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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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만: 인터뷰-객체지향 존재론과 인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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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11.

 

 

 

객체지향 존재론과 인류세

Object-Oriented ontology and the Antropocene

 

――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 리에스베스 쿠트(Liesbeth Koot) & 메노 그루트벨트(Menno Grootveld)

 

LK: 오늘 강연에서 당신은 객체지향 존재론과 인류세에 관해 말했습니다. 강연이 끝날 무렵에 당신은 이 두 주제와 예술의 관계에 관해 약간 언급했습니다. 그것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GH: 예. 제 경우에 예술은 실재적 객체와 그것의 감각적 성질들 사이의 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술어를 사용하면, 예술 객체 자체는 '물러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 그것의 조각들의 견지에서도 그것의 효과의 견지에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 인지가 사물을 그런 두 가지 뿌리 가운데 하나로 환원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무언가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말하거나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 말합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제시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종류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예술은 대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 형식이 아닙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할 때 당신은 누군가에게 작품의 핵심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관여하고 있는 일종의 계획적인 다다이즘적 기획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또한 당신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서 예술 작품의 효과에 관해서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작품 때문에 제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이것들은 그 작품이 미친 사회정치적 충격입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것이 스페인 내전에 관한 대중적 견해에 미친 영향과 동일합니다.' 그 대신에, 회화 속에는 우리를 계속해서 자극하는, 장악할 수 없거나 형언할 수 없는 심미적인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예술 작품이 더 훌륭할수록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계속해서 귀환하고, 그것에 관한 더 많은 논평을 작성하며,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하도록 더욱 더 자극합니다.

 

객체지향 접근방식은 예술 작품의 비관계적 자율성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우리가 1940년대 말에서 대부분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그것에 등을 돌리게 된 1960년대 어느 시점까지 현대 예술과 동반했던 그런 종류의 낡은 형식주의적 비평을 요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대신에 마이클 프라이드(Michael Fried)에 관해 말하면서 그의 입장과 제 자신의 입장 사이의 차이에 초점을 맞춥시다.

 

무엇보다도, 제가 그렇듯이, 프라이드는 형식주의적 비평의 기둥들 가운데 하나를 고수합니다. 예술 작품은 그것의 성분들과 환경(그것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으로부터 자율적인 것입니다. 어떤 장르에서든 간에 예술 작품의 심미적 특질은, 그것들이 역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기호학적인 것이든, 정신분석학적인 것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산문적 설명들의 어떤 집합으로도 의역될 수 없습니다. 1967년에 발표된 "예술과 객체성(Art and Objecthood)"이라는 프라이드의 대표적 에세이에서 그는 최소주의적 예술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즉자적(literal)인 동시에 연극적(theatrical)이라는 점이라고 말하며, 그리고 그는 이것들을 최소주의의 두 가지 상이한 양태라기보다 대충 동일한 양태로 간주합니다. 프라이드의 경우에 최소주의적 작품은 즉자적인데, 그것에 심미적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한 개의 덩어리, 피라미드 또는 막대일 뿐입니다. 어떤 깊은 의미도 없는 우리 행로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간주하듯이, 최소주의적 예술은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예술로서 작동하는 유일한 방법은 관찰자로서의 우리에게 호소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로부터 어떤 종류의 반작용을 얻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즉자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이 정반대의 대립물인 듯 보이고, 그래서 이것 때문에 (제가 그렇듯이) 미학의 연극적 특질을 거부하기보다는 고수하면서 예술의 즉자성에 반대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 입장이며, 그리고 연극적인 것을 거부한 프라이드의 입장과 꽤 노골적으로 거리를 둔 그린버그의 한 인터뷰로 판단컨대,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그린버그의 입장이었기도 한 듯 보입니다. 어쨌든 저는, 예술 객체는 즉자적이지 않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파시즘의 야만적 행위에 반대하는 절절한 진술이다'(또는 심지어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무엇이든 각자가 그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와 같은 어떤 미온적인 평범한 상대주의적 언설)와 같은 언설처럼 어떤 의역 가능한 내용으로 철저히 의역될 수는 없는 어떤 깊이가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물론 이런 진술들이 확실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게르니카는 그저 정치적인 진술이나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피카소는 그저 프랑코, 히틀러 그리고 루프트바페를 비난하는 평범한 산문을 작성하여 신문 사설로 발표했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어떤 예술에서도 즉자주의에 대한 형식주의적 혐오를 공유합니다. 또한 저는 철학에서 나타나는 모든 형식의 즉자주의에 반대하며, 공교롭게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즉자주의의 주요한 반대자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다른 주제입니다.

