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데이비드 머민: 오늘의 에세이-씨비즘으로서의 큐비즘: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5. 7. 6.

 

씨비즘으로서의 큐비즘: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

QBism as CBism: Solving the Problem of "the Now"

 

――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

 

우선 양자 기초에서 비롯된 안개를 일소하기 위해 제시된 큐비즘적 과학관은 고전 물리학의 오래된 수수께끼도 해결한다.

 

1. 큐비즘과 씨비즘(QBism and CBism)

 

<<피직스 투데이(Physics Today)>> 논평란에 실린 한 편의 글에서, 그리고 크리스 푹스와 뤼디거 샤크와 함께  더 주의깊게, 광범위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나는, 과학의 목적은 "현상의 실재적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의 다양한 양태들 사이의 관계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닐스 보어의 언명을 문자 그대로 간주한다면 양자 역학에 대한 해석에서 오래된 완강한 문제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는, 과학을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의 사적 경험을 조직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바라보는 견해, 즉 푹스와 샤크가 큐비즘이라고 부르는 견해가 양자 기초 문제들 이상의 것을 명료하게 만든다고 강조한다. 과학이 주체(과학의 사용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저 객체(그런 사용자에 외재적인 세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고질적인 혼동도 제거할 수 있다.

 

전통적인 고전적 환경에서 큐비즘적 과학관이 사용될 때, 나는 개념적 난제들을 풀 수 있는 큐비즘의 능력이 뜻밖에도 양자 물리학이 어떤 명시적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쟁점들에게까지 확장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큐비즘을 씨비즘이라고 부른다. 큐비즘과 씨비즘은 과학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이중 용어법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씨비즘이 "지금"에 관한 오래된, 짜증나게 하는 그리고 전적으로 고전적인 문제를 처리한다고 주장한다.

 

II. 지금 문제(The Problem of the Now)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에 관한 보고문에서 지금 문제를 간결하게 서술했다. "아인슈타인은 지금 문제로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에 대한 경험이 인간에게 특별한 무언가, 과거 및 미래와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지만, 이런 중요한 차이가 물리학 내에서는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경험이 과학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에게는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하게도 단념해야 할 문제인 듯 보였다."

 

여기서 쟁점은 상이한 장소들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상이한 사건들의 동시성은 준거틀에 의존한다는 점이 아니다. 쟁점은 물리학은 단일한 사건에서 국소적인 지금에 관해 무엇이든 말할 것이 전혀 없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명백한 침묵은 동시성의 상대성이 없더라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상대성 이론 이전이든 상대성 이론 이후이든 간에, 물리학은 한 시점과 다른 한 시점 사이의 관계들을 다룰 뿐이다. 그럼에도 국소적인 현 순간―지금―은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자체적으로 명백하다. 지금에 대한 내 경험은 원초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금이다(Sum; ergo Nunc est). 물리학에서 그렇게 명백한 것에 대한 여지가 어떻게 없을 수 있는가?

 

나의 지금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내게 특별한 사건이다. 그 지금은 현실적인 현재 상황이 됨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여타의 사건들과 구별지어진다. 나는 그것을 내가 기억할 수만 있는 이전의 사건들(이전의 지금들) 및 내가 예상하거나 상상할 수만 있는 이후의 사건들과 구별지을 수 있다. 나의 기억된 과거는 나의 지금에서 끝난다. 어느 특수한 사건의 나의 지금으로서의 지위는 어느덧 지나가 버리는데, 그것은 후속적인 지금들의 출현과 함께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앞 문단의 인간적 내용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아무리 명백하더라도, 그런 지금은 시공간에 관한 친숙한 물리적 서술에서 부재한다. 물리학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경험되는 모든 사건들은 시간꼴(time-like) 곡선을 구성하고, 그래서 어떤 시공간의 점과도 관련하여 그것에 지금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내 경험은 나의 세계선(world-line)이 나의 지금을 나타내는, 빛나는 한 점 같은 것에서 끝나야 한다고 시사한다. 내 세계선이 더 많은 내 경험을 수용하면서 성장함에 따라 그런 발광점은 시간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내 시공간 궤적에 관한 통상적인 물리적 서술에는 이것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지금 문제는 그런 발광점의 배후에 놓여 있는 새로운 물리학을 발견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을 하나의 "환영" 또는 "현재 순간의 쇼비니즘"으로 일축하는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대조적으로, 세계에 관한 우리의 물리적 서술에 지금에 대한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오류들을 식별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

