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nabybany 2021. 11. 10. 05:51
처음엔 좋았다. 이혼이.
남편의 거짓말을 안들어도 되었고 시집의 부담도 없다.
게다가 기분따라 언제 일어날줄 모르는 남편의 폭력도 없다.
이유없이 제자들 앞에서 매맞는 나를 보고 운동 좋아하는 제자가 내게 호신술을 가르쳐주었다.
주로 힘 없는 내가 할수있는 급소 공격 이었다.
하지만 이혼으로 그 호신술을 쓸데가 없었다.

두 딸을 내 품에 품고 사니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우리의 생활비를 걱정해야했다.
애들 아빠가 양육비로 주기로 한 약속을 한번 지키고는 없었다. 독촉 전화 몇 번 하다가 나는 지쳐떨어졌다.
나는 화실을 마련할수 없으므로 집에서 가르치는 개인 렛슨을 시작했다.
학생들의 귀가 시간에 맞춰야 했으므로 나는 일주일에 몇 번씩 저녁마다 외출했다.
얼굴이 희고 비교적 길고 날씬한 몸매를 갖은 나는 저녁 마다 나가는 술집 여자로 동네 사람들에게 오해 받기도했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tv켜놓고 잠이들어 아무리 블러도 문을 열수없는 나는 옆집의 거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울 엄마가 내게 바랬던것처럼.
나는 저녁먹고 전축판 앞,뒤 돌리고 그 음악에 따라 아이들과 춤을 추고난뒤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식탁 불을 켜놓고 같이 책을 읽었다.
책이 길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응답도 책을 통해 들었었다.
레마르크의
'하늘은 누구도 특별히 사랑 하지 않는다' 와
썸머셋 모음의 '달과6펜스' 에서였다.
나는 내 아이들이 책을 읽으며 느끼기를 바랬다.
다행이도 그 애들은 그렇게 되었다.
역시 책은 좋은것이다.

나는 그 동안 내가 하고싶었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중,고교 실기대회때 마다 상슬 탔었고 홍익미대를 갔다.
그 이전 걸음마 할 적부터 그림을 그렸었다.
그런 내가 미술학원을 하면서 학생을 가르쳐 시집식구와 남편의 사업자금 마련하는 앵벌이로 전락한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혼했다! 날개가 생겼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나는 아이들이 먹을것을 준비하고 저녁에 렛슨을 하려 다녔다.
미술 학원을 할때도 그림은 그릴수가 있었다.
하지만 버는 족족 남편에게(시댁 식구들의 문제와 사업자금,남편의 용돈) 돈을 빼앗긴 나는 그림을 그릴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화선지를 펴다보면 먹이 없었다.
무언가 한가지씩 꼭 없었다.
시아버지께서 선물하신 용이 그려진 벼루는 남편이 청전이 쓰던 벼루 라고 팔아 먹었다.

아 맞았다.
엄마의 집에 어느 스님이 댁의 딸이 지금 사귀는 남자 때문에 평생이 위험 하니 내가 부적을 써 줄테니 딸이 지니게하여 꼭 떼어 내라고 써 주신 그 부적을 나는 미신이라고 찢어 버렸다. 그리고 결혼했다.

