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의 사진들

한가람 2013. 2. 3. 20:16

링크 경복궁(광화문)복원에 이르기까지 - [1] 에서 이어진 게시물

예정대로 1915년 9월 11일 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동안 경복궁에서 시정오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다.
왼쪽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모습이 보인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조선물산공진회장을 조성하기위해 경복궁의 전각과 행각이 헐릴때 자선당도 함께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박물관을 세웠다.

자선당 자리에 세워진 총독부박물관(미술관) 자료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1915년 세우고 1916년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시정5년기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에서 열때 조선의 물산과 근대의 물품을 비교하는 전시로서 이때 수집된 자료를 보관, 전시하기 위해 그 해 12월 1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당시의 박물관은 미술관 건물 외에 경복궁의 수정전, 사정전, 금정전을 비롯한 궁궐 건축을 전시실 및 수장
고로 쓰고 자경전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30여 년간 조선 총독부박물관은 고적조사 사업을 통해 수집된 유물과 구입품, 사찰의기탁품 등을 전시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 본관 제1실 내부 총독부박물관 본관 제3실 내부 출처:국립박물관 블로그

  조선총독부박물관 증축 설계도 정면. 자료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

1935년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에서 조선총독부 종합박물관을 짓기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케 조선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는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을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그쳤다.


경복궁 조선물산 공진회 때 광화문 야간점등 모습 - 매일신보 1915년 8월 8일자
전광화(電光化)된 광화문(光化門) 밤의 공진회를 장식할 광화문의 뎐(전)등...칠일(8/7)밤 시험뎜(점)등


1915년의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는 그네들이 조선을 지배한 지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고
식민통치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였다. 이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강녕전, 교태전, 수정전, 사정전과 같은
전각들은 모조리 근대문물의 전시공간으로 변했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구경거리를 찾아 밀려든 관람객도 무려 백만 명을
웃돌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말이 궁궐이었지 경복궁이 더 이상 궁궐의 기능과 위상을 이어나갈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곳은 이미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유흥과 오락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조선물산공진회만으로 그치질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경복궁이 박람회장으로 사용된 경우는 여섯
차례가 넘었다.

우선 1915년의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조선총독부 주최)가 있었고, 그 이후 1923년의 '조선부업품공진회' (조선농회 주최)가
있었고, 곧이어 1925년의 '조선가금공진회' (조선축산협회 주최)가 있었고, 다시 1926년의 '조선박람회' (조선신문사 주최)가 있었고
또 1929년의 '조선박람회' (조선총독부 주최)를 거쳐 맨 나중에는 1935년의 '조선산업박람회' (조선신문사 주최)가 있었다.

1916년 6월 그들은 왕조의 법군(法宮:임금이 주로 거처하고 공식 활동을 하던 궁궐)인 경복궁의 근정문 앞뜰에서 먼지바람을 일
으키며 조선총독부 새청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地鎭祭:건물의 안전을 비는 뜻으로 터를 닦기 전에 지신(地神)에게 지내는 제사)
를 연다. 바로 조선의 정기와 혈맥을 끊는 민족말살정책의 첫 삽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총독부는 한·일합병 이후 경복궁 안의 건물 4000여 간을 헐어 불하했고 1916년에는 근정전 앞마당에 총독부청사를 짓기 시작했다.

 일제가 경복궁 홍례문과 행각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는 모습

 원형이 잘 보이는 19세기 후반의 경복궁과 궁성앞의 모습. 한창 공사중인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 중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복궁의 근정전하면 명색이 조선왕조의 핵심공간이 아니었던가 일제는 1915년~ 1935년 까지 6섯차례의
박람회의 개폐회식을 치룬 장소이고, 뿐만 아니라 별의별 온갖 자질구레한 연회와 기념식과 각종 대회가 벌어지는 단골장소로
활용되었던 사례들은 역시 정말 수두룩했다.
일 총독들은 근정전의 단상(용상)에서 행사를 주제하는 등 이처럼 근정전의 수난인 용상에 오른 조선총독의 모습은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는 내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당시에 사이토 총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포상식수여식을 거행하는 장면이다.

             ←캡처 원본
조선박람회 포스터. 1929. 9. 12.~ 10. 31 까지 50일간 시정 20주년 기념 박람회를 열다.

 

 1929년 조선박람회 때 경복궁 근정전에서 벌어진 폐회식에서 사이토 총독이 훈시하는 장면이다

그 뿐만 아닌 근정전은 독립군과 싸우다 죽은 경찰 등 ‘순직경찰관초혼제’ 장소로 사용돼다


조선일보 1935년 5월호에는 경복궁 근정전 내에서 벌어진 '순직경찰관소방수초혼제'의 광경을 수록하고 있다.
임금의 자리인 근정전 용상이 '왜놈 순사들'의 제단으로 변해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은 어찌 글로 다 쓸까.... 

