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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스탕제: 오늘의 에세이-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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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0.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

The Cosmopolitical Proposal

 

――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

 

우리는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불러 일으키려고 하는 하나의 제안, 즉 추리를 "감속"시킬 수 있고, 우리를 동원하는 문제와 상황들에 대한 약간 상이한 의식을 유발할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방식 외에는 어떤 다른 검증도 요구하지 않는 제안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가? 이 제안은 현재 "이론"이라는 관념에 명확히 표명되는 권위와 일반성에 관한 쟁점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이 의문이 특히 중요한 까닭은, 내가 특징짓고자 하는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주로 "제너럴리스트"를 대상으로 고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제안은 실천가들이 조작하는 구체적 상황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그것은 스스로를 어떤 이론을 "적용"할 과업을 부여받은 부하로 규정하거나 자신의 실천을 이론에 대한 예시로 파악하는 일반화 이론가들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을 습득하게 된(그리고 이것은 코스모폴리틱스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실천가들을 필요로 한다.

 

이 논문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 즉 정치적 제안과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의 구별짓기와 분리할 수 없는 본성이 이런 어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으로 부를 수 있는 것("사물들"에 관한 "실증적" 지식 관련 쟁점들이나 실천들의 정치화)에 해당하는 제안들이 적실해질 때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도 적실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제안은 오늘날의 대부분 구체적인 상황들에서 단연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정치생태학과 관련된 "정치적 전환"을 이미 달성하여 이론들이 아니라 그것들과 관련된 권위를 조소하게 된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제와 관련된 이 논문의 다른 한 주제는 모든 가능한 오해와 무엇보다도 매우 예측 가능한 이론적 통제에 노출되는 이런 유형의 제안의 취약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칸트적 술어를 취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말을 듣게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적 종류의 기획―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시민권에 따라 전세계적 시민 사회의 독자적인 구성원으로 예상할 수 있을 "영구적 평화"라는 기획―을 향한 코스모폴리티즘(cosmopolitism)이라는 고대의 주제를 갱신했던 사람은 칸트가 아니었던가? 이런 점에서 나는 유죄를 인정해야 한다. 1996년에 7권의 <<코스모폴리틱스>> 연작이 될 것의 제1권에 관해 작업하면서 나는 칸트의 용법을 알지 못했는데, 말하자면, 이 술어가 내게 다가왔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제시되듯이,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칸트 또는 고대의 코스모폴리티즘과의 어떤 관계도 명시적으로 부인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설명하고 싶은 대로의 코스모스는 고대 시민들이 그들 근거지의 모든 곳에서 스스로를 내세운 세계와 거의 아무 관계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시민이 되는, 최종적으로 통일된 지구와도 거의 아무 관계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덕분에 내게 깊은 인상을 준 힘을 지닌 채 현존할 수 있게 된 개념적 인물, 즉 백치(idiot)와의 유사성을 나타낼 것이다.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 백치는 그리스어를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문명화된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사람이다. 투명성과 익명성(화자들의 교체 가능성)이라는 이상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소통 형식에서 배제된 반(半)사적인 언어를 가리키는 "방언(idiom)"이라는 낱말에서도 같은 의미가 드러난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차용되어 개념적 인물로 변용된 들뢰즈의 백치는 항상 타자들을 감속시키며, 상황이 제시되고 긴급 사태들이 사유나 행위를 동원하는 합의에 의한 방식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런 제시가 거짓일 것이거나 비상 사태들이 거짓말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유를 묻지 마라. 백치는 응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쟁점을 논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백치는 하나의 현전이거나 또는, 화이트헤드가 서술했었을 것처럼, 하나의 틈새를 제공한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헤아릴 수 없는 당혹감을 산출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유명한 헤겔적 밤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백치는 우리가 감속하기를 요구하고, 우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을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간주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코스모폴리틱스적이라는 낱말은 걱정에 사로잡힌 내가 감속할 필요가 있었던 순간에 내게 다가왔다. 나는,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서, 내가 소속된 전통의 약점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알게 되었던 것―우리가 특별히 자랑하는 한 실천 유형을 모든 것에 타당한, 보편적인 중립적 열쇠로 변형시키는 것―을 재생산할 위험에 처해 있었을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과학을 정치화하는 것(putting science into politics)"에 많은 페이지를 바쳤었다. 이른바 근대 과학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특히 뛰어난 것인 듯 보였다. 누가 무엇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누가 무엇의 대변인일 수 있는가? 누가 무엇을 대표할 수 있는가? 그런데 나는 내가 작업하고 있던 정치적 범주가 우리 전통의 일부이며 그 전통 특유의 발명적 자원에 의존한다는 점을 망각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중립적인" 인류학적 범주를 찾는 것이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류학은 "인간들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찾아내고자 하는 야망일 뿐 아니라 우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이 "합의된" 제안이라는 점을 단언하는 "정치적"이라는 술어를 유지하기로 선택했고, 그것을 "코스모스"라는 불가사의한 술어에 접합하기로 선택했다. 이것이 그 제안이 오해에 열려 있는 지점으로서 정치는 "코스모스", 즉 "좋은 공동 세계"가 현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추론하고 싶은 칸트적 유혹에 빠지기 쉬운 지점인데, 그 관념은 바로 이런 공동 세계의 건설 속도를 늦추는 것, "좋은"이라는 낱말을 발설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찰할 여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세계에 관한 문제, 반향이 전지구적인 듯 보이는 문제, 위협 그리고 쟁점들에 관한 문제일 때, 주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지식, 즉 "우리의" 기술적 장치에 의해 산출되는 사실들뿐 아니라 "우리의" 실천들과 관련된 판단들이다. 선의와 "타자에 대한 존중"은 이런 차이를 제거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지구인의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미명으로 차이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들이 "행성적 쟁점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광신적인 맹목성이나 이기심에 대한 후속적 비난을 막을 것이다.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좋은" 공동 세계에 대한 "좋은" 규정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절차에 대한 "좋은" 규정을 제시할 수 없다. 이런 비상 상태의 기후 속에서 결코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투덜거리면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도된 것인 한에 있어서 그 제안은 "백치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코스모스는 어떤 특수한 전통이 구상할 그런 것으로서의 어떤 특수한 코스모스, 또는 세계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것들 모두를 포괄하도록 고안된 기획을 가리키지 않는데, 다른 무언가에 의해 포괄되기를 거부하는 것들을 포괄하기 위해 무언가를 지정하는 것은 항상 나쁜 착상이기 때문이다. 코스모폴리틱스적이라는 술어에서 코스모스는 이런 다중의 상이한 세계들에 의해 구성되는 미지의 것과 그것들이 결국 해낼 수 있는 명확한 표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최종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의도된 평화, 즉 벗어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그것으로 하여금 자체를 모든 것들의 수렴점을 구성하는 것의 순전히 개별적인 표현으로 인식하도록 요구할 힘을 갖춘 초월적 평화에 대한 유혹에 대립되는 것이다. 코스모스 자체를 대표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그래서..."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의 의문은 주로 "그래서..."의 달인인 사람들, 즉 다량의 "그래서..."로,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스스로를 모든 사람과 관련된 문제들의 대표자로 선의를 갖고서 당연히 규정하는 우리들에게 제기된다.

