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매듭: 상호작용주의적 존재론을 위해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5. 6. 17.

 

매듭: 상호작용주의적 존재론을 위해

Knots: For an Interactivist ontology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밤 늦게 꽃이 달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피어나기 시작한다. 거슬리는 형광 불빛, 자연적 햇빛, 촛불 아래에서 또는 어두운 방에서 바라보는 것에 따라서 유리 머그잔이 상이한 푸른 색조들 사이에서 변화하여 전면적으로 시커매진다. 우리 몸이 대단한 더위에는 부풀고 혹독한 추위에는 움츠러든다. 한 사람의 헬멧이 금이 가고,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우주 공간에서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 소리도 방출되지 않는데, 그들의 성대가 일으킨 음파를 운반할 공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존재자들은 함께 존재하고, 생태적이며, 상호작용적이다. 우리가 플라톤의 동굴, 즉 공통 감각과 일상적 언어의 세계 속 수인들인 것처럼 시작하자. 동굴에서 객체, 사물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특성들로 이루어진 이산적인 개별적 존재자들로 간주한다. 바위가 특별히 흥미롭지는 않은데, 최소한 지질학자나 건축가 외에는 누구에게나 그렇다. 그것은 회색이고, 모양이 불규칙하며, 그저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이 작용받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작용을 받은 다음에 그것은 움직일 것이지만 뉴턴주의적 형식으로 움직인다. 무언가 다른 것이 그것을 때리고 그것은 날게 된다. 이런 세계에서 바위는 아무 생기도 없다고 수인은 말한다. 살아 있는 것들과는 달리, 무언가 다른 것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다면 바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객체"라는 술어로 의미하는 것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기 없는 덩어리.

 

그런데 동굴 벽과 일상적 언어는 존재론, 즉 존재자들의 존재에 관한 의문들에 대한 지침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객체를 어떤 실체에 내재하는 특성 또는 성질들의 집합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실체는 개별적인 것이고, 실체는 존재자인데, 그것에 관해서 다른 것들이 언급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회색이 바위의 한 특성 또는 성질이라는 의미에서 바위의 "회색"을 말할 수 있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실체에 속하는 그런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본질적인 그런 특성 또는 성질들이 존재하고, 우연적인 그런 특성들이 존재한다. 본질적 특성들은 어떤 존재자를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만드는 특성들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은 삼각형이 되도록 세 변을 갖는 특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세 변 가운데 한 변을 제거하면 삼각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연적 특성들은 사물에서 제거되더라도 그 사물이 여전히 그런 유형의 사물로 남을 수 있게 되는 특성들이다. 삼각형이 녹색이라는 사실은 우연적인 것이다. 내가 삼각형을 적색으로 채색하더라도, 그것은 세 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삼각형이다. 우리가 존재자, 개별적인 것 또는 실체를 그것의 개별적 성질들에 의거하여 다룰 때에는 어떤 다른 존재자도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존재자를 그것의 성질과 특성들―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구별지으려고 노력하면서―에 의거하여 생각하는 대신에, 존재자를 활동, 행위 그리고 역능들로 간주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것이 무엇인지 묻지 마라. 그것은 성질 또는 특성들의 목록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어떤 존재자가 무엇을 행하는지 물어라. 사실상, 특성들을 논의할 때, 어떤 실체, 사물 또는 개별적 존재자가 갖고 있는 성질들을 그저 나열하는 것으로 멈추지 마라. 그 대신에 성질을 실체가 저지른 하나의 사건, 해프닝, 행위로 취급하라. 여기서 우리는 바위가 회색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위가 회색을 나타낸다고 말할 것이다. 바위의 회색성은 동사 또는 활동의 결과일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세계 속 실체 또는 존재자들에 대한 이상한 어법인데, 그렇게 할 좋은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지역 선술집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는 두 명의 철학자를 상상할 수 있다. 바텐더가 그들이 앉은 자리의 아름다운 목재를 훼손하지 않도록 그들의 유리잔들을 석판 받침 접시 위에 놓았다. 자신의 사유에서 떠나지 않는 극명한 이원적 대립자들의 결과로서 아무튼 항상 핵심을 놓치는 듯 보이는 플라톤에게 그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디오티마가 자기 주장을 피력하면서 탁자에 기댄다. 디오티마가 자기 판본의 변증법을 설명하려고 다시 시도할 때, 그는 전에 밝은 회색이었던 받침 접시가 이제 자기 몸이 드리운 그늘 때문에 어두운 회색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철학적 토론이 벌어진다. 석판의 색깔이 변해 버렸는가, 아니면 실제로 색깔이 가구 위에 시트를 깔아서 그것을 먼지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가려져 있었거나 은폐되어 있었던 밝은 회색인가?

 