 일본 오쿠라 호텔에 옮겨진 직후의 자선당(資善堂)전경 1916년.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며 동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

광화문은 옮겼다 치더라도, 공진회장 사전 정지작업때 철거해 일본에 가져가 지은 멋대로 지은 자선당(資善堂) 모습이다.
세자 내외가 함께 생활하던 동궁의 내당인 자선당(資善堂)은 동궁철거에 참여한 일본 기업인 오쿠라 기하치로(
大倉喜八郎1837~1928)
해체한 부재를 일본으로 빼돌린 뒤 멋대로 재구성해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오쿠라는 이 건물에 조선관(朝鮮館)이란 간판을 붙히고
우리나라 에서 가져간 문화재 여러점을 전시했다가 1923년 일본을 강타한 관동대지진때 완전 불타 없어지고 기단석 288개만 남았다.
 

 옮겨간 직후(바로 위 사진)의 사진에는 향로가 없으나 향로 4개가 전면에 보인다. 이것도 훔쳐간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아닌가...

경복궁 복원을 하면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거치며 8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자선당의 유구는 경복궁 복원공사 때 자선당의 기단석으로
사용하고자 검토되었으나 관동대지진 때 불에 그슬리어 사용할 수 없었다.

 

1993년 일본 오쿠라호텔 발견된 자선당 유구와 현재경복궁 내 건천궁 부근에 위와 같은 모습으로 설치 해 놓은 모습을 볼수있다.

문화재 약탈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경복궁 자선당을 뜯어가 자기 집 후원에 세워 놓는 등 조선 문화재 무단 반출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해 간 이천 5층석탑 ▲ 북한 문화재인 평양 율리사지 석탑

위 두개의 석탑은 원래 경기도 이천 향교에 있던 고려초기의 5층석탑과 북한의 평양 율리사터의 고려때 5층석탑은 조각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데 191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전시를 위해 서울로 옮겨온 것을 당시 조선에서 군수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던 문화재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몰래 반출한 이후 우리 문화재가 박물관에 보관되지 못하고 도쿄 오쿠라호텔 뒷마당
장식용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은 사례다. 이 외에도 오쿠라가 일본에 가져가 떠둘고 있는 망국의 문화재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오쿠라가 약탈해간 이런 문화재 뿐이겠는가? 이런덩치가 큰 문화재를 헤체해 가져 갔다면 그 외 비교적 자그마한 보물급 문화재들은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 조사한 6만1409점보다 훨씬 더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며 개인 소장가들에게 흘러들어간 문화재가 상당할 것으로 예측한다.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 실태를 조사했던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박상국)은 "최소 10만점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한다" 고 말했다.


 두 탑이 나란이 서있는 곳. 빨간선 안에 오층석탑이 가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11년 지진피해로 오층석탑이 훼손 되었다는...
일본이 가져간 이천 오층석탑, 대지진 피해 ☜ 기사링크


여기서 '장춘단' 역사에 대해..!

1895년 조선의 왕궁을 무단 범궐(犯闕)한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께서 시해될 때 희생된 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00년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의 지시에 의해 남소영 터에 장충단(獎忠壇)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된다.


1908년 일제는 장충단에 올리는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한제국의 우국충정의 성지(聖地)인
장충단을 놀이공원으로 바꾸고, 일본군 장군들이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등박문)를 초청하는 야유회가 개최되기도 하고,
1909년에는 안중근에게 척살당한 이등박문을 위한 추도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그 후 일제는 1931년에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
(伊藤博文)을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지어 철저히 파괴했다.

이 때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다 본전과 부속건물을 짓고, 또 경복궁만이 아닌 경희궁의 흥
화문을
뜯어와 입구에 대문을 세우는 등 실로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장충단에서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일본인이나 친일파 박영효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으며, 태평양전쟁 중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도 거행되기도 했다.


해방 후 박문사 건물은 동국대학교 기숙사로 잠시 쓰이다가 1945년 화재로 전소되었고(경성일보 1945년 11월 26일자), 이후 장충단은
원래의 설립취지대로 국립묘지가 된다. 1946년 군이 창설되어 북한군과의 국지적 교전과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 및 각 지역의
작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獎忠祠)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 말 육군본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중단된다. 1952년 국방부에서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 묘지를 만들게 되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해 3군 종합묘지를 설치하여 명칭을
‘국군묘지’로 하였다. 즉 1956년 새로운 국립묘지(동작동)가 생기기 이전까지 장충단은 국립묘지로 활용되었다.
동작동에
국립묘지(현충원)가 생기면서 장충사는 그 기능을 잃게 되는데, 이때가 장충단을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당시 역사의식 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7년 현 장충체육관 자리에 육군체육관이 들어서게 된다.
1959년 서울시가 육군체육관을 인수한 뒤, 약 11,000m2 부지에 1960년 3월 공사를 시작해 1963년 2월 장충체육관이 개관된다.