모든게 내 탓이다.
나는 영악하지를 못했다.
레슨으로 겨우겨우 생활이 지속 되었다.
이 늦은 내 머리가 그냥 먹고 살만 하면 어쩌지?
이 아이들 대학은? 등록금이 비쌀 텐데... 나는 겁이 났다. 그러는 동안 내 귀엔 별 소리가 다 들렸다.
내 남편과 바람 핀 그녀, 나를 언니 삼고 싶다던 얼굴 가득 웃던 그녀가 내 아이들을 데려가야 할텐데 한탄 한단다. 그래서 아이들과 고등학교 졸업 하고와 그러면 그 동안 엄마가 등록금 준비하고 있을께.
아이들 보내 얼마 안되어 큰 애가 도망쳐왔다.
그 애는 지 엄마 닮았다고 벽에 쳐 박히고 매를 맞았다한다. 학교에선 내게 연락을 했다.
내가 그애를 찾으러 그 동네를 갔을때 그들 부부는 자기들이 얼마나 사이 좋은지를 보여 주려고 아이 걱정 없이 웃고 떠들었다. 작은 아이가 언니 집에 없다고 내게 울며 말했을때도 곧 들어 올거라며 웃었다.
큰 아이는 며칠을 떠돌다가 배가 곺아 내게 왔다.
나는 그애를 품었다. 작은 아이는 '나도 가면 엄마가 힘들꺼야 하고 참았다.
참! 안되는게 꿈 이더라.
꿈은 꿈 일 뿐 현실은 아니였다.
나는 죽을 병을 앓았고 작은 아이와 더 멀어졌다.
작은 아이가 어떤 고생을 할지 아는 나는 그애 위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죽기로 예정 되어있었다.



 
 
 

나의 이야기

nabybany 2021. 9. 20. 20:20
만신의 몸을 빌어 내게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약속이 가끔 꿈으로 나타나셔서 나를 도우셨다.
나는 많이 아팠고 꿈마다 엄마가 나를 데릴러 왔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뒤 2년만에 지병으로 앓던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당신 51세에.
내 편이었던 두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엄마는 나를 꼬시기 위해 꿈 속에서 생전에 안 입던 색갈이 있는 옷을 입었고 생전에 화장도 안하던 엄마가 빨간 루즈를 바르고 날 보여 웃으며 같이 가자고 손짓을 하였다. 나는 엄마랑같이 산 꼭대기로 뛰어오르다 손을 놓쳐 산밑으로 구르며 잠을 깬적도 있었다.
어느날 꿈 속에서 할아버지꺼서 작업 복으로 군복을 입으시고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꿈속에서도 만신과 안고 울었던 일이 생각났는지 할아버지의 건너편에서 웃으며 오라는 엄마의 손짓을 무시하고 할아버지 등에 업히려 기댔다. 할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시다 말고 팔꿈치로 내 무릎을 때리셨다. 나는 서러워 울다가 꿈을깨어 다시 잠들려 하는데 꿈의 장면은 더 선명했다. '할아부지~'하며 다시 업히려하는데 이번엔 더 쎄게 때리셔서 아파 잠이 깨었다.
그리고 고무타는 냄새를 맡았다.
'무슨 냄새일까?' 잠을 깬 나는 전선이 타는 냄새라는걸 알았다. 전선이 탄다면 어디서일까? 전선이 문제라면 전기담요가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형부라고 부르는 소설가 정을병씨가 일본 여행을 하고 돌아올때 내게 사다준 '산요'라는 전기 담요를 애용하고 있었다.
불을 켜려면 이불을 제껴야한다. 우선 전기 코드를 뽑았다.
그리고 이불위를 누르기 시작했다. 만약 전기 담요에 불이 붙었다면 이불을 제끼는 순간 산소가 들어가서 큰 불이 날꺼라고 생각했고 어두어야 불을 발견 할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빛은 볼수가 없었고 시간이 지난 뒤였는지 냄새도 약해졌다. 겁이나 밤을 새운 뒤 새벽 여명으로 밖으로나와 아침을 기다렸다가 이불을 걷어보니 요 바닥과 바로 그위의 이불이 불에 타서 손바닥보다 크게 그을린것을 보았다. 그 자리는 내 무릎이 닿는 자리였다.