석판의 색깔이 가려져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과 석판의 색깔이 변해 버렸다는 주장 사이에서 우리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존재론 또는 실재에 관한 이론을 갖게 된다. 그 석판이 실제로 밝은 회색이라고 말한다면, 그 색깔이 그 석판의 내재적 특성이라고, 즉 그 색깔이 그 석판의 가장 깊은 존재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 석판은 아무것도 행하고 있지 않다. 그것의 실재적 본성이 가려져 있었거나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석판의 색깔이 변해 버렸다고 말한다면, 성질 또는 특성이 존재자가 저지른 활동 또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성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가 된다. 그 석판은 실제로 밝은 회색인 동시에 어두운 회색이다. 또는, 더 정확히 서술하면, 그 석판은 밝은 회색이었으며, 그리고 지금은 어두운 회색이다. 동일성을 진리의 표식으로 간주하는, 엄청난 동일성 애호가인 플라톤에게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디오피마는 색깔이 실제로 변해 버렸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플라톤이 묻는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석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생물체의 경우에서처럼 생명 활동 또는 화학적 반응의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어난 일은 그 석판이 디오티마의 그림자로 덮인 것뿐이다. 그것은 그 객체의 참된 색깔의 은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세계를 형상들의 이상적 세계와 물질의 환영적 세계로 이분화하기를 거부하는, 물질적 세계, 이 세계의 애호가인 디오티마는 미소짓는다. 디오티마의 경우에는 물질과 외양들의 세계가 실재적 세계, 존재, 현존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존재자들로서 그것에 작용을 가하고 그것으로부터 작용을 받으며, 그리고 우리 살은 이 세계의 살과 얽혀 있다. 다시 한 번 가련한 플라톤은 동일성에 대한 강박―그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는 우주를 경시하게 만드는 슬픈 강박―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동일성의 원리 A = A와 무모순성의 원리 ~(A & ~A)가 모든 추리의 기초이고 존재는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작업을 수행한 플라톤은  '장미는 붉다'와 같은 명제들이 기본적으로 부조리하다고 인식하는데, 얼마 후에 장미가 시들어서 갈색이 되고, 그래서 동일성과 무모순성의 원리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장미가 붉다라는 진술은 어느 때에는 참이지만 어느 때에는 거짓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는 참일 수가 없고, 실재적 세계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는데, 그것이 모순적이고 이성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아서 항상 동일하고, 그래서 결코 모순으로 특징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것만이 참일 수 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과학을 광범위하게 공부한 디오티마는 달리 생각한다. 변해 버린 것은 받침 접시가 세계 속 다른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들이라고 디오티마는 지적한다. 디오티마의 몸이 받침 접시 위에 그림자를 드리울 때 그 받침 접시가 상호작용하는 빛의 파장들이 변한다. 색깔은 받침 접시 속에 존재하는 특성이 아니라, 석판의 원자적 구조와 빛의 파장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을 통해서 발생하는 특성이다. 빛의 파장들이 바뀌면 색깔이 바뀌게 된다. 빛의 파장들을 처음 상태로 복귀시키면 색깔은 다시 변하여 이전의 색조로 되돌아간다. 받침 접시가 밝은 회색이거나 아니면 어두운 회색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과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받침 접시는 밝은 회색이기도 하고 어두운 회색이기도 하다.

 

그런 것이 상호작용주의적 존재론의 기본 테제이다. 사유의 지향에 있어서 심대하게 생태적인 상호작용주의는 존재자들의 현실화된 상태―카렌 바라드(Karen Barad)가 "현상"으로 부르는 것 그리고 내가 "국소적 표현"으로 부르는 것―들을 사이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국소적 표현, 특성, 상태는 한 존재자와 다른 존재자들의 장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어떤 존재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별개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장, 존재자들의 생태를 향해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존재자의 색깔은 존재자 속에서 일어나지만 존재자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자기 외의 존재자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받침 접시의 어두운 회색은 디오티마의 몸과 빛 파장들의 변화를 가리키고 인용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상파 화가들은 건초 더미와 수련 잎을 연작으로 그렸다. 그들은 변화하는 생태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항상 변화하는 사건들, 항상 변화하는 해프닝들로서의 이런 존재자들의 본성을 포착하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존재자들은 서로 얽혀 있다는 것, 존재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음으로써 서로를 내재화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확실히 석판 받침 접시의 견고한 특성들은 색깔 같은 특성들이 아니다. 로크의 술어를 사용하면, 색깔은 받침 접시 자체의 특징이 결코 아닌 "이차 성질"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상황은 받침 접시의 견고성 같은 특성들과 두드러지게 다르지 않다. 확실히, 받침 접시의 견고성은 그것의 색깔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지만, 그런 견고성도 인용적인 것으로서 더 넓은 생태를 가리킨다.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면, 받침 접시는 취성을 갖게 되어 쉽게 금이 가고 갈라진다. 온도와 압력이 급격히 올라가면, 석판은 용융되어 액체가 된다. 행성 지구의 압력과 온도 조건이 꽤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석판의 견고성은 그것의 색깔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더 믿을 만하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석판의 안정성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활동, 상호작용 또는 사건이다. 석판의 안정성이라는 지속적인 본성은 행성과 석판의 힘들 사이에 진행 중인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이런 안정성과 지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실체 또는 존재자를 특성들로 해석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생태적 조건이 두드러지게 변할 때 존재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사물 자체의 특성들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물질의 얼개 속에 내장되어 있는 일종의 선험적 환영,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는 유물론적인 선험적 환영이 존재하게 된다. 행성적 조건 덕분에 생태적 장은 흔히 다소간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꽤 지속적인 사건으로서의 성질들을 생성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존재자의 지속적인 성질들을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내재적 특성들로 간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생태적 장이 변화하면, 객체의 특성들도 변화할 것이다. 특성은 존재자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힘들의 결과이다. 환경은 그 속에 거주하는 존재자들에 대해 초월적인, 생기 없는 용기이다라고 결코 가정하지 마라. 환경은 내재적인 것으로서 그 속에 거주하는 존재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자들이 항상 움직이고 생성되고 있는 한, 환경도 항상 변화하는 기계적 생태이다. 객체는 그것의 성질들이 아니라, 그것의 힘, 그것의 역능, 그것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의해 규정된다.

