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의 사진들

한가람 2013. 2. 3. 20:20

링크 경복궁(광화문)복원에 이르기 까지 - [2] 에서 이어진 게시물

 

 강점기의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

 1930년대 경복궁과 그 일대        (큰 이미지로..)

 백악산(白岳山)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전경.
백악산은 서울 경복궁 북쪽에 솟아 그 진산(鎭山)을 이루워온 산, 북악산(北岳山) 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일제는 삼각산이라는
명칭을 썼는데 실제의 삼각산은 그 뒤 북한산에 있다. 백악산은 높이 32m이고 기반은 화강암으로 인왕산(仁王山), 낙산(駱山),
남산(南山)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옥상에서 내려다본 근정전과 서편 수정전 넘어 경회루가 보인다. 경복궁 뒤로 혈맥이 끊긴 백악산의 자태가 쓸쓸하다.

총독부 옥상에서 내려다 본 근정전 모습.  그 많던 전각들은 어디가고 사구라꽃(벚꽃) 천지가 되어버린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옥상에서 내려다 본 근정전 서편 수정전, 그리고 수정전 넘어 경회루가 보인다.

이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 청와대 자리는 수목이 울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와대 자리는고려 숙종 때인 1104년에 완공된
남경 '이궁(離宮)'에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궁은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후원(後園)으로 사용됐으나 일제시대에는 총독 관저, 미 군정시기에는 사령관
관사로 외인들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제1공화국)이 '경무대(景武臺)'로 명명하고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무대는 경복궁(景福宮)의 '경'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자를 따온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독재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바람에 윤보선이 2공화국 대통령이 되면서 '청와대'로 개명했다
.

총독부 옥상에서 본 근정문과 행각. 그 많던 전각들은 다 어디가고 총독부 박물관만... 이곳에서 이후에도 박람회가 여러차례 열렸다.
(
총독부박물관은 1995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다시 자선당과 비현각을 복원했다) 

경복궁 내전과 외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그리고 1945년 연합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좌), 8월 9일 나가사키(우)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폭의 버섯구름

원폭 투하 전, 일본에게 마지막으로 항복 권유를 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고, 결국 미국은 먼저 1발을 히로시마에 투하, 3일 후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 투하를 결행했다. 이라하여 히로시마에서 16만 명, 나가사키에서 7만 4천 명의 인명피해를 보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없어야 되겠지만 이로써 자력으로의 해방은 아니지만 36년간의 일제 식민통치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를 통해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광화문 사거리에 나와서 환호하는
서울시민들

좌) 1945. 8. 15. 광복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된 독립투사들과 함께 환호하는 서울시민들 / (우)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조국 해방을 환호하는 인파.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9월 8일 북위 38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때까지

미군정이 통치하게 된다.

미군에 의해 내려지는 조선총독부 광장의 일장기. 1945년 9월 9일

1945년 9월 9일 일본군이 총독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미군이 접수 했다.


하늘에서 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중앙청) 모습. 
동쪽의 광화문 문루가 있는것으로 보아 미군정에 의해 광복직후에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조선총독부 청사 일대 전경. 광복 직후 美군정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항공사진으로 보인다.

어느 때 인지 모르겠으나 겨울철의 컬러사진이다. 총독부건물 뒤로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 경회루 만 있을뿐 황량한 모습이다.

이 사진의 촬영년도 표기는 없으나 크게보기를 통해서 살펴보니 동십자각은 궁장과 별도로 떨어져 있고,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이
보이고 그 북쪽에 옮겨진 문루없는 광화문 모습인점을 고려하면 한국전쟁 직후에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크기 w936 h649)


사진을 보노라니 조선 제1의 법궁이라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로 경복궁 궁장, 근정전 및 근정전을 싸고 있는 행각, 근정전 옆의 수정전,
근정전 뒤의 사정전, 경회루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헐리고 맨 앞에 서양식 총독부건물이 동궁터엔 총독부 미술관(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
 

1950. 9. 29. 유엔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중앙청(총독부청사)

명함크기를 약간 확대한 사진. 흔치않은 컬러사진인데  더 확대하면 이보다 못함


경복궁 동쪽으로 쫓겨온 광화문 안쪽의 모습. 한국전쟁 전으로 추정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해방이 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 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광화문은
불행하게도 폭격을 맞아 소실되었다.


경복궁 동쪽에 옮겨저 남아 있던 광화문은 이 마져도 1950년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석축 부분만 남았다
서울 수복 후의 광화문은 이런 모습이었다. 목조문루 전체가 소실되고 홍예의 석축일부가 파괴 되었다.

한국전쟁시 폭격으로 부서진 경복궁 편전인 만춘전(萬春殿) 1951년 서울 재수복후의 경복궁 모습 중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서울 이야기중 중앙청 모습

 

 ▲ 1960년 경의 소실된 광화문                                                   ▲ 1965년 구멍이 뚫린 광화문 홍예부분 윗쪽 (광화문 상부)

 1966년 경복궁 동쪽의 광화문 - 조선일보 자료

 

 1968년 12월 11일  광화문 준공 현판식 모습.


