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峨嵋山人 2006. 3. 18. 03:50
국민과 함께 하는 문화유산 e-야기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난중일기’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정조가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를 만들도록 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든 편찬자가 난중일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사후에 자신의 일기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충남 아산시 소재 현충사의 유물전시관에 이순신 장군 친필일기가 전시되고 있다.

‘난중일기’를 통해 본 이순신 장군

이순신의 일기는 초서인지라 한문 전문가가 아니면 읽어내기가 어렵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난중일기초’는 당시 한학자들이 이순신의 초서일기를 해독하고 간추려 책자로 펴낸 것이다. 이 또한 한문이다. 시중에 나온 이순신 일기 한글번역본 대부분은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하거나 노산 이은상의 한글번역본을 따랐기 때문에 제대로 한글로 번역된 이순신일기를 읽을 수 없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친필일기의 상당한 부분이 누락되거나 추가되었다.
임금의 명을 받든 신하들은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면서 왜 누락하거나 추가하였을까? 임금의 눈치를 본 것일까? 아니면, 편찬자 임의로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은 삭제하기도 하고 추가하기도 한 걸까?
국보 제76호(이충무공 난중일기부 서간첩 임진장초)로 일괄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이순신 친필 일기 7권 205매에 없는 기록이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에는 일부 있는 것으로 보아 덕수 이씨 종가에서 대대로 보관 중 친필일기 일부가 분실되었다고도 추정할 수 있다. 서지학자, 한문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후과정을 사실대로 바로잡아 후손들에게 넘겨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1998년 이순신 장군의 400주기에 박혜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런 사실을 알릴 목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며 펴낸 책이 『이순신의 일기』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1597년 9월 15일 부하들에게 훈시한 유명한 ‘必死則生 必生則死’ 구절을 항간에서 즉자를 卽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국가기록유산의 원문텍스트에 따르면 則이 맞다. 이순신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불멸의 정신을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으로 남겼다. 1597년 겨우 사형을 면하고 4월 1일 옥에서 나온 첫 날에 쓴 일기에는 이순신의 면모가 한껏 드러나 있다.

1957년 4월 1일 난중일기

초 1일 맑음. 옥문을 나오게 되었다.
남대문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  과 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 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하였다.
지사知事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備邊郞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영공令公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判府事 정탁鄭琢, 판서判書 심희수沈禧壽, 판성贊成 김명원金命元, 참판參判 이정형李廷馨, 대사헌大司憲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同知 곽영郭嶸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발췌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해서 땀이 몸을 적셨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을 읽으며 오로지 공감할뿐이다.

그리고 이은상의 난중일기 한글번역본과 다른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다가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특히 주목한 것은 ‘1596년 9월 21일 저물 무렵 무장에 이르러 여진과 잤다.’는 부분이다.
가장 최근 간행된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노승석 옮김)에 의하면 여진이 계집종의 이름이라고 주가 붙었다. 아마도 여진은 관기가 아닌가 싶다.
임진왜란 중 도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전라도내 각 진영을 순시하고 있는 장군이라도 조선시대 풍속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이순신은 얼마나 정직한가!
그게 성웅 이순신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은상은 한글로 번역하면서 삭제한 걸까?

청향淸香이 감도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

현충사를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450년 전 아산고을 방화산 기슭에 대략 50호 가량의 농촌 마을이 있었다. 이순신은 서울서 태어나 소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외가인 아산 백암리 마을로 옮겨 성장한 가난한 청년이었다. 이곳에서 거의 10여 년간 청년 이순신은 선비로 수양하며 오로지 무예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장인의 지도아래 병법공부며 말 타기며 활쏘기를 하다가 가끔 멀리 광덕산을 바라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현충사 경내에서 광덕산을 바라보노라면 청정하고 굳센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청년 이순신이 수양하며 소일했던 1560~1570년대는 그 기상이 더 강했을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은 1576년 12월, 32세에 초급장교로 발령받아 함경도 최일선으로 떠난다. 이후 노량진에서 순국하기까지 공직자로서 일관된 생활자세는 아산의 방화산 기슭에서 청년시절 부단히 수련한 근기根氣에 바탕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닌지 싶다.

