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의 사진들

한가람 2013. 2. 9. 23:31

서울 한양도성 4대문과 4소문

 

서울의 한양도성은 1396년(태조 5) 축조, 1422년(세종 4) 중수되었는데, 처음에는 석성과 토성이 섞여 있었으나
세종이
중수할 때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곽에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팔대문이라
하였다.
즉, 도성을 축조할 때 정동의 흥인지문(동대문), 정서에 돈의문(서대문), 정남의 숭례문(남대문), 정북의
숙청문(북대문)
등의 사대문을 세우고, 동북의 홍화문(중종 6년 혜화문으로 개명, 동소문), 서남의 소덕문(후에 소 
의문으로 개명,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수구문),
서북의
창의문(자하문) 등의 사소문을 세웠는데 이 문들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  서울 한양도성과 성문
 광희문을 남소문이라고 했으나 그림에서 보듯 원래의 남소문은 지금의
타워호텔 앞 고개마루에 그 터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단지 광희문이 남소문 역활을 했다는 것엔 이의를 달 수 없을거라 본다.


광희문
(光熙門), 수구(水口門) 또는 시구문(屍軀門)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2동에 있으며, 청계천 오간수문, 현 동대문 역사박물관(전 동대문운동장 자리)의 이간수문이
가까워 수구문(水口門)
또는 서소문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으로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것으로,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
1719년(숙종 45)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그후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복원시 홍예석축
(虹霓石築)을
해체 해 남쪽으로 15m 옮기고,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 했다.

 

  남소문터: "서울의 소문으로 세조때 세우다. 예조원년(1469년) 음양설에 따라 철거, 그후 일제시대 주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라고 쓰여 있다.

남소문은 지금의 중구 장충동(奬忠洞)에서 용산구 한남동(漢南洞)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정상에 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세조실록" 에 의하면 이 문을 축조한 연대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1456년(세조 2) 11월 20일에 세조가 종친과
재상들을 거느리고
청학동(靑鶴洞:현 장충동 일대)에 나가서 건립 예정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1496년(예종 1)에 "남소문을 낸 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다"는 말이 나돌아 그해에 문을 철거해버렸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서 1457년 9월에 죽었다

 

따라서 세조가 행차한 1456년에서 세자가 사망한 1457년 사이에 세워졌음이 명백하고, 시기적으로 보아 세조의
현지 행차가
연말이었으므로, 그 이듬해인 1457년에 준공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문을 철거한 이유는 동남쪽에 문을 내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음양가(陰陽家)의 주장을 받아 들
인데
있었으며, 그 뒤 여러 번 이 문을 다시 내야 한다는 진언이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찍은 광희문과 성곽. 1890년 중반
Isabella Bird Bishop(女)잉글랜드 출신의 19세기 여행가이며, 지리학자이자
작가이다. 처음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된 것은
1894년이었고, 3년 동안 조선과 중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였으며,
제정 러시아의 조선인 이민들도 만났.



 
1900년대 초 광희문 밖의 모습. 말마차의 모습에서 길가에 풀을뜯고 있는 말의 모습이 한가롭게 느껴진다.

△ 1900년 광희문의 모습
 


  홍예부분 윗쪽 석축을 보수한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성문과 성곽이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광희문 안쪽 모습.

이 무렵의 기록중에 하나를 함께 올립니다.

고종황제를 강제로 왕위에서 끌어내린 일제는 나약한 순종을 왕으로 내세우고 대한제국의 군대와 사법권을 없애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첨부되고 있던 비밀각서에 의거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조선군
사령관은 조선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게 한 다음,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는데,
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
되었
이므로 상하
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 할 생각아래
관(士官)을 양성
하는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
기를,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 할
것을 통감
(
統監)에게 의뢰하라. 하였다 ]


1907년 7월 31일 밤, 천하의 매국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현재의 국방부 장관)이병무는 밤중에 입궐, 순종
황제를 협박하여 늦은밤 황제 순종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
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겉으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일주일 전에 일본과 맺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비밀각서에 의한 것이었다. 
그나마 명령을 담은 문서(조칙)도 이토 히
로부미와 이완용이 위조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1907년 8월 1일. 서울은 새벽부터 비가 퍼부었다. 오전 10시까지 동대문 밖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비무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군사훈련' 이라고 했지만 실은 '군대해산식' 이 목적이었다. 일제가 꾸민 간계였다. 이어서
서울에서부터 군대 해산을 결행하였다. 일본은 7월 31일 밤, 미리 군대해산의 칙서를 작성해 놓고는 이완용을 시켜
다음과 같은 '조회문'을 이토 히로
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했다.