 

그런데 예술에서의 즉자주의를 공격하는 것과 더불어 프라이드는 연극성도 공격하는데, 연극성이란 심미적 특징이 우리 인간에 반응에 달려 있는 예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연극성을 거부할 때 수반되는 의미들 가운데 하나는, 예술 작품은 인간에게 아무 호소력이 없더라도 예술 작품이어야 하고, 그래서 당연히 모든 인간이 절멸되더라도 여전히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찮은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트리스탕 가르시아(Tristan Garcia)는 <<형상과 객체(Form and Object)>>라는 책에서 이 입장을 옹호합니다. 사실상 제 저작의 일부 독자들은, 제가 예술 작품은 어떤 수의 인간 관객들과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예술 작품과 결코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 예술이 대다수 예술이라고 제가 생각함에 틀림없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 입장이 아닙니다. 제 경우에, 염소가 존재하지 않을 떄 소금이 소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 예술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닙니다. 저는 이 비유를 진지하게 사용합니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술 작품과 인간으로 이르어진 '화학적 화합물'과 같습니다. 소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트륨과 염소 둘 다 필요하며,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독립적으로도 존재합니다. '염소 없는 나트륨'이나 '나트륨 없는 염소'는 쉽게 요구할 수 있지만, '염소 없는 소금"이나 '나트륨 없는 소금'을 요구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런 성분 원소들이 소금으로 결합되기에 앞서 각기 존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술 객체와 인간은 예술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이 성분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빠진다면 어떤 예술 작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더라도 흔히 예술 작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랑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두 살 먹은 아이의 사례를 생각합시다. 또는 동일한 행동을 하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코요테를 생각합시다. 그들은 벽에 걸려 있는 채색된 표면을 의식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도 코요테도 예술 작품을 대면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는 심각한 사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대단히 산란해진 상태로, 즉 정신적으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채 화랑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 교양을 갖춘 한 성인을 상상합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즉자적인 것과 연극적인 것 사이에 균열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연극적인 비즉자적 예술을 선호하는데, 이것은 인간들이 한 성분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제가 인류세를 예술과 관련지어 말했습니다. 한 가지 의문에서 시작합시다. '인류세 시대는 인간중심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 그 대답은 '그렇다'인 듯 보이는데, 이런 개연적인 새로운 지질 시대룰 초래하는 데 인간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 인류세는 명백히 인간들과 독립적인데, 우리는 기후 변화가 없어지기를 바랄 수 없거나 그것의 메커니즘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후와 관련하여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관한 다양한 암시적 모형들이 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인류세'라는 술어가 기후 연구의 권역을 훌쩍 너머 유용한 것이라고 깨닫는데, 인간의 응시가 그것들 속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채로 인간들을 성분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객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세 객체들은 인간들이 관객과 구성 요소 둘 다의 이중 역할을 수행하는 것들입니다. 