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의 사진들

한가람 2013. 2. 3. 20:13

경복궁(광화문)복원에 이르기까지 - 사진 150여개 모음

경복궁과 광화문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
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경복궁의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천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네이버)

조선총독부청사(朝鮮總督府廳舍)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등 2곳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1907년에 건립된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으로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군정청에 인계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정부가 청사를 다시 인계받아 정부 청사,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청사
일부가 파괴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이유로 그때까지 현존하던 청사를 철거하였다. (위키백과)


중앙청이라 불리운 일제 때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만듦으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버렸다. 광화문은 이후 1968년 콘크
리트로 복원되는데 당시 남아 있던 중앙청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세우다 보니 원래 경복궁 건물들이 이루고 있는 선상에서
벗어나 삐뚤게 놓이게 되었다. 현재 제자리를 찾아 복원 되었다.

 1894. 11. 서울의 중심부 남대문로 모습에 잡힌 광화문과 백악산 (광교통으로 가는길)

 19세기 후반(1895년) 서쪽에서 본 경복궁과 궁성 앞의 모습. 중앙에 광화문, 그 왼편에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보인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광화문 좌우측 담장 모서리에는 서집자각, 동십자각이 궁장과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한말 동편(측면)에서 본 경복궁 모습. 크기 w1287 h296 (크게보기 이미지 클릭!)

 경복궁 동북쪽의 북촌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W 900 h375 (클릭하면 크게보기 됨)
1876년 교태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내전 일곽이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사진에 강녕전과 교태전 등이 없는것으로 보아1888년
복구하기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춘휘당과 보광당은 1890년 이후에 헐리고 이자리에 함
회당과 집경당이 세워진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1395년 창건때는 사정문이었으나 세종 때 광화문으로 명명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 3개의 홍예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큰문은 왕이 사용하는 어문, 동서의 동협문, 서협문은 문관과
무관이 사용하는 문이다. 과거의 모습이지만 광화문 누각의 단청과 편액(현판) 등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이는 사진이다.


1863년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위해 1865년 경복궁 공사를 착수하는데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였다.

 광화문 앞으로 지금과 달리 지면보다 높은 단(壇)위에 월대(月臺)놓여 있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더했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넣었다. 동쪽문에는

천마(天馬)를 그렸고 서쪽문에는 거북을 그렸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구한말의 광화문과 육조거리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앞 좌ㆍ우에 의정부를 비롯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조(六曺) 등 주요 관아가 건설
되면서 형성되었다. 광화문을 바라본 우측에는 의정부와 이조, 한성부, 호조가, 좌측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및 사역원이 차례로 세워졌다.

 광화문을 통과하면 홍례문이 있고 그 뒤로는 근정문이 나오고 근정문을 지나면 조선정치의 핵심이자 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이
통과 해온 3개의 문과 중심축에 맞춰져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왕의 집무실, 왕의 침실, 왕비의 침실, 후원(지금의 청와대 일대)
그리고 담장을 넘어
북악(백악)산과 이어지며, 이는 육조거리와 함께 서울 도성 안의 남북의 중심축이자 조선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890년 경 광화문. 위와 같은 사진으로 눈이 곳곳에 쌓여있는것으로 보아 겨울철로 보인다.

 광화문과 육조거리

 

광화.문 앞(육조거리)으로 배치된 국가의 정무(政務)를 맞아보던 행정관청은 다음과 같다.
서쪽부터 삼군부(三軍府
)는 군사업무 담당, 중추부(中樞府)는 시대에 따라 기능이 달랐고 사헌부(司憲府
)는 지금의 검찰과 비슷하고,
병조(兵曺
)는 국방부, 형조(刑曺)는 법무부, 공조(工曺)는 건설교통부 정도가 될것이고, 동쪽부터 의정부(議政府
)는 내각회의,
예조(禮曺
)는 교육, 의례, 외교 등을 담당하고, 이조(吏曺)는 人
事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호조(戶曺)는 재정, 세금 담당, 한성부
(漢城府)는 서울시청, 기로소(耆老所)는 국가원로 클럽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1904년 이라고 설명된 것도 있다.