 

존재자 또는 실체는 그것의 행위와 상호작용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기계로 불릴 만하다. 항성은 기계이다. 행성은 기계이다. 바위는 기계이다. 개, 사람, 도시, 미생물 그리고 제도는 기계이다. 모든 존재자들이 속하는 기계의 영역은 컴퓨터나 자동차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상 인간들이 제작해낸 기계들은 복잡성과 발명성에 있어서, 예를 들면, 문어의 형태로 자연이 창조한 것들에 비해 미약하다. 분명히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기술적이고 이례적인 방식으로 "기계"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술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술어을 사용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개념이다. "기계"라는 술어의 장점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이 작동하는 방식, 사물이 행하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술어 덕분에 우리는 특성이 아니라 역능과 활동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우선 일단의 특성도 일단의 용도도 나열할 것이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사물이 무엇을 행하는지 물어야 한다. 기계는 흐름들을 활용하고 그것들을 변환하여 출력을 생산한다. 무엇보다도 받침 접시는 빛의 흐름들을 활용하여 색깔을 생산한다. 의자는 어떤 종류의 기계인가? 우리는 의자의 용도를 논의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의자가 행하는 것에 대한 의문은 기묘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그런 의문이 아무리 기묘한 듯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우선, 의자는 중력의 흐름들, 우주의 힘들을 활용하며, 자체의 등과 다리들을 통해 그것들을 교란한다. 그런데 또한 의자는 우리 육체들의 흐름을 활용하여 육체라는 기계의 현실태, 즉 그것의 상태와 그것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한다. 몇몇 의자들은 이완 상태를 고무하여 잠을 부르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호작용적으로 작용한다. 여러분은 독서할 의향으로 속을 두툼하게 채운 의자에 앉는데, 여러분이 알게 되는 그 다음 일은 자신이 코를 골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와 교회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같은 의자들은 불편함을 일으키도록 설계된 듯 보인다. 여기서는 의자가 하나의 기계로서 학습과 영적인 교화에 적절한 주의집중의 상태들을 산출하도록 작용한다. 이런 의자들은 이완을 사절함으로써 주의집중을 부르는 기계들이다. 다른 의자들은 글쓰기 같은 활동들을 사실상 할 수 없도록 작용한다.

 

기계에 흐름에 작용하는 세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첫째, 기계는 흐름을 활용하여 자체 내에서 새로운 상태, 성질 또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다. 철을 함유하고 있는 바위는 산소와 물의 흐름들을 활용하여 녹슨 상태라는 성질을 나타낸다. 우리 몸의 피부는 햇빛의 흐름을 활용하여 햇볕에 탄 빛깔을 나타낸다. 인지적으로 우리는 텍스트를 활용하여 새로운 정동과 행위를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샤르트르의 <<구토>>를 읽는 독자는 구토 경험을 찾아낼 것이다. 스테이시 알레이모(Stacy Alaimo)는 모든 존재자들은 "초육체성(trans-corporeality)"으로 특징지워진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의 경우에 알레이모가 서술하듯이,

 

인간의 육체성을 인간이 항상 인간 이상의 세계와 얽혀 있는 초육체성으로 상상하는 것은 인간의 실체가 궁극적으로 "환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정도를 강조한다. 그것은 자연을...인간의 활용을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기 어렵게 만드는데, "자연"은 항상 인간의 피부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아마도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육체들을 가로지르는 운동을 강조함으로써 초육체성은 다양한 육체적 자연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환과 상호연결들을 드러낸다.

 

인간에 관해 알레이모가 말하는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다른 모든 기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마치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 묶여 있는 듯 보이는데, 서로에게서 비롯되는 흐름들을 활용하여 현실화된 상태와 행동을 나타낸다. 거듭해서 존재의 인용성이 거론된다. 모든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들과 맺는 상호작용들의 장이라는 토양, 즉 우주, 우주의 거주자들, 우주의 힘들의 토양에서 성장하는데, 그것들은 그런 장을 표현하고, 그런 특정한 조건을 인용하는 각 상호작용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 그런 토양의 독특한 조건의 인용에 해당한다. 프랑스 와인에 대한 토머스 리케트(Thomas Rickert)의 아름다운 일례를 사용하면, 모든 존재자는 포도와 같은 듯 보이는데, 포도가 성장한 지역의 토양과 그 해의 독특한 사건들은 그것이 나타내는 성질들과 전적으로 관련이 있다.

 

둘째, 기계는 흐름을 조작하여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나무는 햇빛, 물, 이산화탄소 그리고 토양 영양소들의 흐름들을 활용하여 산소 같은 사물들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대학은 인간 육체들의 흐름들을 활용하여 먼저 학생들을 생산한 다음에 졸업생들을 생산한다. 하나의 기계로서 대학에 접근할 때, 우리는 그것이 이런 육체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런 육체들에 작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 그리고 이런 조작들의 결과로 어떤 유형들의 주체성이 생산되는지 물을 수 있다. 기계는 흔히 대단히 복잡한 존재자, 즉 기계들의 조립체로서 그것의 내부에 수많은 더 작은 기계들이 감겨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교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기계이다.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 있고 교수는 교실 앞에서 지식을 보급하는 그런 공간의 배치 결과로서 어떤 유형의 주체성이 생산되는가? 다른 주체성 또는 행위자들을 생산할 상이한 배치들이 존재하는가? 대학은 교육과정, 교수법, 과제, 평가 방법, 교육 목적, 규칙, 절차 같은 기호학적 기계들, 건물, 개방 지대, 교실들의 배치 같은 건축적 기계들, 컴퓨터, 펜, 종이, 칠판, 마커 같은 기술적 기계, 그리고 물론 학생, 교수진, 행정 직원들과 이런 존재자들이 상호작용하는 모든 상이한 방식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계이다. 대학은 상이한 기계들이 상이한 기계들 속에 접혀 있는 기계인데, 여기서 그런 기계들은 모두 때때로 조화를 이루지만, 흔히 긴장과 갈등 관계에 처하면서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기계는 다른 기계들의 움직임과 역능들에 영향을 미치도록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로는 다른 벡터들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벡터들을 따라 자동차들을 유인한다. 그런 식으로, 그것들 사이에 어떤 경로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과 마을들은 결합되고, 다른 경로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분리된다. 히치콕(Hitchcock)의 <<싸이코(Psycho)>>를 리메이크한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의 영화를 회상하자. 우리는 노먼 베이츠(Norman Bates)의 광기의 생성 원인을 그가 자기 어머니와 맺은 관계에 귀속시키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구스 반 산트의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새로운 주간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호텔 영업이 적자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왕래가 끊기게 된 결과로서 초래된 고립이 영업이 거의 되지 않는다는 스트레스와 결합하여 광기를 일으킬 비옥한 토양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광기를 일으킨 원인은 아닐지라도, 그런 고립이 광기의 활성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창출해내지 않았을까? 그런데 다양한 기계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하는 것은 도로와 고속도로 같은 기계들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산맥과 해류도 유사한 방식으로 다른 기계들에 작용한다. <<천 년의 비선형적 역사(A Thousnad Years of Non-Linear History)>> 같은 초기 저작에서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가 주장하듯이, 해류가 기존의 도시들과 관련하여 그런 장소들을 제시했기 때문에 많은 도시들이 상당한 정도까지 그것들이 위치한 곳에서 발달하였다.