두 분은 네덜란드인이고, 그래서 두 분은 사실상 아무도 결코 완전히 알 수는 없는 네덜란드 문화가 실제로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채로 네덜란드를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시민으로서 두 분은 현재 구성되어 있는 대로의 네덜란드가 갖고 있는 가능성과 결점들에 큰 관심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약하면, 네덜란드에 대한 두 분의 참여는 확실히 연극적인 것이지만(두 분의 주의와 관심이 이 대상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결코 즉자적인 것은 아닙니다(네덜란드는 두 분 또는 어떤 다른 사람도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넘어섭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어떤 객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객체의 성분이 될 때마다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가 창조하지 않은 자연과는 달리 우리가 만들었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와 언어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가 <<새로운 과학>>에서 개진한 주장에 맞섭니다. 우리가 자연적 쟁점보다 문화적 쟁점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명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제작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그저 아이를 살펴봅시다. 아이는 인간 부모가 있지만, 그 부모는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가 무엇이 될지 전혀 알지 못하고, 결코 그 아이의 성격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언가의 구성 요소라는 것이 그것에 대한 특권을 지닌 관찰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제 저작은 다양한 상이한 분야들에서 수용되었으며, 지금까지 철학이 아닌 다른 분야들에서 더 공정하게 수용되었습니다. 객체지향 철학이 분과 학문들을 가로질러 잘 전파되는 개연적인 이유는 모든 분야가 어떤 식으로 객체와 관계 사이의 차이를 다룰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영향력이 있는 대부분의 대륙 철학자들―데리다, 지젝, 라투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철학의 중심부보다 주변부에서 더 애호받았는데, 처음에는 교수들보다 학생들이 더 좋아했습니다. 철학의 중심부는 천천히 움직이는데, 그것은 항상 일정이 백 년 뒤집니다. 이것은 특히 미합중국에서 참인 듯 보이는데, 각각 상이한 이유 때문이지만 분석적 전통과 대륙적 전통 둘 다 제도적으로 얼마간 경직되어 있습니다. 다른 분과 학문들과의 접촉이 개인적으로 제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대단히 자극적입니다. 각 분야는 어떤 주제들은 승인하지만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자기학대적인 자기 부인에 몰입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건축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이 보지 않았을 어떤 가능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도울 수 있는 영역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제가 너무 신중한 반면에 건축가들은 주사위를 굴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방대한 영역들도 존재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다른 한 분과 학문과의 대화에 착수하여 그들이 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속도로 달리고자 노력할 때 그것은 여러분의 뇌를 재구성합니다. 철학자들은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논변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분야들은 이런 사치를 누리지 못하는데, 그것들이 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철학자들은 긴 시간 동안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장기적인, 미묘한, 느린 개념적 변화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철학은 가장 긴급하지 않은 분과 학문입니다. 예를 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상대론적 해석은 아인슈타인에 이르러서야 과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데 대략 200년이 걸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의 사변적 경계를 상대성 이론, 양자 이론, 또는 CERN 가속기에서 얻은 최근 발견들에 한정하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됩니다. 과학의 뒤에서 느릿느릿 나아가면서 과학이 이미 행한 것을 설명하는 대신에 철학자들은 2215년의 아인슈타인이 거주하기를 바랄 개념적 운동장을 발명해야 합니다.