 

평등화(equalization) 장치와 등가성(equivalence) 장치를 엄밀히 구분한다면 코스모스는 평등화 장치의 조작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등가성은 공통 척도를 의미하고, 그래서 위치들의 교환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평등은 어떤 "그래서..."도 산출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정지되게 만든다. 여기서 조작하기는 만들어내기, 즉 정치적 발언자들이 어떤 상황을 논의하는 방식에 부가되면서 그것의 기반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그들에게 반성적이거나 자기고발적인 것이 아니라 실정적인 것인 관심사를 주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발언자들에게 자신들이 논의하는 상황을 스스로 지배하지 못한다는 느낌, 정치적 장은 정치적 발언권이 없고 가질 수 없거나 또는 갖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그늘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을 불어 넣는 문제이다. 이것은, 요구에 대해 아무 응답도 없을 때 정치적 선의는 매우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을 표현하라, 자신의 반대 의견, 자신의 제안, 우리가 건설하고 있는 공동 세계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표현하라."

 

그러므로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프로그램과 아무 관련도 없으며, 아무리 정당화되더라도 자기 확신을 위협하는 일시적인 공포와 훨씬 더 관련이 있다. 크롬웰(Cromwell)의 외침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공포이다. "내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는 당신들에게 호소합니다. 당신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오." 자기확신적이고 보복적인 진리로 가득찬 자신의 청교도 형제들에게 연설하는, 아일랜드의 잔인한 정치인, 고문가 크롬웰을 인용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공포의 스침은 마땅한 것이 아니고, 어떤 특수한 영혼의 크기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결정성의 양태, 즉 아무것도 당연히 도출되지 않는 사건의 양태, 어떤 "그래서..."도 없는 양태로 일어나지만,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물려받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것을 대면한다. 확실히, 크롬웰은 기독교도들로서의 그의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의 연설은, 성공했다면, 그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현전이 존재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어떤 특수한 메시지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의 역할은 아무 상호작용도 없는 현전의 역할인데, 도중에 그의 현전이 고려되어야 하는 어떤 협상도, 어떤 거래도 초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하느라고 바쁜가?"라는 의문이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하는 좋은 이유들의 토양 속에 틈새를 만듦으로써 이 공포의 사건에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을 결부시키는 것은 그런 공포가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틈새는 빠르게 메워진다. 훨씬 더 나쁘게도, 그런 공포를 침묵시키는 것은 흔히 망설임을 없애버리는 부가적인 야비함으로 우리의 많은 이유들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필경사 바틀비(Bartleby)의 말에 직면한 한 변호사가 전해주듯이, 이것이 허만 멜빌(Herman Melville)의 유명한 단편 소설의 요지이다. 바틀비라는 인물은 그의 고용주에 주어진 무서운 불가사의, 시험적 추상물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를 죽이게 되는 무관심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탈선 때문에 투옥된 그는 먹지 않는 편을 택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 불가사의에 대한 변호사의 반응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그것과 씨름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대단히 심란해지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틀비가 어떤 정상으로의 복귀를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바틀비가 교란하는 사회적 게임의 규칙을 거부할 수 없다. 그는 바틀비의 공동 세계로의 복귀 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상상할 수 없다. 고객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이 게으른 필경사의 거부에 그들이 기분이 상할 때, 그는 바틀비의 "백치짓"을 그들과 공유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것이 그를 야비함으로 몰아넣는 것일 것이다. 그는 이 무책임한 남자의 운명을 씻어내기 위해 자기 사무실에서 물러나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대신에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 선의에 경계해야 한다. 정치적 각도에서 우리가 고려하는 문제들에 코스모폴리틱스적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모든 사람이 마침내 수용해야 하는 해결책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포의 외침 또는 백치의 중얼거림이 어떤 정치적 쟁점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조립체에서 "집단적으로" 들릴 수 있게 되는 방식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백치도, 갑자기 겁을 먹은 크롬웰도, 바틀비에 사로잡힌 변호사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들의 넋을 잃게 하는 집요한 의문에 어떻게 자리를 제공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이런 집요함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 코스모스, 우리의 서명인 "정치"가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 이런 정당성에 대해 여전히 개의치 않는 것의 "현전 속에서" 자체의 정당한 이유들을 구성한다. 그것이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이다.