[ 병제개혁을 위해서 선포할 조칙을 받들어 군대를 해산할 때에 인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아울러 왕명을
위반
하고 폭동
하는 자가 있다면 진압할 것을 각하에게 의뢰하고자 하는 대한국 황제폐하의 칙지를 삼가 받은 바 있으므로
이와 같이 각하에게
조회하는 바이오니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나이다]

 

 
△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                  △ 만일의 무력충돌을 예상해 무장하고 지키고 있는 일본군

훈련원에 모인 대한제국을 향해 군대를 해산한다는 발표가 전해졌고, 일본군은 우리 군대의 군모를 벗기고 계급장을
뜯어낸 뒤 흩어질 것을 강요했다.

이무렵 서대문에 있던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부대원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7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한 봉기는 하루 만에 진압됐지만 이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를
대상으로 펼친 무력 활동의 시작이었다.(7월31일 해산 조칙 발효, 8월1일 해산식)
 


 프랑스 신문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Les Troubles de coree, La grade japonaise
aux prises avee les emeutiers a seoul" 서울을 배경으로 일본군과 한국인의 무력충돌하는 삽화와 함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외국인이 남긴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은 외부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인데, 제국말기의 전쟁을

다룬 기사나 삽화를 남기고 있어 외국인의 눈에도 한국전쟁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으로 비춰졌음을 알 수있다.
대한제국의 멸망기에 관한 역사자료이며, 1907년 태극기 사용례를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이 사진은 1907년 8월 초 군대 해산에 저항해 일본군과 대적했다가 숨진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
   
(시구문) 밖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으로 1907년 9월 7일자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에 실렸던 사진이다.


  1907년 8월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대한제국 군인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버려 가족들이 찾고 있는 모습.


 광희문 외측 모습. 문루 오른쪽 기둥 앞 벽돌이 조금 무너진것을 볼 수있다.
 


 바로 위의 사진보다 문루의 벽돌이 조금 더 훼손된 모습.

 


 △ 1920년대 광희문 성문 바깟쪽 모습. 누각 아래와 오른쪽 성곽 상단부가 많이 허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 위의 것과 같은 구도의 사진. 사람들 모습만 다를뿐...


 △ 광희문 內측. 안쪽의 성곽도 훼손된 것이 보인다.


 △ 192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문루가 철거되고 난 후 1930년대의 광희문


 △ 시장통이 되어버린 광희문. 1953년 6월 한국전쟁이 휴전되기 전 서울 피난민의 삶.


  1959. 3. 13 자 조선일보에 실린 광희문. 풍우로 성루는 허물어 없어지고 성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지금은 문 안팍주변이 시장으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다. 라는 기사


 △ 1962.10.10자 동아일보에 실린 광희문 주변성곽이 도로확장에 따라 30m 철거해체계획 기사.

이 일대는 현재 사창이 밀집해 있는 골치아픈 지역이기도 하다. 이번 계획도로로 인해 광희시장안 2백4십여 가구
와 신당동 관내 1백 3십여가구(대부분이 판자집)가 철거되며, 이와 아울러 비록『 아취』만이 남았지만
5백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광희문과 성벽 30m가 헐려나가게 된다.
그 자리에 폭3십6미터 라는 큰 도로가 끈덕지게 생명을 이어
온 이부근의
빈(貧)과 수를 아무런 미련없이 덮어 버리고 말것이다.

 
 
△ 1963.5.20자 경향신문 광희문 철거계획 기사.


  1965년의 광희문
   
     
    


 △ 1966.8.31자 조선일보에 실린 광희문 관련기사.
 


 △  박대통령의 지시로 광희문 철거 보류된 사실이 게재된 1966.9.5자 매일경제기사



 △ 1971년 시장통이 된 광희문 모습. 
필자도 60초~70년대 중반 까지 광희문의 이런 모습을 봐 왔었다.


 △ 광희문 문루는사라지고 홍예부분만. (자료출처:코리아라이프 1972년 9월호)

 


 △ 광희문 복원공사의 착공소식이 실린 1974.12.4 경향신문기사.
     복원공사가 1974. 12.10 착공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광희문 복원공사중  1975년 1월 12 촬영.


 △ 서울시의 서울성곽 전체복원 계획이 보도된 1975.1.19자 조선일보.

 

 △ 1975년 11월 17일 광희문 복원공사 준공. 성문은 원래의 자리에서 남쪽(좌측)으로 15m 이동 되었다.


