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록의 사진들

한가람 2014. 8. 6. 15:57
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 - 3

 

18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강의 모습인데
주제별이 아닌 년도순으로..


1920년 한강을 도선하여 건너고 있는 경성택시


1925년 이전 한강인도교

일강점기 때의 한강의 나룻배. 일본군들이 타고있다


일제시대 용산의 한강. 자료출처:네이버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浦)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동
작진(津:나루 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 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
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멀리 올라 올
수 있는곳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祖江浦), 이산포
(二山浦), 행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용산과 마포가 규모와 기
능 면에서 월등하였다. <네이버 백과 포구 교역 중에서>
 

1925년 1월 5일 한강 인도교 아래서 열린 조선체육회 주체 제1회 조선빙상대회 전경과
경기 모습. - 조선일보 1925. 1. 6. 자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잠길 위기에 놓인 한강철교.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중간 부분이 유실되어 길이가 짧은 용산 쪽의 다리는 1927년 5월에

착공하여 1929년 9월 18일 개통되었으나, 노량진 방면은 길이가 길어 복구하지 못하고 종전의

다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1934년에 노량진 방면의 다리를 넓이 20m로 보수공사에 착공

하여 19375월에 준공하였다.  <네이버 백과>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철교의 교각 전체가 물에 잠긴 모습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 때 용산일대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8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발생한 네 차례의 큰 홍수를 말하는데, 특히

7월 6∼18일에 걸쳐 많은 비가 내렸으며(서울, 경기 300~500mm 파주 최고 650㎜) 한강 범람으
로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여 기록상 한강 최대홍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
면 전국적으로 사망자는 647명, 재산 피해도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 300
만원으로 집계되었고 한강 최고수위는 인도교양수표(현 한강대교) 기준
11.76m(38.82尺), 최대
유량은
32,000㎥/sec로 기록되어있다.  이 때 뚝섬은 완전히 침수되었고, 한강 인도교가 끊어졌
는가 하면
두 개의 철교도 파손되어 강남북의 교통은 두절 되었다.

1925년(대정 14년) 7월 18일 용산 철도창 구내 침수된 모습
철도창 사진 출처:http://blog.naver.com/jkhan23/150092226695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에 다리가 파괴 되고 물에 잠겨있는 한강 인도교.
남단의 도로가 유실되고 물에 잠겨있고, 이미 강쪽 노들섬쪽의 둑과 철골 트러스가 홍수에 파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노들섬 북단의 교량 역시 파괴되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교량의 피해 모습


마포강변에 홍수로 가옥이 침수된 모습

홍수의 결과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의 반이 물에 잠겨 버린 고양군 망원리 (현재
마포구 망원동) 주민 중 반 가까운 45가구는 인근 합정리로 옮겨 새 집을 짓고 살 수 밖에 없

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이래 망원리 사람들은 양반을 자처하면서 이웃 동리 사들을 깔보아 왔
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라고는 하나 합정리 사람들 눈에 새
로 이사온 사람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한 마을에 이웃으로 살면서도 서로 소 닭 보듯 외면하던 사람들은 물난리 피해가
얼추 수습되자 바로 싸움을 시작했다. 1927년 망원리에서 이사온 주민들은 상놈을 구장 (區長·오
늘 날의 동장)으로 모시고 살 수 없다는 이유로 고양군청에 구장을 바꿔달라며 집단 민원을 제기
고, 합정리 원주민들은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며 맞섰다.
천재지변은 인명과 재산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회적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기록은 깨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스포츠뿐 아니라 자연재해에도 해당한다. 자은 인간의 오
을 용서하지 않으니 재해에 대비하는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진인사대천
명(盡人事待天命)’이어야
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글 출처 :중앙일보 [그때 오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23681



을축년 대홍수 때의 용산일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파괴된 한강철교 모습 (사진제공:국토해양부)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철로다리 상판이 싹뚝 잘려나간 한강철교에는 선로만 엿가락처럼
휘어져 내려앉은 모습.


1925년 7월 18일 한강철교 피해 모습
 

1925년 7월 18일 을축년 홍수로 파괴된 한강철교
              한강 철교는 미국인 제임스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면서 착공했으나 완공은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이 대륙공략의 발판으로 건설을 서두른 불편한 역사의 전주곡이긴 하나 한편으론
              인력거, 소달구지, 나룻배 같은 교통수단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수송함으로써
              대도시로서의 급속한 발돋음을 시작했고, 또 한강변의 적막한 모래벌판이었던 용산지역은 노동
              (波市)를 이루었다.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수위가 12m불어나 용산일대가 침수되고 한
              강철교 축대가 유실 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아 교각 일부를 새로 보수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노량
              진쪽에서터 10경간까지 만을 강교로 가설하고 나머지 용산쪽은 축제였으나 을축년 대홍수로 교
              각을 세워 가설한 것이다.