 

나는 이런 "현전 속에서"라는 낱말에 의미를 부여할 구체적인 일례를 인용하고 싶다. 그것은 동물 실험이라는 현재 정치화된 쟁점과 관련된 것이다. 무익하거나 맹목적인 잔인함 또는 농장 동물의 족육(足肉) 지위로의 체계적인 환원, "학대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다중의 시례들은 제쳐 놓고,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실험 거부와 정당한 대의―예를 들면, 전염병에 맞서는 투쟁―가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어려운" 사례들이다. 인간의 이익과 각 유형의 동물에 가해지는 고통(침팬지의 고통은 쥐의 고통보다 더 큰 것으로 "간주된다") 둘 다를 "측정하기" 위한 가치 척도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적 등가성 장치는 모든 종류의 야비함을 낳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결과는 어떤 종류의 집단적인 시장 결정에 맡긴 채, 각자 가장 정당하다고 느끼는 이익의 척도를 조작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인데, 상황에 고유한 어포던스(affordance)를 시험하여 신뢰하고자 결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실험이 동물에 실행되는 실험실에서는 그런 동물을 말하고 언급하는 모든 종류의 의식과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연구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를 증언한다. 지식의 진보, 감상성에 맞서 규정된 합리성 그리고 방법의 필요성에 관한 거대 서사들이 그런 의식들의 일부인데, 그것들은 "나는 무엇을 하느라고 바쁜가?"라는 의문이 집요하게 괴롭히는 틈새를 메워 버린다. 실험의 정당성에 관해 "결정하기"의 필요성의 상관물은 이런 보호 조치들에 맞서도록 정향된 제약의 발명일 것인데, 이것은 관련 연구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결정의 희생자들로 판명될 것들의 "현전 속에" 억지로 처하게 하여 결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일종의 자기규제에 해당하지만, "자기"를 하나의 쟁점으로 제시하는 이점, 다음과 같은 의문의 미지의 요소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현재의 결정이 필요로 하는 듯 보이는 그런 종류들의 보호를 적극적으로 포기한다면 연구자는 "독자적으로"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이런 유형의 의문은 내가 "행태-생태학적(etho-ecological)"이라고 부르는 시각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에토스(ethos)―어떤 존재자에 고유한 행동 방식―와 오이코스(oikos)―그 존재자의 서식지와 그 서식지가 에토스와 관련된 요구들을 충족시키거나 그것들에 대항하는 방식 또는 원래의 에토스가 위험을 무릅쓸 기회들을 제공하는 방식―의 불가분성을 단언한다. 불가분성은 반드시 의존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토스는 자체의 환경, 자체의 오이코스에 부수적인 것이 아닌데, 그것은 항상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자에 속한다. 에토스는 환경을 변환시킴으로써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전혀 변환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에토스도 자체적으로는 독자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거나 독자적인 이유들을 지시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존재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또는 무엇을 할 수 있게 될지 결코 알지 못한다. 환경은 제안하며, 존재자는 처리한다고, 즉 그 제안에 비교행동학적 의미 작용을 부여하거나, 아니면 부여하기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동물 실험의 정당성 또는 심지어 필연성을 단언하는 연구자가 자기 결정의 희생자들의 "현전 속에서"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오이코스에서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궁극적인 생성은 연구자 자신의 생성일 것이라는 사실인데, 바로 이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고, 내가 코스모스라고 부르는 것이 거명될 수 있다. 국소적으로, 생태학적 요구가 비교행동학적 변환을 초래한다면, 모순적인 듯 보였던 것들―연구의 필요성과 그것의 희생자들에 대한 결과―사이에 분절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나의 "우주적" 사건.

