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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겔로네시: 오늘의 서평-아인슈타인 대 베르그손, 과학 대 철학 그리고 시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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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7.

 

아인슈타인 대 베르그손, 과학 대 철학 그리고 시간의 의미

Einstein vs Bergson, science vs philisophy and the meaning of time

 

―― 조 겔로네시(Joe Gelonesi)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은 흥미로운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공히 우주적 춤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한 파트너는 때때로 합류하기를 거부한다. 2011년에 스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ven Hawking)은 심지어 철학의 종말을 선언했다.

 

몇 가지 점에서 그 선언은 예상할 수 있었다. 물리학 승리주의는, 어느 시점에 철학은 소진되어 과학이 급속히 정복하는 듯 보이는 불가사의들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구술한다. 이것은 얼마 전에 나타났는데, 최소한 몇 세기 전에 과학라는 낱말이 자연철학을 대체한 이래로 말이다.

 

이런 서사를 따라가면 지성적 무대에서 위대한 배우들이 연출한 대결의 정점들이 존재한다. 히메나 카날레스(Jimena Canales)는 최고의 철학자가 물리학의 떠오르는 스타와 대결을 벌인 그러한 한 순간을 복구했다.

 

카날레스는 우주론적 주제들에 대한 강한 기호를 갖춘 수상 경력이 있는 과학사가이다. 또한 카날레스는 10분의 1초라는 관념의 역사에 관한 야심만만한 책을 저술했다. 자신의 연구의 일부로서 카날레스는 호각을 이룬 한 특별한 대결을 기록한 희귀 문서를 접하게 되었다. 카날레스는 즉시 자신의 행운을 파악했다.

 

'그것은 역사가가 품을 수 있을 그런 꿈이다. 나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해지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카날레스는 1922년 4월 6일에 파리에 소재하는 평판이 높은 프랑스 철학회에서 개최된 한 모임의 녹취록을 발굴했었다.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이었다. 논쟁 대상은 시간의 바로 그 본성이었다.

 

지금은 아인슈타인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한 듯 보일 것이지만, 일 세기 전 지성계는 다른 곳이었다. 베르그손은 이미 대단한 인물이었고, 아인슈타인은 형성 과정에 있었다.

 

1907년에 출판된 <<창조적 진화>>라는 책으로 인해 베르그손은 유명하게 되었었고, 그 책에는 가장 오래 지속될 그의 관념, 즉 생명의 약동(elan vital)이 소개되었었다. 그것을 통해서 베르그손은 우주의 행진을 비다윈적 의미에서 모든 것을 전진시키는 생기(vital energy)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베르그손은 이것을 과학이 불완전하게 파악할 수밖에 없는 개념으로, 그리고 창조적 충동의 핵심에 놓여 있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또한 그 책은 시간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다. 물리적 설명이 아니라, 베르그손은 시간의 주관적 본성―우리의 관심사에 외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생물체로서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을 탐구한다. 이것은 체험된 시간이라는 관념이다.

 

한편으로, 아인슈타인은 다른 관념들을 품고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시간에 대한 공식적 설명을 전개했다.

 

4월 6일의 모임은 결국 결코 그렇지 않게 되었지만 정중한 행사가 될 예정이었다.

 

'저는 그 날이 폭발하였고 20세기에 거듭해서 언급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카날레스가 말한다. '핵심적인 문장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이다. "철학자들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베르그손이 그런 날카로운 잽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베르그손의 지속―시간에 관한 그의 논제 가운데 주요한 부분―이라는 관념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카날레스가 해석하듯이, 그 문장은 최대의 충격을 가하도록 신중하게 고안되었다.

 

'그가 의미한 바는 철학자들은 빈번하게 그들의 이야기들을 심리적 접근 방식에 정초하고 [새로운] 물리적 지식은 이런 철학적 접근 방식들이 정신의 오류일 뿐이라는 점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 

'이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고 카날레스가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철학자들에 의해 그들의 모임에서 연설하도록 초청받았고, 이 물리학자는 매우 명확하게 그들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베르그손은 격노했으며, 그것을 감내하지 않았다. 몇 달 후에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의 법칙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광전 효과는 카날레스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분야이다. '대중의 상상력에 거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사실상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인정을 갈망했다.

 

베르그손은 나름의 굴욕을 되돌려주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궤적을 의문시함으로써 베르그손은 노벨상 위원회를 설득하여 상대성에 대한 공로로 상을 수여하는 것을 단념시켰다. 1922년에, 시간의 올바른 해석에 대한 판단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래서 수 년 동안 격화되고 물리학과 철학,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더 큰 균열에 이바지할 논쟁이 개시되었다.