 

[...]

 

'셀라스주의적'이라는 형용사는 고인이 된 미합중국 철학자 윌프레드 셀라스(Wilfred Sellars)의 가리키는데, 그는 로버트 브랜덤(Robert Brandom), 폴 처칠랜드(Paul Churchland) 그리고 존 맥도웰(John McDowell) 같은 중요한 분석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최근에 셀라스는 앞에서 언급한 유형의 반(反)객체지향적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가속주의의 경우에, 그것은 몇 년 전에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와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가 발표한 선언에서 상술된 정치적 신조를 가리키는데, 그것의 핵심은 자본주의를 파괴할 최선의 방법은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우 빠르게 가속시켜서 스스로 파괴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셀라스(확실히)와 가속주의(두고 봅시다) 둘 다 나름의 장점을 갖추고 있을 것이지만, 제게는 둘 다 특별히 흥미롭지 않습니다. 셀라스에 대한 제 비판의 짧은 판본은, 그는 모든 것을 현시적 이미지(매일 태양이 뜨는 듯 보인다) 또는 과학적 이미지(우리는 태양이 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가 자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로 요약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분과 동기를 가리키기 위해 다양한 낱말을 사용하지만, 많은 셀라스주의자들은 이것을 언젠가 우리의 심리적 삶에 대한 더 나은 서술―놀랍게도, 자연과학에서 비롯되는 서술―로 대체될 '통속 심리학' 또는 현시적 이미지로 일축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을 '우수적'이거나 '우울한' 사람으로 부를 것이지만, 아마도 과학이 그것은 뇌의 화학적 불균형의 문제일 뿐이라고 가르쳐줄 것입니다. 폴 처칠랜드는 천문학이 황도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 달 그리고 행성들에 관해 알아낸 것의 견지에서 밤 하늘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실제로 체득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멋진 일례를 제시합니다. 현시적 이미지를 과학적 이미지로 대체함으로써 우리는 계몽의 작업을 계속해야 하고, 그래서 철학은 주로 소박한 현시적 이미지들을 파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비록 그것들을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셀라스주의적 집단이 제가 지난 백여 년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고 간주하는 현상학에 대해 끊임없이 경멸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마음에 현시되는 것의 실재성 또는 비실재성에 관한 모든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시작하자고 요청하는 반면에, 새로운 셀라스주의자들은 철학이 일각수나 뽀빠이에 관해 말할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상당히 분노하게 됩니다. '즉시, 그들의 목을 쳐라!' 사실상 저는 이런 종류의 철학을 일각수 도살장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현시적 이미지와 과학적 이미지 사이의 구별짓기와 관련된 진짜 문제는 둘 다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듯이, 과학은 우리에게 다른 한 종류의 이미지를 제공할 뿐이고, 철학은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를 구별짓기 위한 인식론적 기준을 확립하는 것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고백하면, 당신은 실재론을 버리고 그것을 이미지들이 도대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라는 은밀한 관념론적 입장으로 대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미지들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가 존재합니다. 객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들은 A.S. 에딩튼(Eddington)의 유명한 두 개의 탁자, 과학적 탁자와 현시적 탁자와 결부되어 있는 반면에, 저는 이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제3의 탁자가 실재적 탁자라고 책에서 주장했습니다.

 

가속주의의 경우에, 그것의 옹호자들은 젊고 이제 막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들이 결국 어디로 가는지 두고 봅시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신조에 대한 제 관심의 결여는 주로 현대 정치에 대한 저자들의 과도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은 철학자라기보다 활동가처럼 글을 적고 있으며,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두 직업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망각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샤르트르(Sartre)나 푸코(Foucault)처럼 한 사람이 둘 다를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두 개의 매우 다른 모자입니다. 그 저자들은 문제들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기후' 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 보이며, 또한 그들은 '격변'과 '소멸'의 견지에서 말합니다. 이런 그림에서 빠져 있는 철학적 요소는 소크라테스적 무지에 대한 어떤 감각입니다. 작년에 출판된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Political)>>라는 책에서 제가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은 정치란 주로 진리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권력과 관련된 것도 아니라, 불확실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속주의자들은 정치적 진리는 기본적으로 알려져 있고 어떤 적절히 급진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이행하는 방법에 관해 전략화할 시기라고 가정함으로써 근대적 좌파의 기본적으로 관념론적인 노선을 지속합니다. 좌파의 일반적인 가정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이상적인 정치적 질서를 이행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어떤 부패했거나, 탐욕스럽거나, 무지하거나, 소외되었거나 또는 사악한 이익 집단들이 존재하고, 그래서 시간을 질질 끄는, 무익한, 쓸데없는 사변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의미가 있는 위기 순간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것은 여전히 철학자가 아니라 활동가의 태도인데, 철학자는 좌파가 태어나고 양육된 철학적 관념론의 근대 시대보다 훨씬 더 긴 범위의 시간을 다룹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가 실제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갈등과 관련되어 있을 때, 좌파는 정치를 주로 정의의 이행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오독합니다. 인간들은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 정말로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그저 계급 투쟁도 아니고 어떤 종류의 권력 투쟁도 아닙니다(부분적으로는 그럴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과학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합리론은 존재론적 신조로서 죽었기보다 훨씬 더 정치적 신조로서 죽었습니다. 정치는 주로 진리와 정의에 관한 것(루소, 마르크스)도 아니고, 주로 갈등과 승리에 관한 것(홉스와 슈미트)도 아닙니다. 가속주의자들이 무엇을 마련하는지 좀 더 지켜봅시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들은 대체로 개종자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을 뿐이지, 아직 단단한 좌파가 아닌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제시할 어떤 반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오늘날 지성적 삶에서 왼쪽으로 작용하는 막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저는 단단한 좌파가 아닙니다. 철학자들은 시대 정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며, 철학자들은 그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대처와 레이건 이래로 서양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시대 정신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지식인들 사이의 시대 정신은 무언가 상당히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더 큰 위험입니다.