 

이 사례는 내가 백치는 명확히 표명된 지식을 부인하지 않고,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매도하지 않으며, 그리고 명시적 지식을 초월하는 지식의 숨은 원천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까닭을 가리킬 것이다. 제시되는 제약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백치적인데, 그것들은 실험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긴급 사태들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중재자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가설적 기반(실패할 수 있을 것이다)에 의거하여 이런 실험자들의 에토스―동물 실험의 반대자들이 문제라고 규정하는―가 "무균의" 환경을 필요로 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것들은 그런 환경에 대한 권리를 그들에게 부여하기를 거부하는데, 우리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지만, 당신이 그것의 결과을 전적으로 고찰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 사례를 무감각증이 상황의 본질적인 요소인 듯 보이는 다른 사례들에 확장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예를 들면, 생산 공장들의 폐쇄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정리 해고가 경제 전쟁의 가혹하지만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에 우리가 동의하도록 요구하는 담론이 제시된다. 우리 산업체들이 경쟁력이 요구하는 "희생"을 치를 수 없다면, 그것들은 패배당할 것이고 우리 모두가 지게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그 경우에 실업자들은 전쟁 희생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로 집단적으로 예우받고 배려받아야 하는데, 의식들은 그들의 보상, 훈장, 매년 벌이는 행진, 기념패, 어떤 금융적 이익도 결코 상쇄할 수 없는 국가의 부채 인정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물들이다. 그런데 경제 전쟁에 의해 부과된 모든 고통과 절단이 "찬양받"고, 기념되고, 망각과 무관심으로 전락하기 못하게 적극적으로 방비되며,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신속한 진부화를 수용하고 끊임없는 자기 재활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지식 사회"의 경우에 필요한 유연성과 모든 것의 격렬한 유동화라는 주제에 무감각해지지 않아야 한다면 일어날 반향을 상상하자. 우리가 평화의 전망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전쟁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다른 세계에 대한 프로그램, 이유들 사이의 대조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쟁을 우리 공동 운명의 구성으로서의 경제 전쟁에 대한 "행태-생태학적"인 안정된 수용의 진단에 관여하기 때문에 "백치적"인 제안이다.

 

이제 나는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을 정치생태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전개하고 싶다. 정치생태학은 그것 자체로 이미 생태행동학적인 도박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국가 역할의 변환을 함축하는데, 그 변환은 공무원의 에토스를 일반 이익에 관한 이미 구성된 규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과 그것을 구체적인 환경에서의 쟁점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와 결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중을 섬긴다는 것은 그 쟁점을 회피하거나 미리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일반성도 일축하는 오이코스를 진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 아니라(공표된 좋은 의도들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았던 것처럼), 우리가 유망하다고 간주했었을 해결책들이 실패, 기형 또는 전복인 것으로 판명되는 방식에 대한 적극적인 기억의 강화를 요구한다.

 

그런 정치생태학 조립체들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관련 연구자들의 에토스도 변형되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적극적이"게 만들어서 쟁점의 형성과 그것의 구상된 해결책들에 있어서 그들이 아는 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차이에 관한 실험에 관여하게 만드는 양태로 그들이 아는 것을 구성하고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적실성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지 않다면 기억이나 경험은 결코 강화될 수 없다. 이것은 과학의 방법론적 중립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험실 연구자들이 작동하는 것, 적실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에 열렬한 관심이 없었고, 방법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어떤 영향도 미칠 가망이 없는 관측들을 다루었다면, 실험 과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생태학과 관련된 행태-생태학적 도박은 일반 이익이 지배적이라는 점을 확신시킬 책임이 있는 어떤 외부 중재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 협약의 출현 가능성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 도박은 "전문가들", 반대하고 제안할 수단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규합하는 문제적 상황들이 그런 사건을 유발할 힘을 갖고 있는 과정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애초에 나는, 내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종속물로 규정하는 이론들의 힘을 이미 무시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면, 내가 제시한 어떤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상정했다. 이론의 힘은 어떤 쟁점을 그냥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례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힘은 이론의 대표자들이 쟁점에 그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부여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므로 행태-생태학적 도박은 자신을 과학자로 만들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이론이나 방법의 대변인 지위를 포기할 수 없는 연구자와 관련된 에토스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과학자가 아니게 된다"라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입장을 선호한 환경(오이코스)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정치생태학은 "유토피아"로 불릴 수 있을 것의 전망 속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종류들의 유토피아가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약속들에 호소하여 이 세계 없이 지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그리고 여기서 나는 이것이 맞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의문들로 이 세계를 고려하며 이 세계를 "근사적으로 정상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표어들을 무시하도록 촉구한다. 이 경우에 유토피아는 우리로 하여금 이상에 호소하여 이 세계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데, 유토피아는 아무도 영향을 받지 않게 내버려 두지 않는 변환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시사하는 해석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단순한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나타내는 모든 "할 필요가 있을 뿐일 것이다" 진술들을 의문시한다.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이런 유형의 유토피아를 훨씬 더 한층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어떤 명제도 반증될 수 있으며, "정치를 발명한" 우리가 정치를 대체로 공허한 게임―우리 세계들을 만들어내거나 파괴하면서 작동하고 있던 것을 무시하는―으로 환원시키는 수단도 만들어내는 위험한 세계에서 간직한 채 살아가는 기억의 무게를 지고 있다.