 1900년대 초, 광화문 앞 좌우에 있는 해태상에서 놀고있는 댕기머리 아이들

 좌) 복장으로 보아 관청에 들린 관료의 마부로 보인다. 말 주위의 둥글게 뭉쳐놓은 눈덩이를 보니 많은 량의 눈이 내린듯 하다.
우) 해태상 머리 위에 올라 서있는 소년 모습이 천진스럽게 보인다.


 광화문앞 육조거리에 어떤 연유인지 광화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1900년대 광화문 앞 인력거 행렬

1904년의 경복궁 경회루

 

 1904년의 광화문. 이무렵 부터 광화문과 육조거리에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 한다.


 광화문과 육조거리 양옆의 해태상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서 바라본 광화문과 육조거리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쯤에서..)

 경복궁 안쪽 흥례문에서 바라본 광화문 뒷 모습.
흥례문이 헐리기 전의 사진으로 추정되는데, 넷상에서 광화문 전면 사진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후면(안쪽)의 모습은 그리
흔치
않은 자료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저 무성한 잡초를 보면 궁의 주인이 없어 관리되지 않은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광화문을 통과하여 바라 본 흥례문(興禮門)과 행각(行閣) 1910년대 초 모습.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의 모습은 보는 바와 같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2번째 문이며,
이 문을 통과하면 금천이 흐르고 그곳을 건너는 다리인 영제교가 있고 바로 앞에 근정문이다.
일제는 후일 잡초가 난 이 자리와 저 흥례문과 행각을 철거하고 총독부건물을 짓게 된다.
(인터넷 상에서 철거 전의 흥례문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것도 행각과 함께있는 모습을 찾기란...)


 근정문과 영제교
당시 총독부는 남산에 있었는데 건물이 좁고 협소하였기 때문에 새로 건설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총독부청사를 지을 부지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과 대학로 근처 등도 후보지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반대가 있었음에도 권력에 의해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 안 근정문 바로 앞에 세워지게 된다. 위 사진의 영제교는 1915년 이전에 철거된 상태였다.

 

 정문 모습 - 1900년대 초. 자료를 수집하며 이 사진이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알게 됬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흥례문이 나오고 그 문을 통과하면 개천이 나오는데 금천(禁川), 어구(御溝)라고 한다. 이 개천은 모든 궁궐과
왕릉의 진입로에 있는 신성한 공간을 가르는 경계로 이것을 건너는 다리는 영제교라고 한다. 영제교 양옆에는 금천을 내려다 보는
4마리의 천록이 자리하고 있다.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문에 이른다. 이 영역은 행각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이 안에 기별청, 정색, 마색,
결속색 등 하위 관청이 있었다.
근정문은 출입을 위한 단순한 문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명종, 선조 등 총 일곱 임금의
즉위식이 근정전에서 거행되기도 했으며,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에서 책봉식을 가졌다.

 

 근정문으로 가는 다리인 영제교와 다리 양 옆 금천을 내려다 보고 있는 천록

다리 남북 양쪽으로 4마리의 천록이 조각되어 있다. 이 주변으로는 벽을 두른 행각이 둘러져 있어 이곳에 내병조, 정색, 마색,
결속색의 관청이 있었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안쪽으로 벽을 만들지 않고 복도와 같은 텅빈 회랑처럼 복원 되어 있다.

어느새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홍례문과 그 옆을 둘러쌌던 행각도 자취없이 헐려버렸다. 흥례문에서 근정전의 주 출입구인
근정문으로 건너가던 영제교(사진) 다리 난간도
치우고 다리밑을 흐르던 금천, 명당수 개울도 묻어버려 물줄기가 끊겨 버렸다.
이 모든것들을 헐고 터를 넓혔다.