1959년 1월 이승만의 지시로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 본당 터에 국빈접대를 위한 영빈관 신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4.19 와 5.16 으로 공사가
중단 됐다. 그 후
1965년 2월 박정희대통령 지시에 의해 다시 착수, 1967년 2월에 영빈관이 준공되었다.
1973년 7월 이후에는
현재의 신라호텔이 이 건물을 인수하였으며 현재는 호텔의 일부로서 영빈관으로서의 기능이 없어졌으나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의 어진을 봉안하였던 선원전 모습.
1932년 장충동에 있었던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 부속건물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左)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뜯어와 주지 거처와 창고로 사용했다.
右)
경희궁 흥화문을 뜯어와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했고, 신라호텔이 1988년까지 호텔정문으로 사용했다. © 역사복원신문

 1927년 광화문 옆 궁성위에 서양식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기와를 걷어내고 궁성도 광화문도 헐기시작 했다.

 1927년 광화문 해체

총독부가 세워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공사가 진행되어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옮겨 세워진다.

광화문이나마 철거되지 않은것은 다행이었지만 조선의 상징이었던 광화문이 이전되는 것도 당시 조선 지식인에게 슬픔이었는지
언론인이었던 설의식은 "헐리짓는 광화문" 이란 글에서 "서로 보지도 못한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 비가 오락가락 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따하는 망치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 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라며 슬퍼하였다
.

 1929년 10월 경복궁 앞에 들어선 총독부와 옮겨진 광화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제공)
1929년 10월 제2회 조선박람회가 끝난 후 지금의 삼청동 총리공관 부근에서 찍은 총독부와 근정전, 광화문의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보면 광화문이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십자각에서 바라본 광화문의 모습.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 된 광화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현재 중학천은 없어지고 도로로 복개되었고 동십자각은 궁궐 담장이 헐리면서 섬처럼 떨어졌다. 왼쪽을 자세히 보면 궁성이

잘라진 모습이 보인다.

좌) 병합 이후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 안쪽 모습인데 동쪽과 남쪽의 궁장이 아직 잘려나가지 않은상태다.

우) 사진상에는 동쪽의 궁장은 그대로 있고 남쪽은 아직 계단이 남아있고 그 앞까지 궁장이 잘려진 상태며 헐려진 곳에 철창이 보인다.
 

 
경복궁의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 광화문. 다리 밑에 빨래하는 아낙들 모습.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의 석축을 보면 원래의 자리에 있을때와 돌의 색이 다른것을 볼 수 있다.  정석으로 이건(移建) 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1926년 일제가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전한 뒤의 광화문 모습.

경복궁 동쪽의 옮겨진 광화문 문루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촬영시기는 1927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궁장 앞에는 동문인 건춘문과 끝부분에 동측 파수각인 동십자각이 궁장과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중학천이 흐른다. 그리고 옮겨진 광화문 사진 중, 중학천 석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모습이나 각도를 볼때 확신이 간다.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은 1929년 조선 박람회 당시의 사진으로 육측 앞에 기둥이 세워지고 윗부분에 차양이 가설된
기괴한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았다.

경복궁 동쪽에 옮겨간 광화문. 좌측에 원래의 광화문이 있었던 곳 뒤의 총독부건물이 보인다
옮겨진 이후에도 경복궁 내에서 여러차례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면서 광화문은 장식을 붙인채로 입장객을 맞았다.
이렇게 남았던 광화문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소실된다.

아래는 경복궁의 동, 서, 남, 북의 문 들...

 경복궁(景福宮) 동문(東門)인 건춘문(建春門)
1920년대
모습. 좌측 멀리 누각은 동십자각이다.


동문인 건춘문과 중학천

건춘문(建春門)은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와 함께 처음으로 세웠던 궁궐인 경복궁에 딸린 문으로, 문 안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왕족·척신(戚臣)·상궁들만이 드나들었다. 또한 대궐에 열병(閱兵)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함께 타버렸으며, 현재의 건춘문은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집정하면서 경복궁과 함께 1865년(고종 2) 12월에 상량(上樑)한 것이다.

경복궁(景福宮)의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과 1926년 전차의 진동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인해 궁장이 무너진 모습.
경복궁의 궁장 바로 옆에 궤도와 전차의 집전 장치가 맞닿을 전선은 식별되진 않지만 전봇대의 가로로 나온 것이 전차의 전선이 가설된
것이다. 궁장 옆으로 이어지는 전봇대와 무너진 담장에 막혀 서있는 전차모습이 이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영추문(迎秋門) 또는 연추문(延秋門)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했던 문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건립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 석축이 무너지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영추문 앞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는데 전차가 오가면서 발생한 진동 때문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네이버)


경복궁의 정문인 남문 광화문은 순서대로 라면 여기에 배열을 해야 하지만 위에 있으니 글로 대신 합니다.