 

그러므로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의 한 양태는 우리가 타협해야만 하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꽤 놀라운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특수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이차 세계대전 시기에 조지프 니담(Joseph Needam)의 의도였는데, 그때 그는 왜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라고 불리는 거대한 격변의 기원에 중국이 흡수했었던 기술적 발명품들이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차이, 세계를 서술하기 위한 수학의 다산성의 거대한 발견을 이루어낸 것은 물리학이었다고 말한다. 니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발생학자로서 그는 그런 다산성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정말 알고 있었다. 갈릴레오나 뉴턴의 작업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설명될 필요가 있던 것은 그들이 "사건"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새로운 시대"와 관련이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니담이 선택한 설명은 당대의 유럽 기업가들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존재론적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점점 더 늘어나는 이종의 비인간들과 두려움 없이 연결하는, 점점 더 넓어지는 연결망들을 적극적으로 구축했다. 갈릴레오는 사실상 연결망들의 구축자였다. 그의 지식은 무엇보다도 매끈한 공이 경사면을 따라 구르는 방식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런 지식은 그의 망원경 관측 결과와 더불어 그로 하여금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적 가설을 뒷받침하는 논증들을 부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권위에 관한 거대한 의문, 신앙에 대한 진취적인 지식의 권리에 관한 거대한 의문, 철학적 전통과 신학적 전통을 파괴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들의 역할에 직접 관련시켰다. 마지막으로, 경쟁 국가들로 파편화된 유럽에서 갈릴레오의 유죄 판결은 아무것도 멈추지 못했던 반면에, 통일된 중화 제국에 살았었더라면 그는 아무것도 수행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했었을 것이다.

 

그들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기획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해 당사자들은 어떤 외재적인 것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말아야 한다. 공동 세계는 그들의 다양한 이질적인 연결들에서 자유롭게 창발해야 하고, 그런 창발에 대한 유일한 이유는 서로의 바퀴들에서 그것들이 구성하는 살들이다. 그런 연결은 역학과 초월성 없는 자유로운 창발이라는 이런 개념 사이에서 흔히 강조되었다. 기업가(그리고 소비자도 기업가이다)들은, 역학적 힘들과 마찬가지로, 부가적으로 "구성하고", 그래서 창발은 그들이 서로에 대해 구성하는 사실적 걸림돌들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각 기업가는 명료하게 규정된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확실히, 그들은 자신들을 전진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개방적일 것이지만, 오직 그것이 그들을 전진시키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 그들은 "기회"의 인간들인데, 그들의 노력이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세계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는 귀와 눈을 막고 있다. 자율적인 구성체로의 "시장"을 수학에 의거하여 서술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척도들(개인들의 척도들과 그들이 함께 창발하게 만드는 척도)의 단절인데, 시장은 경제학자들이 집단적 선과 비교하기로 선택할 함수를 극대화한다. 그렇다면 다른 한 구성의 원리에 호소하는 어떤 개입도, 어떤 이해도, 어떤 무시의 중단도 같은 가방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데, 그것들은 모두 자유 시장이 극대화하는 것(수학적 정리의 힘)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받을 것이다.

 

이것은 그린피스가 이해 당사자(stakeholder)를 그것이 "주주(shareholder)"―시장 지분을 갖는다는 것은 명확히 규정된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간 부적절한 술어임에도 불구하고 대조를 이루는 장점을 갖춘 술어이다―라고 부른 것과 대조할 때 분명히 이해한 것이다. 그 착상은 가담하고 참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창발하는 것, 결과, 반향, 경제를 구성하는 주주들의 이해관계들이 관여하는 모든 것에 의거하여 이루어진다. 요약하면, 그것은 기업가들(그들의 이해관계들,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에 의해 규정되는)을 전체의 자유로운 창발이 이루어지는 데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것, "어느 누구의 사업도 되지 말아야 하는 것에 개입하는" 사람들과 대조를 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는 물론 정치적인 것이고, 그래서 이런 점에서 수행할 권리는 여전히 첫 번째 정치적 낱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주주들의 문제―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여지가 전혀 없으며, 방어적인 입장의 가능성에 대한 여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험한 세계에서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의 첫 번째 의미는 이해 당사자들이 (아마도) 더 이상 그것을 동화시키거나 반증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더 이상 그것을 "인정하"거나 강제로 그들의 틀―아무에게도 속하지 말아야 하는 지식에 호소하는(시장이 "가장 잘 안다") 이해관계들의 자유로운 구성 아니면 초월자, 국가, 계획의 달갑지  않은 개입―에 맞출 수단이 없는 그런 식으로 정치생태학이라는 관념을 "완결하는" 것, 즉 명시적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구성을 통한 이해관계들의 창발의 기계적 본성을 강조했다. 나는 자연과학이 초월성 없는 창발에 관한 다른 모형들을 제공하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이 노선을 따라 계속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찾게 되는 첫 번째 모형은 물론 생물학적 모형인데, 민주주의적 삶은 각 구성원이 단일한 신체에 조화롭게 참여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오래된 매우 호소력 있는 관념임에도 불구하고 거부될 필요가 있는데, 모든 사람이 그것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진리와 충족을 찾아내야 하는 이 신체가 자연주의와 종교의 나쁜 반(反)정치적인 혼합물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신체가 이런 조화로운 양식으로 작동한다는 확실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들과 무관하게, 그것은 정치적 모형이 아니다. 신체에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의 생존이 달려 있는 상대적인 계층화이다. 질병의 경우에, 이런 계층화, 우리로 하여금 기능들에 의거하여 신체를 서술할 수 있게 하는 척도들의 분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신체를 서술하는 것은 흔히 훨씬 더 어렵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런저런 식으로, 인간 사회들에 현존하는 척도들은 상관되어 있는데, 개인은 자신의 사회를 생각한다. 생물학적 준거가 지배적일 때마다 사유는 온전한 사회에 대한 적, 독약이 되는데, 사유는 척도들을 뒤섞기 때문이다.

