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칸트와 시간 그리고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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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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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야수가 시간이라는 쟁점에 실재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걸기로 선택한다면, 이것은 일차 성질들, 즉 우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 안에" 존재한다고 하는 성질들이 일반적으로 수학적 특성들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수학적 특성들에 관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 이런 특성들의 수학화될 수 있는 양태들뿐이다. [...] 요점은, 메이야수가 일차 성질에 관해 말할 때 기본적으로 그는 수학적 표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공간적 및 시간적 특성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특성이 하나의 숫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측정, 실험, 관측 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수학화가 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런 특성들은 객체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와인이 나의 미뢰 및 신경학과 갖는 관계에서 발생할 뿐인 쓴맛 또는 단맛 같은 와인 맛과 달리, 객체는 우리와 맺는 어떤 관계와도 전적으로 무관하게 자체의 일차 성질들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원자는 그렇고 그런 원자량을 갖고 있다. 우리가 원자량을 알기 위해 임의의 측정 체계들을 사용하는 것은 참일 것이지만, 측정되는 것은 그 객체가 나와 관계를 맺는 방식의 결과로서 그 객체 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임의적인 것도 아니다. [...]

 

칸트의 주요한 혁명들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일차 성질들이 아니라, 인식 주체와 관련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실재적이며 인간들에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반면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사물들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 대해서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뉴턴은 절대적 공간의 존재를 믿었다. 공간과 시간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관련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은 매우 특이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체험된 육체와 오감의 증거는, 사물들은 멀리서 차례차례로 나란히 있고, 사건들은 이어지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가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시사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사물들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고찰을 옹호하는 일단의 매우 설득력이 있는 인식론적 논변과 주장들을 제시한다. [...]

 

칸트는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객체들에 관한 내 지식은 후험적으로 내 감성을 통해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험적 감성의 핵심적 특징은, 나는 어떤 객체가 어떤 성질들을 나타낼 것인지 선험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 객체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내가 심었던 오이가 싹을 내밀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밖에 나가서 밭을 살펴볼 때까지 싹을 내밀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 그런 것이 경험적 객체들이 귀속되는 우연적 진리들의 본성이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이 사물들 자체의 특성들이고, 즉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특성들을 알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 공간과 시간이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면, 공간과 시간을 구조화하는 필연적 관계들에 관한 지식, 즉 기저에 놓여 있는 수학(공간의 수학으로서의 기하학, 시간의 수학으로서의 산술학)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 나는 어떤 객체의 경험적 특성들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용성을 통해서 이런 특성들을 발견해야 한다. [...] 그러나 수학의 경우에, 문제는 전적으로 다르다. 첫째, 나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모든 종류의 것들을 선험적으로, 즉 그것들을 직접 경험하는 것과 무관하게 안다. 둘째, 수학적 진리들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사과의 색깔은 아무 모순도 포함하지 않은 채 달리 될 수 있을 우연적 진리인 반면에, 사각형의 각도들의 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걱형의 본질적 구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셋째, 수학적 진리들은 보편적인데, 말하자면, 그것들은 모든 시점과 장소에 대해 성립한다. [...]

 

그런데 공간과 시간이 사물들 자체의 특성들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칸트는 [...] 제기한다. 공간과 시간이 사물들 자체의 특성들이라면 나는 감각을 통해서 그것들을 알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경험에 거주하는 것들에 관해서는 필연성, 보편성 그리고 선험성에 의거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각형의 각도들의 합이 360도라는 내 지식이 관측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맞다면, 내일 또는 우주의 저쪽에서 사각형들이 합해서 360도가 되는 각도들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보증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감각은 내게 우연적 관계들만 현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적 진리들이 이런 식으로 우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는 경험적으로, 즉 감각을 통해서 이런 유형들의 관계들에 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은 유명하다. "...감성적 직관들 일반의 순수 형식은 마음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현상들의 모든 잡다는 일정한 관계에서 직관되는 것이다."(<<순수이성비판>>, A20/B34). [...] 칸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사물들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마음 속에 거주한다. 처음에는 이 논제가 기묘하고 기이한 듯 보일 것이지만, 그것은 일단의 문제들에 대한 우아한 해결책이다. 첫째, 그것은 세계의 현상들이 어떻게 수학적일 수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들이 우리 마음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 형식에 의거하여 마음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감각들은 공간과 시간에 속하는 수학적 특성들을 가질 것이다. 둘째,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 마음이 공간과 시간에 의거하여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특수한 객체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적 체험에 무관하게 시간적 및 공간적 관계들을 사색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이것은 수학이 젓가락을 사용하거나 수염을 깎는 사람들과 같은 어떤 특수한 인간 집단에 속하는 관습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상호주체적으로 보편적인 까닭을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수학적 결론에 독립적으로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수학과 물리적 실재의 수학적 본성에 관한 일단의 철학적 수수께끼 전체에 대한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해결책이다.