 

 

 광화문은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복원된다. 하지만 이때의 복원은 2층 누각 부분이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 라는 치
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위치와 방향도 총독부 건물에 중심축이 맞춰져 원래의 위치보다 약간 동북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높이도
원래보다
높게 지어졌다고 했다.
당시 문화계의 인물들이 이 복원에 대해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 당시 가난했던 한국의 경제상황에 신흥
독립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주의에 의한 전통문화에 대한 욕구의 절충점에서 이런 비창조적인 전통의 모방과 합리주의, 권력의
문화인식 부족 등의 결과로
이런 콘크리트 한옥양식을 낳은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역사적 사료에 의한 복원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상층부가 콘크리이트 구조물로 복원되었던 광화문의 모습.

이때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이 건재한데
오랜기간 과거의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많은 사람들이 총독부와 겹쳐진
광화문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곳에는 많은 현대의 사건들과 여러사람의 추억이 묻혀 있다.


권력에 의해 경복궁에 세워졌던 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역시 권력에 의해 철거되고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인해 경복궁 중심축에 있는 부분들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뒤의 산과 경복궁 앞의 중심대로와 연결되는 경관의 축은 회복되었지만
광화문 역시 불완전한 복원이었기 때문에 2007년 완전히 해체하고 원래의 광화문 모습대로
재복원 하게 된다.

 경복궁 복원 및 구,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구,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일단, 헐어 버렸으니 잘 했다고 봐야 되겠지만,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두고 각계의 찬반 논란은 많았지만 최고 권력자인
김영삼 대통령 의지대로 부셔버렸다. 조선을 대표하는 법궁 앞에 총독부 청사가 있었던 것 때문에 보존이라는 명분은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력이 없겠지만, 없에 버린다고 지난 역사의 아픔이 치유 될까...!
 

 독립기념관 뜰에 전시된 총독부 건물 부재.
옳바른 역사 인식과 교훈을 주기위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는 독립기념과 뜰에 전시 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바로 앞은 중앙 돔 랜턴, 기둥 상부와 하부 모습도...

 총독부 건물은 철거되고 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나니 막혔던 체증이 뚫리고 가슴이 트인것 같아 좋아 보이긴 하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축조된 광화문(光化門 '왕의 큰 덕이 온나라를 비춘다' 라는 뜻)은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고 조선후기에
중건 되었으나 또 다시 일제에 의해서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되어 그 원형이 훼손되고 이마저도 6.25 동란의 와중에 화재로 전소

말았다.  그 후 1968년 문화재 복원이란 일환으로복원되기는 했지만 문화재에 대한 몰이해로 철근과 콘크리트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 해체되었다.




광화문 해체 후의 콘크리트 부재
역사박물관 한켠에 역사의 흔적을 쓸쓸하게 보전되어 있는 전 광화문의 잔해들, 조선의 역사와 대한민국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켜보았던 광화문! 왜 문화적 가치가 없는 콘크리이트 덩어리를 굳이 보전해 놓은 것일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본다면

이를 통해 지난 역사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교훈을 남기기 위함이리라...

                                                                               복궐도형  크기 w900  h1320

 광화문은 원래 자리에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목조로 재복원 되었다.
 

  현재의 광화문 모습

모진 시련을 겪었던 광화문은 2007년 새정부가 들어서고 옛 원형으로 복원 했으나 2010년 광복절에 맞춰 완공하기 위해 무리한
공기 단축으로 현판이 갈라지고 목재간의 틈이 벌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노정(路程) 되기도 했다.

2010년 8월15일 현판공개로 광화문은 다시 제자리에 선다. 이로 인해 경복궁의 중심축은 거의 완성이 되었고 앞으로도 경복궁의
복원은 진행될 것이다.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조선건국 이후 조선과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역사적 사건의 중심 무대였으며 100년 이전부터 한국의 모든 도로는 광화문앞에서 시작 되듯이 대한민국의 중심이며 상징이다.
다시 세워진 광화문은 이전에 그랬듯이 오랫동안 다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쌓일 것이다.

 1차복원을 끝낸 현재의경복궁 모습

경복궁 복원 사업 기간 중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시작으로 1991년 부터 시행되어 총독부 박물관( 미술관) 등을 철거하고,
두번에 걸쳐 복원을 진행하여 2030년 완료를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복원 규묘는 91년부터 2010년까지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당시 500여 동의 25% 정도까지 복원됐다.

1차 복원 정비사업의 목표는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를 완비하여 뼈대를 갖추는 것인데 궁의 중심축은 대부분 복원 되었고,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문화재청은 단기 복원사업이 마무리 된 해인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5%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경복궁을 모두 복원한 것으로 가정한 그래픽


 

편집후기 : 이 게시물을 '사진으로 보는 광화문' 이라는 제목으로 경복궁 변천 과정을 올릴까 하다 "경복궁(광화문)복원에 이르기 까지" 로
작성하게 된것입이다. 그리고 네이버에서 편집, 작성한 것을 옮겨온 것이라 참고 문헌도 그쪽 것을 인용한점 이해바라고 이미지의 년도
표기는 출처의
것을 원칙으로
하기도 했지만, 잘 못 캡션이 달려 있는 것들도 상당수...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 나름대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 못 인식된 것은 바로잡기도 했지만 필자는 사학가 가 아니기에 혹시 오류가 있을 경우 양해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충 성~!   - 공용화기 30기 nahasa -

 

 

 
 

 

 

출처 : 육군제1하사관학교총동문회
글쓴이 : 나필섭/7503/화기30/서울동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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