 

조화로운 구성이라는 이상은 기업 정신의 "이면"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어떤 불변자와 관련하여 기계적 모형의 극들을 반전시키는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체의 실현을 추구할 때 악몽이 되는 꿈(전통적 사회들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구성은 결과에 대한 어떤 정치적 사유, 의심 또는 상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신체는 코스모스, 완결된 코스모스이며, 백치, 의심하는 자의 투덜거림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게도, 사유의 기술과는 대조적으로, 직관, 본능 그리고 직접적 감각들이 찬양받을 것이다.

 

"우주의 질서"를 의미하는 코스모스는 서로 상쇄하는 수단을 갖추고 있는 명확히 규정된 이해관계들에만 발언권을 부여하는 "기업가적" 판본의 정치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한편으로, 이제 우리는 정치가 인간혐오적인 코스모스, 책략, 망설임, 차이, 과잉, 갈등, 인간의 무질서와 관련된 모든 것들과 대조적으로, "정직한" 또는 "온전한" 실재와 직접 소통하는 코스모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생물학적 조화의 모형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정치생태학의 창발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무심한 힘들의 기계적 구성과 신체를 형성할 때 자기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만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는 것의 조화로운 구성 둘 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물리학("자연을 통제할 수 있으려면 자연에 복종하라"라는 구호를 입증하는 법칙들에 관한 과학)과도 관계가 없고 생물학(신체의 삶 또는 죽음이 의존하는 결합 방식들에 관한 과학)과도 관계가 없는 창발에 관한 다른 한 모형이 존재한다. 이 모형은 화학자들의 기예에서 비롯되는데, 그들은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할 조작 수단에 의거하여 다루고 있는, 내가 화학적 "행위소"라고 부를 것의 다양성을 이해한다.

 

화학자의 기예에 관해 말하는 것은 일종의 응용 물리학으로 흔히 간주되는 현대 화학을 향한 전환이 아니라, 18세기 화학을 향한 전환을 의미한다. 행위소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기계적 모형과 대조한 계몽주의 사상가들(특히 디드로, 또는 노년 괴테)로부터 이어받는 방식인데, 그들은 화학을 반응의 가능성들을 도출해야 한다고 상정된 화학적 결합들에 대한 이론적 규정의 이상에 복속시키기를 거부했다. (이런 "이상"은 현대 화학에 의해서도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

 

<<사물의 성향>>이라는 프랑수아 줄리앙(Francois Jullien)의 멋진 책을 읽는다면, 화학자의 기예와 꽤 유사한 긴급 사태의 기예를 알게될 것이다. 줄리앙은 중국인들이 우리가 멸시하는 것, 즉 조작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을 서술하는데, 조작은 사물들의 성향을 이용하고, 사물들이 자발적으로 예술가, 전사 또는 정치가가 바라는 것을 달성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전개할 수 있게 하는 배열의 기예이다. 이 모든 것은 예속과 자유 사이의 어떤 대립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효험성에 집중하는 사유.

 

그것은 정치에 관한 기묘한 모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기묘한 느낌은 "좋은" 정치는 일종의 보편적 해방을 구현해야 한다―인간들을 자유로부터 분리시킨다고 하는 소외를 제거하면, 민주주의를 닮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는 우리의 관념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정치적 기예 또는 "기술"이라는 관념은 몹시 혐오스러운 것, 인간들을 진리로부터 분리시키는 책략이다. 화학자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 조립체가 그것과 관련하여 자발적인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단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무리를 관리하는 최소로 나쁜 방식이거나, 아니면 인간들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가능한 모습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민주주의는 존 듀이가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던 의문이다. 민주주의적 습관에 유리한 방식. 어떤 책략, 어떤 절차로 우리는 정치생태학을 감속시키고, 백치의 투덜거림―그것은 "고려될" 수 없기 때문에, 백치는 "중요한" 것을 반대하지도 않고 제안하지도 않기 때문에 매우 망각하기 쉬운 "더 중요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 효험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의 첫 번째 양태와 두 번째 양태 사이의 접합 지점에 이르게 된다. 정치생태학이 자체의 기계론적 환원 또는 생물학적 승화로부터 도박을 하는 그런 종류의 합의의 출현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작적 화학자들의 행태-생태학적 기예에 의해 제시되는 모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그것이 명백하게 만들 어떤 보편적인 인간적 진리에 대한 어떤 준거로부터도 해방되게 된다. 특히, 그것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 선의, 백치 또는 바틀비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당신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기를 바라신다면, 와서 스스로를 설명하고, 우리와 함께 주주가 되십시오."―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기예이고, 기예는 그것이 다루는 것으로부터 순종을 요구할 근거가 없다. 정치는 그것이 다루어야 하는 것을 다룰 수 있도록 할 수 있게 할 방식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방식들은 다른 전통들, 창발적 합의의 다른 기예들에서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협의" 체계와 그것이 내가 간략히 세계 질서라고 부를 것을 포함하는 방식으로부터 배운 것에 관해 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문제적 쟁점에 대한 공정한 해결책을 제공할 초월적 세계 질서의 현존을 가정하는 듯 보이는 이런 의례적 조립체가 그런 질서에 아무 권위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협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집결하는 사람들, 그런 질서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그것이 적용되는 방식에 관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질서는 주장이 아닌데, 그것은 참여자들에게 스스로를 "탈심리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의견의 "소유자"가 아니라 세계는 어떤 질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할 권위가 갖춘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반박하지도 않고 그 사람에게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협의는 세계 질서의 "현존 속에서" 진행되고, 창발되는 것은 그것의 전개로 인식된다.