일제는 한일병합이 이루워 지자 박람회(공진회)를 연다는 구실로 전각과 행각을 헐게 되는데 일제가 새 청사부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오백년 조선왕조를 호령했던 경복궁 근정전 앞뜰이다. 그러니까 총독부 부지는 광화문을 들어서게 되면 보이는
흥례문 부터
위 사진에 보이는 근정문 바로 앞까지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게 되는 곳이다.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모습. 1900년대 초


 1910년대의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근정전 월대 위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근정문 뒷 모습. 1900년대 초중반
이 때만 해도 근정문 너머(앞)에 공진회장 시설물도 총독부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도 순종도 살지 않는 경복궁은
보는
바와 같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경복궁 전각이 훼손되기 시작

일제는 1914년 7월 근정전 전면에 있는 흥례문과 연결한 행각, 그리고 세자가 머물던 자선당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문, 담장을,
그 외 이용하지 않는 석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설살가상으로 1915년 '정(始政) 오년(五年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를 개최하는데
이 공진회 전시장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을 마구 헐어버린다

경술국치로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지 몇년 되지 않아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는다.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종의 산업박람회 비슷한 이벤트를 열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 5주년을 자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로
인해 조선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국내외에 두루 알리고자 하는
속셈이 숨어 있었고, 거기엔 더 큰 계획인 조선총독부는
새청사를 지을 계획을 세운다.
그 속뜻은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식민 통치의 야욕이었다.

다음은 1910년 5월15일 '대한매일신보' 에 실린 '경복궁이 없어지네' 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1910년 5월 10일 왕실사무를 총괄하던 궁내부는 경복궁 내 공원 신축을 위해 전각 4,000여칸을 경매 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80여명이 경매에 참여했고, 이중 10여명에게 전각이 매각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타이' 에게 전체의 3분의 1이 매각도었는데,
그는 척식회사 총재 '우사가와 카즈마사' 의 첩자로 알려져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이전부터 경복궁이 훼손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줄곧 살림집, 요릿집, 기생집, 사찰 등으로 팔려 나가고 또는 일본으로 가져가 지어 놓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관보(대정3년)1914년 7월 1일자에는 "경복궁 구내 와용건물(瓦茸建物)"에 대한 "입찰불하공고"가 수록되어 있다.

1915년 열릴 조선물산공진회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이뤄진 이때의 입찰불하에 따라 흥례문 구역과 동궁지역(즉 자선당, 비현각,
시강원 등)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입찰에 참여한 조선인 및 일본인이 다수 였다.


 광화문과 문앞의 석재 난간의 원형모습 그대로지만, 오른쪽 홍예문 안에 보이는 흰색의 가건물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1915년 9월)
하기 위한 준비작업 중인지 또는 총독부청사의 공사가 시작 된것으로 추정된다. 이무렵 전봇대 숫자도 늘었고 전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왕의 행차로와 계단이 사라진지 오래...

 바로 위의 사진과 같은 것인데 최근 광화문 재 복원 당시 20세기 초에 사진에 나타난 광화문 현판 글씨체를 참고? 했다는...

 광화문 뒤로 총독부 건물을 짓는 구조물이 보인다.

 

 이때만 해도 광화문과 월대난간이 건재하고 좁은 형태의 계단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뒤엔 완공단계에 있는 총독부 건물 돔이 보인다.

 

 어느새 광화문앞의 석재 월대난간이 사라지고 노면전차가 다니고 있는모습이다.
원래 자리의 광화문도 총독부청사 완공에 따라 헐리게 되었는데..

광화문 원래는 철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반대여론으로 옮겨 세우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1926년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자 그 앞에 있는 광화문도 철거될 운명을 맞았는데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중에서도 반대여론이
있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 중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신문의 기고를 통해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 하였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탄식하고 일번인들에게 "가령 일본이 쇠약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됨으로 궁성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저 양풍(洋風)의 일본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주길 바란다" 라고 쓰며 광화문 철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해체공사가 진행되어 1927년 경북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옮겨 세워진다.

이렇게 남았던 광화문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 전체가 소실된다.