 

그런데, 기계가 다른 기계들의 운동을 구성하여 기계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할 뿐 아니라, 다른 기계들이 행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한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을 바꿔 말하면, 매체는 다른 기계의 역능과 능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와 앤디 클라크(Andy Clark) 같은 이론가들은 사이보그에 관한 그들의 개념으로 유사한 관념들을 표현한다. 사이보그가 되기 위해 외과 수술을 통해서 기계를 우리 살 속에 집어 넣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다른 기계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역능 또는 능력을 갖춘 창발적 기계를 형성할 때마다 우리는 사이보그이다. 글쓰기는 저자가 죽은 후에도 메시지를 보존하면서 대단히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는 지속적인 매체의 구성을 통해서 언설의 역능을 확장한다. 그런데 글쓰기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행한다. 글쓰기가 없다면 추상적 개념성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은데, 우리 마음은 주인공과 악역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시작, 중간, 끝을 갖춘 서사에 의거하여 생각하도록 적응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로 대단히 추상적인 추리의 연쇄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종이가 하나의 기계로서 수학적 연쇄의 새부 내용을 보존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의 수학적 능력은 상당히 확장된다. 생물학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기억의 경우에 이것은 터무니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종이가 보존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호들도 중요하다. 로마 숫자로 계산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상상하자. 아라비아 숫자는 전적으로 다른 수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계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한 명의 인간, 한 개의 창 그리고 등자로 이루어진 사이보그를 서술한다. 등자는 전쟁의 본성을 심대하게 변형시켰다. 모든 작용에 대해 크기가 동일하고 방향이 정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한다고 뉴턴이 가르쳐주었다. 등자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인간-말 조립체의 힘이 다른 한 존재자에게 전달될 수 없었는데, 말을 탄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격할 때 그는 말에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등자 덕분에 그 힘은 보존되고 목표로 전달될 수 있게 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어떤 존재자가 행할 수 있는 것의 이런 사이버네틱스적 확장은 인간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 세계에도 속한다. <<매체의 법칙들(Laws of Media)>>에서 마셜 매클루언과 에릭 매클루언은 전등이 인간 관계들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전에는 밤이 위험하고 위협적이었던 반면에, 지금은 세느 강변을 따라 낭만적인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제는 야간 야구 경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리고 좋지는 않게도, 야간 노동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지만, 존재자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의 이런 사이버네틱스적 확장은 인간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전등은 동물의 역능도 확장시킨다. 내 뒷뜰에서 도마뱀들은 현관 등을 곤충들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사용한다. 그것들의 크기를 내가 본 여타의 도마뱀들에 비교해 보면, 그것들은 이런 조립체로부터 많은 득을 보게 된 듯 보인다.

 

상호작용주의적 존재론은 존재에 관한 생태적 개념을 요청한다. 그렇지만 생태를 오로지 자연과 생물학과 관련시키는 경향이 존재한다. 개념 또는 구별짓기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처신하는 방식을 유도하는 일종의 무의식을 갖는다. 생태학을 유기체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물리적 환경과 맺는 관계들을 탐구하는 생물학의 갈래로 규정하는 것은 나름의 전제들을 갖추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암묵적으로, 그것은 사회와 자연, 문화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구별짓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암묵적인 것들은 영향을 미친다. 생태가 존재의 한 영역(자연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 생태에 대한 관심은 북극 곰과 점박이 부엉이의 복지에 관련된 것들에 한정될 수 있다.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순조롭게 생태를 무시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인간적 쟁점들이 북극 곰의 곤경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경제의 쟁점들이 대양에 데드 존이 존재하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카렌 바라드, 도나 해러웨이,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이사벨 스탕제 같은 이론가들이 가르쳐 주었듯이,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런 존재론적 구별짓기를 의문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심지어 기호들도,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만물은 어떤 생태에 묻어 들어가 있다.

 