 

[...] 브뤼노 라투르의 정치 이론에 관해 조금 더 말해 봅시다. 그의 이론은 결코 묵시론적이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의 저작들을 처음 통독했을 때 가시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투르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당신은 친숙한 좌우 스펙트럼에서 그를 어디에 위치시킵니까? 좌파로부터 라투르는 부르주아 계급의 신자유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것이지만, 그들은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릅니다. 저는 실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라투르를 사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정치적 견해들이 때때로 놀랍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를 때때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프랑스의 중도적 사민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라투르를 좌파 또는 우파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지향들이 이른바 자연 상태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루소가 그렇듯이,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불평등을 부자연스럽고 정의에 어긋난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래서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가능하다면 사회적으로 전복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마키아벨리, 홉스 또는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악한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질서를 최우선시할 것이고, 갈등을 삶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간주할 것이며, 평등주의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어떤 시도보다도 신중한 안정을 선호할 것이다. 라투르에게 이런 도식을 부과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라투르는 결코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게다가 그는 인간들을 정치권의 일부로만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 그가 영장류 학자 셜리 스트럼(Shirley Strum)과 함께 수행한 비비 원숭이에 관한 연구에서 라투르의 독창적인 정치적 사유의 탄생을 좇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서술했듯이, 비비 원숭이와 관련된 문제는 그들이 사회적이라는 점입니다. 비비 원숭이들은 누가 서열이 더 높은지 파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비비 원숭이는 항상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내가 위계에서 밀려 났는가? 누군가가 내 짝을 강탈하고 있는가? 최근에 누가 최상의 음식을 먹고 있는가?' 비비 원숭이들은 그들이 직면하는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대체로 이것에 대해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깨어나고, 당신은 자기 직업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당신은 자기 배우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당신은 자기 은행 계좌, 직책, 이름, 여권 번호, 시민권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 위기 시기를 제외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그래서 우리는 자기 지위를 매일 협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투르의 흥미로운 착상은 생기 없는 객체들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위한 안정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반지, 여권, 은행 계좌, 우편 주소, 사회보장번호, 운전 면허증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를 저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기 없는 객체들입니다. 우리가 그저 들판에서 함께 서 있는 일단의 벌거벗은 사람들이라면, 어떤 종류의 위계 또는 심지어 어떤 종류의 정체성도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같은 사람을 다시 인식할 수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특히 그럴 것인데, 언어도 또 하나의 중요한 생기 없는 객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라투르는 자연 상태에 관한 좌파 또는 우파 이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고 간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라투르는 좌/우 스펙트럼과 아무 관계도 없는 반면에, 그는 제가 진리 대 권력이라는 더 중요한 근대 정치적 이원론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많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진리 정치인이거나 아니면 권력 정치인입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둘 다의 혼합물이지만 말입니다. 좌파적 종류(루소, 마르크스)와 우파적 종류(레오 스트라우스) 둘 다로 나타나는 진리 정치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미 정치적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관념이다. 저는 정치적 진리가 평등주의라고 알고 있다고 말해 봅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평등하지만, 현재 우리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잘못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착취하고 있음에 틀림없거나, 또는 어떤 특권을 지닌 사회적 계급이 우리을 억압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라투르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는 그것이 정치적 토론을 단절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정치적 토론을 이기기 위해 과학을 도입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지구 온난화와 관련된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후 논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아무도 모든 사실을 실제로 알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합의가 진전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실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파의 진리 정치도 있는데, 그것은 유럽보다 미합중국에서 더 일반적입니다. 