한강인도교 긴급 복구공사
             한강 인도교 긴급복구공사.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8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발생한 네 차례의
             큰 홍수를 말하는데 특히, 7월16일∼18일에 걸쳐 많은 비가 내렸으며(서울, 경기 300~500mm, 파
             주 최고 650mm) 강 범람으로 많은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여 기록상 한강 최대홍수로 알려져 있다.
 

1927년 11월 29일 동아일보 낙성된 한강철교
을축년 홍수에 혼이난 당국은 작년부터 한강철교의 연장과 높이를 올리는 공사에 급급히 착수
중이던 바 이즈음에 대
체 준공이 되어 12월부터 복선운전을 행하게 될 터이라는데 교의 연
길이는 삼천 육백 오십 사 척(尺,피트)으로 압록강 철교보다 오백 오십 칠척
(尺)이 길다하며,
이로서 조
선에 제일 길은 동시에 경성교외의 한 위관을 이루고 있다더라

 

1929년 한강인도교
1925년 을축년(釔丑年) 대홍수 때 중간 둑이 유실되자 1927년 5월 5백 29m의 대교 가설공
사를 벌여​ 1929년 9월 18일 개통하였다. 이때 가설된 신교(노들섬 북쪽다리)는 너비 20m로
전차 궤도까지 부설 되었는데 노량진 쪽의 구교는 예전 너비의6.5m로 좁아 전차궤도 부설의
가망이 없게되자 1936년 노량진 쪽까지 전차궤도를 부설하도록 지금의 아치형 신 인도교를
건설하게 된다.

 


1929년 을축년 대홍수로 새로 완공된 한강 인도교 (전차궤도가 보이는 노들섬 북단쪽 다리)
이무렵부터 노들섬까지 노면 전차가 운행되었다.
 

1929년 9월 한강 인도교. (오른쪽에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건물이 보인다)

1920~30년대 명수대(明水臺) -새로운 주택단지


1916년 공사에 착공하여 그 해 활주로 공사와 격납고 공사를 마치고 10월에 개장하였다.

1929년경 조선박람회 도회.  (자료출처-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
그림을 보면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경성역, 용산역, 서빙고역, 남산 자락의 조선신궁, 남산 왜성
대의 통감부건물(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로 사용하다 경복궁의 신축 총독부 건물로 옮기기 전
까지 사용), 총독관저(현 용산의 미8군 기지), 여의 비행장 등이 그려저 있다.


1930년경의 여의도 경성비행


1929년 한강의 얼음을 채빙하는 모습


1930년 한강 난지도 부근에서 얼음 채빙하는 모습

1930년대 한강의 얼음. 결빙초기 상류에서 떠내려온 얼음들이 밀려 쌓여있는 모습

1930년경의 한강철교

1930년경 한강철교
 

1930년경의 한강철교

 


한강 인도교 건설현장. 왼편에 초기의 인도교 모습이 보인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1934년 8월 새 한강인도교 건설에 착수, 1936년 10월 완공됐다. 이 신교 건설 때 노량진 쪽까지
전차가 통행할 수 있게 궤도를
 부설하도록 너비 20m 길이 1천 37m 아치형(지금의 모양) 다리가
세워 졌다.



1936년경 한강 인도교를 새로 건설할 당시의 모습.
다리 남단 노량진쪽에서 본 모습인데 다리 왼쪽에 구 인도교가 보인다.


1936년경의 한강 인도교 모습.
노들섬(중지도)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오른쪽에 철거되지 않은 구인도교가 보인다. 노량진의
본동

쪽 한강교는 종전대로 사용하다가 1934년 3개년 계획으로 공사비 251만 8,000원을 들여서 현재의
타이드아치(tied arch) 형식의 다리로 다시 1937년에 준공하였는데, 이 때 한국다리 기술자가 감독
으로 참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1950년 6·25동란으로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되었던 것
이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되어 서울의 명물이었던 한강대교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것이다. [네이버 백과 漢江大橋]