생태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은 자연과 문화를 서로 독립적인,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두 개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자연은 인과성과 본질의 지배를 받는 생물학적인 것들,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존재자들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그리스인들의 경우에, 자연은 본질, 즉 존재자 속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도토리는 자연적으로 참나무가 되지만, 자연적으로 탁자가 되지는 않는다. 탁자는 문화의 산물이다. 사회는 관념, 규범, 관습, 기호, 예술, 법, 의미 등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요약하면, 자연은 유형의 것, 물리적인 것, 물질적인 것, 육체, 선천적이고 필연적인 것들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사회는 무형의 것 또는 관념, 의미, 자유로운 것, 우연적인 것 또는 달리 될 수 있는 것들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결과적으로, 그 두 영역은 상이한 개입 형식들을 요구한다. 자연적 세계에서 변화를 발제하기를 바란다면, 과학을 통해서, 인과적 메커니즘들을 촉발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회에서는 의미에 작용함으로써 변화를 만들어낸다. 법률을 제정하거나, 텍스트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확립된 의미를 해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십 세기의 대다수 정치가 섹슈얼리티, 젠더, 인종, 계급 등에 귀속된 다양한 "본성(자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있었던 까닭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은 참나무가 될 운명을 타고난 도토리처럼 불가피한 본질이 아니고, 그것들은 달리 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생물학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 힘들의 산물이라는 점을 증명하게 된다. 자유가 수반된다. 중요한 점은 그 두 영역이 상이한 원리들로 관장되는,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사회적인 것들의 영역에만 귀속되며 의미들에 관한 논쟁에 관련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위성과 도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닌데, 그것들은 어떤 집합체를 관장하는 의미들이 아니라 물질적 행위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문화 분리 아래에서는 설계가 대체로 정치 영역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치가 대체로 의미 또는 기호들의 장에서의 개입들로 이루어진다고 간주되는 한, 확립된 자연적 환경의 특징들은 정지적인 문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건물, 도로 그리고 기술을 설계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그것들이 집합체의 구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정동의 생산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하는지 식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치는 대체로 항의, 입법, 수사법적 설득 그리고 사람 또는 집단들의 집합체를 구성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와 자연에 관한 이런 관념들의 타당성을 의문시할 수 있다. 첫째, 오늘날 도처에서 우리는 우리 기술,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그리고 인구 성장의 결과로서 사회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과 더불어 자연에서 초래되는 이런 변화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목격한다. 가뭄, 자연적 재난, 기후 변화로 인한 유행병의 심화 그리고 자원 부족은 모두 정치적 불안정성의 증가로 이어진다. 과거에 대체로 자연 열성주의자들에게만 관심사였던 자연이 점점 더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 관심의 현장이 되고 있다. 둘째, 지난 이 세기 동안 사회가 겪은 거대한 기술적 변형들의 결과로서 사물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셜 매클루언, 도나 해러웨이, 브뤼노 라투르, 앤디 클라크, 프리드리히 키틀러, 카렌 바라드 등과 같은, 우리의 사회 생활에서 비인간 행위자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집중한 일련의 사상가들을 인용할 수 있다. 기술, 건축 그리고 하부구조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분리시키며, 상이한 활동, 공존 방식 그리고 생성 방식들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정치 이론과 활동주의의 핵심에 위치할 만하다. 불행하게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둘 다 여전히 의미에 대한 집중이 지배적이고, 그래서 이런 사상가들은 대체로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

 

견고한 자연/문화 구별짓기는 유지될 수 없는데, 사회가 자연에 묻어 들어가 있어서 언제나 더 넓은 생태적 세계와 열역학적으로 접촉할 뿐 아니라, 사회 자체가 생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과 문화 둘 다를 퀴어링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정확히 이런 술어가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라투르, 데란다, 스테이시 알레이모, 제인 베넷,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 로시 브라이도티 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이 수행했으며 현재 잘 진행 중에 있는 기획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자연과 문화를 퀴어링하는 것은 특성들의 키아스마적 교환을 포함한다. 이전에 문화에 대해 유보된 특성들을 자연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자연에 대해 유보된 특성들을 문화가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의 퀴어링은 현대 과학에 의해서도 증언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현재까지 줄곧 역사 전체에 걸쳐서 떠도는 그리스적 자연 개념으로 돌아가자. 퓌시스(physis), 즉 자연은 자체적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 텔로스(telos)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호한 사례에 따르면, 도토리는 참나무가 된다. 도토리 내부에 포텐티아(potentia, 잠재태)로 접혀 있는 것은 참나무가 되는 운명, 목적, 벡터, 궤적이다. 결국 참나무는 오렌지나 망고가 아니라 도토리를 생산한다.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도토리가 되는 것 또는 도토리가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필연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자연적 발달은 질료 속의 형상 또는 본질의 실현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동일성, 본질이 차이와 개별성에 선행한다. 닭 개체는 잠재태에 포함되어 있는 계성(鷄性)의 형상 또는 본질의 예화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전적 우주는 괴물을 포함한다. 머리가 둘인 닭은 괴물인데, 그것이 자체 본성의 텔로스에 따라 되어야 하는 것의 필연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왜 이런 자연 개념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있는지 정말로 강조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여성, 남성 또는 특수한 인종의 구성원들이 특수한 본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사회적 질서 속에서 자신이 맡아야 하는 역할을 규정하는 본질을 구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 지배의 경우처럼 이것으로부터의 일탈은, 이런 고전적 틀에 따르면, 진정한 기형의 것으로 간주된다.

 

자연에 관한 고전적 개념을 테크네(techne, 기예, 공예, 거의 틀림없이 문화)와 습관에 관한 고전적 개념과 대조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을 우리의 제2의 천성으로 특징짓는다. 습관을 습득하는 것은 우리의 제1의 천성, 우리의 본질에 속하지만, 이런 습관들의 본성은 우리의 본질에 의해 미리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 속에는 어떤 인간이 영어 사용자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테크네, 공예 또는 기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목재와 관련하여 그것이 탁자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조각품, 의자, 삽 손잡이 또는 어떤 다른 것들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습관과 테크네는 문화와 사회의 영역인데, 메시지는 그것들이 퓌시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습관과 테크네는 필연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퓌시스 또는 자연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자유와 우연성의 영역이다.

 