물론, 널리 조롱받는 저자이지만 영향력이 매우 큰 아인 랜드(Ayn Land)가 있는데, 그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정치적 진리라고 상당히 확신했습니다. 아마도 주류의 지식인들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인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인데, 레오 스트라우스는 히틀러의 독일에서 탈출하여 시카고 대학에서 개업하였고,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미합중국의 보수적 사상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 깨닫게 될 것은 그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기본적으로 상황을 바로잡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저는 이것을 완전한 오독리라고 간주하지만 말입니다―은 인간 유형들의 영구적인 위계가 존재한다고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어떤 평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역사 시대에는 현명한 사람들과 바보들의 대충 같은 혼합물이 존재합니다. 역사주의는 틀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든, 우리가 어떤 기술을 개발하든 간에 중요하지 않은데, 어떤 인간 유형들의 고유한 가치의 견지에서 지속 가능한 서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가장 상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철학자들보다 대중의 수가 엄청나게 많고, 그래서 대중은 철학자들을 쉽게 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를 떠올리면 됩니다.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은 이것이 진짜 위험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관심은 대단히 많은 허망한 바보들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철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 교훈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참된 위험을 도시로부터 은폐하고, 그것의 애국적이고 종교적인 제의에 동참하며, 암호화된 비의적 방식으로 그들의 가장 어려운 진리들을 작성해야 하는 것인 듯 보입니다. 이것은 지성사에 대한 그들의 관계도 관장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각주와 의도적으로 터무니없는 논증들에서 저자의 '진짜 견해들'을 탐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데카르트의 초상을 꺼내들고 대충 이렇게 말한 스트라우스주의자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주장했지만, 그냥 그의 얼굴을 살펴 봅시다. 그는 명백히 무신론자이고, 그는 대단히 엉큼한 듯 보입니다'. 개별적 사례들에서 이것은 강력한 기법일 수 있는데, 권위주의적 역사 시대 동안, 그리고 아마도 현재까지도, 암호화된 글쓰기에 대한 많은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의견보다 더 훌륭한 지식, 지혜를 갖추고 있는 어떤 권위 있는 선생들이 존재한다고 실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파적 판본의 진리 정치이며,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영웅이라는 것이 기묘한데, 소크라테스는 정치 또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리를 알고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권력 정치는 어떤 진리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입니다. 대충 서술하자면, 누구든지 이기는 자가 무엇이 진리인지 결정합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 논쟁의 이 측면이 애초에 라투르의 고향입니다. 그는 의기양양한 홉스주의자, 심지어 무모한 홉스주의자로 시작합니다. 라투르는 항상 홉스에 이질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풍경에 생기 없는 객체들을 더하지만 말입니다. 슈미트도 라투르의 수수께끼의 한 조각인데, 특히 나중에 그렇습니다. 나치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슈미트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에 대한 반대 때문에 오늘날 좌파에서도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슈미트는 헤겔적 의미에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를 정치에서 생명과 신체를 위태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저 물질적 이득을 허용하는 정치적 안정성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의 입장으로 규정합니다. 정치에 관한 표면적으로는 딱딱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목적은 자연 상태에서 발견되는 편재하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때때로 자유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홉스는 국가가 폭력뿐 아니라 진리 자체에 대한 독점권도 갖기를 바라는데, 어떤 종교, 어떤 과학도 국가를 초월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슈미트는 이것을 완전한 인간의 삶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본질을 위한 투쟁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주권자가 적과의 실존적 투쟁을 천명하는 유명한 '예외 상태'에서 가장 생생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슈미트가 자유주의자들이 항상 행한다고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행위에서 근절될 필요가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사악한 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확실히 이것은 미합중국 외교 정책의 경우에 사실입니다. 미합중국인들은 누군가를 그저 패배시킬 필요가 있는 적으로 간주하느라고 고생하며, 그리고 일반적으로 적을 근절될 필요가 있는 도덕적 악으로 서술합니다. 홉스처럼 정치권에서 폭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슈미트는 폭력을 회복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좌파는 이것을 좋아하는데, 그들은 자유주의에 의해 정말로 억압당하거나 무시당하고 있는 계급 적대가 대단히 많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좌파에도 어떤 종류의 '진리'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그런 유형의 권력 정치인들이 존재합니다. 스스로를 진리 또는 현실에 대한 어떤 소박한 믿음도 넘어선 사람으로 간주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선호하는 집단들이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도록 투쟁하는 많은 탈근대적 이론가들이 떠오릅니다.

