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의 사진들

한가람 2013. 2. 9. 22:12

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광희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 졌으며, 수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때 써 붙였다. 그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북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서울성곽 → 서울 한양도성 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  문화재청  -

 

혜화문(惠化門), 별칭-동소문()


서울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의 하나인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이 폐쇄됨에 따라 창의문(북소문)과 함께  북문의

역활을 분담 했으며 의정부, 양주, 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에 일제의 도시계획과 더불어 문루를 헐렸다. 그리고 석축과 홍예는 1936년 허물었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혜화문이 1994년에 복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복원(원래대로 돌려놓다)의 말뜻으로 볼 때 이는 잘못이다.
혜화문은 위치도 다른 곳에 옮겨 지었으며, 모양도 엇비슷하게만 만들었다.

  △ 혜화문(惠化門, 弘化門, 속칭 동소문) 풍경.

 

  △ 현재의 삼선교(한성대 입구역)방향에서 본 혜화문 모습.


  △ 현재의 삼선교(한성대 입구역)방향에서본 혜화문 모습.


  △ 옛 동소문 풍경(혜화문) 外측

 △ 위와 동일사진. 소등에 길마를 얹고 혜화문을 나서는 사람과 성문 오른편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 영조때 제작되어 걸렸던 혜화문 원래 현판. (우좌쓰기)

  △ 혜화문 外측
 
 

 



  바로위와 같으나 약간 확대한 사진

 

    혜화문 內측 모습은 없고, 外측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다.
 


 △ 1928년에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도로확장과 더불어 문루를 헐렸다. 통행을 하던 홍예는 흙이 수북이 쌓여 있다.
     길다란 장대를 들고 가는이는 소녀일까?...

  △ 일제는 1941년 창경원 - 돈암동 까지의 전차길을 신설하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일제의 토목기술로도 얼마든지 도로선형을 다른곳으로 또는 터널공법을 해서라도 제자리에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있었을 
것이나, 일제는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니 역사가 담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보존 할리 
    만무 였다.


    아래는 1928. 7. 12.자 동아일보는 보수할 재력이 없다는 이유로 동소문과 광희문이 함께 헐리게 된사연이 실려있다.


   △ 혜화문기사

 

  
 
 

   △ 혜화문 기사출처  싸이월드 블로거angayo님  www.cyworld.com-angayo-2878668

  돈이 없어 보수를 못하니 동소, 수구 (혜화문, 광희문)을 헐어 버린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유가 아닐까...

  창의문(자하문)을 헐어 버릴려는 계획은 보존으로.. 광희문(수구문)을 부정문(不淨門)이라고도 불리워 졌고, 부정문을
  검색해보니 더러운 물건이 나가는 문이라고 하는데 망자(亡者)를 더럽다고 표현한 것은 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 1994년 조금 다른 곳에 옮겨 엇비슷하게 다시 지음.  이 모습이 현재의 혜화문이다.

  혜화동에서 삼선교 방향으로 가는길 왼편에.. 원래의 자리는 길이 난곳인데 진정한 의미의 복원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서울성곽 낙산코스 끝 도로변에서 바라본 혜화문.


 

   △ 삼선교에서 혜화동 방향을 가며 바라본 모습. 현재 혜화문 편액의 글이 원래의 반대로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