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이야기

무지한 2012. 11. 2. 16:46

10월 마지막 날 펼쳐지는 핼러윈(Halloween) 축제는 고대 캘트인의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신인 삼하인을 찬양하고 새해와 겨울을 맞는 의미를 갖는 축제이지만 오늘날 미국 어린이들의 축제로 유명하다. 

한국의 강남 등지에서도 최근 미국 어린이들처럼 도깨비나 마녀 등 분장을 하고는 핼러윈 축제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어린이들까지 상업적인 미국 문화를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되기도 한다. 

아무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핼러윈은 어린이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곳곳에 마녀나 괴물 등 다양한 분장과 복장을 한 어린이들이 호박 속을 파서 만든 '잭오랜튼'(Jack O'Lantern)을 켜놓은 집을 찾아다니며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다(Trick or Treat)’고 으름장을 놓고 초콜릿이나 사탕을 얻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실리콘밸리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팰러앨토에서는 핼러윈 축제때 가장 많은 주민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스티브 잡스의 집이다.

팰러앨토 중심부 주택가에 위치한 그의 집 주변에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핼러윈만 되면 사탕을 얻으려는 어린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수백명씩 몰려든다.

잡스 가족도 마당을 개방하고 곳곳에 으시시한 유령 인형이나 거미줄 등을 만들어 놓고 어린이 손님들을 맞는다.

잡스가 살아있을 때는 운이 좋으면 잡스로부터 직접 사탕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잡스가 사망한 직후 이웃에 사는 수필가가 지역신문에 기고한 추모글에 보면 '잡스가 자신의 집을 유령의 집으로 꾸며놓고 길가에 프랑켄슈타인 복장을 하고 앉아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줬다'는 대목이 나온다(관련기사 여기 )

이미 이 지역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어 먼 곳에서 원정을 오는 어린이들도 많다.

지난해 지역 신문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2009년에는 잡스가 핼러윈 때 아이팟을 준다는 소문이 돌아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그의 집에 줄을 섰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다만 이 기사는 원문을 다시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해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는 자신이 없다)

또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사탕이 떨어지면 현금 10달러씩 줬다는 설도 있다.

이번 핼러윈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만 2년 이상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가족은 핼러윈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올해에는 마침 한국에서 후배가 찾아온 것을 핑계로 잡스의 집을 찾았다.

오후 8시가 훨씬 지난 시간인데도 잡스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집 밖까지 50m 정도 줄이 늘어서 있었다.  직접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0명은 넘었다.

게다가 좀체 줄이 줄어들지 않아서 잡스의  집에서 나오는 한 30대 백인 남성을 붙잡고 아이가 무엇을 받았는지 물었더니 초콜릿과 캔디가 잔뜩 들어있는 복주머니 모양의 비닐봉지를 들어서 보여줬다.

특히 마당 곳곳에 괴물이나 유령 분장을 한 사람 10명 정도가 숨어 있다가 괴성을 지르며 갑자기 나타나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줬다고 한다. 이른바 '유령의 집' 놀이를 한 것이다.

나와 후배는 줄이 너무 길어 마당까지 들어가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이곳을 찾았던 한인들 말로는 잡스 마당에서 나타난 유령이 너무 무서워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날따라 늘 차에 놓고 다니던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는 바람에 사진을 찍지 못했다. 스마트폰으로 몇 컷을 찍었는데 너무 어두워 '인증'에 실패했다. (대신 지난해 기사동영상)

스티브 잡스 집의 핼러윈 연례 행사는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생활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곳에는 많은 억만장자들이 살고 있지만 이들 집에 거의 담이 없다.

이날도 호기심이 발동해 잡스 집 뒤편으로 돌아가봤다. 창문 안으로 집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알려진대로 하얀 벽에 장식이 하나도 없고, 가구도 식탁을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도 다른 지역 부촌에 가보면 엄청난 담에 감시카메라가 작동하고 곳곳에 근육질의 보안담당자들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잡스의 집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가 아니면 담이 없는 집 주변까지 접근하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의 집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살았던 집,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소가 인터넷 검색만 하면 나오고 직접 가보면 일반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잡스에 집에 도둑이 들기도 했으며, 저커버그는 한동안 스토커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인근 식당에서 이들을 봤다는 사람들도 많다.

이곳에 파견된 지지통신 특파원은 지난번에 만났을 때 다음에는 잡스가 자주 갔던 일식집에서 보자고 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일반인들도 갈 수 있는 곳이란 뜻이다.

가끔 저커버그나 잡스를 식당에서 봤다면서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한다.

물론 실리콘밸리나 미국과 한국 간에는 상당한 문화차이가 있다. 

게다가 잡스가 주로 이곳에서 생활했지만 이곳 이외에도 여러 곳에 집이 있다.(관련 기사 여기)  알고 있는 것만 스페인풍의 우드사이드저택과 팰러앨토의 집을 포함해 3곳이다.

혹자는 이것도 일종의 '스타'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집의 담 뿐아니라 마음의 담까지 허문 '억만장자'는 여전히 우리에게 신선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