 

청년 라투르는 가차없는 권력 정치인입니다. 그는 '나는 생기 없는 객체들의 마키아벨리이다' 또는 '홉스가 옳다'라는 정신으로 많은 상이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일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에서 라투르는 갑자기 자신의 곡조를 바꿉니다. 그는 보일과 홉스 사이의 갈등에 대한 스티븐 섀핀과 사이먼 섀퍼의 논의에 관한 이야기로 그 책을 시작합니다. 물론 보일은 근대 초의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고, 대단한 진리 추구자입니다. 보일은 펌프를 사용하여 진공을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된 예증 가능한 진리를 확인하는 가치 있는 목격자들과 함께 자신의 실험을 설정합니다. 그 다음에 홉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더 높은 진리에 대한 호소와 그로 인한 내전의 개시를 피하기 위해 국가가 종교를 독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홉스는 과학이 초월적 지식에 직접 호소함으로써 국가와 충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모든 것에 대한 최종 권위일 필요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자연 상태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일이라는 이 자식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심지어 홉스는 보일을 잉글랜드 정부에 신고합니다. 홉스는 보일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주기 위해 실험을 수행하고, 그런 다음에 과학이 국가보다 더 높은 진리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섀핀과 섀퍼는 보일보다 홉스가 더 옳았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무엇이 좋은 과학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사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과학과 자연 둘 다를 능가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라투르에게 전환점인데, 홉스가 옳았다는 의견에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5년 이상 동안 명시적인 홉스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에 라투르는 홉스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는 특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과학이 진리에 직접 접근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진리에 직접 접근하지 못합니다. 과학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라투르가 폴리스는 순전히 내재적이지도 않고, 결코 자기충족적이지도 않다고 깨닫게 되는 핵심적인 지점입니다. 우리가 계속 주시해야 하는 외부, 폴리스가 아직 인식하지 못한 외부가 존재해야 합니다. <<자연의 정치>>(1999)에서 이것은 두 가지 기본 집단, 즉 과학자와 도덕주의자들의 과업이 됩니다. 과학자의 일은 정치권이 아직 고려하지 않은 생기 없는 객체들을 탐지하는 것입니다. 기후 변화가 그것에 대한 매우 좋은 일례일 것입니다. 나머지 한 집단은 도덕주의자들입니다. 초기의 라투르는 도덕주의자들이 억압당하고 패배하는 모든 사람 문제로 푸념할 뿐이기 때문에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했으며, 그리고 초기 라투르는 정의를 뒷받침할 힘을 갖지 못한 채 정의롭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이기고자 분투하는 것이 당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연의 정치>>에서 라투르는 갑자기 도덕주의자들에 반하게 되는데, 그들이 여전히 편입되지 않은 폴리스의 외부를 탐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투르의 정치적 궤적의 다음 단계는 누르트예 마레스(Noortje Marres)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마레스의 박사 학위 논문이 라투르의 정치 철학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억이 맞다면, 마레스의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쟁점이 없다면 공중도 없다(No Issue, No Public)>>이었고, 200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마레스는 [...] 미합중국에서 학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일반 대중들은 알지 못하는 리프먼-듀이(Lippmann-Dewey) 논쟁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합니다. 명백히 존 듀이는 가장 중요한 미합중국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육 분야에서의 국제적인 영향력으로 유명합니다. 반면에 월터 리프먼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요한 저널리스트였지만 아무튼 잊혀졌습니다. 당대에 그는 널리 친숙한 저자였으며, 미합중국 민주주의에 관한 몇 가지 냉소적인 글을 적었습니다. 