박근혜는 2002년5월11일부터 5월14일까지

DJ가 묵었던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과 1시간이상 독대한 사실도 있습니다.

 

박근혜는 김일성 70회생일에 완공된 지상170m 석탑인

"주체사상탑"을 방문하고 방명록에

"기다리던 단비가 오는 가운데

평양의 전경을 잘보고 돌아갑니다."-박근혜 서명-

 

박근혜는 또한 북한8경의 하나인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지를 돌아보고

방문기념품으로 "통영칠보단자함"(주석궁에 보관 전시중)을 전달했습니다.

 

폭로사이트" 위키리크스"에서는

김정일이 박근혜를 초대한 만찬장에서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이니 선친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둘에게 달렸다"고 축배를 든 사실도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제안 합니다.

야3당은 "박근혜의 용공사상 전력"을 검증하는 TF팀을

국회내에 구성해야 합니다.

 

박근혜의 국가보안법 위반사실,위장된 입북경위,

북한에 동조한 행동과 언행 등 을

면밀히 조사하여 탄핵해야 합니다.

 

이시대에

9년전 문재인의 공인된 사실과

14년전 박근혜의 국가보안법 위반 용공행위중

누가 더 애국적인 행동을 하였는지 심판을 내립시다!!

 

이제 동학의 정신을 이어 받아

서민대중의 힘으로 역사의 마지막 심판을

시작한 날도 2016.10.16 부터 입니다 !!!

 

- 숨 죽이고 사는 대다수 민중-

 

출처 다음까페

출처 : 신나
글쓴이 : 신나 원글보기
메모 :

 
 
 

해야 할 말

뮤즈 2017. 6. 30. 08:47

 


출처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7062813277237574


영화 ‘박열’은 1923년 독립운동가 박열이 일본 황태자 암살 혐의로 공판을 받는 과정을 그린다.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까지 박열과 함께했던 인물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이 과정에서 본인이 남긴 옥중수기와 당시의 기록들, 그리고 후대의 연구들은 일본의 하층민, 특히 여성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투쟁은 천황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국가에서 한 명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영화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정리했다.


호적 없는 아이
1903년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유년 시절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무적자’로 살았다. 유서 깊은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가 산골 처녀인 어머니를 임신시키고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 7살이 된 후미코는 호적이 없어 학교에 갈 수 없었고, 매일 아침 ‘적갈색 윗옷을 입고 머리에는 크고 붉은 리본을 묶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 했다. 겨우 무적자도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아 입학했지만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마련하지 못해 3일간 결석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후미코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차별이었다. 출석을 부를 때 선생님은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남자 기모노를 빌려 입고 참석한 졸업식에서 남들이 딱딱한 종이에 인쇄된 수료장을 받을 때 혼자 붓글씨로 적힌 종이를 받았다. 가문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무적자였던 후미코는 일찍이 온갖 부조리를 경험했고, 이는 그가 훗날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법정에 선 후미코는 국가를 향해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무적자라는 이유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법률입니다. 사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아이를 채찍질할 정도로 잔인합니다(‘재판기록’)”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조선의 이민자
아버지는 외도와 가정폭력, 가출을 일삼다가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9살이었던 후미코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 7년을 보냈다. 조선에 오기 전 “공부를 잘하면 도쿄에 있는 여자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던 할머니는 남들 앞에서 그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았고 점차 학대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왔을 때 후미코의 성은 고모부와 같은 ‘이와시타’였지만 반년 만에 다시 ‘가네코’로 바뀌었다. 그는 12세 무렵부터 집안의 하녀처럼 일했는데, 학교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으며 매를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고리대금업과 아편밀수로 부를 축적한 일제시대 식민자 집안 속에서 후미코는 조선인 머슴 고씨에게 공감할 정도로 철저히 피지배층이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고씨가 “옷이 한 벌뿐이어서 빨래를 하기 위해 하루 쉬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할머니와 고모는 그를 깔깔대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을 목격한 후미코는 “그날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재판기록’)”라고 설명했다. 스스로가 고통받는 약자였기에, 국적을 뛰어넘어 해방에 대한 열망에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받는 여성
후미코는 열여섯 살이 되어 고모부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는 그에게 다짜고짜 결혼을 강요했다. 후미코를 외삼촌과 결혼시켜 재산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공부 대신 신부 수업의 일환으로 ‘실과여학교 재봉전문과’에 다니게 되었으며, 아버지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이에 대해 후미코는 훗날 ‘부모가 자식의 의지나 개성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아이의 생활방식을 결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계급지배의 일환’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 무렵 후미코는 극장에서 만난 청년과 자유연애를 시작했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혼담은 파기됐다. 이 일로 그는 아버지에게 “화냥년”이라는 욕을 먹고 폭행을 당했다. ‘교사가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한 후 좋아하는 학문을 하겠다’며 무작정 도쿄로 올라간 후미코는 한동안 작은외할아버지 댁에 신세를 졌는데, 그의 생각 또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너는 지금 몹시 공부를 하고 싶겠지만, 선생님이 되어 봤자 생활이 되겠니? 그야 물론 독신일 때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시집을 가게 돼. 아이가 생겨봐라. 배가 불러 학교에 가게 되면 모양새도 좋지 않아(‘옥중수기’)”.