 

옛 화학자들의 기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협의가 주인공들로 하여금 세계 질서가 여기서 적용되는 방식을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런 질서에 화학적 행위소들을 용해하여 인접하게 만들거나, 또는 그것들을 활성화하는 불에 노출될 수 있게 하는 산 용액["멘스트루(menstrue)" 용액]에 비견되는 역할을 부여한다. 요약하면, 그것은 효험성의 견지에서 특징지워질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모두 집결하게 되는 쟁점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아무도 옳지 않다는 사유를 활성화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생산하고 "가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두 번째 예로서, 나는 마술을 택할 것인데, 그것은 생존하고 있는 "진정한" 마녀들이 아니라 미합중국 활동가들, "신이교도적 마녀들"에 의해 실천되는 마술이다. 우리는 마술을 진지하게 간주할 수 있는가? 우리는 확실히 다양한 영역에서 마술에 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나치 예식의 흑마술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어떤 순간, 책, 응시,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마술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낱말이지만, 현대 마녀들의 경우에, 스스로를 마녀라고 부르고 자기 기예를 마술로 규정한다는 사실은 이미 "마술적" 행위, 페이지가 명확히 넘어가버린 것으로 가정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안정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행위들이다. 공적 합리성이라는 개념, 인간은 이상적으로 이성의 주인이라는 개념이 승리한(곧 인간 이성이 복속당하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식별한다는 주장들과 함께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사소성이 수반되는 승리) 시기에 마녀들과 마법은 제거되어 버렸고, 마술은 실격당했고, 비난받았으며, 파괴되어 버렸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걸려 있는 사건들을 촉발하는 기예를 감히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롬웰의 외침을 떠올리게 하는 비명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 퍼기게 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를 마녀들을 근절시킨 사람들의 후예로 만드는 낱말들을 사용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이고, 계속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치적 영역에서 미합중국 활동주의자 마녀들이 계발한 마술은 긴급 상황이 또 다시 초석을 이루는 실험적 기예인데, 그것은 생각하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라는 질 들뢰즈의 좌우명에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제의가 어떤 정령에 호소하듯이, 이 기예는 소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소집되는 것(마녀들이 여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취해야 할 결정에 대해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으며, 어떤 "예언적" 계시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효험성은 사유를 위한 동기가 되도록 주변에 모이게 되는 것에 권능을 부여하는 사유와 느낌의 체제를 촉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의의 효험성은 대답을 고무할 수 있는 여신의 현현이 아니라, 독자적인 지식, 희망, 두려움 그리고 기억들로 각 주인공의 관계들을 변형시켜서 전체로 하여금 각자가 개별적으로는 생산할 수 없었을 것을 생성할 수 있게 하는 정령의 현현이다.

 

"일상적인" 정치는 우리의 상상을 단절하는 극적인 양자택일의 대안들로 포위된다. 한편으로는 "벌거벗은 시민들"이 있는데, 그들 각자는 추정컨대 독자적인 무욕의 선의로 무장하고 있고, 모두가 일반 이익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이익의 승리에 무심한 기업주의적 이해관계의 승리가 있다. 일반성이 지배하는 한, 일반 이익이 정당하게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억지로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인 한에 있어서 이 대안은 불가피한 듯 보인다. 결합시키는 것이 확실히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당신의 "가치들"은 무엇인가?), 사실-가치에 의거하여 분해될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적실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유를 활성화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을 필요가 있는 쟁점일 때, 정치생태학적 시각에서 그런 대안은 치명적이다.

 

정치생태학은 적실한 것이면서 초연한 지식은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이러스나 홍수에 관한 객관적인 규정, 모든 사람이 수용해야 하는 초연한 규정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이 다양한 양태로 바이러스나 강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이다. 코스모폴리틱스적 시각의 경우에, 그것의 의문은 이중적이다. "선의의 인간들이 일반 이익을 위하여 결정할 것이다"라는 허구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풍경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가? 바이러스나 강을 사유를 위한 동기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그런데 또한 어리석게도 제안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창발적인 "공동의 설명"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실격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집단적 사유가 진전되어야 하는 그런 식으로 그것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가?