현대 과학은 자연이 문화와 으스스하게 흡사한 듯 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퓌시스 또는 자연에 관한 이런 개념을 점점 더 의문시해 왔다. 첫째, 지금까지 진화 이론은 개체에 대한 형상 또는 종의 수위성을 의문시했고, 그래서 보편자 또는 종과 관련하여 실재론에 대한 존재론적 유명론의 승리를 지지한다. 현대 생물학의 틀 내에서 종은 다소 유사한 개체들의 개체군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유용한 허구이다. 여기서 개체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도하는 텔로스도 전혀 없으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괴물도 전혀 없다. 돌연 변이를 통해서 부모와 달라지는 유기체는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종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 진화의 가능한 벡터이다. 종은 더 이상 불변적인 본질이 아니라, 자연의 습관이다. 둘째,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연구의 집합체는 유전자가 운명, 청사진 또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수전 오야마(Susan Oyama)가 선도하는 발달 체계 이론과 메리 제인 웨스트-에버하드(Mary Jane West-Eberhard) 같은 생물학자들이 상당히 기여한 이보디보 같은 생물학적 연구 분야들은 유전체가 청사진이 아니라, 섭생, 화학, 조명 조건, 스트레스 유발 자극 등과 같은 환경적 인자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성화될 수 있는 일단의 경향들인 듯하다고 점점 더 시사한다. 점점 더 유전체는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만 불가피하게 전개되는 발달 벡터, 즉 단능성(unipotency)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능성(pluripotency), 즉 상이한 조건 또는 상이한 상호작용적 장 아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듯하다. 후성유전학적 연구도 가난과 전쟁 경험으로 인해 초래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같은 정신적 외상을 통해서 성인의 유전체가 바뀔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런 변화가 유전될 수 있다는 충격적인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마이클 미니(Michael Meany)와 모쉬 시즈프(Moshe Syzf)가 수행한 연구는 PTSD를 앓는 부모의 자식들이 정신적 외상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문화가 유전체의 층위에서 우리 육체의 살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 프로테비(John Protevi)는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 인지 과학, 후성유전학 그리고 발생생물학을 종합하고, 자연/양육 논쟁을 복잡하게 만들며, 육체의 생성에 있어서 생물학과 문화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탁월한 철학적 작업을 해냈다. 그 밖에, 물리학의 세계에서 리 스몰린(Lee Smolin)은 생기 없는 물질도 다양한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으며, 물리 법칙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물리 법칙들 자체가 그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생성되는 고정된 망으로 간주되는 대신에 역동적인 발달 과정들의 결과로 간주된다. 복잡성 이론과 소산 체계 이론도 물질적 세계의 창조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누엘 데란다는 이런 연구 궤적들을 활용하여 낡은 영원한 본질을 현실화된 존재자들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존재에 관한 발달적 설명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존재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자들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을 미리 규정하는 본질의 현실태가 아니라, 존재자들이 어떤 관계들의 장에서 특정한 조건 아래 어떻게 생성되는지 관찰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실상 자연은 전적으로 퀴어적인 듯 보인다. 자체의 창조적 우연성 또는 달리 될 수 있는 역량 속에서 자연은 습관 및 테크네와 대단히 유사한 듯 보인다.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연, 즉 사물들이 되어야 하는 바의 목적론에 호소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도처에서 자연이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생성된 것, 본질로서의 종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이상 기형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에서 발견되는 그런 종류의 발명성을 닮은, 새로운 형태들의 생성과 관련된 형태 실험이다. 마찬가지로, 발생생물학은 표현형 또는 현실화된 유기체의 형성이 유전자적 청사진에서 성체로의 일방적인 발달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고 후성유전학적으로 변화될 수도 있는 유전체와 환경의 다양한 특징 사이의 협력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단순한 일례를 들면, 애벌레가 되는 개미 유형―여왕 개미, 병정 개미, 일 개미―은 모든 개미가 이런 유형들 가운데 어느 유형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유전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둥지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유충의 이웃에 있는 페르몬들이 그것의 발달 궤적이 이 행로를 따를 것인지 저 행로를 따를 것인지 결정한다. 문화와 자연 사이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불가피성의 장으로서의 자연과 창조적 자유 및 자기 형성의 영역으로서의 문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간 또는 속도의 차이이다. 물리 법칙과 진화는 매우 느리게 움직이거나 변화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연적이고, 창조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문화의 퀴어링은 정반대 방향으로 일어난다. 우선 그것은, 문화의 물질적 본성을 강조하도록 사회의 영역을 의미, 기호 그리고 무형의 것들을 넘어서 확장하는 것에 놓여 있다. 이것은 기술, 하부구조, 지리, 날씨 패턴 그리고 태양을 사회적인 것들의 차원으로 식별하는 것을 수반하지만, 기호, 의미, 텍스트, 서사 그리고 관념도 물질적 존재자들로 간주해야만 한다.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은 더 이상 탈육화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유형의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예를 들면, 기호와 서사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 걸쳐 퍼져야 하며, 그리고 이것은 시간과 그것들을 보급할 매체가 존재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의 발명은 사회적 시간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요소들을 연결함으로써 사회적 시공간의 새로운 구조와 새로운 집합체들을 만들어내었다. 인터넷, 해저 케이블, 위성 그리고 슈퍼컴퓨터들이 없다면 현대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런 것들을 정치적 개입의 현장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둘째, 그리고 밀접히 관련된 취지에서, 문화와 사회의 퀴어링은 사회적 행위자 또는 참여자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수반하여 식물, 동물, 미생물 그리고 다양한 도구, 기술, 하부구조, 지리적 특징, 자원 등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을 포함하게 된다. 