할아버지께서 팔꿈치로 때리신 내 무릎이 바로 그 자리에 있던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간중간 그림을 그리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내것이 필요했다. 나의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업 하겠다며 내게 돈을 요구한 남편 때문에 적잖은 빚이 있었고 돈은 벌어도 그 빚의 이자와 시집 식구의 필요한 돈을 주어야했다. 그들은 너무나 당당했다. 나는 그 집의 맏 며느리였기에.
그들이 그랬다. 너는 맏 며느리라고. 내 생각도 그랬었다. 나는 맏 며느리니까 이 집안을 격조있는 가풍을 갖은 집안을 만들꺼라고.
하지만 지쳐가먼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나를 위한것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어릴적부터 나의 놀이였던 그림 이었다. 공부도 그렇게해서 미대도 나오질 않았던가?
그런데 나의 취미이며 특기인 그림으로 쓰인곳은 남편과 시집식구들을 위한 앵벌이였다.
그것을 깨달았을때 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병을 앓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여러 병원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내가 죽을거란 진단이 내려지고 나는 그 문턱까지 갔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살아났고 남편은 떠났다.
모두가 고마운 일 이었다.
단지 안타까운것은 그 일로인해 시동생, 시 고모님과의 이별이었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이다.
이제 나의 끈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이 있어도 그 아이들은 내가 보호해야만 하고 내가 기댈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엄마가 상중에 누하동으로 오셨다. 상청에 절도 못하고 집앞 골목에서 나를 만나 눈물을 흘리고는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 울 엄마를 얼마나 사랑 하셨던가? 우리가 살던 신촌에 할아버지께서 이사오셔서 한 동네에서 산 적도 있었다.
엄마는 부화장으로 열심히 돈을 벌었고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드린 병아리 오리들을 마당에 풀어놓고 소일 삼아 기르기도 하셨다.
울 엄마가 돈을 많이벌어 집을 사니 삼촌들은 할아버지가 사주셨다고 의심 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돈은 우리가 누하동에 갔을때 엄마랑 내게 똑같이 차비를 주셨던이 전부였다. 어린 내가 무슨 돈이 필요했을까? 그 돈은 나를 핑계로 엄마에게 주시는 돈 이었을것이다.
물론 그 당시 그 돈은 우리 삶에 보탬이 되긴 했었다.
헌데 딱 한번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큰 돈을 주신적이 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때 할아버지가 책 처럼 포장된 선물을 놓고 가셨다.
'별거 아니다.' 하셨으므로 우리둘은 궁금한채 할아버지께서 떠나신뒤 그 선물을 풀어 보았다.
돈 이었다. 내 등록금.
세 다발의 돈이 뭉치로 쌓인것이 아니라 책 처럼 펼쳐져 싸여있었다.
그럴리는 없지만 혹여 상촌들이라도 들이 닥친다 면 을 생각 하셨을 것이다.
엄마는 그 사랑을 못잊어했다.
얼마나 주고 싶으셨을까?