 

풍경 설계는 무대 설치의 기예이다.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 어떤 의견을 옹호하는 벌거벗은 시민들이 아니다. 그것은 역할들을 교란하는 문제, 쟁점의 설정에 교묘하게 참여하는 것의 문제이다. 여기서 전형적인 역할들에 의거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정치생태학적 견지에서 역할들은 각 쟁점을 둘러싸고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전문가 표상과 외교관 표상을 구별지을 것을 제안한다. 전문가는 자신의 실천이 논의되는 쟁점에 의해 위협받지 않는 사람인데,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적실한 것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역할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나타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고려될 방식을 예견하지 못하는 양태로 그 지식을 제시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교관은 실천, 존재 양태 그리고 정체성이 어떤 결정에 의해 위협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발언을 제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에 그렇게 결정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므로 외교관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진보 또는 일반 이익에 준거함으로써 산출되는 무감각증을 제거하고, 전문가들로 하여금 재고하도록 만들며, 그들의 선호하는 행동 노선이 전쟁 행위일 수도 있는 가능성에 관해 억지로 생각하도록 할 개연성이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협받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외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외교관들이 대변하는 사람들이 평화의 가능성에 동의해야 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그것의 발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것은 엄중한 조건인데, 그것은 외교관들이 그들이 대변한 사람들에게 되돌아올 때의 협의 역량, 즉 외교관들이 가지고 오는 제안과 관련하여, 수용될 수 있는 것(억지로 어떤 습관을 바꾸도록 할 수는 있을 것이지만, 무엇이든 "자리잡고 있"거나, "결부되어 있"거나 "의무로 지워져 있"는 것을 파괴하지는 못할 것)과 수용될 수 없는 것(외교관들의 배반) 사이의 차이를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나는 협의라는 술어를 택했는데, 그것이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는 지점들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은 타협에 둔감하고 인간적 이성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의 보유자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국가가 자체의 정체성을 의문시하는 견지에서 엄숙하게 의견 제시를 요청받든,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의견 제시를 요청받든 간에, 두 경우에 모두 협의의 오이코스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알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의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습관을 정지시킨다.

 

쟁점에 따라서, 관련 집단은 외교관이나 전문가들을 파견할 수 있다. 그런데 "약한" 집단, 혼자 내버려 두기를 선호하며, 어떤 결정이 그들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할지라도 그런 결정에 참여하기를 피하는 백치들 또는 바틀비들의 경우에는 어쩔 것인가? 여기서 위험은 참여를 강요하거나, 말할 수 없는 이유들(어떤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을 요구하거나, 또는 바틀비의 변호사가 그랬듯이, 꼬드기려고 시도하고 싶은 유혹이다. 희생자들은 목격자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희생자들"로 부르자고 제안할 것이다. 그들을 "현존하게" 만드는 것이 목격자들의 역할인데, 그들을 대신하여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여할 것이 전혀 없는 쟁점에 의해 위협을 받게될 가능성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희생자들의 현존은 명백히 어떤 것에 대한 보장이 아니며, 외교적 무대 장치일 뿐이다.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모든 사람이 동의하게 만드는" 결정들의 기적과 아무 관계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망각의 금지, 또는 더 나쁘게도, 모욕의 금지, 특히 재정적 보상이 충분해야 한다는 부끄러운 착상―희생자들을 분열시키고, 어떤 이유로 더 쉽게 굴복할 자들을 먼저 처리함으로써 반란자들을 격리시키려는 저속한 시도―에 의해 초래되는 모욕의 금지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돈에 의해" 끝나지는 않는데, 돈은 대차를 차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그것의 희생자들에 결부시키는 부채를 탕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코스모스를 등가성에 관한 어떤 관념과도 대조를 이루는 "평등화"의 조작자로 제시했다. 간략히 말해서, 내가 막 규정한 역할들은, 공통 척도 덕분에 이해관계와 주장들이 계량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교체 가능한 것으로 결코 규정될 수 없는 주인공들을 산출하는 조작이라는 관념에 해당한다. 평등은 그들이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결정을 가능한 한 어렵게 만들고, 어떤 지름길이나 단순화도 배제하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 사이의 어떤 선험적인 차별화도 배제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코스모스의 경우에,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때, 그것은 어떤 대표자도 없고, 그것을 대변하여 말하는 사람도 없으며, 그래서 그것은 어떤 특수한 협의 절차에서도 위기에 처할 수 없다. 그것의 존재 양태는 창조될 모든 인위적인 방식들에 반영되는데, 그것의 효험성은 결정해야 할 사람들을 밝히고,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내가 크롬웰의 외침과 관련시킨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코스모폴리틱스적 제안은 백치의 투덜거림이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창조도 있을 수 없는 감속하기로 응대될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히 우주적 백치의 투덜거림이 여타의 것과 마찬가지로 긴급성의 주장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매우 선의로 가득차고, 매우 진취적이며, 항상 모든 사람을 위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배하는 "그래서..."를 정지시킬 뿐이다.