 △ 1975년 11월 17일 광희문 복원공사 준공.

 


 △ 1975년 11월 광희문 복원공사 준공후 성곽앞의 구조물은 그대로...


 △ 1975년 11월 광희문 복원공사 준공후 안쪽모습.


 △ 2007년 광희문 모습. 이전 복원당시 성문은 남쪽(좌측)으로 15m이동, 성곽도 일부 헐어버렸다.


 △ 광희문 2009년 모습.


 △ 복원당시 형태의 안내판이 그대로 2010년 모습.


 △ 광희문 外측.


 △ 광희문 內측


  △ 광희문과 성곽. 성문 안내와 성곽 순례 안내판이 새롭게..

   △ 광희문에서 장충동 방향으로 연결된 성곽...


 △ 광희문 주변의 복원된 성곽모습. 성곽의 석재 형태에 따라 축성된 년도가 다르다는...

광희문(光熙門) 또는
구문
()
이야기
 

속칭 '시구문'이라고 하던 광희문 밖에는 젊은 조선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1907년 8월 1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조선군 해산 칙소가 내렸다.  이에 불복한 조선군 2개 대대 병사 1천 2백여
명이 항거, 일본군과 큰 싸움을 벌였는데, 전사한 조선군은 100여명 정도였다.
당시, 이 시체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놓고,
그 가족들로 하여금 찾아가도록 했다.
이 때문에 여러 날 동안 광희문 밖에서는 유족들의 통곡이 하늘을 쩡쩡 울렸다.

서울 도성에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이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장안의 시체들이 대개 소문(小門)들을 빠져
나갔었다. 
즉, 산 사람들의 출입은 어느 문이나 다 가능했으나, 시체들은 대문을 이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울의 사소문인 동소문(혜화문), 서소문(소의문), 남소문(광희문) 등으로 시신들이 나갔다. 그 중에서도

광희문으로 가장 많이 나갔다.

장안에서 처형된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지기도 했는데
조정에서 천주교를 탄압해 그 신자들을 마구 처형했던 때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는 최경환(영세명 프란치스코), 우술임(영세명 수산나), 김임이(영세명 데레사), 이간란(영세명

아가다), 정철? (영세명 카타리나) 등의 시신이 문밖에 버려지기도 했다.

 

왜 광희문으로 시체가 많이 나갔을까? 그것은 한양 서민들의 주거 지역이나 길의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엔 도성 안에는 지금의 종로에 해당하는 길과 퇴계로에 해당하는 남산길, 두 가닥의 큰길이 동서로 나 있었다.

남산길 주변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가족이 죽으면 장례고 뭐고 할 것 없이 그저 시신이라도 빨리 처리해야

하는 형편들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도성 안에선 마땅한 장지가 없어 문 밖의 낮은 산자락을 찾게 되었는데, 그러한

곳으로 떠오른 곳이 광희문 밖이었다.  더구나 광희문으로는 남산길이 잘 이어져 있어 이 길을 통해 신당동쪽으로 많이

나갔다. 이 때문에 광희문 밖으로 장례 행렬이 자주 이어지곤 했는데, 그렇게 이용되는 광희문 근처 길을 사람들은 '황천길'

이라고도 했다. 오죽하면 '수구문(水口門)'이라 하던 광희문을 '시구문(屍門)'이라고도 했는가? 광희문은 분명히 '시구문'

이란 이름의 문이 아니었다. 

그 근처에 청계천의 지류가 빠져 나가는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어 물이 나간다는 뜻의 수구문(水口門) 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 문으로 많은 주검들이 나가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 문을 '수구문'과 발음이 비슷한 '시구문'이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구문" 이란 이곳에서 이간수문을 거쳐 오간수문,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물이 흐르는 곳이 라는데서 유래 되었다.
그 옛날 '시구문'이라고도 했던 문은 '광희문(光熙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광희문은 이 문이 아니었다.
  

원래의 광희문은 죽음길의 문이 된다고 없애 버려

광희문은 원래 남소문(南小門)을 가리키던 것이었다. 지금의 장충동 타워호텔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있던

문이다.
광희문이 세워진 것은 세조 2년(1456)이었다. 그런데, 대궐에서 보면 동남쪽의 이 문이 음양설로 따져 손방(巽方)에 해당,

왕궁의 황천문(黃泉門)이 되어 불길하다고 여겨 예종 원년(1469)에 문을 폐쇄해 버렸다.