 

베르그손은 시간이란 한 잔의 물에 한 개의 각설탕이 용해되기를 기다리는 경험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지각을 언급하지 않은 채 시간에 관해 말할 수는 없다는 선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란 시계가 측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베르그손은 틀림없이 우리가 우선 시계를 제작하는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선행하는 시간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시계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고...우리가 중요한 사건을 접하고 장소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시계를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날레스가 말한다. '여러분은 그들의 관점들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론적으로 요약하면, 이것은 체험된 시간과 시공간 사이의 분리, 즉 주관적경험 대 객관적 실재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물리학자와 철학자의 다툼은 철학자들은 개별적 기질에 가장 잘 맞는 관념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믿음을 떠올리게 한다. 카날레스가 자신의 연구에서 알아냈듯이,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이 매우 다르다는 점에 매혹되었다. 도처에서 우리는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이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전쟁에서 채식주의까지.' 카날레스가 말한다. '베르그손은 육식에 대한 입장으로 잘 알려져 있던 반면에 아인슈타인은 그의 여자 친구가 우편을 통해 보내준 구운 거위 껍질을 애호했다.'

 

이런 개인적 차이점들은 사소한 듯 보일 것이지만, 그 충돌은 더 큰 규모의 차이를 구체화했다. 세계는 변하고 있었고, 그것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과학과 인문학은 결별하고 있었고, 곧 전적으로 상이한 문화들이 되었다.

 

그렇지만 성 정치의 세계에서는 낡은 가치들이 여전히 견지되었다. 카날레스가 이해하듯이, 이것은 아인슈타인에게 유리했다.

 

'여성들이 베르그손을 읽는다는 사실은 그에 반대하는 증거, 즉 그의 이론은 가볍고 정교하지 않다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물리학은 남성적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아인슈타인의 과학을 따라갈 수 없다고 [믿어졌다]. 베르그손과 철학은 여성화되었다.'

 

카날레스는 이런 전형화가 부분적으로는 전문가의 흥기와 비전문가 의견의 쇠퇴―1920년대에 모멘텀을 모으고 있었던 과정―와 결부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참된 전문가는 남자였고, 그것도 남성적인 남자였다.

 

시간의 거인들 사이의 논쟁은 많은 단계를 거쳤고, 두 사람 모두 당대의 선도적인 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그리고 사상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편이었다. 세기가 진전되고 기술이 물리학의 예측들을 입증할 수 있을 만큼 자체 역량을 연마함에 따라 베르그손과 그의 추종자들의 더 주관적인 견해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술적으로 추동되는 근대성의 맥락에서 베르그손의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시간 연구에 있어서 저명한 인물에서 대륙 사상의 주변부 인물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역사는 베르그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나는 <<스탠퍼드 엔사이클로피디어 오브 필로소피>>의 시간이라는 표제어로 가서 베르그손이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카날레스가 말한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반전이다, 1922년 4월 6일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역사가 바로 잡지 않았던가? 카날레스는 그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나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묻는 것을 초월하고 싶다. 그것은 이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것을 가린다. 그것은 분리된 세기였는데, 특히 1920년대 이후에 그랬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손은 특별히 좋은 주제였다. 지금까지 생존한 가장 똑똑한 사람들에 속하는 두 사람이 결국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방대한 분리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 것은 20세기와 관련된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베르그손은 여전히 거대한 지적 존경을 불러 일으키며, 지속과 생명의 약동이라는 그의 관념들은 학술적 맥락에서 연구되고 논의되지만, 시간 논쟁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대단히 감소되었다.

 

아니면 여전히 인기가 있는가?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해결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에 양자 이론의 발견과 더불어 비결정성과 변화의 베르그손적 우주의 가능성도 대두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아포리즘과는 대조적으로, 신은 우주를 갖고서 주사위 놀이를 한 듯 보인다.

 

몇몇 지지자들은 나아가서 베르그손의 초기 저작이 40년도 더 전에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혁명을 예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카날레스는 베르그손이 죽었을 때 글을 쓴 문학비평가 앙드레 루소의 말을 인용한다.

 

'베르그손 혁명은, 비록 그가 행하지 않았었더라도, 베르그손이 초래한 철학 혁명을 자체적으로 필요로 할 과학 혁명에 의해 배가될 것이다.'

 

결국 베르그손이 옳았던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