 

III. 오류들

 

두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첫 번째 오류는, 앞에서 강조했듯이, 누구든지 과학을 사용할 때마다 과학은 객체뿐 아니라 주체도 갖는다는 점을 인정하기 꺼려하는 깊이 뿌리박힌 우리의 성향이다. 우리 각자가 물리학이 전하는 이야기로부터 자신―경험하는 주체―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잘 확립된 습관이다.

 

두 번째 오류는 우리 각자가 엄청나게 유용한 개념적 장치라고 꺠닫게 되는 4차원 도표로부터 시공간을 보어가 "실재적 본질"이라고 부른 것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내 도표 덕분에 나는 내 과거에 속하지 않거나 나의 직접적인 주의를 벗어난 사건들에 대한 나의 가능한 추측, 연역 또는 예상들과 더불어 내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나의 추상적 도표를 객관적 실재와 동일시함으로써 나는 어리석게도 그 도표를 내 삶이 영위되는 4차원 영역으로 간주하게 된다.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은 복잡한 연장된 존재자들이며, 내 경험에 시점들을 할당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시계들은 연장된 거시적 장치들이다. 나의 현실적 경험을 연속적인 시공간에서 수학적 점들의 집합체로 나타내는 것은 뛰어난 전략적 단순화이지만, 우리 경험을 나타내려고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삽화를 경험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IV. 개인의 지금

 

내가 나의 지금 경험을 실재―내게는 분명히 그렇다―로 간주하고, 시공간은 그런 경험들을 조직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추상적 도표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물리학에서 지금의 지위는 명백해진다. 어느 순간에도 나는 나의 과거 경험을 내 도표에서 나의 지금에서 끝나는 연속적인 시간꼴 곡선으로 그릴 수 있다. 나의 지금이 기억 속으로 물러남에 따라 그것은 더 이상 실제 상황이 아니게 되며, 나의 팽창하는 도표 속에서 후속적인 지금들로 대체되게 된다.

 

내 도표에서 내 궤적을 추적하는 내 지금의 운동은 내 시계가 나아감에 따라 내가 그 도표에 기록할 더 많은 경험을 획득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반영한다. 나의 지금은 내 시계에서 지나가는 각 초 동안 개인적 경험의 일 초에 나아간다.(* [...] 시간은 우리가 많은 상이한 시계들이 나타내는 시간들을 배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추상물이다. 동일한 일단의 사건들에 놓여 있는 시계들은 명확하게 서로 비교될 수 있다. 여기서 두 개의 관련된 시계는 나의 기계적(또는 전자적) 시계와 나의 내부적인 생물학적 리듬이다.)  상대성에 따르면 이것은 경험의 일 초가 내 궤적을 따라 가는 고유 시간의 각 초 동안 경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진행 중인 경험과 내 도표의 기하학적 특징 사이의 이런 연결은, 누군가가 "지금 몇 시 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내 시계를 보면서 읽는 것을 보고한다는 사실에 대한 도표적 표상일 뿐이다.

 

V. 많은 사람들의 지금

 

과학은 "우리 경험의 다양한 양태들"을 서술하고 조직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라는 인식은 물리학에서 누구이든 어떤 개인의 지금에 대한 자리를 분명히 제공하는데, 그의 경험은 어떤 단일한 시간꼴 궤적을 따라 이어지는 일련의 국소적인 사건들로 표현될 수 있다. 지금과 관련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많은 상이한 사람들의 지금들을 관련시키는 데에만 놓여 있을 수 있다. 여기가 상대성이 이야기에 편입되는 지점이다. 상이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이한 장소들에 존재한다. 동시성에 대한 전체적으로 일치되는 것―뉴턴의 "절대적이고, 참이며, 수학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면, 상이한 사람들의 상이한 지금들을 정렬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런 것은 전혀 없다고 가르쳐주었다. 두 사람의 두 개의 지금 경험이 공간꼴(space-like)로 분리되어 있다면, 그들이 단일한 전체적인 지금에 속하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개인적 관행의 문제이다. 그런데 공간꼴로 분리된 사건들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개별적 경험들이 동일한 지금을 공유하는지 여부에 관해 두 사람이 상이한 관행을 갖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낳지 않는다.