 

칸트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실재론자는 두 가지 수수께끼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것들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든 한낱 속성적인 것으로 보든 경험 원리들[즉, 경험의 선험적 조건] 자체와 합일하지 못할 터이다. 무릇 만약 그들이 (보통 수학적 자연과학파가 그러하듯이) 첫 번째 경우를 취한다면 그들은 두 개의 영원하고 무한하고 독립적인 무물[無物] (곧, 공간과 시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들은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면서) 오로지 실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담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약 (그 안에 몇몇 형이상학적 자연이론가들이 들어 있는) 두 번째 파를 취하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이 경험에서 (비록 추출에서 모호하게 표상된 것이긴 하지만) 추상된 현상들의 (서로 곁하여 또는 서로 잇따라 있는) 관계들이 되어버린다면, 그들은 (예컨대 공간상에서) 실재하는 사물들과 관련한 선험적 수학 이론들의 타당성을, 적어도 명증적 확실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이 명증적 확실성은 후험적으로 결코 생길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의 생각대로라면 공간 시간의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것의 원천이 실제로는 경험에서 찾아져야 할, 상상력이 지어낸 것으로서, 상상은 경험에서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 것이고, 그것은 그 관계들의 일반적인 것을 내용으로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은 자연이 그 관계들에 결부시켰던 제한 없이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A39-40/B56-57)

 

칸트가 암시하는 첫 번째 문제는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에 관한 형이상적 문제이다. 공간과 시간이 실재적인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뉴턴이 절대적 공간의 실재성을 주장했을 때 그는 불바람을 불러 일으켰었다. 결국, 물질적 객체들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에게 아무 감각도 제공하지 않는 공간이나 시간 같은 것이 실재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이것은 심원한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두 번째 문제는 학습의 문제이다. 모든 수학적 진리들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들이라고 간주하면, 어떤 경험과도 무관하게 이런 진리들을 알 수 있다고 간주하면, 나는 그런 필연성에 관한 지식에 어떻게 후험적으로 이를 수 있을 것인가? [...] 칸트가 주장하듯이, 수학적 추리가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라면, 나는 그저 사유을 통해서 수학적 지식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런데 수학이 후험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가능하지 않은 듯 보일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사물들 자체이거나 사물들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칸트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일거에 우아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결론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칸트가 요약하듯이,

 

그래서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렇다 : 우리의 모든 직관은 다름 아니라 현상에 대한 표상이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그 사물들을 그런 것이라고 직관하는 그 자체가 아니며, 그것들의 관계들도 그 자체로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그대로가 아니며, 또 우리가 우리 주관이나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을 제거한다면, 공간·시간 상의 객관들의 모든 관계들, 그리고 심지어는 공간·시간조차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현상인 것으로서 그 자체로가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 그리고 우리 감성의 일체의 이 수용성과는 별도로 대상들이 어떤 사정에 놓여 있는가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의 방식, 즉 우리에게 고유한, 비록 모든 사람에게 속하기는 하지만 모든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닌 방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A42/B59)

 

다시 말해서, 우리가 칸트 편에 선다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는 사물 자체가 우리의 현상 경험의 공간적 및 시간적 특성들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에 관한 어떤 지식도 결코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우리는 사물 자체가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우리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칸트의 우아한 입장이 요구하는 희생은 우주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이라는 테제에서 우주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듯 보인다는 테제로 이동하는 것에 놓여 있다. 이런 움직임이 성취할 수 있는 인식론적 안정성을 감안하면 이것은 약간 사소한 희생인 듯 보인다.

 

그렇다면 왜 선조성으로부터의 논증을 통한 상관주의 비판에서 메이야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집착하는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 공간의 시간적 성질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공간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 서로 동시적인 존재자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거실을 관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칸트주의자에게는 어떤 특별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데, 내가 거실로 걸어 들어가면 그것은 내 마음에 속하는 순수한 공간적 직관 형식에 따라 구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 메이야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룬다[...].

 