그러나, 남쪽에 단 하나 있는 소문(小門)을 아예 없앨 수 는 없어 1719년 이 문 북쪽 지금의 자리인 광희동2가에 새로이
남소문을 짓고 원래의 문에 있던 '광희문' 현판을 옮겨 달았다. 
광희문은 나라의 큰 변란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죽곤 할
때면 더욱 복잡했다. 장안에 전염병이 돌 때도 그랬다. 
광희문을 나오면 대개 근처의 작은 고개를 넘어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거나 신당동 화장터로 갔다. 
1880년대 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장안의 아이들이 많이 앓거나 죽어 갔는데, 장안의 어려운 사람들은 환자를 피막(避幕)
같은 곳에 아무렇게나 방치했다가 숨을 거두기도 전에 이 문 밖에 내다 버리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광희문 밖에는 이미 죽었거나 신음하며 죽어 가는 아이들로 생지옥을 이루었다.

이러한 비참한 모습을 옆에서 몇백 년을 지켜보아 왔던 문이 바로 광희문이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이 문이 원귀(怨鬼)들과
사귀어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의 돌가루라도 취하면 병마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광희문의 돌가루를 치료제로 여겨 몰래 긁어 간 풍습은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무당들 많이 살았던 광희문 밖

'시구문'이라 하던 광희문의 밖에는 장례 치르는 사람들 때문에 무당들이 많이 모여 영업을 했다. 좀 있는 집안에서 시신을
운구하거나 죽은 후에 사십구제 같은 것을 지낼 때 이 문 밖에서 망자(亡者)를 좋은 곳으로 보낸다는 의미에서 무당을 찾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서 마을 이름에까지 무당과 관련한 이름들이 붙게 되었다.

'무당개울'도 그 중의 하나다. 남산 기슭인 약수동에서 발원하여 그 북쪽의 신당동 한가운데를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
가는 이 내(川) 양쪽으로는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

무당개울에선 조선시대엔 해마다 대보름이면 마을의 청년들이 모여 편을 짜서 돌싸움(석전)을 벌이곤 했었다. 이 곳과 함께

돌편쌈으로 유명했던 곳으로는 남대문 밖의 우수재, 종로의 비파정, 동대문 밖 안감내 등이 있었다.  무당개울에는 '무원교
(巫院橋)'와 '수당교(水唐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무원(巫院)'은 '무당집'을 뜻하고, '수당교'는
'무당 다리'의 한자식 표기
이다. '무당' 이라는 말을 꺼려 '무당'의 '무'를 '물(水)'로, '당'은 그대로 다른 한자로 쓴 것이
'수당(水唐)'이다.

 

역시 무당들이 많이 살았던 근처의 고개 이름은 '무당고개'이다. '신당동(新堂洞)'이란 이름도 무당들이 많이 살아 원래는
귀신 신(神)자가 들어간 신당동(神堂洞) 이었다.
옛 지도에도 보면 이 곳이 '신당리(神堂里)'로 나온다.
이 곳 화장터에선 광희문을 통해 나온 시신들이 주로 화장되었다.
지금은 서울 돈암동쪽의 고개를 '아리랑고개'라 하지만 옛날엔 광희문 앞의 고개도 '아리랑고개'라 했다.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아리랑고개 넘어갔다'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바로 이 고개를 넘어감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함을
의미한 것이다.

지금의 무학동 부근인 신당동 236번지에는 조선시대에 전염병 치료의 일을 맡은 기관인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의약으로 병을 치료하는 일 외에 사람들의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 무당들을 시켜 환자를 위안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활인서에 아무 무당이나 다 드나들어 그 폐해가 많다고 알려지면서 나라에서 이들을 다른 한 곳으로
몰아

쫓고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우물과 관련된 땅이름 많아

광희문 안팎 일대는 조선시대엔 한성부 남부(南部) 명철방(明哲坊)의 일부였다.