경복궁(景福宮)의 남문(南門)인 광화문(光化門).


광화문근처에서 본 경복궁 남서쪽 모서리의 서십자각 모습. 광화문과 궁성이 헐리기 전이다.

영추문 (서문) 근처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서십자각 모습

집옥재 앞을지나 광임문을 통과하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나온다.
이 신무문을 나가서 쭉 가면 경보궁의 후원으로 완이 친히 농사를 짓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운 경농재와 과거를 시행한 용문당과
용무당 등이 있었다. 일제는 이를 모두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세우는데 광복 후에도 대통령 관저(경무대)로 사용되었다.

저 문을 나서면
1990년에 신축한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모습.
여기는 전차길도 없지만... 허물어져 가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행색이 몰락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닮아있다
.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세종15년(1433년)에 창건되었다. 성종6년(1475년)에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四神) 중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神武門)이라는 이름을 비로서 얻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지만, 고종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문들과 다르게 이 신무문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다. 음기(陰氣)가 궁궐을 어지롭히는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기우제를
지낼때와 임금이 신무문 밖 활터로 행차할 때만 문을 개방했다고 한다.

이런 구중궁궐 속 수려하면서도 법궁의 안위를 굳건히 지켜주던 신무문(神武門)은 쇠락해 가는 국운과 함께 외벽이 허물어져도
어느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경복궁 내부에있는 전각만 훼손 했으랴, 궁을 싸고 있는 행각이며 담장 등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는 대한제국의 땅을
유린했듯 닥치대로 파괴해 버렸다.

이밖에도 일제에 의해 헐리고 해외로 유출되거나 훼손된 문화재를 열거 할려면 무수히 많지만 이쯤 해 두고...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때의 모습. 엽서에 大正15년(서기:1926년) 표기

건물 앞에 아직 조경수목이 식제 되지 않을것을 볼때 완공 직후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 된다.


한편 총독부 새청사가 모습을 갖춰 갈수록 경복궁은 점점 더 초라한 몰골로 변해 갔다. 그런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들의 눈에
광화문이 눈에 가시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이야 조선총독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으니 문제될것이 없는데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형상이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가만히 놔둘리 없었다.

피를 흘리지
않은 땅은 조국이 아니라고 했던가...진정 조선의 땅은 , 그리고 조국을 상징하는 법궁은 이 땅에서 두 손에 피항방울 묻히지 않은
이 땅의 자손임을 거부하는 매국노들과 일본제국주의의 망령들에 의해 그렇게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있었다.


초기 계획의 청사 설계는 완공시의 돔과 내부가 다르다는 설이 있으나 생략...


총독부가 들어서고 광화문이 헐린뒤의 육조거리

총독부의 경우 日字의 평면형태에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약간 어긋나게 남동쪽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그 방향에는남산이 있었고
남산에는 조선신궁이 있었다. 광화문의 원래 위치에는 총독부의 담장과 쇠창살이 세워지고 총독부 정문도 약간 동쪽에 세워졌다.
권력의 건축은 그 권력의 의도에 따라 어느 시대나 강한 상징성이 부여되기 마련이다.

완공 당시의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위의 사진과 달리 작은 나무들이 식재되고 조경이 완성 된 모습이다.

이 사연 많은 청사는 두번 공사를 중단 했는데,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과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때 때였다. 강행군을 한지 10년
만인 1926년 10월 1일 공사를 끝냈다. 당시 그 규모나 디테일로 이 건축물은 극동지역에서 보기 드문 대건축의 사례가 되였다.

시사편찬위원회 에선 '완공된 조선총독부' 라고 설명을 단 사진이지만, 광화문이 철거된 1927년 경 또는 그 이후로 보인다.

광화문을 이전한 일제강점기 때의 광화문로(세종로)와 조선총독부 건물 미니어쳐

1929년 10월 서울 경복궁과 총독부건물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자료) 근정문 안쪽에서 본 모습
오욕으로 점철된 근정문의 행색이 초라하다. 근정문의 행담넘어 조선총독부 건물이 가시처럼 느껴진다.
흥례문과 행각은 이미 철거 되었고,
경복궁의 흥례문과 행각을 헐어낸 자리엔 총독부 청사 건물이 들어서 근정전으로 들어오는 출입문인 근정문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근정전 월대에서 바로본 근정문과 총독부 건물

광화문이 철거된 후 육조거리(세종로)에서 바라본 조선총독부청사




경복궁(광화문) 복원에 이르기 까지 - [3] 계속 --------->


 

 
 

 

 

출처 : 육군제1하사관학교총동문회
글쓴이 : 나필섭/7503/화기30/서울동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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