 

상이한 두 사람의 지금들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근본적인 제약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동일한 사건에 함께 있을 때, 마침 그 사건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지금이라면,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지금이어야 한다. 어느 개인의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인간 경험의 명백한 특징이다. 당신과 내가 직접 상호작용―소통―할 때, 내게는 실시간의 만남이 당신에게는 기억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나, 또는 거꾸로의 상황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금이다만큼 과학의 많은 지각 주체들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이다.

 

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마다 존재하게 되는 나의 지금과 당신의 지금의 이런 공통성은 우리의 지금들이 두 번의 연속되는 만남들 각각에서 일치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다음에 다시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역사 전체에 걸쳐서 사람들이 헤어져서 다시 만나는 매우 작은 상대 속도에서는 상이한 개별적 지금들의 진전에 미치는 상대론적 시간 지연의 복잡한 효과는 사적인 지금 경험들 각각의 심리학적 너비(최소한 수 밀리초)에 비해 전적으로 무시할 만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에 무관하게, 그리고 그 여행이 얼마나 길었는지에 무관하게,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우리의 지금들이 일치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의문을 향유할 수 있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나의 개인적 시간, 즉 나의 지금의 진행은 나의 고유 시간, 즉 내 시계가 나타내는 시간과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상대성의 기본적인 사실이다. 이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두 명의 쌍둥이를 고려하자. 어떤 관성틀에서 집에 함께 있을 때 그들의 지금들은 일치한다. 그 다음에 앨리스는 광속의 4/5의 속력으로 근처 항성으로 비행한 다음에 동일한 속력으로 밥의 집으로 귀한한다. 밥의 시계가 그들이 헤어져서 다시 만날 때까지 십 년을 전진했다면, 앨리스의 시계는 육 년을 전진했다. 그들의 지금들 각각은 각자가 휴대하고 있는 시계와 보조를 맞추어 전진했기 때문에, 그들의 재회 순간은 그들 둘 다에게 계속해서 지금이 된다.

 

그래서 지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턴의 절대적이고, 참이며, 수학적인 시간에 의해 제공되는 시공간을 채우는 층들이 많은 상이한 사람들이 많은 상이한 시공간 도표들에서 다중으로 교차하는 많은 시공간 궤적들의 섬유상 구조로 응축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각자 독자적인 경험과 독자적인 지금을 갖게 된다.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우연히 단일한 공통 사건에 함께 있을 때마다 그들의 궤적들은 그들의 도표들 모두에서 교차한다. 지금은 "우리 경험의 양태들" 가운데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은 그런 섬유상 구조의 점들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지금들과 그것들의 모든 상관관계들에 관한 완전한 물리적 서술을 제시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것이다.

 

앞선 세 문단의 내용은 물리학은 단일한 사건에서 국소적인 지금에 관해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오해를 논박한다. 물리학이 우리의 지금들에 관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은 우리 경험과 일치하고, 그래서 심지어 물리학은 지금에 대한 우리의 미래 경험들이 상대론적 속력으로 성간 여행을 하는 세계에서도 계속해서 이런 특징들을 가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VI. 결론

 

푹스와 샤크의 큐비즘의 설명력은 양자 기초의 쟁점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 문제는 물리학의 표현 형식을 자연 세계의 실재와 부적절하게 동일시한 것과 더불어 고전 물리학이 지각 주체의 경험을 오랫동안 배제한 것에서 비롯된다. 현 순간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 각자의 경험의 부인할 수 없이 실재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우리 경험을 나타내며 지금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듯 보이는 유용한 표현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은 환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표현 형식과 표현 형식이 서술하도록 구성된 경험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은 헤어질 때와 재회할 때에 일치하는, 상대론적으로 여행하는 쌍둥이들의 지금들을 설명한다. 이것은 과학에서 지금에 대한 자리가 사실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빠졌던 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빠졌던 것은 과학의 목적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에 질서와 정합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분간 이것은 씨비즘주의자들에게만 명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