 매일신보 1915년 7월 6일자에 수록된 공사중인 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이다. 광화문 위에 올라가 촬영한 것으로 흥례문 구역을
포함하여 경복궁 일대를 헐어낸 황량한 풍경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장을 조성하기 위해 그 이벤트 장소로 경복궁의 4000여칸 200여동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박물관(미술관)

세우고
임시로 지은 전시장과 여러 시설물, 야외에는 조선 각지에서 가져온 유서깊은 석탑과 석불들이 장식물로 채워졌다.
이때부터 조선의 약탈 상징의 건물들이 경복궁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손님을 맞는 광화문은 요란한 문구로 장식되었는데, 천황가를 상징하는 노란색 국화꽃 문양이 그려졌다.

 손님을 맞는 광화문은 요란한 문구로 장식되었는데, 천황가를 상징하는 노란색 국화꽃 문양이 그려졌다. (w200을 확대한 사진)
전같으면 광화문 3개의 홍예문 사이로 흥례문과 그 문과 연결된 행각이 보여야 정상이지만 공진회장 시설물(흰색구조물)들이 보인다.

 근정전의 어좌.
어좌와 일월오악도 -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 붉은 소나무, 폭포가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왕권의 상징으로 왕의 초상이 있는
어진 주변이나 왕이 있는 자리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1910년대 중반의 근정전 어좌. 일 관리인이 어좌 앞에 휀스를 쳐놓은 모습

 근정전 내부. (최근 모습?..)

사정전. 1867년(고종 4) 건립. 왕이 일반 업무를 보던 집무실(유리건판 복원사진)

 왕의 침전인 강년전 모습. 유리건판 복원사진 (일강점기때 헐어버린 것을 현재 복원)
대전이라 하는데 다른 내전 전각들과 달리 앞에는 월대가 있어 이곳에 차양을 치고 왕이 공식행사를 치르거나 그 가족들과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관람하면서 연회를 즐겼다.
주변으로는 4개의 보조 침전이 있으며,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과 함께
유일하게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복원). 중궁전 이라고도... 강녕전과 달리 좌우로 행각이 붙어있으며 궁녀들이 기거하며 시중을 담담했다.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현존). 고종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대비의 거처.
조대비는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고종을 양자로 들여 왕으로 즉위 시켰다.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흥복전(미복원). 흥복전은 주변으로 많은 행각들로 둘러싸여 내명부에 적절한 소임을 주고 각 전에 배속시키는
본부역활을 하였으며 외국사산을 만나는 편전으로도활용되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중건을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되고
이곳에 일본식 정원 조성되었다.


일장기가 걸린 근정전

1915년 9월 11일 오전 10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예정대로 공진회 개장식이 열렸다. 서양식 대례복을 갖춰입은 조선총독
데라
우치 마사타케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으며 근정전 돌계단에 올라섰고, 근정전 가운데 놓인 용상으로 다가가 거리낌 없이
앉았다.

근정전은 국왕 즉위식, 세자책봉식,외국 사신의 접견, 문무관의 조례 등 국가의 공식 행사시나 의례가 열리는 곳이다.
일제는 더 이상 조선의 왕은 존재하지도 인정하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하늘이 내리는, 오로지 군왕만이 앉는 존귀함이
깃든 용상에 온 백성과 이 땅을 희생으로 지켜낸 선조들의 통곡을 뒤로하고 데라우치 총독이거만하게 앉아서
회심의 웃음을 흘린다.

 

 조선물산공진회 홍보물

그림에서도 이때는 광화문과 해태상이 제자리에, 경복궁의 전체 담과 근정전, 경회루 등 몇 몇 건물만이 남아있고 나머지
전각과
행각들은 모조리 허물고 전시장 건물과 오른편 윗쪽의 총독부 박물관이 모습이 보인다.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장 배치도


본 게시물은 전에 올린 (바로가기 클릭!) ☞ "불편한 역사의 현장, 왜성대를 아십니까?" 에서 이어진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수집 한 자료가 많아
"경복궁(광화문)복원에 이르기 까지-사진 160여개 모음 [2]와 [3]" 로 계속됩니다.


 

 

 

출처 : 육군제1하사관학교총동문회
글쓴이 : 나필섭/7503/화기30/서울동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