미합중국이 정치적으로 자술하는 이야기는, 시민들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현명하게 투표할 수 있도록 탁월한 공공 교육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물론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정책의 미묘한 점들에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선동가들의 조작과 근시안적인 이기심에 의거하여 투표하는 무지하고 무식한 잉여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미합중국 대중에 의해 꽤 많은 어리석은 결정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리프먼은 미합중국이 기술관료들에 의해 지배받을 수 밖에 없다는 약간 냉소적인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상황을 이끌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단서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있는 척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질적으로 더 낙관적인 듀이는 이것을 읽고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정말로 자극적인 책이지만, 리프먼은 틀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너무 높은 가로대를 설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쟁점에 관해 심층적인 교양을 결코 갖출 수가 없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이다. 리프먼조차도 모든 쟁점을 숙지할 시간이 없으며, 그리고 그는 생계를 위해 정치를 다룬다'. 그 대신에, 듀이는 정치적 쟁점들이 각 경우에 독자적인 공중을 생성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일곱 가지 정치적 쟁점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저는 국가의료보험에는 관심을 가질 것이지만, 동성애 결혼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논쟁에는 관여하지만 저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관심을 끄는 쟁점들에 관해서 정통해지는 데 수고를 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듀이와 마레스가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라투르는 이것을 '객체지향 정치'라고 부릅니다. 공중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객체가 존재하며, 그리고 공중에 대해서 그 객체는 결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논쟁들이 존재합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타협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서로 권력 투쟁만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주듯이, 인간들은 결코 진리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것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라투르가 지향하고 있는 듯 보이는 지점인데, 즉 그는 홉스에 맞서서 이런 종류의 존재론적으로 실재론적인 정치를 지향하며, 정치를 침범하는 외부가 있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집단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환영받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쟁점에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 년 전에 가이아에 관한 기포드 강연에서 그랬듯이, 라투르가 인류세라는 주제를 제기할 때 그는 다시 한 번 전환하는 듯 보입니다. 여기서 라투르는 자신의 옛 권력 정치 노선으로 복귀하는데, 이번에는 홉스적 형식이 아니라 슈미트적 형식의 노선을 취합니다. 이것은 라투르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말할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기후 변화 회의주의자들과 관련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우리는 그들을 납득시킬 수 없지만, 우리가 옳다는 것은 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행성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기후 모델링은 경사면 아래로 공을 굴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과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있었듯이 그것을 전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라투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슈미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회의주의자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적입니다. 증거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견해를 바꾸라고 설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데 진절머리가 납니다. 그들을 물리칠 때입니다.' 라투르는 폭력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굴복시키자. 그들은 적이다'.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라투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사악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그래서 그들은 그저 굴복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슈미트주의적 의미에서 전쟁을 선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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