인간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자연의 여타 피조물들의 통치자로서 비인간 피조물들의 관리자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자기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활용한다는 창세기의 창조 신화와는 전혀 다르게도, 사회적인 것은 생물과 무생물, 기술과 광물을 비롯한 비인간들과 인간들 사이의 협력에 관련된 것인데, 여기서는 유일한 주권자처럼 모든 것을 감독하는 것은 전혀 없다. 예를 들면,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마리화나가 인간들이 그것을 경작하고, 돌보며, 씨를 뿌려서 그것의 생식을 돕도록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유쾌한 최면 능력을 진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모든 종류의 관계들은 이것의 결과로서 맺어지게 된다. 마리화나 식물을 키우기 위해 토지가 개간되고, 토양이 변형되고, 도로, 차량, 상점, 판매자, 구매자 등을 비롯하여 유통 수단이 개발되고, 마약을 둘러싼 하위문화가 출현하고, 법률이 제정되고, 상이한 서사들이 만들어지며, 정치적 투쟁이 지속된다. 기타 등등. 이것에 덧붙여, 마리화나가 그것을 파괴할 곤충 및 동물과 투쟁을 벌일 때 그것을 돕기 위해 살충제가 도입된다. 마리화나를 그저 우리의 쾌락 또는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하기가 매우 쉽다. 그렇지만 마리화나도 자체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가담시켰으며, 그리고 다양한 기호학적 코드와 사회적 관계들을 주조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촉매적 작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것을 오로지 인간들과 그들의 기호들 사이에 맺어지는 일단의 관계들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들의 전체 연결망, 즉 인간, (인간 및 비인간의) 기호학적 코드, 식물, 식물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과 개, 물질을 수송하는 데 사용되는 도로와 차량 등을 포함하는 전체 조립체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행위자들은 모두 인간들에 의해서만 연출되지는 않는 행위, 창조 그리고 관계들을 요청하는 사태들을 생성한다. 문화의 퀴어링은 사회라는 개념의 탈인류화에 놓여 있다. 인간들도 사회적 조립체의 행위자들이기 때문에 탈인류화는 인간을 추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사회적 조립체 내에서 다른 행위자들 가운데 일단의 행위자들로 이해하는 것에 놓여 있다. 사회와 문화의 이런 퀴어링에 있어서 브뤼노 라투르와 이사벨 스탕제보다 더 나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그들 각자는 사회적인 것을 인간과 비인간들의 집합체로 이해하고, 사회적 관계들이 이런 형태를 취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자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와 정치에 관한 상호작용주의적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인 것을 세 가지 넓은 종류의 기계들―물질적 기계, 기호학적 기계 그리고 현상학적 기계―의 얽힘으로 간주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물질적 기계는 동물, 미생물, 산, 해류 그리고 날씨 패턴 같은 자연의 존재자들을 가리킬 뿐 아니라, 기술과 하부구조도 가리킨다. 기호학적 기계는 코드, 범주, 법률, 기법, 서사, 신화 등을 가리킨다. 현상학적 기계는 상이한 유형들의 기계들이 자체 환경에 선택적으로 개방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목적은 이런 다양한 종류들이 상호작용하고 함께 얽혀서 그 속에 존재자들이 거주하는 사회적 조립체를 형성하는 방식을 추적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주의적 존재론은 사회적인 것을 모두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수정하는 물질, 의미 그리고 경험의 기계들의 얽힘으로 간주한다. 정치에 관한 의문은 해방적이고 긍정적인 생성을 고무할 방식으로 기계들의 집합체들을 조립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설계이다. 정치는 기계에 관한 설계이자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하는 기계들의 생태에 관한 설계이다. 이것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사회적 생태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논의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권력은 대체적으로 중력 모형에 의거하여 고찰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틀 내에서 중력은 두 물체를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객체가 그것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고랑을 만들어내는 어떤 객체의 질량에 의해 생성되는 시간과 공간의 곡률이다. 가운데에 포도가 놓여 있는 침대 시트를 상상하자. 포도의 영향으로 침대 시트는 가운데에 곡률을 나타내게 된다. 오렌지 하나를 잡아서 침대 시트를 따라 굴리면, 그것은 포도에 의해 생성된 곡률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기계 및 권력과 관련된 사태이다. 어떤 생태에서 기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의 결과로서 다른 기계들의 운동과 생성을 구성하는 몇몇 기계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기계들을 그것들이 행사하는 중력 또는 권력의 견지에서 다른 기계에 대해 수행하는 상이한 기능적 역할들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기계의 고유한 특징들이 아니라 서로 맺는 관계들에서 비롯되는 특징들이라고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첫째, 내가 "밝은 기계(bright machine)"라고 부르는 것들이 존재한다. 태양은 태양계에 속하는 모든 행성들의 운동을 조직하기 때문에 밝은 기계이다. 여기서 행성 지구에서 석유와 다른 화석 연료들은 밝은 기계들인데, 거의 모든 기술과 삶이 이런 에너지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튼 화석 연료의 흐름에 접속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작동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그리고 물론 이런 에너지들에 의해 산출되는 폐기물은 기후 전체를 변화시키고 있고, 그것은 결국 행성 지구의 모든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 석유가 그런 밝은 기계인 한에 있어서, 이것은 정치, 국내 정치 및 국제 정치도 화석 연료를 둘러싸고 조직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재 인류가 지구 전체의 조직 원리라는 의미을 포착하기 위해 현재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지만, "석유세(petrocene)"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밝은 객체가 다른 기계들의 운동과 생성을 구성한다면, 밝은 기계의 중력에 포획되어 있는 그런 기계는 위성(satellite)이다. 어떤 기계의 운동과 생성의 행로들이 다른 한 기계에 의해 구성될 때 그 기계는 위성이다. 이를테면, 위성은 다른 기계의 궤도에 포획되어 있다.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은 직업이라는 밝은 객체에 대한 위성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기 가족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대안적 방식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가면서 내리는 거의 모든 결정―언제 잠을 잘지, 언제 깨어날지, 언제 식사를 할지, 무엇을 할지,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노동으로 인한 소진은 자유 시간을 보내는 방식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킨다) 등―은 고용주라는 밝은 객체를 둘러싸고 구성되게 된다.