생명과 인간 모두에 앞서거나 선행하는 시기들을 논의하는 우주에 관한 선조적 진술들을 제시할 수 있는 과학의 능력이 출현함으로써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진다. 우리는, 칸트의 통찰에 의해,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법칙들이 초기 호모 사피엔스 시기에 작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전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매우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소여 또는 시간과 공간의 구조화 형식들이 이 시기에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명 또는 의식에도 선행하는 주장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칸트의 말을 반복하자[...].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그 사물들을 그런 것이라고 직관하는 그 자체가 아니며, 그것들의 관계들도 그 자체로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그대로가 아니며, 또 우리가 우리 주관이나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을 제거한다면, 공간·시간 상의 객관들의 모든 관계들, 그리고 심지어는 공간·시간조차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현상인 것으로서 그 자체로가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의 시간에 관한 주장들에 대한 강한 독법(사물 자체는 우리가 그것을 직관하는 그대로가 아니다)을 택하든 부드러운 독법(우리는 사물 자체가 우리가 그것을 직관하는 그대로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을 택하든 간에, 칸트의 테제는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이런 선조적 주장들에 관한 회의주의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칸트의 테제와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물들 자체에 속하지 않는 순수한 직관 형식으로서의 시간에 관한 칸트의 테제는 필연적으로 선조적인 것들에 관한 주장들은 독단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지식의 지위에 대한 어떤 권리 주장도 공허해야 한다는 점을 수반한다. 이것이 그렇다면, 그것은 선조적 주장이 의식에 대한 시간이 아니라, 사물들 자체에 관한 시간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에 선행하는 시간을 전제로 한다. 결과적으로, 상관주의자는 인간이 진화했다는 테제나 인간에 선행하는 시간에 관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다는 테제를 거부해야 하는데, 상관주의자의 경우에, 사물들 자체가 시간에 의거하여 구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설이 다음과 같이 진술할 때의 요점이다. "자연의 현존은 의식의 현존에 대한 조건이 될 수 없는데, 자연 자체가 의식의 상관물인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의식의 규칙적 연쇄 속에서 구성되고 있다". [상관주의자]는 세계가 사유에 의해 발견되는 수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까닭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현존이라는 틀 안에서만 그렇다. 우리가 이 틀에서 벗어나서 인간 생명체들의 현존에 선행하는 시간으로 진입할 때마다 이 모든 것은 붕괴되는데, 우리는 사물들 자체에 속하는 시간에 관해 명료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관성이 있는 상관주의자는 진화 이론, 빅뱅 그리고 신경학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지불하기에는 상당히 비싼 대가인 듯 보인다.

[...]

우리는 세계가 어떤 이야기나 소설(사유를 통해서 생산된 존재자들)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우리가 사유 속에서 발견하는 수학적 진리들을 따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는 [...]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들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다. 그런데 칸트가 이런 심원한 문제에 대한 성공 가능한 유일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것이 참인가? 수학의 선험적 지위에 대한 칸트의 깊은 통찰(객체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것들에 관한 것을 확립할 수 있는 능력)를 보존하는 동시에 수학적 특성들이 인간들의 현존 여부와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의 객체들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는가? 화이트헤드 및 들뢰즈의 사유와 결합된 진화 이론이 바로 그런 대안을 제공하는 듯 보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칸트는 세계를 고찰하거나 사색하는, 완전히 형성되었거나 현실화된 주체들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 철학적 시대에 작업했다. 이 모형 아래에서 지식은 분석적, 선험적 그리고 선천적이거나, 아니면 지식은 경험적이고 감성을 통해서 수용되는 것이었다. 물론 경험적 지식은 필연성의 발톱이 없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수학적 지식은 선험적이라는 점[...]에 동의한 반면에, 그들은 선험적인 수학적 지식과 세계 구조 사이의 조정자로서의 신에 호소하지 않은 채 어떻게 객체들도 수학적일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가 객체들이 주어지기 전에 어떤 수학적 특성들을 알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주체와 객체, 마음과 세계, 행위자와 환경이 추상적으로 서로 대립적이고, 그래서 어떻게 객체가 적절한 표상으로 마음에 진입하게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이런 맥락에서 칸트의 해결책은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다.

 

진화 이론은 이런 사유 노선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진화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객체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것들에 관한 것을 알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 마음이 수학적 구조를 갖춘 우주 속에서 진화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즉, 진화 이론은 우리의 인지적 구조들에 대한 개체 발생적 설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나의 뼈 구조, 세포, 소화 체계 등이 특정한 범위의 압력, 열, 중력, 빛 등을 갖는 특수한 환경에 적응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지 역시 세계의 수학적 구조에 알맞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그것은 바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그들 각자의 유전적 존재론에서 제시하는 인지 이론이다. 화이트헤드는 주체(subject)를 "초월체(superject)"로 서술한다. 주체를 "초월체"로 서술하는 것은 그것을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것이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맺는 관계들을 내재화하는 방식의 결과 또는 산물로 서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도 개체화에 관한 설명에서 개체화를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와 구별되는 기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선험적 장"이라고 부르는 것, 즉 그것이 주변 세계와 맺는 관계들에서 비롯되는 한 개체의 생성으로 이해한다. 이런 각 경우에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 자체에 속하는 공간적 및 시간적 특성들에 관한 실재론적 이론과 어떻게 선험적 지식, 즉 소여에 선행하고 심지어 독립적인 지식 같은 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설명을 견지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사유 구조들과 인지의 생성이 제시된다. 진화에서 비롯된 이런 수학적 인지 구조들은 매우 단순하고 최소한의 것일 수 있다. 필요로 할 것은 수학의 더 복잡한 형식들이 구축될 수 있는 소수의 기본적인 최소한의 구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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