사상에 눈을 뜬 고학생
작은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후미코는 주경야독의 고된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신문가판대 직원, 가루비누 노점상, 가정부 등의 일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다. 특히 후미코가 길거리에서 석간신문을 판매하던 시절, 이 가판 근처에서는 여러 사상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허무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본래 공부를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목표였던 후미코는 ‘사람들에게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박열의 동지
후미코는 ‘청년조선’에 실린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를 접하고 그에게 운명적 끌림을 느껴 먼저 동거를 제안했다. 두 사람은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대등한 관계였는데, 1922년 도쿄에 방문했던 후미코의 어머니가 “그때 후미코는 단발머리에다 조선옷을 입고 남자용 가방을 메고선 거의 하루 종일 어딘가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박열과의 생활은 남녀 두 사람이긴 했어도 지극히 사이가 좋은 두 남자가 함께 사는 세대처럼 보였습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뻔뻔스러운 조선인’이라는 잡지를 통해 일본의 권력자들에게 ‘불령선인(뻔뻔스럽고 무례한 조선인)’으로 불리는 조선인들의 무고함을 일본 민중에게 알렸고, 저항의식을 가진 조선인과 일본인 모임인 불령사를 조직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함께 구속된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도 투쟁을 이어나갔다. 후미코는 법정에서 “박열이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재판기록’)”라고 선언하거나 옥중서신을 통해 지인에게 “혹시 여유가 있어서 나에게 줄 게 더 있다면 그것은 P(박열)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P에게 뭘 좀 먹여주고 싶어요”라고 부탁할 만큼, 박열을 뜨겁게 사랑했다.

굴복하지 않은 사상가
후미코는 일본의 천황제에 저항하는 아나키스트였다. 사상가로서 그는 박열과 동지였지만,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둔 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어린 시절 경험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재판 과정에서 후미코는 천황제의 부조리함에 논리적으로 반박했고 일곱 차례의 전향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었고, 권력의 대표자인 천황과 황태자는 이러한 평등을 해치는 존재로 보았다. 또한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의 국가관에 대해 “권력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생명이나 자아를 박탈시키는 것(‘재판기록’)”이라며 정면으로 맞섰다. 결국 1926년 3월 25일 후미코와 박열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4월 5일 천황은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었다. 이는 천황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국가권력이 부여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후미코는 7월 23일 형무소에서 자살했다. 국가에 굴복하지 않고, ‘나’로서 살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참고 도서 
‘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산처럼
‘나는 나’ 가네코 후미코.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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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겐 조국이 없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생각나오.

출처 : 쌍화차 코코아
글쓴이 : 파치리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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