 

밝은 기계가 있다면 희미한 기계(dim machine)도 있다. 희미한 기계는 기계들의 생태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행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의 견지에서 매우 희미하게 드러나는 기계이다. 인간들을 포함하는 사회적 생태에서 희미한 기계는 흔히 밝은 기계로서 작용하는 기호학적 범주들의 결과이다. 밝은 기계로서 작용하는 그런 범주에 대한 좋은 일례는 "시민"이라는 범주일 것이다. 약간 소름끼치게 서술하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부검은 시민권이라는 성질을 결코 드러내지 못한다. 인종차별주의자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시민권은 유전자 또는 생물학의 성질도 아니고, 누군가가 공간적으로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성질도 아니고, 부모의 성질도 아닌데, 비시민, 불법 이민자도 시민과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며, 그리고 그런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권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명확히 표명하듯이, 인간 육체의 무형적 변형을 수행하는 기호학적 기계, 법적 기계로서 비시민을 시민으로 변형시킨다. 이런 무형의 변형을 겪지 않은 채 국가라는 사회적 생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희미한 기계들이다. 그들은 그곳에 존재하고, 그들은 말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언설이다. 그들은 그런 사회적 생태에 거의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소리 없는 언설이다. 랑시에르가 서술하듯이, 그들은 몫이 없는 부분이다. 그들의 삶은 비가시성을 둘러싸고 조직되는데, 추방당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비가시성을 유지하면서 세상에서 발판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그 다음에 불량 기계(rogue machine)가 있다. 오늘날 천문학자와 우주론자들은 어떤 체계에도 묶여 있지 않으면서 은하 전체를 그리고 은하 사이들을 돌아다니는 불량 행성, 항성 그리고 블랙 홀 같은 무서운 존재자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불량 기계는 기계들의 생태에서 느닷없이 나타나서 그 생태에 거주하는 기계들 사이의 모든 관계들을 재구성한다. 정치 혁명, 과학 혁명 그리고 예술 혁명들이 모두 불량 기계의 사례들이다. 혁명은 생태에서의 단절, 중단이다. 때때로 이런 사건은 좋을 수도 있지만, 때때로 나쁠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의 결정은 기계들의 생태의 재구성과 혼돈의 지속 여부로 요약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둡고 가장 무서운 기계, 즉 블랙 홀이 존재한다. 블랙 홀은 질량이 대단히 밝고, 대단히 거대하여 아무것도 그것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계이다. 약물 중독이 블랙 홀일 수 있다. 어떤 생리학적 질환이 블랙 홀일 수 있다. 어떤 관계가 블랙 홀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석유세가 블랙 홀이라는 점을 우려한다. 본질적으로 블랙 홀이 드물기를 희망하자.

 

정치에 관한 의문은 이중적이다. 첫째, 그것은 탈출 속도에 이를 수 있는 방식에 관한 의문이다. 지구라는 밝은 기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주선은 초속 11.2km의 속도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의 다양한 사회적 생태를 구성하는 밝은 객체들의 중력을 벗어나는 데 어떤 탈출 속도가 요구되는가? 둘째, 일단 탈출 속도에 이르게 되면 어떤 생태를 건설해야 하는가라는 쟁점이 존재한다. 우주선이 지구를 벗어나면, 이제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생태에 처하게 되어서 새로운 기계들을 발명할 필요가 있게 된다. 중력이 바뀌었다. 이런 새로운 중력장에서 우주인들은 어떻게 잠을 잘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식사를 할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음료를 마실 것인가? 그들의 육체와 육체의 특성들이 상호작용적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그들은 어떻게 감압되는 것을 막을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 여러분은 웃는다. 그런데 탈출 속도에 도달하면 무중력 환경에서 사물들이 흩어진다. 어떤 기계적 생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생태에 대응하여 해결해야 할 일련의 문제들과 다른 한 생태의 발명을 수반하게 된다.

 

정치의 문제들 각각에 대해 두 가지 차원, 즉 지식적 차원과 설계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우주인들이 중력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았었다면, 그들은 탈출 속도에 결코 이르지 못했었을 것이다.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속도에 이르러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들은 지구의 고유 중력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지식을 일단 획득했을 때 그들은 설계에 몰두해야 했다. 그들은 이런 속도에 이를 수 있는 엔진을 설계해야 했다. 그들은 이런 힘들을 견딜 수 있는 비행체를 설계해야 했다. 그들은 자기 육체를 보호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일단 탈출 속도에 이르게 되면 쟁점은 동일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육체와 그들이 진입할 새로운 생태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우주복, 비행체, 식기, 호흡 장치, 목욕 도구, 복사를 차단하는 장치도 필요했다. 탈출은 탈출할 장치와 탈출한 이후의 장치를 필요로 한다.

 

우리 경우도 우주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매우 슬픈 궤도 또는 생태들을 만들어내는 그런 밝은 기계들로부터 벗어날 탈출 속도에 이를 수 있으려면, 지식과 설계 둘 다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생태들이 구성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고, 그런 생태들이 블랙 홀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며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탈출 속도에 이르는 데 요구되는 것을 발명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탈출하여 진입하게 되는 새로운 생태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는 간략하게 언급할 수 있을 뿐이지만, 조립체들에서 벗어날 탈출 속도에 이르는 데 필요한 지식과 설계가 요구되는 다양한 현장들이 존재한다. 물론 내가 "기호정치(semiopolitics)"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한다. 기호정치는 기호, 의미, 법률, 규범 그리고 서사의 질서이다. 새로운 유형들의 사회적 조립체들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것에 작용해야 한다. 인간 육체, 동물, 기술, 도시, 마을 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칼로리와 다른 연료 형태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거의 탐구되지 않은 열정치(thermopolitics)라는 온전한 영역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에너지가 어떻게 우리를 예속시키는지 조사하고, 새로운 작용, 운동, 생성 그리고 집합체가 가능하게 만드는 데 어떤 다른 형태들의 에너지가 활용될 수 있는지 조사한다. 우리 삶은 시간에 의해 매우 다양한 방식―노동 시간, 의무적 복무 시간, 이동 시간―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시간정치(chronopolitics)라는 영역이 존재한다. 약간 특이한 방식으로 지리정치(geopolitics)라고 부를 수 있을, 지리와 자연의 특징들이 사회적 집합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존재한다. 기술정치(technopolitics)라고 부를 수 있을, 상이한 기술들이 새로운 삶의 형식들도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예속시키기도 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가정정치(domopolitics)라고 부를 수 있을, 하부구조와 건축이 사회적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고 제약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물론, 특이한 방식으로, 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불릴 수 있는, 물체, 동물, 식물, 미생물 그리고 인간의 살이 존재한다. 이런 영역들은 모두 서로 얽혀서 상호작용하며 서로 수정한다. 그것들은 모두 더 지속 가능하고, 공평하고, 정의로우며, 만족스러운 삶과 생성을 위한 상호작용의 장들을 초래하기 위한 탈출 속도에 이르기 위해서 지식과 설계를 필요로 하는 영역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