명철방의 마을로는 근동(斤洞), 어교동(漁橋洞), 쌍림동(雙林洞), 남정동(藍井洞), 남소문동(南小門洞), 석교동(石橋洞),
배동(裵洞), 동산리동(東山里洞), 지례동(知禮洞), 남성저동(南城低洞), 형제동(兄弟洞), 곡정동(谷井洞), 야현동(冶峴洞)
등이
있었다.
이 중의 대부분이 지금의 광희문의 바로 안, 지금의 중구 광희동2가에 있었다.
'석교동'은 '돌다릿골'의 한자식 이름이고,
'배동'은 '배나무 마을'의 뜻인 '뱃골'의 한자식 표기이다. '동산리동'은 '동산말'로
불렸던 곳이고, '지례동'은 지금의 장충
동 1가에서 신당동을 질러 가는 길목에 있어 '지레목골'이라 불려 왔던 곳이다. 
지금의 장충동에 있었던 '남소문동(남소동)'은 원래의 남소문이 있어 '남소문골'이라 불렸던 곳이다.
'도성 남쪽'이라는 뜻의 남성(南城) 밑에는 '남성밑골(남성저동)'이 있었고, 그 근처에는 두 형제가 의좋게 살았다는 마을의
'형젯골(형제동)'과 골짜기 안의 우물 마을인 '골우물골(곡정동)'이 있었다.

지금의 광희동1가와 2가의 어름에는 벌판 사이의 우물이 있었던 '벌우물(볼우물)'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근처 광희동1가 296번지와 오장동 193번지의 경계에는 '어청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가 있는 마을인 '어청다릿
골'은
한자로 '어교(漁橋)'라고 했다. 그 옆의 쪽우물이 있었던 '쪽우물골'은 한자로 '남정동(藍井洞)'이었다.

신당동과 마찬가지로 전에 성동구에 있다가 중구로 들어온 무학동에는 벌 가운데의 마을인 '벌말'과 '동학동(東學洞)'이
있었다.

지금의 광희문 앞에서 남쪽으로 광희문교회 앞을 지나 성동구 금호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길은 예부터 있었던 길이다.

그러나, 옛날에 한양에서 남도로 가는 길손들은 이 길보다는 동쪽으로 지금의 왕십리길을 거쳐 사근동(한양대 방면) 쪽으로
둥글게 휘어져 내려간 길을 주로 이용했다. 그래서, 지금의 뚝섬으로 이어지는 살곶이다리가 중요한 길목이었다.
살곶이다리를 가기 직전, 지금의 덕수상고 앞으로는 '수레재'라고 하는 작은 고개가 있었는데, 옛날 살곶이다리를 건너
서울
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많이 쉬어 가던 곳이다. 수레재는 한자로 '차현(車峴)'이라고 하지만, 이 땅이름은 '수레'와
관계가 있어
붙은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꼭대기'라는 뜻의 '수리'라는 말이 들어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


광희문 밖을 나온 사람들이 남도로 갈 때 많이 이용한 길은 살곶이길이지만, 장례 행렬은 이 길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었다.
그것은 광희문을 나온 운구 행렬이 대개는 언덕이 많은 금호동쪽으로 꺾어 나갔고, 이에 따라 시신들은 대개 그 가까운
어딘
가에 묻히곤 했기 때문이다.


신당동 언덕 일대가 공동묘지였던 것은 이 때문이었는데, 나중에 이 일대가 주택지로 되면서 그 흔적들도 하나하나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광희문은 울음을 많이 삼켜 온 '눈물의 문'이고, 그 곳의 땅은 많은 사람들의 한을 움켜 담은 '한숨의 땅'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민들의 아프고도 자잘한 흔적은 지금은 새 시간의 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많은 혼들을 몰래 달래고 있다.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광희문과 그 일대,
서울 중구의 동쪽 끝자락인 광희문 일대는 조선과 일제를 거친 오백 여 년의 역사에
서 그 어느 곳보다도 깊고도 슬픈 사연을 많이 안고 있는 곳이다.                        - 글 출처:토지공사 사보 원고

우연히 읽어보게 되었는데, 토지공사 글이군요. 그런데 기사에 오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 안에는 묘지를 쓸 수가 없습니다. 태조때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를 정릉동(지금의 정동)에 설치한 적이 있었지만, 아들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도성 내에는 왕릉이라도 쓸 수 없다고 하면서 강제로 지금의 정릉으로 천장을 했습니다. 신덕왕후 강씨가 계모이었으며, 이복 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는 도성 안에는 모든 묘소를 쓸 수가 없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저 역시 님의 말씀대로 한양성 안에는 묘지를 쓸 수 없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토지공사 자료를 살펴 봐도 도성 내에 묘지를 섰다는 글은 없고 시신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소문이며
이 게시물의 제목 광희문에 대한 것을 참고하다 보니 토지공사 자료를 나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시구문이라 불리었던 광희문은 한일신약에 의해 1907년 8월 초 군대 해산에 저항해 일본군과 대적해
싸우다가 숨진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성밖에 버려져 방치되어 있는 시체가 엄청 많았다고 해서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했고 70년대 까지만 해도 그리 불리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