 
1937년 새로 완공된 한강인도교
 
용산구 이촌동에서 동작구 본동을 잇는 교량으로 서울에서 남쪽 방면의 노량진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1916년 3월에 공사를 착수 1917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이 교량은
한강철교를 준공하고 남은 자재를 이용하여 가설했으므로 소교였고, 폭이 좁아 중앙
차도 4m, 좌
우측 보도는 각 1m에 불과하였다.  그 후 1925년에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자
459m의 대교 가설 공사를 벌여 1927년 5월 착공 1929년 9월 18일 개통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많
은 인명이 살상되기도 했던 역사적 다리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1월 복구공사에 착
수하여 1958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이 다리는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 됨에 따라 새
로운 다리가 필요하게 되자, 1979년 1월 4일 종전의 폭을 20m에서 40m로 늘리는 확장공사에 착
수, 1981년 12월 준공하면서 이름도 한강대교로 바꾸었다. <글: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37년의 광진교(​廣津橋).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 착공해 1936년 10월에 준공된 다리로 길이1,037m, 너비9.4m(2차선)
이다. 서울의 도로교로는 두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광나루다리(광진교)라고 불렀다. 광진교가 위
치하고 있는 광나루는, 옛날부터 충주
를 거쳐 동래로, 원주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지는 요충에 있
는 유명한 나루터였고 1920년대는 발동기선으로 화물차나 버스같은 자동차를 건너게 하던 나룻 
터였다. 그러나 한번 홍수가 나면 수일간에 걸쳐 교통이 두절되어 불편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
고,1930년대를 전후해서 교통량이 격증하여 하루에 강을 건너는 자동차, 우마차, 손수레 등이 수
백대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도로교통의 원활한 수송을 기하고자 다리를 건설하게 되었다.

일강점기인 1936년 준공이후 한국전쟁으로 파괴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8일
밤 북한군 남하를막기 위해 광진교 트러스 구간을 한국군 공병에의해
폭파되었다. 그 후 1953년

미군에 의해 복구되었으나 트러스 부분을 모두 없에고 그 트러스가 있던 부분에는 교각을 더 설

치하여 라멘 르바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 다리는 1976년 천호대교가 준공되기 전까지 서울시 도심과 10만 인구를 초과하는 천호지구
를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그러나 낡아서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1986년부터 1.5 t 이하
형차량만 이용하다가 구조물의 노후도가 심하여 철거되고 새로운 광진교가 놓여지게 되었다.
 

한강에서 물을 기르는 모습.
예전엔 식수로 사용할 정도로 수질이 좋아서 도시나 지방이나
한강유역에 사는 마을 사람들
강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다. 위의 모습은 물지게를 지고 물에 들어가 물초롱에 바로
담지만, 겨울철엔 음얼을 깨고 바가지로 떠서 물초롱에 담았다.
 

1930년대 선유도(봉)과 양화 나룻터 -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선유봉은 양평동4가 한강 변에 위치하였던 봉우리로 산의 형국이 고양이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일명 고양이산・굉이산으로도 불렀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1962년 양화대교를 건설할 때 깎아 허물어뜨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 옛 모습을 볼 수 없다.

 


1930년대로 추정되는 선유봉 사진


일 강점기 때의 한강의 겨울

일 강점기 때의 여의도 비행장 전경
 

 

1938년 한강진 옛 청사


1940년대 선유도와 백사장. -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마포나루 옛 모습 도기시장
 
1945년 마포나루 풍경.

노들나루 언덕의 월파정(月波亭). 월파정은 8.15 광복 초기에 수도경찰청을 지냈고
국회의원,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별장
 
1940년대 중반 한강철교 모습. (용산 서부이촌동쪽)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 미국 해군이 항공 촬영한 서울 여의도 일대의 모습.

 

1945년 9월 9일 미군이 항공촬영한 하늘에서 내려다 본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의 모습
 ​당시 서울의 관문으로 기능했던 비행장으로 공항 건물과 격납고 등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건물들과 뒤로 한강과 한강인도교 모습이 보인다.

 

1945년 한강철교. 44년에 놓인 또 다른 모양의 철교가 아랫쪽에 보인다. 멀리 북한산 모습이

 
한강철교의 상부구조는 모두 트러스 형식이지만 1900년에 준공된 노량진 쪽 10경간은 단순 와랜
(Warren)트러스(7 panels), 용산 쪽 잔여구간은 강판형교로 구성되었고 1912년에 준공
된 상류의
동쪽 노선은 중앙 노선과 마찬가지로 노량진 쪽 10경간은 단순 와렌 트러스, 나머
지는 판형교로

구성되어 있고 1944년에 준공된 하류 서쪽 노선은 3경간 연속 더블 와렌 트러스 3틀과 단순 트러
스 1경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50개)
서울 한강과 주변의  모습들 - 4로 계속

 

조선말기 및 일제 시대를 포함한 한국 근대 향토 역사에 저는 아주 큰 흥미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귀한 사진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