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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핼버슨: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소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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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4.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 XIII: 소칼 사건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XIII: The Socal Hoax

 

―― 대니얼 핼버슨(Daniel Halverson)

 

10,000피트에서는 아무도 사회적 구성주의자가 아니다.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인문주의자 무뢰한들의 주장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소칼과 그의 동지들은...그들 분야의 정초자들 가운데 일부의 물리적 이론들을 거부해야 한다.

― 발 두세크(Val Dusek)

 

1996년에 앨런 소칼(Alan Sokal)이라는 물리학자는 사회학, 상대주의, 탈근대주의 그리고 과학학 일반이 넌더리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해는 토머스 쿤(Thomas Kuhn)이 수문을 개방해버린 이래로 대략 30년이 지났었고, 때떄로 비판은 꽤 격심해졌었는데, 흔히 터무니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소칼은 생각했다. 과학은 유용하고 상황을 바로 잡는다. 그에 비해, 탈근대주의는 무엇에 좋은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무용한 것에 의거하여 유용한 것을 해소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중력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높은 건물에서 뛰어 내려 보라. 그렇지 않다면 입 다물어라."

 

자신의 주장을 제기하기 위해 소칼은 제목이 "경계의 침범: 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s a Transformative Hermeneutic of Quantum Gravity)"인 논문 한 편을 작성하여 <<소셜 텍스트(Social Text)>>라는 문학 저널에 투고했다. 그 논문은 탈근대주의적 용어와 과학에 대한 참담한 오해들을 많이 담았지만, 정합적이고 유의미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적게 담았다. 실증주의자들이 말하기 좋아했듯이, 그것은 "인지적으로 공허"했다. <<소셜 텍스트>>는 그 논문을 출판했고(분명히 그것을 읽지도 않은 채, 또는 어쨌든,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얼마 후에 소칼은 그 날조 행각을 밝혔다. "이 멍청이들을 보십시오." 그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들은 무엇이든 출판할 것입니다." 과학 옹호자들은 환호했다. 비판가들은 끓어올랐다. 대중은 조소했다. "과학 전쟁"이 개시되었었다.

 

과학에 대한 실재론적 옹호는 흔히 도덕에 의거하여 표현된다. 이 설명에 따르면, 과학은 계몽주의의 독특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산물이다. 과학의 설명적 성공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지적 활동으로의 지위의 정당성을 전적으로 입증하며, 모든 사람이 열망할 수 있는 합리성의 일례를 제공한다. 과학은 우리가 속이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계속 정직하게 있도록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과학 비판가들은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학을 자연에 대한 합리적이고 올바른 접근 방식이 결코 아닌 것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과학의 산물을 객관적 사실이 결코 아닌 것에 대한 서술로 간주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리석고, 최악의 경우에는 부정직하다. 그것은 문명의 토대를 침식한다.

 

탈근대주의적 공격도 흔히 도덕적 견지에서 표현된다. 과학은 계몽주의의 독특한 축복이기는 커녕 그것의 독특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과학은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일반적으로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와 결부되었다.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과학의 보편적 열망은 자연에 대한 인류의 전쟁에 해당한다. 과학의 특징적인 태도는 비자연적인 동시에 어리석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과 더불어 서로 함께 살아야 한다. 인간적이고 자발적인 모든 것을 분류하고, 균일화하며, 탈자연화하는 데 이 모든 노력을 소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시무시한 과학의 방법론적 정확성의 과시 아래에 권력―수단이 아니라 오로지 목적으로서의―에 대한 사악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갈망이 잠복해 있다.

 

탈근대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과학적 실재론을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위치시켰고, 그들 자신들은 왼쪽에 위치시켰다. 탈근대주의가 형성되고 있었던 베트남 전쟁 동안 이것은 정확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래로 진자가 방향을 전환했다. 오늘날 열기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다. 이제 과학은 성 평등과 인종 평등 편에 확고히 서 있으며, 지구 온난화와 진화는 세금과 규제 수준을 낮게 유지하는 것과 도덕 및 교육의 종교적 기반을 고수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적 목표들을 위협한다. 예전에 좌파에서 제기되었던 과학 비판―과학은 사악한 이해관계의 전선이다, 동료 평가 절차는 붕괴되었다, 과학자들은 증거보다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한다, 기타 등등―은 이제 점점 더 우파의 특성이 되고 있다.

 

구 좌파적 입장에서 글을 쓴 <<소셜 텍스트>>의 편집자들은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그 사건은 진보 진영 내부의 갈등인 것으로 가장 적절히 간주된다. 촘스키와 (후기) 라투르와 마찬가지로, 소칼은 탈근대주의가 자신들의 가치들에 대한 합리적인 옹호를 조직할 수 있는 진보주의자들의 능력을 훼손했고,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그들의 가치들에 대한 비합리적인 옹호를 조직할 길을 닦았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좌파가 과학을 회복시키고 보수주의자들에 맞서는 투쟁에 동원할 시기가 도래했었다. 결국 그것은 전통적으로 과학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작용했었던 탈근대주의를 공격하는 것을 의미했다.

 

과학자들과 대중으로부터 공히 심한 비판을 받은(인문학자들은 그 날조 사건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소셜 텍스트>>의 편집자들은 여러 가지 근거에 의거하여 소칼의 터무니 없는 논문을 출판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첫째, 다른 학자들을 검열하는 것은 그들의 업무가 아니었다. 어떤 학자가 논문을 발표할 때, 그는 그들의 신뢰성을 위태롭게 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결정이다. 둘째, 그들은 물리학자들이 아니었고, 그래서 양자중력 같은 (심지어 물리학자들에게도) 모호하고 어려운 이론에 탈근대주의가 어떻게 적용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업무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소칼의 업무였다. 세째, 그들을 속임으로써 소칼은 자신의 신뢰성과 자기 동료들의 신뢰성을 훼손했다.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나쁜 신념은 그럴 수 없다. 소칼의 논문과 후속 논평들은 그가 탈근대주의에 관해 물리학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소칼의 논문을 출판했다는 것이 편집자들을 나쁘게 말하는 것이었다면, 그 논문을 작성했다는 것은 소칼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했던 것인가? 그들은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이지만, 그는 거짓말쟁이였다.

 

과학 전쟁과 관련하여 약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 주제의 정치적 차원과 도덕적 차원을 전면적으로 살펴보는 이점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려 깊고 진지한 입장들을 희화화할 위험을 겪게 된다. 내가 연작 전체에 걸쳐 보여주려고 했듯이, 과학에 관한 엄청나게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매우 단순한 환원주의적 서사들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소칼의 날조 사건은 확실히 <<소셜 텍스트>>의 편집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과학기술사회학(STS)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탈근대주의는 사회 또는 과학과 관련된 이론이 아니라, 문학과 관련된 이론이다. "과학 전쟁"이 대체로 STS의 지형에서 치뤄졌지만, 그 논쟁은 STS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에서의 도덕과 이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과학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예증하며, 과학의 본성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명시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