이순신은 괴멸된 나라에서 7년이라는 장기에 걸쳐 온갖 악조건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여 나라를 구하였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를 덮을 해군 제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고 백의종군의 신세가 되어도 그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씀이에 도가 있었던 것이다.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청향淸香이 감도는 인간 이순신은 후손들이 어려울 때 힘을 얻도록 불후의 명문을 남겼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 이순신이기에 심금을 울리는 글이다.
허영일 / 문화재청 행정사무관
등록일 : 2006.03.03 0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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峨嵋山人 2006. 2. 9. 21:38
(고뉴스=김성덕 기자)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쓴 작가 김완섭 씨가 8일 고뉴스와 전화인터뷰를 갖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김 씨는 본지가 지난해 3월16일 보도한 ‘친일파 김완섭 “독도 일본에 돌려줘라” 망언’이라는 기사에 ‘악플’(악의적 댓글)을 단 네티즌들을 고소하기로 하고, 최근 해당 네티즌들에게 메일 통지문을 발송했다.

당시 본지 뉴스가 제공된 포털사이트 네이버에는 7천개가 넘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달렸고, 고뉴스 자체 사이트에도 3만5천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는 등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김 씨는 네이버 뉴스에 달린 댓글 7천여개 가운데 절반이 넘는 4천여개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고소대상자를 계속해서 선별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씨의 법무담당 비서인 이호연 씨는 “다음주 초 1차 고소 대상자의 서류를 검찰에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욕 많이 한다”

-오래된 기사를 왜 지금 문제 삼나?
“작년 3월 기사다. 아직 1년도 안됐다. 또 고소는 댓글을 단 시점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인지한 시점이다”

-고소를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나도 욕을 많이 한다. 이새끼, 저새끼 한다. 나도 인터넷을 하는 사람으로 옛날 PC통신 시절부터 표현을 자유롭게 하자는 주의였다. 또 변호사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검찰이 네티즌들의 댓글까지 처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많았었다. 그러나 최근에 임수경 사건에서 검찰은 악플을 단 네티즌들을 처벌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문제가 되는 댓글은 몇 개 정도인가?
“네이버에 달린 댓글 7천개 중 4천개 이상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4천명 다 고소할 것”

-4천명을 다 고소할건가?
“그렇다. 나는 단기적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나누어서 장기적으로 계속 고소를 할 계획이다”

-악플로 피해를 입었나?
“딱히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일상화된 두려움이 있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도 욕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돼 버렸다. 이게 문제다”

-본인도 욕을 많이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그래서 나도 이런저런 송사에 휘말려 있다. 그런데 ‘왜 나만 당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인지 사법적 판단을 받아보고 싶다”

“독도는 일본땅, 당장 돌려줘야”

-독도를 일본에 주라는 주장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나?
“말이 안 된다. 그 때는 독도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물론 책을 좀 팔아 볼까하는 홍보효과도 노리긴 했다. 그러나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다”

-지금도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일본한테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원래 일본 땅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 땅이라니?
“일제시대 일본 땅 아니었나. 대만도 조선도 일본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협정에서 한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했다. 제주도, 울릉도, 거제도는 부속도서가 맞다. 그러나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아니다. 대륙붕도 나눠져 있다. 당시 미군지도를 봐도 독도는 일본 땅이다. 그러고 나서 이승만 정권이 독도를 강제 점령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정부가 억지를 쓰고 있다”

“나, 친일파 맞다”

-본인에 대해 친일파라고 얘기하는 것도 명예훼손인가?
“나는 친일파다. 친일파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다. 그러나 나를 ‘매국노’라거나 나의 발언을 ‘망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예훼손이자 모욕이다. 지금도 일본이 한 발언에 대해 ‘망언’이라는 표현을 공공연히 쓰지 않나. 망언이 뭔가? 개소리, 헛소리란 얘기다. 토론을 거부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용어들은 문제가 많다”

-고소를 하기보다는 경고정도로 그치는 것이 어떤가?
“그렇게 해서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나중에 당사자들과 합의할 생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