黎明의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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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일기

2020. 10. 24.

새벽 6시

집을 나선다

여느 때 같으면 잠자리에 뭉개고 누워있거나 TV로 뉴스를 보고 있을 시간이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봉급쟁이의 생활습관은 대부분 그렇다

은퇴 후에도 생활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명의 시간에 이렇게 집을 떠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다

 

예전에 읽었던 스님의 글귀가 또 나를 붙잡는다

 

스님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를 이렇게 급히 가시느냐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스님에게 대답했다

밭에 일하러 갑니다.  조카 결혼식에 갑니다.  손자 보러 갑니다.  공부하러 학교에 갑니다...... 모두 그렇고 그런 연유로 바쁘게 길을 가야 하는 사정은 있었다

스님은 하늘을 바라보며 헛헛하게 웃었다

바보들, 결국은 죽으러 가는 길인데 무엇이 이렇게 바쁜가?

 

會者定離와 같이 만남도 이별의 시작이라는 관념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젊은 나에게는 염세적이라 반감이 컸다

그 반감은 죽는 날 까지는 사는 것이라는 나의 사생관이 되었다

 

윤달이 들어 반박자씩 계절이 늦은 올해지만 10월 초순으로 접어드니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간절기에는 외출할 때마다 옷 챙겨 입기가 쉽지 않다

현관문을 열고 먼저 나간 마누라가 얇은 옷이 걱정되어 춥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따라 나갔다

결혼해서 40여 년을 함께 살아보니 이제 마누라와는 말이 필요 없다

대하소설은 몇 장을 안 읽어도 줄거리가 바뀌지 않듯 눈빛과 손짓만 봐도 상대의 속마음을 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건강검진은 의무사항이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일반인은 건강관리공단에서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한다

해마다 하는 건강검진이지만 과정은 괴롭고 결과표를 받아보는 것은 무섭다

피를 뽑고, 대소변을 받아 제출하고, 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 모두 온통 공포다

무병장수를 위해서 아픈 곳을 미리 찾아내어 치료하자는 국책사업이니 피할 수도 없다

전에는 과정만 괴로웠지 결과는 무섭지 않았다

특별함도 주의사항도 없었기 때문이다

은퇴를 하고 이순을 넘기자 건강검진 결과표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혈액성분과 사진판독에서 빨간 글씨가 보이고 재검사를 받기도 했다

금년에는 건강검진 병원에서 면담을 요청해왔다

가슴 CT 사진에 폐암으로 의심되는 결절이 있으니 상급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으라며 의사가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속된 말로 암 진단은 사형선고다

의술이 발전하고 신약을 개발해도 암은 여전히 불치병이다

걸어서 병원에 들어갔다가 기어서 나오는 것이 부지기수인 난치병이다

확진은 아니지만 암이라는 예고에도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주변 지인들의 투병 소식을 듣고 보면서 학습효과가 있었는지 나에게도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의학 영상으로만 이상소견이 있을 뿐이지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

유행가 가사처럼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온 것이라면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하라고 하고 난감한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결과는 내 잘못이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담배를 피웠다

먼지와 냄새가 많이 나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직업을 가졌다

형제가 둘이나 폐암으로 죽은 가족력이 있다

게을러서 운동은 숨쉬기만 했다

건강검진 문진에서 드러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나는 오래전부터 폐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폐암 고위험군임을 알면서도 예방을 위해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서울의 상급 병원은 몸이 아픈 환자의 입장에서는 최후의 선택지다

급한 마음에 대전의 대학병원에서 재검진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검진병원에서는 절망적인 중증으로 봤지만 대학병원에서는 수술치료가 가능한 초기 암으로 예상했다

작아서 조직검사도 할 수 없는 완두콩만 한 결절이 오른쪽 폐의 하엽에 붙어 있다고 했다

흉강경 수술로 그 결절을 떼어내고 검사를 해봐야 무슨 병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서울의 상급 병원은 본인의 의지 보다 가족들의 성화에 등 떠밀려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은 누구도 암이라고 확진은 하지 않았다

설령 암이라고 해도 수술치료가 가능한 초기 암이라 희망은 있다고 했다

수술로 치료가 가능하다는 대학병원의 판단에 나는 서울의 상급 병원으로 가자는 가족들의 권유를 따랐다

 

아들이 알려준 서울 상급 병원 가는 길은 쉬웠다

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가면 대전역이다

대전역에서 SRT를 타고 1시간을 가면 종점인 수서역이다

수서역에서 병원까지는 셔틀버스를 타고 간다

우리 집에서 프로야구를 보러 야구장에 가는 길보다 쉽고 빠르다

아픈 것만 빼면 참 좋은 세상이다

새벽에 대전을 떠나서, 서울에서 병원 진료를 보고,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새벽에 집을 나와 찾아가는 병원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긴다

부르는 날짜에 찾아가 피를 뽑고, 사진을 찍고, 수술대에도 누울 것이다

더 갈 곳도 없다

의사의 손이 내 생명줄이다

생명줄을 잡고 병원 가는 길 모퉁이에서 불쑥 스님이 나타났다

어디든 따라다니며 무시로 나를 붙잡는 스님이다

동티처럼 달라붙은 스님의 책이 아픈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이른 새벽에 어디를 이렇게 바쁘게 가느냐고 스님이 또 묻는다

 

黎明의 시간에 餘命을 求하러 갑니다

열 번도 넘게 한 같은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