이제 날 사랑 하시던 두분 이 이세상을 떠나셨다.
엄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뒤 다음 다음해에 돌아가셨다.
나의 두 줄의 끈은 없어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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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ybany 2021. 9. 18. 08:06
할아버지 돌아가신뒤 누하동에 식구들이 모였다.
혼돈의 그 자체여서 나는 그 날을 잘 기억 못한다. 단지 생각 나는게 있다면 삼촌들의 싸움, 거기에 끼어들은 내 남편인 조카사위와 처 삼촌들의 싸움이라든가 재털이가 내 머리위로 날랐고 내 남편의 손목에 끼어진 시계줄이 클러져 헐렁하게 춤 춘다고 생각한 것과 안채는 벌써 팔아 첫째삼촌과 둘째삼촌이 나누었고 막내는 살던 집 아랫채를 그냥 갖고있다는것 밖에.
그림은 할아버지께서 밤 11시 가까이에 돌아가셔서 통금 때문에 나를 부르지못해 할아버지의 그림이 자기끼리 나누다보니 내겐 한 점도 없다는것이었고 실망한 조카사위가 처 삼촌들에게 대들어 물건 이것 저것들이 머리위로 날아 다녔던것이다.
할아버지의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도 덕수궁 미술관에도 또는 화랑의 소장품으로 전시는 계속 될터이고 나는 그 그림들을 할아버지 생각하며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차 심부름 하면서 화초에 물 주라는 말씀대로 화실에 들릭이며 또는 내가 학교에서 미술반에 들어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림 그리시는 할아버지의 뒤에 앉아 조용히 그 붓질을 보았었다. 할아버지의 그림 한점 한점 내가 모르는 작품이 없었기에 전시장에서 익숙한 할아버지의 그림을 보면서 추억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들에겐 돈 이었다.
남편은 그림 한점 갖고 오라 나를 채근 하였고 나도 한점 갖고 싶기에 세명의 작은 아버지들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나를 축구공처럼 드리볼 하였다.
미대 교수이며 화가인 막내 삼촌이 가장 많은 할아버지의 그림을 가졌다.
스켓치부터 작은 그림 모두가 그 삼촌것이었다.
할아버지의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그 모든 그림 차지는 용인 되었다.
첫째, 둘째 삼촌들은 최소한의 몇장의 그림으로 물러났다. 할아버지의 집 안채를 팔아 나눈 뒤 였으니까.
할머니는 뒷전에 앉아 소품 한점을 기념으로 가져야했다. 이유는 할아버지 생전에 조금씩 꼬불쳐둔 돈으로 집 한채 샀으니 그거면 됬다 했단다.
나는? 출가 외인이기 때문에. 없어야했다.
그들의 계산이었다.
허나 내 남편의 계산은 끝나지 않았다.
나를 꼬시느라 얼마나 애 썼든가?
내가 누구의 손녀딸인지 살펴두고 대학 다니면서 모든 시간표는 내 시간표를 따랐다.
자신의 강의 시간은 무시했던것이다.
나는 등교시간 아침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게되는그를 우연이라 생각했었다. 언제나 같이 등교하게 되었고 그가 싫어 나는 도망을 쳤었다. 그런데 하교시간에도 그는 언제나 버스 정류장에 있었다.
서교동쪽 정문으로 하교 하든 서강쪽으로난 후문으로 나가든 버스 정류장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렇게 나를 얻었다. 아니 나의 배경을 얻었다.
그 날로 그가 원하던것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
허나 우리에겐 두 딸이 있었고 나는 여전히 미술학원을 운영해 그의 식구들을 보조 할수 있긴했다.
다음해부터 나는 병을 앓기 시작했다. 시한부였다. 산다는건 기적이라 했는데 나는 기적처럼 살았다.
나는 그의 식구들을 보살필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동생 둘을 공부 시켰고 시누이를 결혼 시켰다. 나는 힘들었지만 그들은 당연했다.
그는 사업 하겠다는 명목으로 집도 은행빚을 얻았고 하다못해 시아버지가 선물하신 내가 아끼는 벼루조차 우리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팔아서 돈을 만들어갔다.
나는 속 빈 강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남편의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
정말로 고마운 여자였다.
내게는 아이들만 있으면 되었다.
절대로 나 같은 조실부모의 팔자를 갖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지만 어쩌랴 그 지옥같은 생활을 그냥 데려가주는 그녀가 고마웠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많이 울었다. 내 눈에선 실개천처럼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그와 헤어질때 그의 앞에서 흘린 눈물이 그와 헤어지기 싫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는가보다.
그는 내 기사가 신문 잡지에 실릴적마다 자신의 전처였다고 그 기사들을 스크랲하여 들고 돌아 다녔으며 20년 가까이 내 전시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올리거나 문득 전화하여 나를 화 나게 했다.
아마도 많은 남자들이 이혼한 자신의 아내였던 여자가 재혼을 안하고 있으면 아직도 자기의 여자라고 생각한다는게 맞는 말 인것도 같다.
이혼 하고 아이들 만 내 차지를 하고보니 내겐 해결 해야할 일이 많았다.
그가 사업 한다고 빌려오라 해서 빌려온 빚이 고스란이 내게 남았다. 빚쟁이들은 그 돈이 어디에 쓰였던 나를 보고 준것이니 내 책임이라했다. 내 집은 그가 벌써 2/3쯤 융자해 빼 내갔다.
결국 나는 그 빚에 쪼들려 내가 운영하던 미술 학원을 팔아야 했다.
하! 그는 기대했던 할아버지의 유산이 한푼도 없자 ㄴ대신 내 모든것을 털어갔던 것이다.
아무튼 내게는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